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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211화 (211/327)

< 211. 춘봉전장. (2) >

“소유권을 나눠 가진다니 어떻게 말인가? 전장(錢莊)을 여러 개 만들어 나누어 가지자는 말인가?”

“그렇게 전장을 여러 개 세워 주인이 다르게 되면 각 전장마다 달라지기 때문에 교환권의 신뢰성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나눠 가진다는 말은 춘봉 전장을 쪼개겠다는 겁니다.”

“쪼갠다고?”

“네. 전장의 주인이라는 주인권(券)을 열 개로 쪼개어 다섯 조각을 여러 대감님들께 팔겠습니다.”

“주인권을 쪼개어 판다라. 흐음. 전장에 보관되는 금과 은의 1할씩을 부담 시키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되는가?”

지분과 주식의 개념이 아직 없기에 주인권이라고 설명을 했는데, 대충 의미는 통한 것 같았다.

“네 맞습니다. 전장을 이루고 있는 10할 중 1할의 권리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보증을 위해 들고 있는 금과 은을 언제든 확인할 수 있으니 신뢰성과 안전성 부분에서는 문제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열 개중에 다섯 조각인가? 자네의 전장 운영에 방해하지 못 하게 하겠다는 건가?”

“그것도 있지만, 제가 만든 것이니 제가 절반은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그래 맞는 말이야. 만든 이가 절반은 먹어야지. 하지만, 보한재(신숙주)가 자네 편을 들면 6:4가 되는 것 아닌가?”

“그럼, 처조부님은 권리를 가지지 못 하게 빼겠습니다. 대신 내수사를 끼워 넣으면 되겠습니까?”

“흐음. 내수사라...”

신숙주 대신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를 넣자고 하니 한명희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니, 모두 다 빼고 자네와 나만 합세.”

“네? 그렇게 되면...”

결국 한명회는 욕심을 부리는 것이었다.

다른 이는 끼워주지 않고 둘이서만 하다 보면 이익이 커질 수 있었고, 추후에 나만 빼버린다면 전장의 소유권을 가져오기가 더 쉽기 때문이었다.

국왕의 장인이 되었음에도 대금(貸金) 일을 계속하고 있는 욕심쟁이다운 생각이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사채(私債)를 놓는 일인 대금(貸金)업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기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하는데, 지금의 조선은 대금 일에 대한 관념이 달랐다.

우선 왕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內需司)에서도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대금 일을 했기 때문이었다.

태조 이성계 자체가 함경도의 토호였기에 함경도의 땅을 백성들에게 경작하게 빌려주고 그 수익을 얻었으다. 당연히 돈도 땅처럼 백성들에게 융통해 주고, 그 이자를 받아왔었다.

국왕의 내탕금을 관리하는 내수사에서 대금 일을 하니 그 신하들도 마찬가지로 대금 일을 함에 있어 거리낌이 없었다.

다만, 조정일을 하는 곳에서 대 놓고 대금 일을 논하지 못할 뿐이었다.

유교적으로도 공자의 제자 중 대금업자가 있었다는 이유로 대금업에 대한 유교적 고민이나 통찰도 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 누가 공자와 그 제자를 탓할 수 있겠는가.

실제 역사에서도 대금의 이자 문제로 인해 한명회의 대금 일을 하던 ‘한윤옥’이란 자가 사람을 죽이게 되었는데, 장령(掌令 사헌부 감찰 4품) 안처량이 이일을 경연에서 성종에게 아뢰었다.

하지만 다른 대소신료는 물론이고 성종까지도 ‘한윤옥은 영천군 윤반(尹磻)의 반당(伴倘 호위)이니 어찌 정승(한명회)에게 책임을 묻는가?’ 하며 슬그머니 넘어갔다.

문제는 이 한윤옥이란 반당(호위)이 모시는 영천군 윤반이란 사람이 한명회의 둘째 사위였다는 것이었다.

한명회의 넷째 사위인 성종과는 족보상 ‘형님’으로 불러야 하는 가까운 사이였기에 대금 이자와 관련해 사람이 죽었음에도 흐지부지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국왕과 대소신료들까지도 대금 일을 거리낌 없이 하다 보니 한명회는 춘봉 전장에서 만들어 쓰겠다는 교환권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대금 일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거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었다.

“왜? 둘이서 하기는 싫은가?”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주인권(主人券)을 명시한 서류를 가져오겠습니다.”

“그리고, 이 각인 은화는 생각지도 못한 것인데, 이 방법이 참으로 좋을 것 같구만. 왜의 은을 가져와서 이렇게 각인 은화를 쓴다면 명에서 은이 많다고 조선에게 은을 바치라고 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지. 안 그런가?”

