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 전권특사. (1) >
“송구하게도 소신이 했던 말 중에서 어떤 말인지를 모르겠나이다.”
“후추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배를 타고 후추를 구해오겠다고 한 말 말이다.”
“아, 전하. 그것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소신이 개인적으로 준비를 하고 있었사옵니다.”
원종은 후추라는 말에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이미 준비하고 있다며 이야길 했다.
“하하하. 본래 그 말을 들었을 때, 자네가 연소하여 일을 맡겨도 될지 걱정을 했었어. 한데, 이미 왜구들과 싸워본 경험도 있고, 군선인 누전선을 세척이나 운용해본 것 같으니 일을 맡겨도 될 것 같군. 상선은 그것을 내리도록 하라.”
성종의 말에 따라 상선이 작은 방석 같은 것을 원종의 앞에 놔두었는데, 비단 보료 위에는 마패(馬牌)가 놓여 있었다.
본래 마패는 말을 빌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패를 뜻했지만, 그런 권한이 있는 신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신분 패로도 쓰였다.
“저, 전하 말의 숫자가...”
일반적인 어사의 마패에는 말 두 마리에서 다섯 마리까지 새겨져 있었는데, 원종이 받은 마패에는 말이 무려 여덟 마리가 새겨져 있었다.
영의정의 마패에는 일곱 마리의 말이 새겨지고, 여덟 마리의 말이 새겨진 마패는 특사, 전권특사라는 의미가 있다고 배웠었다.
그리고 상징적 의미로 세자는 아홉 마리, 왕은 열 마리의 말이 그려진 마패를 가진다고 했다.
고로 내게 주어진 말 여덟 마리가 새겨진 마패는 나를 전권특사로 임명한다는 뜻이었다.
“사신사로 북경을 다녀오며 산동반도를 지나 조선으로 오지 말고, 남경으로 가거라. 거기서 더 남쪽에 있다는 백월(百越 베트남 인근)인들이 산다는 곳까지 가서 후추의 종자를 구해오거라.”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신들의 배 뒤로 상단의 배를 따르게 하여 산동 위해항에서 배를 갈아타 동남아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공식적인 명을 받았으니 이제는 숨길 이유가 없었다.
말이 여덟 마리가 새겨진 마패를 준 것은 조선은 물론이고, 명나라의 해금 조치도 무시할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국왕의 명으로 동남아의 타국에 사신으로 간다는 명분이 있으니 명나라에서도 앞뒤 생각 없이 배를 막을 수는 없을 터였다.
이런 특권을 받았다는 게 기뻤지만, 맨입으로 그 먼 길을 다녀올 수는 없었다.
“전하. 하지만 문제가 있사옵니다. 후추의 종자를 구해오기 위해 남쪽으로 가려면 소신의 배만으로는 부족하옵니다. 큰 배가 더 있어야 하옵니다. 몇 척의 배를 더 내려 주시옵소서.”
“그래서 마패를 주지 않았나. 가까운 충청수영에서 필요한 배와 수군을 조달하도록 하게. 대신에 후추 외에도 각궁을 만드는데 필요한 물소 뿔과 유황을 가져와야 할 거야.”
“네. 물소 뿔 외에도 백월 인근에는 유황도 많이 난다고 하니 배 가득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래. 사치품보다는 물소 뿔과 유황을 가져오는데 신경을 더 써주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심전력으로 후추와 나라에 보탬이 되는 물건들을 가져오겠나이다.”
이후로도 이야기가 이어졌고, 몇 번이나 더 망극하다고 감사를 표하며 원종은 침전에서 물러 나왔다.
성종은 자신이 좋아하는 후추 종자를 가져와 조선에서 재배하길 원했지만, 원종이 후추 종자를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기후가 맞지 않아 제대로 재배가 될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후추 종자를 가져오는 것과 재배에 실패하더라도 따로 언급한 물소 뿔과 유황만 가득 챙겨와도 국가적인 측면에서는 남는 장사였다.
조선의 기병이나 궁사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각궁은 물소의 뿔로 만들었는데, 매년 명나라를 통해 수입해 오는 수량이 100개 미만이라 늘 부족했었다.
수출하는 물소 뿔 수량을 늘려달라고 명나라에 주청하였음에도 명나라에서는 1년에 100여 개 이상을 절대 넘겨주지 않았다.
예로부터 동이(東夷)족이라 하여 활을 잘 쏜다고 알려진 조선이었기에 물소 뿔로 만든 각궁이 늘어나게 되면 조선이 딴마음을 먹을 수 있다고 여겼기에 물소 뿔의 수출에 엄금한 것이었다.
