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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194화 (194/327)

< 194. 이 시대의 네트워크. (1) >

194. 이 시대의 네트워크. (1)

김일휘는 남경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기 위해 배에 탔는데, 항주에도 신라방 사람들이 있다며 소개해주기로 했었다.

한데 신라방 사람으로 혈통은 조선 사람과 마찬가지였지만, 발해방과는 달리 산동 중국인들에게 동화가 많이 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입맛도 중국인들의 입맛이었다.

“하하하. 조선 사람들이 회를 좋아한다고 신기해하지만, 사실 중국 사람들도 회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고기를 날로 먹는다는 뜻을 가진 회(膾)도 중국인들이 만들지 않았습니까?”

“엇? 그러고 보니 그렇구만. 회란 한자를 만든 것이 중국이었군. 하지만, 지금은 산동이든 산서이든 회를 먹는 이들이 없소이다. 내가 나고 자랐을 때도 그렇고 회를 먹는 이가 없는데, 왜 글자까지 만들어 놓고는 안 먹게 된 것이지.”

“원나라 때 이후로 안 먹게 되었다고 알고 있소이다. 질병이나 돌림병을 생선이 일으킨다고 여겨 생선 자체를 먹지 않게 되었다고 추측은 하는데, 정확하진 않소이다.”

중국 사람들이 회를 먹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출병을 온 명나라의 군사들은 조선 사람들이 생선회를 먹는 모습을 보고 오랑캐(야만인)의 식습관이라고 흉을 봤다고 할 정도였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중국인들은 회를 먹지 않기에 생선회를 먹는 조선인을 낯설어한다고도 했는데, 아예 회를 먹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었다.

물론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 온 병사들이 요동 반도 위쪽에 주로 거주했던 바다와 먼 지역의 병사들이라 생선회를 접해보지 못했기에 그럴 반응이 나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명나라 이후로는 생선회나 육회에 대한 기록 자체가 없어졌기에 더 이상했다.

중국은 기원전부터 생선회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 당나라 송나라 시절에는 문학 작품에도 생선회에 대한 예찬이 있을 정도로 흔한 음식이 회였다.

소동파는 아예 복어 회를 예찬하며 목숨과 바꿔서라도 먹는 맛이라며 찬양을 했을 정도였다.

한데 유목민인 원나라 시기부터 이런 생선회에 대한 기록이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명나라에 들어서는 아예 날로 먹는 회에 대해서 기록도 없고, 먹는 것 자체를 모르게 되었으니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추측하기로는 유목민이었던 원나라 몽골인들이 생선회를 싫어했고, 14세기 흑사병을 비롯한 전염병이 음식물을 통해 감염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날로 먹는 식문화 자체를 점차 터부시하게 되지 않았나 추론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회를 먹지 않는 문화가 지금까지 중국에 내려와 생선회를 먹지 않았기에 우리가 참치회를 즐길 수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초밥과 회 맛을 알게 된 중국인들이 늘어나면서 신선한 해산물은 씨가 말라가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전 세계 해산물 생산량의 30%가 중국에서 소비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기에 지금부터 미리 회 맛을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우리는 그냥 구워 먹도록 합시다. 생선회를 날로 먹게 되면 충(蟲)이 몸에 생길 수도 있으니 문인들은 구워 먹어야 할 것이외다.”

김일휘도 몸 안에 충이 생길 수 있다는 말에 회를 먹길 포기했다.

***

“남경으로 가는 이유가 물건을 팔고 상인들과 안면을 터는 이유라면, 남경으로 배 한 척만 올라가면 될거요. 잡다한 것은 남경보다는 항주에서 거래하는 것을 추천하오. 그리고, 정화 태감의 뒤를 쫓는다면 용강(龍江)조선소를 가보는 걸 추천하오.”

장수성을 지나 상해 만에 이르자 김일휘는 남경 상인들 보다 항주에서 거래하는 것을 더 추천했다.

“용강 조선소는 왜 가보라고 하는 것이오?”

“남경의 장강과 진회강이 합류하는 곳에 지어진 조선소인데, 정화 태감의 대장선을 거기서 만들었소이다. 물론 거기서 모든 배들을 다 만든 건 아니고, 대장선이라 불리는 돛이 9개가 달린 대형 배들을 거기서 만들었소이다.”

정화의 대장선이라면 배 길이가 100m를 넘었고 폭은 50m에 달할 만큼 큰 배였다.

원나라 시절에는 이러한 배를 만들지 못했지만, 영락제의 명으로 격벽이 있는 대형 배들이 만들어진 것인데, 그런 대형 선박을 만든 조선소라고 하자 가보고 싶었다.

우리가 타고 온 누전선의 5배에 가까운 대형 배였기에 그런 배를 만드는 기술자를 영입하거나 기술자를 못 구하면 배라도 구매하는 것이 목표였다.

***

뱃머리를 돌려 오게 된 용강 조선소는 기대와 달리 규모가 크지 않았고, 쇠락해 가고 있었다.

