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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212화 (212/327)

< 212. 알고 보니 괜찮은데! >

“언문으로 만들어진 활자는 을해자(乙亥字)에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교환권에 내 얼굴을 넣고 싶었지만, 아직 사람 얼굴을 그럴듯하게 그릴 원근법도 없었고, 그걸 인쇄할 기술도 없었다.

전교서에 한글 언문으로 만들어진 활자가 남아 있는지도 몰랐기에 한글로 만든 활자가 있는지부터 확인해 보는 것이었다.

“언문 을해자는 능엄경언해(불교 능엄경을 한글로 풀이한 책)에 사용되었는데, 이후로는 쓰이지 않고 있습니다.”

을해자는 세조 1년인 을해년에 만들어진 활자를 뜻하는데, 한자로 된 활자를 만들며 언문으로 된 활자도 같이 만든 것이었다.

능엄경언해를 만든 이후 몇십 년이 흘렀음에도 활자들은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다만, 현대에서 쓰이지 않는 글자가 있었고, 글씨도 꽤 컸기에 가로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게 활자 만드는 것을 한번 보라고 했으니, 이왕 만들거 내가 원하는 글자로 만들어 주시오.”

“그럼 60자를 정해주십시오. 수틀에 올려 주물로 한번 만들 때 60자를 만들어 낼 수 있으니 60자를 정해주시면 됩니다.”

원종은 한글로 ‘가나다라... 타파하’ 14자를 4개씩 만들고 남는 4글자에 ‘춘봉상단’을 지정해 주었다.

글씨를 보고 깎을 수 있게 궁서체로 글씨를 써주었는데, 기술자들은 왜 같은 것을 4개나 만드는지 의구심을 가졌지만, 나무를 깎는 일이 줄어들었기에 그대로 작업을 했다.

“헌데, 나무를 깎는데, 정확한 치수대로 깎는 것이 아니오?”

“1촌(약 3cm) 크기로 조각 하고 있습니다.”

조각하던 기술자는 자신의 왼손 집게손가락 윗마디를 보여주며 이 크기로 만든다고 이야길 했는데, 아차 싶었다.

수치의 통일이 안 되는 것이었다.

듣기로 조판에 활자를 나열해 인쇄할 때 활자들이 흔들리는 것을 방지하고자 밀랍을 접착제처럼 쓰거나 대나무 가지로 움직이지 않게 틀을 잡았다고 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처음 활자를 만들기 위해 깎는 나무 조각부터 규격이 통일되지 못했기에 좋은 퀼리티의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었다.

“다들, 잠시만 일을 멈추고 나무 조각을 다 모아 보시오.”

조각하던 다섯 명의 나무 조각을 모두 모아서 겹쳐보니 1~3mm 정도의 크기로 나무 조각들의 크기가 달랐다.

1촌 크기라고 하다 보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센티미터 표시가 되어 있는 자가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게 세밀한 자가 없었다.

어떻게 수치를 통일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녹여 쓰기 위해 가져다 둔 작은 구리 괴가 보였다.

들어서 살피니 얼추 3cm와 비슷하여 이 구리 괴를 기준으로 삼았다.

“갯벌 흙에 찍는 것이기에 이런 작은 차이가 있어도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이런 작은 차이 때문에 글이 틀어 지는 것이오. 앞으로는 이 구리 괴를 기준으로 해서 모든 나무 조각들의 크기와 길이가 같아야 하오.”

기술자들은 내 말에 귀찮아 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나무 조각의 크기를 정확하게 만들어 글씨를 깎았다.

나무 조각을 깎는 동안 해감한 갯벌 진흙을 수틀에 평평하게 깔았는데, 조각이 끝난 나무 활자를 진흙에 힘껏 눌러 찍었다.

그러곤, 쇳물을 부었을 때 쇳물이 움직일 수 있는 길을 세심하게 파주며 위 수틀의 주물사(沙)도 만들었다.

그리고 사흘 후 진흙이 마르자 위 수틀과 결합시켜 녹인 구리 쇳물을 부었는데, 이 일에는 방짜 유기를 만드는 기술자들이 와서 도왔다.

연기가 뿜어져 나오던 구멍에서 연기가 나오지 않자 수틀을 열고 주물사를 헤쳐 꺼내니 후끈한 열기가 활자에서 느껴졌다.

나무줄기처럼 연결된 쇳물 길을 따라 활자들이 붙어 있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신기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60자의 궁서체 한글 활자를 끌로 다듬어 주며 각 활자의 크기가 모두 같도록 마감처리를 했다.