해서 세종대왕 시절부터 이 물소를 조선에 들여와 키울 생각을 했는데, 문제는 사신들이 중국 남부의 따뜻한 기후에서 사는 물소를 화북지역에서도 북쪽에 있는 추운 북경에서 찾았으니 물소를 구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더구나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세조가 즉위했을 때는 이를 꼬투리 잡아 물소 뿔을 아예 넘겨주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그래서 당시 조선에서 키우던 소들 중에서 가장 뿔이 길었던 황해도의 소뿔과 사슴의 뿔로 각궁을 만들게 했다.
물소 뿔 두 개로 만들 수 있는 각궁을 흑각궁(黑角弓)이라 불렀고, 황해도 소의 뿔 세 개로 만든 각궁을 향각궁(鄕角弓)이라 했으며 사슴의 뿔 다섯 개로 만드는 각궁은 녹각궁(鹿角弓)이라고 불렀다.
비싼 흑각궁을 대체하여 만들어진 향각궁이나 녹각궁은 제작 비용은 저렴했지만, 흑각궁과 비교해 사거리가 짧았고, 여러 뿔을 이어 붙여 만들었기에 내구성이 나빠 잘 부서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흑각궁을 대체하지 못했고, 물소 뿔을 사 오기 위해 왜의 상인이나 유구의 상인들에게도 물소 뿔이나 물소를 가져오게 시켰다.
결국 세조 7년 왜의 박다(博多:하카다) 상인 도안(道安)이 유구에서 가져온 물소 암수 두 마리를 공물로 바쳤는데, 이게 한반도에서 키운 최초의 물소였다.
이때 들어온 물소가 성종 초기 30여 마리로 불어나긴 했지만, 조선군에서 쓰이는 각궁을 국산화하기에는 아직도 머나먼 일이었다.
그리고 물소의 숫자를 더 늘린다고 하더라도 임진년 왜란 이후로는 각궁의 중요성이 줄어들었고, 성종 말 90여 마리까지 개체를 늘렸던 물소들은 왜란 이후 중요도가 낮아지며 실록의 기록에서 사라져 갔다.
그러다 병자호란 이후 만주에서 들어온 전염병인 우역(牛疫)으로 인해 한반도의 소들이 초토화되며 물소들의 대도 끊어져 버리는 게 원 역사였다.
물론 그 이후로는 화포의 중요성으로 인해 물소나 물소의 뿔을 거래하는 무역도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화약의 재료가 되는 유황은 물소 뿔과는 달랐다.
근대시대까지 유황은 전략물자로 계속 거래를 해야 되는 물건이었고, 그 물건이 지금 가장 필요한 사람도 알고 있었다.
***
“그래.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 책은 돌려받았소?”
“전 제조께서 여러 곳에 힘을 써주신 덕분에 할아버님의 유산이나 다름없는 책을 돌려받았사옵니다.”
최무손의 손자인 최공손은 자신의 집에 찾아온 전원종에게 화약수련법 책을 보여주었다.
최무선이 말년에 초석과 분탄을 손쉽게 만드는 방법을 정리해두고, 그걸로 품질 좋은 화약을 만들 수 있게 자식들에게 남긴 책이었는데, 최무선의 아들인 최해산이 소문난 망종이라 최무선이 남긴 유산이 분실될까 염려되어 조정에서 압수했었던 책이었다.
“다행이로구만. 그럼 초석을 얻는 작업의 진척도 좋아졌소이까?”
“물론입니다. 아버지께 전해 들은 것과 책은 많은 것이 달랐습니다. 이 책이 없었다면 쉬운 방법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럼 그 기술을 화통군(火筒軍)의 다른 이들에게도 알려주었소?”
“네. 제가 혼자서 머리를 싸매고 알아낼 때 느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기술이라고 하나 전해지지 않으면 끝난다는 것을 이 책으로 인해 알게 되었습니다.”
귀한 것일수록 흔하게 둬야 한다는 사실을 최공손은 깨달은 것 같았다.
“혼자 고민하기보다는 여러 사람의 머리가 모이면 좀 더 쉬운 방법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책을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었고, 이제는 할아버지가 남기신 여러 방법이 절전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최공손의 말에 원종은 한숨 놓을 수 있었다. 성종 때의 안정된 시절을 거치고, 특별한 일없이 임진왜란 때까지 150년 가까이 평화로웠기에 최무선의 화약수련법은 자연스레 잊혀졌었다.
