< 213. 장터 연회. (1) >
“경회루에 준비를 해두었사옵니다. 가시지요.”
말라카를 다녀온 이후 활자인쇄에 파묻혀 있다 보니 벌써 해가 바뀌어 입춘이 코앞까지 와 있었다.
한낮에도 찬 겨울바람이 불기는 했으나 햇볕은 이미 따뜻해 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경회루에는 1층 기단 부위의 양 사방으로 천이 둘려 있었는데, 마치 실내 전시장처럼 되어 있었고, 둘려진 안쪽으로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전하. 곧 봄이 오기에 특별한 연회를 준비했사옵니다. 바로, 장터 연회이옵니다.”
“장터 연회?”
“네. 전하께옵서 일반 사가의 생활을 경험해보시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사가의 생활을 늘상 궁금해하신다고 들었사옵니다.”
“흠. 그건 그렇지. 제왕 된 자로서 사가의 백성들 삶을 알아야 하기에 늘 궁금한 것이지.”
성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지만, 사실 이건 좀 애매한 일이었다.
성종은 2살이 되던 때 아버지인 의경 세자가 죽자 어머니와 함께 궁을 나와 외가에서 컸는데, 그의 외할아버지가 바로 ‘한확’이었다.
바로 명나라 선덕제 시절 공녀로 보내졌던 공신부인 한 씨의 오빠였다.
영락제가 죽으며 순장당한 강혜장숙여비(康惠莊淑麗妃) 한 씨가 한확의 누이였고, 이후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던 여동생 한 씨는 지금 황제인 성화제를 어릴 때 키워준 황실의 웃어른이었으니 한확의 권세는 대단했다.
그런고로 명나라의 후광을 입은 성종의 외갓집은 아주 부유했으며 그런 외가의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한명회의 넷째 사위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명목상 보기에는 궁을 나가 사가에서 생활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조선에서 가장 부유한 외갓집과 처가에서 왕족의 생활만을 영위해 왔던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지나다니며 본 육조거리와 장터의 활기참을 늘상 재미있어했고 즐기고 싶어 했다.
궁에서만 커왔다면 오히려 아예 모르기에 그 재미 자체를 알지 못하겠지만, 지나다니며 겉으로나마 보아왔었기에 더 백성들이 어찌 살고 하는지가 궁금했던 성종이었다.
“해서 소신이 가상의 경회 장터를 만들어 보았사옵니다.”
원종은 경회루 1층 기단의 아랫부분에 가로로 쓴 ‘경회 장터’ 현판을 내 걸었다.
마치 시장에 들어 갈 때 ‘OO시장 – 어서오세요!’ 같은 역할의 현판도 만든 것이었다.
성종이 현판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던 장터가 마치 새 숨을 얻은 것처럼 살아나기 시작했다.
“아직 쌀쌀한 바람이 불 때 먹으면 좋은 어묵입니다. 일단 하나 드셔보시지요.”
“엇 너는...”
“전하. 오늘은 내관이 아니라 어묵 장수로 일을 하는 만복이옵니다.”
평상시 입고 있던 의관이 아닌, 일반 백성들이 입는 흰색의 무명옷을 입었고 상투를 튼 상태 그대로 매대 뒤에 서 있는 내관의 모습에 성종은 즐거웠다.
“하하하. 재미있구나. 내관들을 상인으로 세우다니.”
성종은 경회루 1층 기단 가득히 매대가 만들어져 있고, 상인으로 분장한 내관들이 보이자 아주 신기해하며 즐거워했다.
“그래. 이게 뭐라고?”
“네. 전 제조의 말에 따르면 어묵이라고 하온데, 생선숙편과 비슷한 음식이옵니다. 생선의 살을 발라, 으깨고 거기에 밀가루를 넣어 튀긴 음식이라고 하옵니다.”
“흠. 생선의 살을 발라낸 것인데, 이렇게 대나무 꼬챙이에 꽂아 나오다니 신기하구나.”
“전하 저쪽에 자리가 있사옵니다.”
본래라면 어묵은 꼬챙이를 들고 서서 먹는 것이 기본이었지만, 조선의 국왕이 서서 음식을 먹었다는 말이 돈다면 난리가 날 일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경우에는 밥그릇을 들고 젓가락으로 먹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아무 문제가 없지만, 조선에서는 음식을 들고 먹는 이는 거지밖에 없다며 음식을 들고 먹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래서 길거리 장터 음식이라고 하더라도 자리를 만들어 먹을 수 있게 조치했다.
“식초와 섞은 간장에 찍어 드시면 되온데, 이 물에 불은 흰떡도 드셔보시지요. 원양항해를 하며 배에서 만들어 먹었던 음식이옵니다.”
중국으로 가는 배 안에서 양반들이 건번을 먹지 못하겠다고 해서 그런 양반들을 위해 만든 음식이라고 이야기를 해주자 성종은 아주 재미있어했다.
