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205화 (205/327)

< 205. 무역 거점. (3) >

지중해 무역과 인도양 무역이 절정기에 이르고, 중동의 기후가 좋을 때는 아랍의 왕국들이 북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 같은 아프리카 왕국들과 전쟁을 자주 치렀다.

그렇게 전쟁의 부산물처럼 얻어지는 흑인 포로들이 있었고, 대항해시대 이후 노예사냥으로 남아프리카에서 중동으로 유입되는 흑인 노예들도 있었다.

몇백 년 동안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중동으로 유입되었지만, 중동은 북미와 남미처럼 흑인들의 후손이 번성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이슬람의 전통적인 노예 관리법 때문이었다.

이슬람과 페르시아의 전통적인 노예 관리법은 남자 노예라면 노소를 가리지 않고 거세를 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중동 특유의 환경에 의거한 관습이었는데, 남자들이 여러 부인을 거느리며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았기에 노예들의 씨가 남겨지지 않도록 거세를 해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십만, 혹은 수백만의 흑인 노예들이 중동으로 유입되었음에도 중동에서는 아프리카 흑인들의 후손이 없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십자군 전쟁이나 베네치아 상인들의 인신매매, 튀르크의 유럽 침략 등으로 백인 노예들이 유입되었을 때도 남자 노예들을 거세해 버렸기에 백인들의 후손도 중동에 없는 것이었다.

추가로 남자 노예를 거세하게 되면 호르몬의 변화가 생겨 남자답지 못하게 되므로 노예들의 반란 자체도 줄어드는 효과가 있었다.

시쭈꾸는 그런 노예 거세의 장점을 알기에 이슬람의 노예 관리법을 이곳에서도 시행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잔인한 노예 관리법을 말려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것 또한 이슬람의 문화이니 인정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더해서 포로로 잡히면 무조건 거세된다는 무서운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면, 시쭈꾸 용병단의 깃발만 보고도 해적들이 도망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악명이 모여 바다를 장악하게 된다면 지나가는 배들에게 통행세를 요구할 수도 있을 터였다.

특히나 시쭈꾸를 정착시킬 곳이 대만 섬이었기에 대만과 중국 본토의 해협을 장악하기만 한다면 아시아의 교역 전체를 통제할 수도 있었다.

물론 지금은 대만 섬에 정착지를 만드는 것부터가 문제이긴 했다.

대만으로 향하는 길에는 속도가 빠른 다우선에게 먼저 나아가지 못하게 명령을 내렸고, 배들을 한데 뭉쳐서 움직였다.

중간에 해적으로 보이는 다른 배들이 기웃거리며 나타났지만 규모가 있다 보니 서로 눈치만 보며 지나쳤다.

얕보이면 공격당하는 야생의 전쟁터와 같았기에 참파인들과 수군들을 뱃마루와 갑판에 도열시켜 언제든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해적들에게 백병전에서 밀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

***

“팽호현(澎湖縣 펑후현)으로 보이는 섬들이 보입니다.”

“방향타(方向舵)를 우측으로 꺾어 팽호현과 직각으로 멀어지게 움직여라!”

팽호현은 대만 섬과 중국 본토와의 사이에 있는 여러 섬 제도(諸島)를 묶어서 부르는 이름인데, 원나라 시대 지방관인 다루가치가 파견되기 전까지는 이름도 없는 섬들이었다.

모든 섬의 면적을 합쳐도 광역시 만한 크기밖에 되지 않았으나 크고 작은 섬이 90여 개에 달했기에 배를 숨기거나 몸을 숨기기에는 좋은 장소였다.

그래서 지금의 팽호현은 해적들의 소굴이 되어 있었다.

배에 병력이 충분하고, 화물이 없다면야 팽호현의 해적들을 털어먹으며 규모를 늘릴 수 있었겠지만, 해적들의 배를 빼앗더라도 배를 움직일 수 있는 수군이 더는 없었다.

훗날을 기약하며 팽호현과 직각으로 방향을 꺾어 대만 섬으로 움직였다.

저녁이 되어 대만 섬의 바닷가에 도착했는데, 평지가 펼쳐져 있었음에도 바닷가 해안에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으로 가득 찼던 대만의 모습을 기억하는 원종은 무인도처럼 불빛조차 없는 섬의 모습에 여기가 진짜 대만이 맞는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날이 어두워 섬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다에 정박해 밤을 보냈고, 아침 일찍부터 배를 댈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섬의 남쪽으로 계속 내려오다 안쪽으로 움푹 들어간 만(灣)을 발견하곤 암초에 강한 다우선을 먼저 보내 만의 안쪽을 살피게 했다.

“만 안쪽을 보니 바다로 흘러내려 오는 강이 있고,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원주민들도 보이는데, 그 숫자는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배가 움직이는 데는 문제가 없고?”