한명회도 신숙주와 오래 있으면서 화폐가 유통됨으로써 생기는 이득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명나라의 요청이 두려워 은화를 통화로 도입하지 못한 것인데, 이렇게 우회해서 왜국의 은화를 들여와 유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그렇게 꼼수로 유통은 할 수 있사오나, 그렇게 되면 다시 문제가 생깁니다.”

“무슨 문제?”

“우리의 통화(通貨)가 왜은이 된다면, 왜국에서 우리의 경제를 쥐락펴락할 수 있게 됩니다. 갑자기 많은 왜은이 들어오게 되면 조정에서 그 왜은을 관리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흐음. 그렇군. 임의대로 왜국에서 작업을 할 수 있겠구만. 흠. 참으로 이 화폐 문제는 골치 아프군.”

왜은을 들여와 각인 화폐를 만드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생각에 한명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명회에게 전장의 권리를 가지는 주인권의 절반을 넘긴다는 계약서를 넘기고 의정부를 나서니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교환권이 자연스레 화폐의 가치를 가지게 되고, 전장이 전국적으로 만들어지게 되면 큰 이득이 생기는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돈이 된다는 말이 돌면 욕심을 내는 자들도 생길 것이고, 송상이나 최권영처럼 전장을 만들어 교환권을 찍어내는 것을 따라 하려는 이들도 나올 수 있었다.

그런 것들에게서 전장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는 한명회와 대신들에게 지분을 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나눠주지 않는다면, 예전 석탄 광산처럼 또 조정에서 강탈해 갈 수도 있는 것이라, 아깝더라도 절반을 내어놓아야 했다.

100% 다 빼앗기는 거보다는 50%만 주고 뒤로 더 챙기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내 편이었기에 그저 움켜쥐고만 있으면 자연스레 내가 다 차지할 수 있었으니 한명회에게 절반을 준 것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

“저기... 단주님. 배들은 언제 남쪽으로 움직입니까요?”

“응? 다시 말라카로 가고 싶다는 말이냐? 10개월이나 다녀왔으니 가족들과... 아! 남쪽이 거제와 남해를 말하는 것이냐?”

그러고 보니, 선원들의 대부분이 거제도와 남해 도서에서 올라온 이들이었다.

배가 남쪽으로 가지 않으면 그들도 집에 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네. 맞습니다요. 언제 가는지를 알아야 가족들에게 뭘 가져다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여쭈어보았습니다요.”

청남이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마누라와 아이들이 생각나는지 덩치에 맞지 않게 눈이 촉촉해졌다.

“내가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네. 염 참군을 데리고 오게. 남쪽으로 가는 배의 일정을 잡아서 바로 알려주겠네.”

“그렇지 않아도 선원들이 언제 가족들에게 가냐고 다들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내가 잊고 있었어. 염참군도 가족들을 못 만났나?”

“저는 다행히 고향이 경기도라 가족들이 한양으로 와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다행이군. 선원들 중에서 벽란도에 정착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는지 확인해 주게나. 구해준 중국 여인들과 살림을 차린 이들도 있다던데, 그들은 벽란도에서 더 살고 싶어 하지 않겠나?”

“네 맞습니다. 벽란도와 동래에 가족들과 살 선원들과 그대로 섬에 사는 선원들을 구분하여 배를 움직일 수 있게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내려가면서도 한양의 물건을 실어서 내려가도록 하게. 운행비는 뽑아야 하지 않겠나?”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서류를 받게나.”

염호진은 원종이 건네주는 서류를 받았는데, 호조판서의 큰 도장이 찍혀 있는 서류였다.

“수영에서 일꾼들과 나무를 차출해 원양선을 만들 수 있도록 허가한 서류네. 호조에서 따로 수영에 내려가는 게 있겠지만, 이걸 들고 가게나.”

“은 2천 냥의 금액으로 배를 만드는 것이군요.”

“중국에서 정크선 기술자를 데려온 이유이지. 수영의 기술자들과 같이 만들게 하게. 정크선처럼 배의 바닥이 뾰족한 침저로 된 배와 누전선의 바닥처럼 평평한 평저로 된 두 종류를 만들어 보게.”

“네. 돛은 다우선의 그 삼각돛을 달 것이지요?”

“그래. 이 그림처럼 중앙의 가장 큰 돛은 사각으로 하고 앞쪽 돛대는 삼각으로 하는 것으로 해서 다우선의 장점을 같이 넣어서 해 보게나. 그리고 경상 좌수영의 원철 대감은 영전해서 북방으로 갔다고 하니, 데려다 쓰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데려다 쓰게.”

“단주님의 전권특사 서류를 잘 써먹겠습니다. 그리고 다우선 1척은 남겨서 벽란도와 한양의 연락선으로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나.”