그러곤 중국으로 같이 갔던 서거정과 다른 이들을 불러 앉히고는 그때처럼 같이 먹자고 어묵과 떡을 하사했다.
“오! 이 국물이 아주 시원하고 훌륭하구만.”
점심나절 처음으로 먹는 음식이었기에 국물로 입부터 축인 성종은 해산물을 넣어 끓인 국물맛에 감탄했다.
무와 대파를 넣고, 꽃게와 새우, 양파를 넣어 끓인 국물이었으니 맛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아직 쌀쌀한 날씨 덕에 국물이 더 입에 달라붙었다.
서거정과 신하들이 먹듯이 떡 꼬챙이를 입에 넣은 성종은 물컹거리는 떡의 식감이 기묘하다 여겼으나 해물 국물과 간장의 짠맛이 뒤섞이며 묘한 맛을 만들어내자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떡 맛에 재미를 느꼈다.
물에 불어 쫄깃쫄깃한 맛을 느끼며 씹다 보니 금세 흰떡은 사라졌고, 그 맛을 다시 느끼고자 흰떡 꼬챙이를 또 잡았다.
“전하, 앞으로 먹을 음식이 많이 있사옵니다.”
성종은 그제야 줄줄이 서 있는 매대들을 보며 떡 대신 어묵이 꽂힌 꼬챙이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오오, 이런 탱탱함이! 후추의 향이 살아있군. 그런데 이게 생선 살이 맞는가? 어찌 이런 맛이 날 수 있는 것이지? 수라에 오르던 생선 숙편과는 맛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구나. 어떻게 만드는 것인가?”
평소 생선 숙편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성종이었지만, 이건 맛이 있었다.
“수라에 오르던 생선 숙편은 생선 살을 쪄내는 것이옵니다만, 어묵은 찌지 않고, 기름에 튀겨낸 것을 다시 국물에 불게 만드는 것이옵니다. 그래서 맛이 생선 숙편과는 다르옵니다.”
“오호, 기름에 튀기는 것만으로도 이리 맛이 달라지고 향이 달라지는군. 내 입맛에 맞게 후추가 제대로 들어간 것도 아주 좋아. 생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도 아주 마음에 드는군.”
“다행이옵니다. 이 어묵은 또 튀기는 시간에 따라서도 맛이 달라지는데, 그것은 다음에 따로 올려드리도록 하겠사옵니다.”
성종이 마음에 들어 하는 음식이라고 하면 이 어묵도 전문적으로 만들어 판매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료 문제로 소, 돼지의 사육을 늘리는 데 힘이 드는 만큼 조선의 부족한 단백질을 생선으로 채워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선을 잡기 위해 그물 같은 어획 기구를 더 보급하다 보면 흉년이 들더라도 바다 생선이 흉년을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게 만들어 줄 터였다.
하지만 다음 매대로 옮겨가는 성종을 보니 뭔가 아쉬웠다.
어묵을 먹을 때는 떡볶이를 같이 먹는 것이 국룰인데, 고춧가루가 없다 보니 길거리 음식의 룰을 지키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간장 떡볶이라도 만들면 되었지만, 훗날 고추를 가져온 이후를 생각해서 참았다.
“여기에는 내관 대신 수라방의 숙수가 서 있는 것으로 봐서는 뭔가 제대로 된 조리를 하는가 보구만.”
“네 맞사옵니다. 저기에 앉아서 조리되는 것을 봐주시옵소서. 아마 처음 보시는 조리법일 것이옵니다.”
30대 숙수인 철금이는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뭐 이딴 음식을 배워야 하는지 의문을 가졌지만, 생선 숙편과 흰떡으로 성종의 마음을 흔들어 버리는 것을 보니 전 제조가 알려준 이 음식으로 성종의 마음을 잡고 싶었다.
가마솥에 물을 넣고 불을 지핀 지 오래였기에 가마솥의 뚜껑을 뒤집어 놓자 서린 김에 의해 뒤집어진 솥뚜껑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그런 솥뚜껑 위로 얇게 펴 만든 밀가루 반죽을 붙이자 타지 않으면서도 밀가루가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는 게 보였다.
그렇게 반죽을 뒤집어 가며 손으로 치고, 잘게 썬 양파와 파를 한 줌 넣어 만두처럼 싸선 다시 반죽을 눌러가며 늘려갔다.
“이건 도통 감이 안 잡히는구만 뭘 만드는 거지?”
“이것은 말라카에서 알아 온 음식으로 부침개와 비슷한 음식이옵니다.”
“특이하구만.”
시간이 흐르자 솥뚜껑 위에 있던 물이 다 날아가고 마르기 시작하자 철금은 들기름을 솥뚜껑에 바르고 그 위에 반죽을 눌러가며 익혔다.
