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181화 (181/327)

< 181. 독상. >

“사옹원의 호적 정리가 끝이 나자 상단 일에도 기웃대길래 장부를 맡겼었는데, 의주에서 큰 도련님이 보내주신 털가죽이나 약재의 수량을 누락해서 착복하려는 것은 기본이고, 공신의 후손이라며 사람들을 무시하기 일쑤입니다.”

“사옹원 본자기 때문에 일부러 점포에 있게 했는데, 오추가 힘들었겠구만.”

아무래도 권항필은 양반이고 오추는 평민이다 보니 뭐라 말도 못 하고 속앓이만 한 것 같았다.

“권항필을 내게 보내게. 내일부터는 내가 데리고 다니겠네.”

어떻게 하면 돈을 빼먹을지 궁리만 하는 도움 안 되는 사람이었지만, 이 권항필이라는 자를 나중에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누구나 쉽게 와서 먹을 수 있는 국숫집이 되어야 했기에 이튿날부터 권항필과 삼식이를 데리고 한양의 사대문 인근을 이리저리 다니며 국수 가게 터를 찾기 시작했다.

권항필은 내가 데리고 다니자 이제야 자신을 알아준다며 공랑점포를 벗어난 것을 아주 기뻐했다.

“어라? 저자가 왜 혼자 있는 것이지. 상단주님 저기 저 쌍꺼풀이 찐한 양반이 보이십니까? 흰색 도포입니다.”

“보이네. 저자가 누구기에 그러는가?”

권항필은 자신의 인맥이 넓고, 식견이 있다는 것을 내게 어필하기 위해 국숫집에 온 양반을 아는 척했는데, 방금 가리킨 양반은 인상이 선해 보여 누구인지 궁금했다.

“저 사람이 애처가로 유명한 나안정이란 자입니다. 밥을 먹든 책을 읽든 무슨 일을 하든 마누라와 같이하기로 유명한 자이지요. 저자가 어찌 유명해졌느냐면은 아 글쎄, 동문수학한 이들과 기방에 가는데, 마누라를 데리고 기방에 갔지 뭡니까.”

“기방에 마누라를 데리고 갔다고?”

“네. 다른 이들이 기녀들과 술을 마시며 풍류를 즐길 때 기방까지 마누라를 데리고 와 마누라하고만 놀았다고 해서 유명해진 자입니다.”

“허허. 기방까지 가며 마누라를 데리고 갔다고 하니 확실히 애처가로구만.”

나안정이란 자에 대해 이야길 하고 있으니 그도 우리를 보았는지 다가왔다.

“전 제조님이 맞는지요? 하나 물어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춘봉 가패 이후에 여인들을 위한 가패를 만드셨듯이 여인들을 위한 국숫집은 언제 문을 여는지요? 마누라가 금국수를 먹어 보고 싶어 하는데, 이리 번잡한 상황이다 보니 마누라를 데리고 올 수가 없습니다.”

애처가란 나안정의 말에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국숫집을 오픈했을 때도 장옷을 뒤집어쓴 여자들이 이리저리 많이 돌아다니길래, 이 근처에 방물점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었다.

하지만 나안정의 이야길 듣고 보니 그제야 여인네들이 국수를 먹고 싶어 왔지만, 남정네들만 가득 하자 먹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들에 대한 배려를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채월이 덕분에 신분에 따른 자리를 준비했는데, 성별에 대한 자리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저 여자도 와서 자리에 앉아 먹으면 된다고 하는 현대의 생각만 했고, 여자가 다른 이들이 다 보는 데서 뭘 먹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는 시대라는 걸 잊고 있었다.

진짜 국수 한 그릇을 파는데도 규범에 따라 신분과 성별을 따져 준비할 것이 많다 보니 조선 시대에는 요식업을 시작하는 것 자체에 진입장벽이 만들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안타깝게도 여인들만을 위한 국숫집은 아직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소이다.”

“그렇소이까. 이른 아침 시간이라도 자리가 나면 마누라와 같이 와서 먹으면 될 터인데, 아침부터 이리 사람이 많으니 여인네들이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인네를 위한 국숫집도 만들지 않을까 기대한 것인데. 지금은 방도가 없겠군요.”

“집에서 국수를 해 먹을 수 있게 건 국수를 팔기도 하는데, 저걸 사가서 집에서 해 먹는 것은 어떻소이까?”

“이미 해 먹어 보았습니다. 헌데, 춘봉 국수에서 먹던 그 맛이 안 나더이다. 국숫집에서 먹은 맛과 집에서 먹은 맛이 너무 다르니 한계가 있었소이다. 일단 육수부터 차이가 나는지라...”