“네. 다우선 함수에 긴 장대를 달아 수심을 확인하며 움직였는데, 만의 중심에서는 걸리는 곳이 없었습니다. 정크선이나 큰 배들이 드나들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작은 배부터 해서 안으로 들어 가지.”

참군 염호진의 지휘로 배들이 다우선을 따라 줄줄이 만으로 들어갔는데, 만 안쪽으로 꽤 넓은 바다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대만 섬 남쪽에 이렇게 큰 만이 있는 곳은 가오슝(高雄市)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얼추 움직인 거리를 계산해 보니 가오슝 만이 맞는 것 같았다.

대나무 숲이라는 원주민 말 ‘마타카오’를 명나라 말기 명의 관리들이 섬에 들어오며 한자로 음차해 다거우(打狗)라 불렀고, 일본이 대만을 점령한 이후로는 이걸 다시 일본어의 비슷한 발음 타카오(高雄 고웅, たかお)로 불렀다.

2차 대전 후 ‘중화민국’이 되자 일본어 타카오의 한자 高雄을 표준 중국어에 따라 발음하게 되었고, 그렇게 지금의 ‘가오 슝(市)’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가오’가 살아 있는 동네 이름이었다.

물론, 지금은 명나라의 관리가 들어오기 전이니 강가 옆으로 펼쳐져 있는 대나무 숲을 뜻하는 ‘마타카오’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 같았다.

***

상륙 후 주위를 살피니 바닷가 근처에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대나무로 집을 만들어 사는 것 같았고 그 수준은 열악했다.

문명의 혜택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야생의 원주민인 것 같았다.

“망원경으로 보니 원주민들이 다들 산으로 도망친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뭐 여기에 원주민들이 있었어도 말이 안 통했을 거다.”

대만의 원주민인 고산족은 서로 부족이 다르면 말도 잘 안 통할 정도로 고립된 언어를 썼다.

“제가! 원주민 언어를 할 줄 압니다. 우르샤케 무라아징기!?”

이상한 말을 하며 큰소리를 지르는 녀석은 이번에 포로로 잡은 해적 중의 한 명이었다.

“저는 백월 출신으로 이쪽 사람들과 말이 같습니다! 믿어주십시오!”

백월이라 하면 복건성에 있는 오랑캐 남만족을 이르는 말이었고, 대만의 고산족과도 연관이 있었다.

“좋다. 말이 통하고, 저 원주민들과 통역을 할 수 있다면 노예에서 빼주겠다.”

자신의 이름을 만추라고 밝힌 포로는 원주민들이 언뜻 보이는 산을 향해 큰소리로 뭐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길 한참 지나자 산에서 나이 든 노인이 한 명 내려왔는데, 그 차림새가 특이했다.

북미 인디언의 깃털 장식과 같은 깃털로 된 머리 장식을 하고 있었고, 하체는 얇은 천 하나로 가리고 있었는데, 진흙으로 그린 것 같은 문신이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노인은 수백 명에 달하는 우리를 경계하면서 만추와 이야길 시작했다.

“말의 어휘가 좀 다르지만, 말은 확실히 통합니다. 이들의 마을은 루카이의 마을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부족 이름 같습니다. 그리고, 언제 갈 것이냐고 물어봅니다.”

“말이 통해서 다행이군. 우리는 여기에 마을을 만들어서 같이 살고 싶다고 이야길 해라. 쫓아내지 않고 공존을 원한다고.”

원주민 노인은 만추의 말을 듣곤 화가 나는지 한참을 크게 이야기하다 만추가 뭐라고 하는 말에 말이 없어졌다.

“뭐라고 하느냐? 왜 화를 내는 것이냐? 같이 살기 싫다고 하는 것이냐?”

“그것이, 말이 잘 안 통해서 자신들의 마을을 빼앗는 거라고 이해해서 화를 낸 것 같습니다. 이후로 설득을 하고 있는데, 우리도 전란을 피해서 온 것이라고 하자 말이 없습니다.”

원주민 노인은 자기 혼자 판단하기 힘든지 뭐라고 말을 하곤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내일 다시 오겠다고 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서로 말이 안 통해서 생기는 오해를 풀기 위해 루카이족의 마을 옆으로 미리 집을 짓는 것을 보여줘야겠구먼.”

시쭈꾸의 참파인들과 해적 노예들을 동원해 루카이족 마을과 얼마 정도 떨어진 곳에 땅을 고르고, 대나무를 베어와 집을 지을 준비를 했다.

