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198화 (198/327)

< 198. 남만이라 불리는 곳. (2) >

반세워라고 사람들에게 알려준 반쎄오는 한국으로 치면 ‘지짐’, ‘전’이라고 보면 되는데, 역시나 비가 올 때 먹으면 좋은 음식이었다.

물론 베트남에서는 1년 내내 언제든 먹는 음식으로 고기와 해산물이 들어가기에 한 끼 식사로도 충분했다.

안에 들어가는 내용물은 가게나 지역마다 다를 수 있는데, 반죽에 쌀가루와 전분, 달걀이 들어가는 건 대부분 같았다.

노란색의 색을 강조하려면 강황 가루도 넣고, 돼지고기가 없으면 닭고기나 다른 고기를 넣기도 하며 새우가 없으면 다른 해산물을 넣는 등 강제로 정해진 레시피는 따로 없었다.

전을 반으로 접어 전이 가진 열기로 야채를 익히기에 야채의 아삭거림이 살아있는 식감의 재미를 가진 음식인데, 상추나 쌈 야채에 올려 먹을 수도 있었고, 라이스 페이퍼로 김밥처럼 말아먹기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음식이었다.

물론, 느억맘(늑맘) 소스라는 그 특유의 짜고도 감칠맛이 나는 소스가 있어야 베트남 특유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음식이었다.

피쉬 소스인 느억맘 소스 대신 간장에 식초에 찍어 먹다 보니 베트남 특유의 음식이라기보다는 한국 지짐을 조금 다르게 한 것 같은 느낌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름에 튀기듯이 얇게 구운 지짐처럼 비가 내리는 밤과 어울렸다.

“도련님 안남미가 다 떨어졌고, 배에서 키우던 숙주와 콩나물도 동이 났습니다. 이제 반세워 요리를 위해서 숙주와 콩나물을 키우는 항아리를 더 늘릴까요?”

200명에 넘는 대인원이다 보니 먹는 양이 확실히 장난 아니었다.

“녹두는 이제 구하기 힘들어질지도 모르니 키워 먹는 것에 콩나물을 더 늘리게나.”

정화의 대항해 기록에도 햇빛이 들지 않는 배 아래에 항아리를 두고 콩나물과 숙주를 키워 먹었다고 했는데, 장기간의 항해에서 신선한 채소를 먹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었다.

화분에 들여 다른 채소를 키우는 것도 배에서 가능하긴 했지만, 흙에서 키우는 채소의 경우에는 물을 한번 주면 물이 흙에 흡수되어 사라졌기에 물 문제가 있었다.

더해서, 햇빛이 잘 드는 갑판에 화분을 놔두어야 채소가 자랐기에 갑판에서 채소를 키우는 데는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콩나물과 숙주나물은 햇빛을 피해 뿌리를 길게 키워 먹는 채소였기에 어두운 배의 선창에서 키우는 것이 가능했고, 흙에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한번 부어 쓴 물을 몇 번이고 재활용할 수 있었다.

이런 동양 특유의 채소를 키워 먹는 식문화가 있기에 동양의 항해자들은 비타민C 부족으로 오는 괴혈병을 겪지 않았고, 마른 비스킷보다 더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사실상 대항해시대를 위한 식문화도 준비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배가 수리되는 동안 참군 염호진을 데리고 산두에 열리는 시장에 다니며 상업에 관해 이야기해주었는데, 앞으로 동남아시아 해상무역을 책임질 사람이었기에 상업과 유통에 대해 최대한 많은 것을 알려줘야 했다.

“그런데, 제조어른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이상하다는 말이요?”

“저 소금 말입니다. 조선의 소금과는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아, 천일염(天日鹽)말인가?”

“저렇게 하얗고 알갱이가 굵은 소금을 천일염이라고 하는 겁니까?”

“맞네. 하늘의 햇볕이 만들어 주는 소금이라고 천일염이라 부르지.”

이 당시의 조선에선 소금을 구워 만드는 자염(煮鹽)이 대부분이었고, 북방 의주를 통해 들어오는 암염(巖鹽)이 간혹 있을 뿐이었기 때문에 흰색의 천일염이 조선인에게는 신기해 보일 수 있었다.

“조수간만이 심한 곳에 염전(鹽田)을 만들어 소금을 만들어 내는데, 자염처럼 불을 때어 만들지 않고, 햇볕의 열기로만 만들어 내는 소금이네.”

“그렇군요. 땔감을 쓰지 않고, 햇볕으로만 소금을 만들어 내서 그런지 소금값도 저렴한 것 같습니다. 이 소금을 사서 가면 이문이 많이 남지 않겠습니까?”