사실 집에서 개인이 해 먹는 음식과 업장에서 판매하는 음식은 준비되는 재료나 기교가 다르기에 맛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나안정의 집안이 양반이라 부엌에 솜씨 좋은 어멈이 있다면 좀 다르겠지만,

일단 건 국수라는 것이 처음 조선에 선보이는 것이라 기본적인 조리법도 다를 수가 있었다.

이런 문제 때문인지 생각보다 건국수의 판매량도 좋지 못했었다.

문경에서 했던 것처럼 국수를 맛있게 만들어 먹는 방법이 퍼져야 건국수의 판매도 좋아질 것 같았고, 여인네들의 아쉬움도 줄어들 것 같았다.

“흠. 그럼 방도를 만들어 봅시다. 삼식아 진기야 주변 민가에 방을 빌려줄 수 있는지를 물어보거라. 부부이니 한방에서 먹어도 되겠지요?”

“하하하. 물론입니다. 따로 방을 얻어 차려 준다니 마누라도 기뻐할 겁니다.”

나안정은 마누라와 같이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이렇듯 여인네들이 먹는 모습을 외간 남자가 못 보게 할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라 국숫집 인근 양민들의 집을 임시로 빌려 거기서 먹게 하면 여인네들도 국수를 즐길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가게를 전체적으로 보니 사람 인원에 비해 다들 독상으로 혼자 앉아 먹다 보니 공간의 활용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권항필 자네는 국수를 먹어 봤나? 만약에 말일세 국수를 먹는데 독상에 앉지 못하고, 다른 이들과 겸상을 해야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나? 다른 이들과 겸상을 하겠나? 아니면 안 먹고 말겠나?”

“허허. 왜 겸상을 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친아비와 아들도 겸상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법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국수가 먹고 싶다고 한들 겸상하라고 한다면 먹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양반들은 그렇겠지? 하지만, 저기 보게나 평민들은 길게 늘어선 탁자에 줄줄이 앉아서 겸상하며 먹고 있지 않은가.”

“신분이 다르지 않습니까? 신분이! 저들이야 경전을 읽어본 적이 없으니 그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일 뿐입니다. 저들도 경전을 읽고, 겸상을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란 것을 알게 된다면 저리 먹지 않을 것입니다.”

“경전이라 도대체 어느 경전에 겸상이 부끄러운 행동이라고 나와 있는 건가?”

“그것이... 아니, 제조영감은 진짜 모르시면서 하시는 말입니까? 공교(孔敎)께선 신분의 존비와 인애에 따라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의 길을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치국과 평천하에는 유교적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그 질서는 신분에 따라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자신의 분수에 맞게 행동하라는 것이 담겨 있사옵니다.”

“그래. 그 신분과 분수에 맞게 행동하는 것에 겸상이 부끄러운 것이라고 들어가 있는 것인가?”

“당연하지요. 그 신분과 분수에 맞춰 밥상을 받는 것 또한 유교적 질서이옵니다. 왕이 상을 받은 이후 신하가 상을 받는 것이 치국을 위한 당연한 유교적 질서인 것입니다. 신하가 존귀한 왕보다 먼저 상을 받는 것은 역천(逆天)이옵니다. 그렇기에 신분이 높은 이가 숟가락을 든 이후에 낮은 이들이 숟가락을 들 수 있는 것이 온대, 그런 유교적 질서를 무시하고 분수에 어긋나는 겸상을 하는 것이니 경전을 읽은 선비로서 그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권항필의 말은 결국 존귀한 윗사람, 서열 높은 이가 밥상을 먼저 받고, 밥을 먼저 먹어야 하기에 독상이 당연하며, 겸상을 하게 되면 그 신분, 반상(班常)의 서열이 무너질 수 있으니 겸상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의 경우처럼 그 서열의 높낮이가 확연히 날 때는 겸상해도 괜찮다고 하지만, 지체가 높은 집에서는 그런 조손간의 겸상도 법도에 어긋난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유교 서열의 붕괴.

단순한 장유유서(長幼有序) 말고도 실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먹는 것에서 서열이 구분되지 않고 없어지게 된다면 왕을 정점으로 하는 유교적 서열 신분제 또한 무너진다고 보는 것이 유교에서 겸상을 금지하는 이유였다.

그리고 그런 유교적 교리화가 권항필의 예처럼 기본 마인드로 탑재가 되어 있었으니 모든 양반을 다 때려죽이지 않는 한 바꿀 수가 없는 것이었다.

실제 조선에서 독상이 없어지고 겸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 나온 시대는 1930년대 일제 치하 시기부터였다.

당시 1936년 동아일보에서는 한 상에서 가족들이 모여앉아 화기애애한 식사를 하자며 캠페인을 벌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겸상에 대한 기록이자 사회 캠페인이었다.