참파 왕국이 있던 베트남 반도에도 대나무로 집을 짓는 것이 흔했기에 다들 만도를 휘둘러 대나무를 벌목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조선 사람들은 될 수 있으면 배에서 내리지 말고, 원주민과 피부색이 비슷한 참파인들만 배에서 내려 육지에 머물게 하게. 우릴 보고 바로 산으로 도망친 걸 보면 한족과 비슷한 생김새의 왜구나 해적들에게 당한 경험이 있을 것이야.”

대만 원주민이 중국 본토 한족들에게 당해 온 역사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위·촉·오 삼국시대 오나라의 손권은 인구를 늘리기 위해 이주, 단주, 주애를 쳐 주민들을 징발해 오라고 시켰는데, 여기서 이주(夷州)가 바로 대만 섬이었다.

당시 위온과 제갈직이란 장수에게 1만 명의 병력을 주어 보냈는데, 1천 명의 원주민을 잡아 오나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 돌아가는 길에 태풍을 만나 원주민과 원정 온 병력 8천 명이 희생되어, 귀중한 사람들만 날려 버렸다며 이후로는 이주에 대한 약탈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후 전국시대가 되어 한족들이 복건 지방으로 내려오고, 원나라 시기 몽골인들을 피해 남송 사람들이 대만 섬으로 넘어오기 시작하자 다시 대만 원주민들은 피해를 당하기 시작했다.

대만 섬을 좌우로 나눠 보면 왼쪽은 넓게 펼쳐진 평지라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오른쪽은 높은 산으로 가득한 고산지대라 농사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남송 이후 한족들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섬의 왼쪽 평야를 원주민들에게서 빼앗았고, 원주민들은 높은 산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수십 세대가 살게 되니 대만의 원주민들은 높은 산에 산다고 고산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렇게 말레이계인 참파인들 만이 해안가에서 집을 만들고 거주 준비를 하자, 원주민 노인이 다시 내려왔고, 뒤이어 원주민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 수가 대략 60여 명 정도였다.

“루카이 족 사람들도 싸움을 피해 이곳으로 내려온 것이라고 합니다. 참파인들이 살고 싶다면, 같이 살아 가자고 합니다.”

“다행이구만.”

그제야 시쭈꾸의 참파인들과 원주민들은 서로를 제대로 보기 시작했는데, 언뜻 보기에 검 갈색의 피부는 비슷했지만, 참파인들은 곱슬머리가 많았고, 원주민들은 직모가 많았다.

마치 현대의 혼혈 남미인들과 과거의 북미 인디언들이 만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슬람인들의 기도 시간이 되자 참파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기도를 올렸는데, 그런 모습을 보는 원주민들도 참파인들과 함께 서쪽을 보고 기도를 올렸다.

다 같이 절을 하고 하는 모습을 보니 왜 서구인들이 기독교를 앞세워 남미를 공략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다른 종족이라도 하나의 끈으로 묶어주는 것이 종교라는 생각에 종교의 효용에 대해 고민을 했다.

거점지를 만들고, 조선인들의 해외 진출을 위해서 조선의 단군을 모시는 그런 종교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서 단군(檀君)이 조국(肇國)하며 삼국시대와 고려 시대를 우리의 역사라고 한민족의 성립을 체계화했던 서거정이 아직 살아 있으니 그에게 부탁하면 그럴듯한 경전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다른 나라 불교와 궤가 달라진 한국의 불교를 앞세워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인종과 나라가 다르더라도 그걸 하나로 묶어줄 종교라는 구심점이 필요했다.

원나라가 갑작스레 붕괴하고 칸국들이 서로 등을 돌리고 돕지 않게 된 원인 중의 하나가 모두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종교라는 구심점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었다.

몽골의 텡그리 신앙은 토속 신앙을 벗어나지 못했고, 이슬람과 도교, 불교등 여러 종교를 믿었기에 나라를 하나로 묶어줄 만큼의 구심점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렇다고, 서구 열강들처럼 기독교 단일 종교로 구심점을 강제로 만드는 것도 거부감이 들었다.

고민이 많을 때는 역시나 고기였다.

“시쭈꾸가 새로운 터전을 찾았고, 루카이 일족과 함께 살게 되었으니 그 기념으로 아주 특별한 요리를 해드리겠습니다.”

종교로 민족과 나라들을 묶어 구심점을 만드는 것이 힘들다면, 입맛으로, 먹거리로 같은 식습관을 가진 식문화란 것으로 사람들을 묶어 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투쟁과 전쟁, 싸움이 벌어지더라도 한 솥에서 난 밥을 같이 먹고 얼굴을 마주하며 같은 음식을 먹어 온 사이라면 밥 정(精)으로 인해 관계가 좋아질 수 있었다.

원종은 ‘한식 문화권’이라는 것을 만들어 무역 거점마다 한식을 알리고 먹이며 밥 정으로 사람들을 묶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 205. 무역 거점.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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