염호진이 알 정도로 이곳 산두의 소금이 저렴한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대만 인근이 우리가 흔히 아는 염전이 시작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갑종제염전(甲種製鹽田)이라고 알려지는 염전법은 제방을 쌓고, 층별로 함수를 만들어 채염하는 방식인데, 바로 이 근방이 그 염전법이 태동한 곳이었다.

대만을 비롯한 이 근방은 일조량이 많고, 물 증발량이 많아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염전도 있었기에 소금값이 저렴할 수밖에 없었다.

“소금을 배 한가득 싣고가면 이득은 나올 테지만, 우리도 우리 땅에 염전을 만들면 되네. 교역보단 그게 맞는 방법일세.”

염호진은 염전을 만들 수 있다는 말에 신기해했고, 만들어 보고 싶다고 말을 할 뻔했지만, 금세 입을 다물었다.

자염을 만드는 권리를 가진 이들이 바로 종친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소금을 전매했기에 이 자염을 만드는 권리를 종친들에게만 주었는데, 이로 인해 일반인들은 자염을 구워낼 수가 없었다.

“대월에 가서 교역품을 더 실을 것이 없다면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에 여기서 소금을 싣고 가도록 하지. 주상전하께 상신해 보겠네.”

염호진의 말처럼 소금을 싣고 간다면 성종의 허락하에 소금을 팔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일반 백성이 아닌 종친들의 대리인에게 적당한 가격에 넘기게 될 터였다.

하지만 이 천일염을 성종에게 보여주고 조선도 천일염을 해야 한다고 설득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종친들의 자염 생산을 천일염으로만 돌려도 마구잡이로 바닷가 나무를 벌채하여 자염을 굽던 것이 줄어들 터였고, 생산량이 늘어남으로 해서 소금값도 내려갈 터였다.

후추와 설탕에 이어 소금까지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가장 기본이 되는 이런 조미료들을 내가 다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갑하기도 했다.

“여기가 소금도 싸고, 생선도 싸니 어장이나 만들어 봅시다. 청남아! 몇 명을 더 불러오거라.”

천일염이 저렴하고, 남방 바다 특유의 살이 무른 생선들을 보니 피쉬소스라고 할 수 있는 어장(魚醬)을 만들어 두면 좋을 것 같았다.

수군 20여 명이 큰 항아리 10개와 천일염, 멸치를 잔뜩 짊어지고 정크선으로 돌아왔는데, 멸치가 부족해서 동남아에서 까눅(정어리나 고등어의 새끼)이라 부르는 생선도 구매했다.

큰 항아리 10개 바닥에 천일염을 넉넉히 깔아두곤 생선과 소금을 버무려 쌓듯이 항아리에 쌓아 넣었다.

발효가 되며 생기는 물에 생선들이 뜨지 않도록 항아리 사이즈에 맞는 대나무 발을 만들어 눌러주면 어장 만들기는 끝이었다.

“도련님 그럼 이건 언제 먹을 수 있는 것입니까요? 간장처럼 오래 삭혀야 하는가요?”

언년이가 일지를 적으며 물었다.

“빠르면 6개월, 제대로 맛이 배서 먹으려면 2년은 놔두어야 한다.”

“그럼 이번 항해에서는 못 먹는 거네요.”

“그래. 다음 항해를 위해서 만들어 두는 것이다. 이 어장이 다 되면 간장을 대신해서 반세워를 찍어 먹으면 될 것이다. 남만 음식들은 이 어장에 잘 어울리거든.”

***

근 한 달 만에 배가 수리되자, 40m 급의 정크선 1척에 30m 급 누전선이 3척, 누전선 급인 남방의 배 2척, 한선과 같은 15m 급의 남방 배 3척까지 총 9척의 선단이 되어 있었다.

이 중 15m 급 남방 배 한 척은 취엉청에게 내어주었지만, 처음 출발할 때에 비해 3배나 늘어난 규모였다.

덕분에 이후의 항해는 안전했다.

하이난 섬을 지날 때 해적인 것 같은 의심스러운 배들이 있었지만, 서로가 비슷한 숫자의 배였기에 서로 경계만 하며 지나쳤다.

산두항을 출발한 지 한 달 만에 취엉청의 고향인 ‘까올로우’라는 곳에 도착했는데, 항구라고 하기가 미안할 정도의 어촌 마을이었다.

물론 취엉청이 내게 받은 도자기 같은 것은 지역에 뿌리내린 화교들의 영향력으로 교역할 수 있겠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답이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결정적으로 이슬람 상인이 올 것 같지도 않았고, 특산물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취엉청 저 산맥 일대에 취씨 사람들이 흩어져 산다고 했는데, 혹시 저 산맥에 후추나무가 자라나?”