반죽을 찐 것도 아니고, 구운 것도 아닌 어중간한 반죽 부침개가 되었는데, 찐 것과 구운 것의 장단점을 섞은 조리법이었다.
철금은 그런 부침개를 전 제조에게 배운 대로 반으로 접고 칼질을 해서 성종에게 내놓았다.
“이건 뭐지? 아무런 양념이나 그런 것 없이 그냥 밀가루와 채소를 약간 넣은 부침개로 먹는 것인가? 아무 맛이 없을 것 같은데.”
“네. 전하 이 부침개는 담백한 그 맛이 장점이온데,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저 카레 장이라는 천축의 장에 찍어 먹어야 하는 것이옵니다.”
“천축의 장?”
철금은 종발에 카레를 담아 내놓았는데, 과연 이것을 성종이 좋아할까 걱정이 되었다.
어제 만들면서 먹어본 천축의 장은 정녕 이제까지 먹어 본 적이 없는 맛이었기 때문이었다.
“흐음. 특이한 향이 나는군. 맡아 본 적이 없는 향이야.”
성종은 맡아 본 적 없는 특이한 향이라고 하면서도 젓가락을 들었는데, 단순히 카레에 찍어 먹는 것은 가능해도 카레 안에 든 야채나 고기를 같이 먹기는 힘이 들었다.
원종은 마음 같아서는 난(naan)과 카레는 손으로 이렇게 찢어서 찍어 먹는 겁니다. 하고 해주고 싶었으나, 손으로 집어 먹는 것을 천것들의 식사법이라 생각하는 조선에선 수식 식사법을 적용하기 힘들었다.
“제가 도와 드리겠나이다.”
대신 숟가락으로 썰린 난을 펴고 그 안에 카레의 야채와 고기를 퍼 넣은 후에 젓가락으로 다시 싸서 아예 성종의 입에 넣어 주었다.
“으음? 이거 향이...”
성종은 난을 씹으면서 표정이 여러 번 바뀌었는데, 여러 가지 향을 내는 마샬라의 향이 다양했기에 어찌 이런 향이 나는지 놀라는 중이었다.
“본래 이 음식은 말라카와 천축의 전통적인 식사법인 손으로 들어먹는 것이옵니다. 하오나, 청결 문제가 있기에 젓가락으로 먹는 것이 더 좋사옵니다. 다만, 부모님이나 가족 간에는 이렇게 손으로 싸서 먹여주는 것이 가족 간의 정을 더 크게 하기에 가족끼리는 이렇게 서로 싸서 먹여주는 것이 좋사옵니다.”
“오호 그러고 보니 이 천축의 장은 상추 쌈에도 어울리겠구만. 이 부침개와 먹는 것도 괜찮을 것 같지만, 상추 쌈에 밥과 함께 올려 먹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성종은 난(naan)은 별로이지만, 마샬라 카레는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네. 천축 장은 숙수 철금에게 만드는 것을 알려주었사오니 상추 쌈을 드실 때 같이 올리라고 하겠습니다.”
“헌데, 이 천축의 장이 아주 좋긴 한데, 냄새가 입에 오랫동안 남는구만. 자주 먹긴 힘들겠어.”
“그래서 다음 매대에는 그런 향기를 날려 버릴 수 있는 것을 준비했사옵니다.”
“오호. 철판이로구만. 기름 향이 나는 것을 보니 굽거나 튀기는 것이겠지?”
“네 맞사옵니다. 호떡이라고 하옵니다.”
“호떡이면 오랑캐(胡)들의 떡이라는 말인데 예전에 한번 해준거 아닌가?”
“네. 맞사옵니다. 예전에 해드렸을 때는 설탕이 없어 다르게 해드렸었습니다. 이번에 해드릴 호떡에는 꿀이나 그런 것을 빼고 오로지 설탕만을 넣어 만든 가장 고급스러운 호떡이옵니다.”
“설탕만을 넣은 고오~급 호떡?”
< 213. 장터 연회. (1) > 끝
작가의말
많은 분들이 오뎅과 어묵을 같은것으로 여기시는데, 오뎅과 어묵은 다릅니다요.
오뎅(おでん)은 어환(둥글게 뭉쳐서 만든 어묵)을 넣어 끓인 전골요리를 뜻하는데, 일본 사람들이 이 오뎅에 어환을 넣어 먹었기에 조선에 들어와서도 어환을 오뎅 재료라고 말한 것이 와전되어 어묵 = 오뎅 이라고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어묵을 피쉬 케이크라고 이야기 하는 경우도 있는데, 생선으로 만드는 어묵을 먹어보지 못한 외국인의 경우에는 이 케이크라는 말이 엄청난 혼동을 줍니다.
그래서 점차 어묵 발음 그대로 eo-muk이라고 부르는 추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