가족들이 모두 같이 먹으니 식욕이 증진되고 독상에서 남겨지는 반찬도 다 같이 먹기에 잔반 처리에 편하다고 이득이 많은 겸상을 하자는 캠페인을 언론사에서 한 것이었다.

물론 이 시기의 캠페인은 일본의 자원 수탈이 극심했던 시기였던 때라 독상으로 인한 자원의 낭비를 줄여 군수물자를 더 늘리기 위한 캠페인의 일환이긴 했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며 물자 부족이 심각해지자 자연스레 독상이 없어지고, 겸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생활로 굳어지게 된 것인데, 지금 조선에서 겸상을 하자고 주장을 펼치면 반상의 도리를 헝클어트리는 잡놈이라고 탄핵을 당할지도 몰랐다.

시대와 사회가 겸상을 받아들일 수 없는 시대와 사회였다.

“도련님. 저쪽 집에서 방을 빌려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방이 작아 소반 탁자가 하나밖에 들어가지 않는데 어찌할까요?”

“나는 괜찮네. 괜찮아. 내 마누라와는 소반으로 겸상해도 되네. 어서 가세나. 그래야 마누라를 부르지.”

얼른 마누라를 부르겠다고 앞장서는 애처가 나안정을 보고 있으니 독상을 없애고 겸상을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이 보였다.

“커플 메뉴, 아니, 가족 국수를 만들어야겠구나.”

원종은 그날 저녁 채월이와 머리를 맞대어 가족 국수를 만들었는데, 일반적인 크기의 국수 두 그릇과 아이들을 위한 작은 국수 두 개가 세트로 나가는 것이었다.

물론 먹는 장소는 오늘 빌린 양민의 집에서 다 같이 겸상해서 먹을 수밖에 없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렇게 해두면 국수를 먹고 싶어 하는 여인네들을 위해 남편이나 형제·자매들과 같이 오게 될 것이고, 방이 좁다 보니 한 상에서 강제로 겸상을 하게 만들어 가족 간에는 겸상해도 괜찮다는 그런 의식을 심어주려 했다.

당장은 이런 가족 국수로 겸상에 대한 의식이나 저변이 바뀌지 않겠지만, 훗날 겸상에 대한 문제가 불거졌을 때 춘봉 국수에서부터 가족 간에 겸상을 했다는 전례가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하나씩 용인되다 보면 유교적 신분제를 위한 독상도 전쟁이나 물자 부족 없이 겸상이 될 수 있을 터였다.

***

“도련님. 송상의 김만춘 총대방이 뵙자고 하는데 어찌할까요?”

“들어오라 하게.”

사행단에 관련한 일인가 싶어 들게 했는데, 김만춘은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마포 나루에서 돈을 벌어 부자로 불리는 최부자 최권영이란 자도 함께 온 것이었다.

“무슨 일로 같이 온 것인가?”

사행단의 일 때문에 온 것이 아닌 것 같아 물었다.

“제조 어른 소생도 국숫집이라는 것을 해도 되려는지요?”

< 181. 독상. > 끝

작가의말

인터넷에 보시면 중종 때 아비와 아들이 겸상하다 밥그릇으로 아비를 때려죽였지만, 겸상했다고 형벌을 봐주었다는 정보가 나돕니다.

아비가 무식해서 겸상했으니 그 형벌을 감해줄 만큼 조선시대에는 겸상을 나쁘게 봤다고 하는 자료입니다.

하지만 이 자료는 잘못된 정보입니다.

돌고 있는 자료는 2005년에 나온 엽기조선왕조실록이라는 책에 나와 있는 이야기인데,오류가 있습니다.

돌아다니는 정보처럼 실제로는 중종과 신하가 주고받는 대화 자체도 아예 없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아비를 밥그릇으로 때려죽인 것이 아니라, 밥 먹던 그릇으로 아비를 때린 것이 전부입니다.

죽이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아비를 때렸다는 것을 안 이웃들이 관아에 고변해 관에서는 강상죄(삼강 오상(三綱五常)의 인륜을 어긴 죄)를 물어 아들을 사형에 처하게 했는데, 당시 황해도 감사 김정국은 강상죄를 저질렀지만, 삼강오륜을 배우지 못해 삼강오상을 어기는 것이 죄인지를 알지 못했으니 감형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평민들에게 그런 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 못한 위정자들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라고 그 형벌을 감해주었다는 것이 정확한 팩트입니다.

겸상했다고 때려죽여도 형벌을 감해 준다는 것이 아닙니다요.

이후 황해도 감사였던 김정국은 이러한 죄를 죄로 알지 못하는 평민들을 위해 성리대전절요, 경민편 같은 책을 써서 평민들에게 무엇을 하면 죄가 되는지를 알려주려 했는데, 역시나 김정국도 양반인지라 그러한 법률이 평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책도 한자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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