“후추나무는 없습니다. 제가 중국으로 갈 때 들고 갔던 후추는 ‘후에’에서 구매했던 것입니다.”

“그럼, 여기 까올루우에서는 중국에 팔만한 물건이 있나? 그런 특산품이 없다면 여기는 상단이 들어선다 해도 말라 죽을 것이야.”

“조선에서 교역선이 와도 그렇겠습니까?”

“그래. 조선에서 이 배들로 물건을 가져와도 어디에 보관할 것이며 어디에 물건을 팔 것인가? 여기는 상단이 들어설 만한 곳이 아니야. 후추를 구매했다는 후에로 가서 상관을 여는 것이 어떤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처음부터 다 새로 만들고 해야 합니다. 여기는 씨족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 처음에는 네 말대로 가문 사람들 덕분에 수월할 거야. 내가 구매한 물소의 뿔만 해도 취씨 일족 사람들이 모아줘서 100여 개를 수월하게 구매했으니깐. 하지만 여기에 계속 있으면 상단이 계속 자네의 것일 수 없을 것이야. 가문의 입김이 불게 될 거네.”

취엉청은 원종의 말을 듣고는 뭔가가 와닿았다.

사실 당장 오늘만 해도 집안 어른들이 와서는 자신이 원종에게 얻은 도자기가 마음에 안 든다며 여러 가지를 바꿔가겠다며 난리를 부렸다.

씨족의 존장이었기에 취엉청은 뭐라고 말도 못 하고 그저 웃으며 속만 태웠었다.

지금은 이런 물건에 대한 것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은근슬쩍 가문의 사람들이 교역 일에 끼어들게 될 것이고, 원종의 말처럼 자신이 도움받아 만든 상단이 개인의 것이 아닌 씨족의 것이 될 수도 있었다.

씨족 간의 일은 끊고 맺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었기에 원종이 해주는 충고가 제대로 와닿았다.

“떠날 준비를 하겠습니다. ‘후에’로 가시지요.”

***

마음을 굳힌 취엉청과 후에라는 교역이 발달한 곳으로 갔으나, 이곳은 대월과 참파의 중간 지점으로 다낭과 호이안까지 사람들이 꽤 몰려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도 뭔가 특산품이라고 팔 수 있는 물건이 없었다.

이쪽 사람들이 중요치 않게 생각하는 물소 뿔이 남아도는 것을 구매했지만, 물소 뿔 하나만 보고 여기에 상관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여러 상인들과 안면을 트며 이야길 하니 취엉청이 구매한 후추나 단목 같은 것은 참파왕국의 남쪽인 ‘붕따우’ 인근에서 재배되는 물건이라고 했다.

그 말에 붕따우까지 내려가니 그제야 특산품이라고 할 만한 후추를 재배하고 있었고, 이슬람 상인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붕따우 인근 산지에서 후추나무가 키워지고 있었는데, 인도 남부에서 이슬람 상인을 통해 미얀마로 전파되고, 다시 말라카 해협을 통해 동남아시아까지 재배가 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후추나무의 종자를 가져가야 했기에 후추나무 군락지에 대해 수소문을 했고, 참인이라는 계급의 ‘시쭈구’란 참인을 화교를 통해 소개받았다.

“중국에서 후추거래를 하러 오는 상인들은 몇 보았으나, 후추나무를 직접 보고 싶어 하는 이는 처음이오.”

“쌀이 논에서 자라듯이 후추도 논에서 벼처럼 익어 열리는 줄 아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진짜 나무에서 열리는지 구경하고 싶습니다.”

“하하하. 하긴, 그 열매만 보았던 사람이라면 진짜 벼처럼 논에서 크는지 나무 열매처럼 산에서 크는지 어떻게 열리는 건지 궁금할 만도 하지.”

참파의 참인 계급은 신라로 치면 성골, 진골과 같은 출신 성분을 나타내는 말인데, 참파인들은 동남아 계열이 아닌, 피부가 검고 곱슬머리가 나는 인도계 민족이라서 동남아인들과 혈통이 다른 것을 자부심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런지 ‘시쭈구’란 참인은 우리를 후추나무가 있는 롱 쿠안이라는 곳으로 안내해 주며 우리에게 힘을 과시하고 싶었는지 창을 든 병사를 100여 명이나 동원했다.

참파인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화교를 고용해 통역을 맡겼는데, 통역을 맡은 화교가 참파인들이 없을 때 묘한 말을 했다.

“이 땅의 주인이 조만간에 바꿔버릴지도 모릅니다.”

< 198. 남만이라 불리는 곳.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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