하지만 이제는 손자인 최공손에게 제대로 이어졌고, 화통군의 여러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훗날 화약 관련 기술이 절전 되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럼 나랑 멀리 어디 좀 갑시다.”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영성부원군(최무선)께서 직접 배를 타고 나가 왜놈들과의 싸움을 승리로 이끄셨듯이 화포를 배에 싣고 바다로 나가야 합니다. 거기에 최주부의 힘이 필요하오.”
“어디서 왜놈들이 난리를 부리는 것입니까?”
할아버지의 피를 제대로 이어받은 것인지 최공손은 왜구라는 말에 눈빛이 달라졌다.
“지금 왜란이 난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왜구들이 우리를 찾아올 겁니다. 그런 왜놈들의 배를 날려 버릴 수 있게 화통군에서 배를 탈 수 있는 이를 뽑아주시오.”
원종은 성종에게 받은 마패를 보여주며, 물소의 뿔과 유황을 구해오기 위해 먼 바다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누전선에 화포를 고정하여 발포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알려주자 그는 얼른 배를 보자고 했다.
“지금 열심히 배가 올라오고 있을 터이니 같이 움직입시다.”
***
“저기 옵니다! 태극 문양의 깃발입니다.”
눈 밝은 이가 멀리서 겨우 보이는 배의 깃발을 알아보고 크게 소리쳤다.
사신단이 출발할 때 함께 갈 수 있게 거제도에 있던 배를 불러올렸는데, 딱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왜구로 분했던 놈들에게 빼앗은 한선 다섯 척과 누전선 세척이 강화도 포구에 도착했는데, 참군 염호진이 있어서 그런지 대오가 안정적이었다. 배에서 내린 이들도 두리번거리긴 했지만, 절도가 있었다.
누전선에 60~70인, 한선에는 20~30인이 타고 있었는데, 다들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염 참군. 누전선은 물론이고, 한선에도 선원이 가득한데 이게 무슨 일이오?”
“그것이. 소인이 임의로 채용을 했사옵니다. 경상우수영의 원철 대감이 허락한 일인지라. 올라오는 여러 섬에서 장정들을 선원으로 뽑아 왔사옵니다.”
“응? 우수영에서 선원을 뽑아가라고 했다고? 이거 뭔가 사연이 있겠구만. 이야기나 한번 들어보세. 아참! 이쪽은 영성부원군의 손자이자 화통군의 최공손 주부네. 누전선에 화포를 놓아줄 화장이지. 최주부는 가서 배를 살펴보고 고정식으로 총통을 놓을 수 있는지 연구를 해보게나.”
최공손은 자신이 데려온 화통군의 사람들과 신이 나서 배에 올라갔다.
“화통군이 배에 총통을 설치하는 것을 허락받은 것이옵니까?”
염호진은 상선에 총통을 설치한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그런 사연이 있네. 그래. 거제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
“내 듣기로 전 제조가 다른 수영에도 개삭(묵은 부품을 갈아 끼우는 행위)하여 만들어 지는 누전선을 사겠다고 했다는데, 이것은 나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더냐?”
경상우수사 원철은 배 수리를 위해 배와 함께 온 염호진과 동래에서 온 희재란 이에게 화를 내었다.
원종에게 화를 내어야 하지만 원종의 수족이라고 할만한 사람이 희재밖에 없었기에 왜 자신에게 배를 다 사지 않고 다른 수영에서 배를 사냐며 화를 내는 것이었다.
“쇤네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요. 제조 어르신이 오셔야 무슨 대답이든 해드릴 수가 있습니다요.”
희재가 고개를 숙이며 권한이 없다고 하는 것도 원철은 기분이 나빴다.
동래에서 온 희재라는 놈이 춘봉상단의 부산 지부 책임자라고 했지만, 그저 모른다고 고개만 숙이니 뭐가 되는 게 없었다.
물론 돈을 내었기에 한선의 개삭은 허락해 주었지만, 저런 한선이 다섯 척이나 늘었으니 이제는 더는 자신의 수영에서 나오는 배를 사지 않을 것만 같았다.
“대감마님.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동래에서 여러 상인을 보다 보니 상단에 투자하는 양반이 많았습니다. 동래의 양반들이 왜국의 상인들에게 투자를 하는 것인데, 그 이문이 2배 이상이 나오더군요.”
“이문이 2배라고? 자세한 이야기를 한번 해 보거라.”
“그것이 말입니다. 동래의 양반이나 상단들이 왜국의 상인들에게 물건을 단순히 파는 것뿐만 아니라, 그 상행에 지분을 투자하더라 그 말입니다.”
< 183. 전권특사.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