“해금령으로 배를 만들 수가 없는데, 배 만드는 이가 남아 있을 수 있겠소? 배를 수리하러 온 것이면 저기로 가보시오.”

인근에서 고기잡이하는 조각배에 탄 이가 배를 댈 수 있는 곳을 알려주었는데, 배가 조선소에 닿자 사람들이 달려 나왔다.

“대월(大越)에서 왔소? 아니면 참파(占婆)에서 왔소?”

“섬라(暹羅)국에서 왔소?”

“어디서 왔든 배 기술자는 안 구하오? 고칠 수도 있고, 만들 수도 있소이다!”

햇빛에 검게 그을린 피부를 가진 이들이 서로 자기가 일을 하고 싶다며 여러 나라말을 해왔는데, 뭔가 노동 인력시장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나라에서 관리하던 조선소인데 이렇게 되어 버렸구랴. 쯧쯧쯧”

김일휘는 용강 조선소가 이 정도로 몰락했을 줄 몰랐다며 난잡한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다.

“배를 수리하고 가격만 맞는다면 배도 사고 싶소이다. 두 가지 일을 다 하는 이는 누구요?”

“내가 다 되오!”

“저리 꺼져! 배도 없는 놈이, 우리 배가 크다고!”

“우리 배를 사시오!”

서로 자기 배를 팔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답이 안 나올 것 같았다.

“우리 배보다 큰 배를 팔 수 있는 자만 남고 해당 사항이 없는 이들은 물러나시오!”

방패수 역할을 하는 수군들이 나서 정리를 하자, 누전선보다 큰 배를 가졌다며 나선 10여 명이 남았다.

일일이 그들이 가지고 있다는 배를 둘러보았다.

누전선의 배의 길이가 20m 내외였는데, 그들이 보여주는 정크선은 크기가 30m에서 50m에 이르는 크기로 돛이 5개나 달린 대형 정크선도 있었다.

“배가 크기는 하지만 다 삭아서 수리가 필요한 배들입니다. 못해도 30년 이상 묵은 배들입니다. 어떤 배를 사든 수리를 해야 하니 가장 저렴한 것을 사시면 될 것 같습니다.”

수군에서 배를 수리하던 이가 나서서 정크선들을 둘러보았는데, 아마도 이 배들은 정화의 항해에 실제로 사용되었던 배들 같았다.

멋진 역사를 가진 배들이었지만, 그 시간의 흐름은 참으로 냉혹했다.

하지만 조선소가 이런 상황이라면 조선 기술자를 쉽게 데리고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배를 수리하고 만들 수 있는 이들 중에 이곳을 떠나 이주를 생각하는 이들은 없소?”

“우리 배를 산다면 그런 사람을 구해주겠소이다. 헌데, 가족까지 다 데리고 가는 것이오?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힘든 상황이라 가족까지 다 데리고 가야 할 터인데.”

“가족까지 다 함께 가준다면 더 좋소이다. 우리는 조선 사람으로 조선에서 살 수 있는 자라면 더 좋소이다.”

가족까지 다 데리고 갈 수 있다고 하자 기술자 4명을 소개해주겠다는 이가 나섰고, 그의 배를 구매했다.

돛이 4개에 배의 길이가 40m에 이르는 낡은 정크선 한 척을 은 200냥에 샀고, 기술자 4명과 그 일가 19명을 소개비 조로 은 다섯 냥에 들였다.

실제 정크 선을 고치는데 수군 기술자와 함께 하는 것을 보니 진짜 기술자가 맞았다.

본래 이런 배를 만드는 기술자는 나라에서 중시 여겨 유출되지 않게 관리를 하는 것이 기본인데, 해금 정책으로 인해 조선 기술이 천시받게 되니 이런 상황이 온 것 같았다.

하긴, 영락제 이후 문인들의 시대가 되며 유교적 원칙에 근거하여 농업을 중히 여기고 상업을 비루하게 여긴 것이었으니 조선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유럽이 갤리온을 만들어 태평양을 건너고 할 때도 중국은 정크선 이후 발전이 없었기에 대양으로 나갈 수가 없었고, 조선은 1500년대에 만들어진 판옥선을 조선 말기까지 그대로 사용을 했으니 중국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배가 수리되는 동안 남경으로 가 거래를 하고, 정덕진에서 나오는 고급 도자기를 구매해 오면 될 겁니다. 신라방이 있는 항주는 감합무역(勘合貿易)으로 온 왜국과 다른 나라의 상인들도 있기에 정덕진의 고급 도자기가 남경보다 비쌀 겁니다.”

김일휘의 말대로 상해를 지나 항주(杭州)와 영파(寧波)에서 교역할 수 있는 물건들을 구할 수도 있었지만, 감합무역으로 왜의 상인이나 유구, 참파, 대월 등등의 감합부(勘合符)를 든 상인들이 많이 있을 터였기에 프리미엄급 물건은 남경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더구나 형이 남경 상인들에게 받은 소개장도 있었고, 왕직에게 받은 소개장도 있었기에 남경으로 우선 올라갔다.