***

한명회가 전교서(典校署)의 기술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를 보내준다고 했는데, 예전 세종대왕 시절 갑인자(甲寅字)를 만들 때 참여 했던 기술자들이었다.

“그러니깐 고운 진흙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해감한 갯벌의 고운 진흙을 주로 사용합니다.”

“그럼, 도자기를 만들 때 쓰는 고령토는 어떤가?”

“고령토로 해 보지는 않았으나 가능은 할 듯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들어가는 재료를 변경하게 되면 시간이 더 길어질 것입니다. 활자를 만드는 과정을 제조 어른이 모르시는 것 같으니 우선 한번 만드는 방법을 보여드리겠습니다요.”

활자 기술자 정일관과 권치후는 50줄에 접어든 노인들이었는데, 세종대왕 시절 갑인자를 만들 때 전교서의 막내로 참여를 하며 장영실이나 이천, 김돈과 같은 유명한 조선의 과학자들을 직접 모셨다고 했다.

문제는 갑인자를 만든 1434년 때의 기술이 1470년인 지금까지 발전 없이 그대로라는 것이었다.

먼저 나무를 조각해 글자를 만들면, 이후 해감한 갯벌 진흙에 조각한 나무글자를 찍어 글자를 새겼다.

그렇게 글자가 새겨진 갯벌 진흙이 마르면 거푸집이 되는 것이었는데, 글자마다 쇳물이 갈 수 있는 길을 만들고, 펄펄 끓는 구리 쇳물을 거푸집에 부어 굳히면 금속 활자가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활자를 만들어 온 것이 1300년대 고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거푸집 방식은 그때 이후로 변화 없이 쭉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저, 활자를 좀 더 크게 하거나 찍기 좋게 사각형으로 나무 조각을 하는 식의 변화가 있는 것 말고는 기술의 발전은 없었다.

서양의 구텐베르크보다 100여 년이나 빨리 고려 시대에 금속 활자를 만들었지만, 널리 알려지고 남겨진 책도 몇 없었다. 그나마 조선 시대 세종대에 찍은 책들이 없었다면 그저 취미로 만든 활자로 알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늘 듣는 말은 우리가 먼저 금속 활자를 상용화시키고 책을 찍었지만, 구텐베르크의 성서와 같은 혁명은 없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 늦게 만들어져 쓰였음에도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인류를 진보시킨 기술로 더 높게 쳐주는 것이었다.

왜 이런 혁명이 조선에 없었는지를 따지자면, 한자로 만들었기에 활자를 일일이 만들기 어려웠다는 것도 있고, 책을 만듦에 있어 구텐베르크는 ‘성서’를 조선에서는 ‘자치통감강목’ 같은 지배 권력을 위한 책을 찍어서라는 의견도 있었다.

원종은 그런 조건들을 알고 있었기에 처음 금속 활자로 찍어내는 것을 책이 아닌 교환권으로 잡은 것이었다.

실생활에 가장 먼저 쓰이는 화폐와 같은 교환권을 찍어낸다면 책보다 더 실생활에 유용할 터였다.

교환권에 아예 내 얼굴도 박아 넣어 봐?

< 211. 춘봉전장. (2) > 끝

작가의말

한명회가 도입하려고 고민했던 각인 화폐가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쓰였던 적이 있습니다.

1800년대 후반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많이 이주했고, 교역도 증가했기에 일본 은화가 조선에서 통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은화 1엔이 조선 은화 5냥의 가치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다 1894년 고종의 \'신식 화폐 발행 장정\'이 선포되며 일본의 은화가 아예 공식 화폐로 인정되어 쓰이게 됩니다.

문제는 1897년 일본이 금 본위제를 채택하며 조선에서 유통되던 일본 은화를 환수하기 시작하면서 발생되기 시작합니다.

이미 3년간 공용 화폐처럼 쓰이던 1엔 은화가 사라지기 시작하니 1엔 은화의 가치가 오르기 시작해 버린 겁니다.

이렇게 화폐의 가치가 요동치자, 고종은 일본 은화가 일본으로 돌아가는 환수를 정지시켜 버리고, 1엔 은화에 은(銀)자를 각인해서 조선의 5냥 은화로 사용해 버립니다.

조선의 백동화에 비해 은이란 가치를 가진 은화를 사람들이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만도 식민지가 되며 이 일본 은화를 쓰게 되는데, 이 각인 은화의 가치가 조선과 달라지자 환차익을 보기 위해 중국인들이 조선에서 각인 은화를 사다 대만에서 파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이로 인해 국내에서 유통되는 은화는 더욱 감소하게 되고, 어쩔 수 없이 백성들도 조선 정부에서 찍어낸 백동화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각인 화폐는 자신의 돈을 투자하지 않고, 통용 화폐를 쉽게 도입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외부 요인에 휘둘리게 되는 약점이 있는 화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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