“그런데, 이 조판 나무 틀은 무엇입니까요? 활자가 들어가는 조판 틀은 세로로 길게 칸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가로로 있군요.”

“특이하게 가로로 해보려고 하네.”

원종은 활자를 가나다라 순으로 칸을 채웠고, 4글자마다 납작한 나무 칸을 넣어 띄어쓰기도 적용했다.

그러곤, 먹물과 아교풀을 섞어 만든 끈적이는 먹물을 발랐는데, 나무 각목을 둥글게 다듬고 그 위에 솜을 붙여 만든 롤 붓을 썼다.

그러곤 닥종이로 만든 한지를 위에 올려 솜뭉치를 뭉쳐 만든 둥근 다듬이로 먹물이 제대로 달라붙을 수 있게 찍어 주었다.

“대충 깔끔하게 잘 나오는구만.”

활자의 크기를 동일하게 맞추고, 가로 틀에 끼워 넣을 때도 바닥에 솜을 깔고 넣어 흔들림을 최대한 없앴는데, 그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다만, 글씨가 정확하게 종이의 원하는 부위에 인쇄될 수 있게 이중 구조로 종이를 고정시키는 틀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인쇄에 가장 많이 시간이 드는 종이를 올린 후 먹이 제대로 종이에 묻게 만드는 다듬이 작업을 개선해야 할 것 같았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는 압착 프레스가 있었기에 이런 다듬이질로 잉크를 묻히는 과정이 필요 없었다.

다행히 미국 워싱턴에서 일할 때 관광으로 성서 박물관에 들렀었는데, 인쇄 체험을 하며 프레스에 대해서 제대로 체험을 했었다.

그때 체험하기로 다듬이를 손으로 움직여 찍다 보면 힘이 균등하게 가해지지 않아 흔들리거나 해서 불량이 되는데, 프레스로 작업을 하게 되면 균등한 힘이 가해져 흔들리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더불어 인쇄 퀼리티도 올라가고 속도도 빨라질 터였다.

우선, 나무 목장을 불러 종이를 끼워 넣는 이중 구조 나무 틀을 설명하여 만들게 했고, 나무 틀이 만들어지는 동안 보통 종이보다 2배는 더 두꺼운 종이도 구해왔다.

그렇게 나무 틀에 넣어 원하는 위치에 인쇄를 하곤 먹물이 마르자 뒷면에도 다시 찍었다.

두꺼운 닥종이에는 앞뒷면을 인쇄해도 비치지 않았다.

테스트로 수십 장을 찍어서 책도 엮어 보았는데, 제본 법도 전통적인 중앙을 접어 바깥 종이를 양면으로 만드는 제본법이 아니라 두꺼운 종이를 반으로 잘라 현대식으로 양면 모두를 사용할 수 있는 제본을 했다.

표지까지 붙여서 만들어 보니 테스트 책이었지만, 깔끔했다.

진흙이 마르는 시간이나 주물을 뜨고 하는 시간을 뺀다면 한사람이 활자를 조합하고, 먹을 발라 프레스로 찍어낸다면 하루에 100장 이상은 찍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레스로 균등하게 눌러주는 작업만 개선하면 조선의 주물사(沙) 활자제작 방법도 쇠를 깎아 만드는 구텐베르크의 방법에 뒤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구텐베르크의 방식은 쇠를 깎아 ‘아비자(패트릭스)’ 펀치를 만들고 무른 구리 괴에 강하게 펀치하여 ‘어미자(매트릭스)’를 만들어야 했다.

그 구리 어미자에 납으로 된 쇳물을 부어 활자를 만드는데, 쇠를 깎아 ‘아비자’를 만드는 것이 힘든 일이었다.

주물사로 활자를 만드는 데까지는 조선의 방법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더구나 납을 녹여 만들다 보면 납중독도 나올 수 있는 것이라 납 대신 구리를 녹여 만드는 조선의 주물사 방식이 더 좋은 방법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 있었다.

우선은 갯벌의 진흙으로 만드는 주물 틀을 좀 더 입자가 곱고, 결합성이 높은 고령토로 만들어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냥 진흙을 말리기보다는 아예 고령토로 만든 주물 틀을 가마에 구워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고령토가 세라믹화 되는 1300도 이상에서 굽는다면 쇳물이 된 구리의 1000도를 견뎌낼 수 있을 터였다.