***

“흐음. 확실히 본자기는 특이하구랴. 이렇게 얇게 만들어졌는데, 휘어짐이 없다니.”

챙겨온 본자기를 본 남경 상인은 얇게 만들어진 본자기의 표면에 감탄했다. 그리고 경덕진에서 만들어진 청화백자를 꺼내와 둘을 비교했는데, 그 흰색의 온도가 달랐다.

소의 뼛가루가 들어간 본자기의 흰색은 따뜻한 상앗빛과 같은 흰색이었다면, 경덕진에서 만들어진 청화백자의 흰색은 차가운 얼음과 같은 흰색이었다.

물론 그림이 그려진 코발트 파란색의 영향이 있어서 더 차갑게 보이는 것도 있었지만, 본자기를 옆에 두고 비교하니 이 흰색의 온도가 확연히 차이가 났다.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물어봐도 알려주시지 않겠지요?”

“저야 뭘 알겠습니까? 그저 경덕진과 조선의 흙이 다르다 보니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자토(瓷土)에 따라 다르니 차이가 나는 것이겠지요. 듣기로는 생산량이 많지 않다고 하던데 맞소이까?”

“한 달에 50개 정도 만들어지니 소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흐음. 경덕진과는 경쟁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다행이오.”

남경의 상인들은 본자기가 대량으로 생산되어 청화백자를 밀어내는 것이 아닐까 걱정을 했는데, 그 제작 수량 자체가 몇 없다고 하니 안심하는 눈치였다.

남경 상인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남방의 곡식 거래로 부를 쌓아 온 것 같았지만, 명의 수도가 북경이 되면서 화북으로 곡식을 보내는 일에서 수익을 마음대로 낼 수가 없었다.

영락제나 그 후대의 황제들도 자신들의 식량을 가지고 장난질 치는 남경의 상인들을 가만히 놔둘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경 상인들의 가장 큰 수익은 도자기였다.

도자기의 산지로 유명한 경덕진이 장강 물길로 연결되어 있었기에 도자기들을 쉽게 가져올 수 있었고, 그런 도자기들은 항주와 영파에서 이슬람 상인들에게 판매가 되어 2배 넘는 이익으로 남경 상인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물론 이런 경덕진의 청화백자는 이슬람 상인에 의해 인도와 중앙아시아 여러 곳 심지어 아프리카 동부까지 팔리며 이슬람 상인들에게 3배 이상의 이익을 안겨주고 있었다.

이러한 도자기 사업에 본자기라는 뛰어난 자기가 들어오게 생겼으니 이런 꿀통을 빼앗길까 경계를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나오는 물량이 경덕진의 작은 가마에서 나오는 물량보다 작자 안심하는 것이었다.

실제 선덕제 시절, 선덕제가 경덕진에서 생산되는 청화백자의 아래에 대명선덕(大明宣德)이라는 글자를 넣어 명나라의 이름을 알리게 했는데, 이러한 연호가 들어간 청화백자는 아랍을 지나 유럽에 전달되면서 명품 중의 명품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유럽에 도자기라는 것이 최초에 알려진 것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출판되면서부터였는데, 사람들은 처음 동방견문록을 보고서는 이 도자기라는 물건에 대해서 믿지를 않았다.

동방견문록 157장에 보면 원나라에는 도자기라는 신기한 그릇이 있는데, 이 도자기들은 다음과 같은 흙으로 만든다.

사람들은 물에 젖은 진흙을 모아 큰 둔덕을 쌓은 뒤 30~40년 동안 그 둔덕을 그대로 둔다.

오랫동안 둔덕에 쌓여 있던 흙으로 도자기를 만들면 푸르스름한 청색을 띠게 되는데, 이 청색이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라고 쓰여 있었다.

당시 동방견문록을 읽었던 이들은 흙으로 이런 것을 만들어 낼 수 없다고 여겨 믿지를 않았는데, 실크로드를 통해 용천자기가 유럽에 실제로 전해지자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기 시작했다.

이때 전해진 최초의 도자기는 폰트힐 베이스(Fonthill Vase)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헝가리, 이탈리아를 거쳐 프랑스 영국, 아일랜드에까지 전해진 기록이 남아 있는 도자기였다.

문제는 이런 도자기를 보고 유럽인들이 마르코 폴로의 기록을 신뢰하기 시작했고, 비싼 도자기를 복제하기 위해 동방견문록에 쓰인 대로 진흙을 모아 둔 덕을 만들고 했다는 것이었다.

마르코 폴로의 기록 자체가 잘못된 기록이었기에 당연히 유럽인들의 도자기 만들기는 수백 년간 실패할 수밖에 없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럼, 이 본자기의 값은 은으로 주면 되겠는가?”

“은 대신 현물로 주십시오.”

“어떤 것이 필요한가?”

“이 청화백자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파란색 안료가 필요합니다.”

< 194. 이 시대의 네트워크.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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