이렇게 고령토로 수틀을 만든다면, 갯벌 진흙으로 만들어 무너지거나 해서 생기는 불량비율이 줄어들 터였다.

“고령토 장인을 데려와 갯벌 진흙 대신 고령토로 한번 만들어 보겠네. 그동안에 자네들은 ‘가갸거겨고교구...효후휴흐히’ 이 140자를 깎아주게나. 나무 조각의 크기는 저 구리 괴와 같아야 하네.”

기괴한 언문을 깎으라는 말에 기술자들은 이게 뭔가 싶었지만, 특별 보너스로 후추를 준다고 하자 두말없이 작업에 들어갔다.

유니코드로 한글의 조합을 다 따져보면 11172자를 깎아야 하지만, 명심보감 같은 책은 1200자 정도의 한글 활자로도 가능했다.

그래서 자주 사용하는 어조사와 필수 단어에 들어가는 글자들부터 조작을 하기 시작했다.

5천 자 정도만 만든다면 웬만한 책들은 다 한글로 인쇄가 가능할 터였다.

물론, 여기에 들어가는 구릿값이 만만치 않을 거긴 했다.

사옹원에서 고령토를 곱게 고르는 수비장을 데려와 고령토로 수틀을 만드는 동안 나무 조각들이 1500개 이상 만들어졌는데, 한자보다 획이 작아 조각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장점이 제대로 발휘되고 있었다.

그렇게 고령토를 도입하여 만든 활자에는 갯벌 진흙에서 나오던 모래가 끼거나 하는 일이 줄어 들어 활자의 선명도가 확연히 개선되었다.

그리고, 목장들과 야장들이 힘을 합쳐 프레스를 만들었는데, 평평한 솜 다듬이가 내려와 종이를 제대로 눌러줬다.

이중 틀과 프레스로 명심보감을 찍어 보니 제본하는 시간까지 합쳐도 한 사람이 한 권의 책을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근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조선의 인쇄술을 유럽에 버금가는 기술력으로 끌어올린 것이었다.

이제야 전장의 교환권을 만들 준비가 된 것이었다.

교환권에는 목판화처럼 여러 색상을 쓸 생각이었기에 도화서에서 화공을 데려와 가로 10cm 세로 5cm의 테두리 꾸밈 무늬를 그리게 했고, 그런 꾸밈 무늬를 조각 장인에게 목판 4개로 나눠 그리라고 했다.

4개의 다른 색이 꾸밈 무늬로 들어가고 ‘교환권’이란 글씨까지 여러 색이 들어가게 된다면 전교서의 틀과 프레스가 없다면 위조가 불가능할 터였다.

***

“전하께서 내일 특별한 음식이 먹고 싶다고 하시옵니다.”

한창 목판의 안료 색을 잡고 있는데, 상선이 직접 와서 성종의 주문을 알려주었다.

“근 한 달 동안 전하께서 후추와 설탕이 듬뿍 들어간 음식을 드셨는데, 이제 전 제조가 직접 해주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고 보니 한 달이나 궁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르지 않았으니 나름 나를 배려해 준 것이었다.

후추와 설탕은 성종이 마음대로 먹어왔을 테니, 인도에서 가져온 마샬라를 조합한 카레를 해 주면 될 것 같았다.

물론, 단순한 카레만 하기엔 아쉬웠기에 전분으로 만든 당면을 준비했고, 잡채까지 해 주기로 했다.

음식에 이어 디저트로 뭘 해 줄까 생각하다 이제 설탕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생각에 좋은 디저트가 떠올랐고, 내일 성종에게 어떤 컨셉으로 음식을 만들어 줄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프레스를 만들며 안면이 튼 야장에게 연철로 조리도구를 몇 개 만들었고, 디저트의 감성을 끌어 올릴 수 있는 매대도 목장에게 만들게 했다.

그러곤, 수라간에서 몇몇을 미리 불러 음식을 만드는 법을 알려주고 연습을 시켰다.

***

“오! 철판을 가져온 것인가? 거기에 무엇을 구워 줄 것인가?”

성종은 큰 철판을 들고 온 나를 보곤 철판구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오늘은 특별히 방안에서 답답하게 먹지 않고, 넓은 뜰에서 자유로이 드실 수 있는 음식과 주전부리를 준비하였사옵니다.”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음식과 주전부리라고? 그게 어떤 것인가?”

< 212. 알고 보니 괜찮은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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