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148화 (148/327)

148. 어구를 만들다. (3)

대게와 감.

아니 게와 감이라고 하면 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나 요리를 공부한 사람이면 바로 떠올리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바로 조선의 20대 왕인 경종의 독살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와병 중이던 경종이 게장으로 식사를 한 후 단감을 후식으로 먹었는데, 다음 날부터 복통과 설사에 시달리다 며칠 만에 죽었다는 이야기인데, 게와 감이 만나 독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현대 한국에서 나오는 거의 모든 음식 조리서에 이 이야기가 들어가 있고, 이 둘은 궁합이 나쁜 음식이니 절대 같이 먹지 말라고 쓰여 있다.

감에 들어 있는 타닌(Tannin)성분이 게의 껍데기를 딱딱하게 만들어 게 껍데기가 뱃속에서 소화되지 않고, 위장병을 일으킨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사실 건강한 사람은 게와 감을 같이 먹어도 별 상관이 없다.

음식을 소화시키는 위액은 게장의 껍질 정도는 그냥 녹여 버릴 정도로 강하며, 그 게 껍데기도 치아로 씹어서 삼키기에 타닌으로 딱딱해져 봤자 돼지 오돌뼈보다도 연했다.

하지만, 시대가 문제였다.

단순한 감기, 설사로도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시대였기에 게와 감을 같이 먹고 배앓이를 하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시대라는 게 문제였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만에 하나가 있으므로 영덕의 유지인 사장어른에게 미리 일러두는 것이었다.

“의학서에 보면 게와 감을 함께 먹으면 위장에서 서로 엉겨 붙어 돌덩이가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그 돌덩이가 속을 막게 되면 사람이 죽게 되니 게를 먹을 때는 감을 절대 먹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해 주시면 됩니다.”

“오호, 대게도 가을부터 올라오고, 감도 가을에 익어서 그 기운이 뻗치니 서로의 기운이 강해서 문제가 생기는 거구먼. 알았네. 대게를 먹을 때는 감을 먹지 않아야 한다고 꼭 알리겠네.”

***

“도련님. 청남이가 도련님을 뵙고 싶다고 하는데 어찌할까요?”

“청남이? 그게 누구지?”

“그 삼으로 만든 그물을 처음 받은 청손이의 아들입니다요.”

“아, 그래 들이거라.”

청남이는 원종을 보자마자 꾸벅 절을 하며 부복했는데, 얼굴도 마주 보지 않고 이야기를 쏟아 냈다.

“저기... 나리께서 경상우수영에서 배를 받아 상선을 운영하실 것이라 들었사옵니다. 그 배에 탈 선원도 구하신다고 들었는데, 선원이 되는 특별한 조건이 있사옵니까?”

“조건이야 배를 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 조건이지. 너는 이미 어부이니 그건 문제가 없겠구만. 헌데, 이제 새로운 그물이 생겨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을 터인데, 왜 선원이 되고 싶은가? 그리고, 같이 고기를 잡던 아들이 가면 아비는 어찌하고?”

“저를 대신해 동생이 아버지와 고기를 잡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부도 신량역천(身良役賤)의 신분이라 계속 물 위에서 살아야 한다면 팔도를 돌아다니는 상선을 타보고 싶습니다.”

이야길 듣고 보니 어부를 이 시대에는 ‘생선간’이라 불렀는데, 신량역천의 대표적인 직종이었다.

원래 신분은 양민이지만, 종사하는 일이 천한 일이다 보니 천민과 양민의 중간에 위치하는 신분이었다.

조졸(뱃사공), 수능군(묘지기), 생선간(어부), 목자간(목축인), 봉화간(봉화 올리는 사람), 철간(광부), 염간(소금 굽는 사람), 화척(도살꾼), 재인(광대) 이 신량역천의 신분이었는데, 조선 후기로 가면서 의금부의 나장, 조운창의 조졸, 역참의 역보, 수영의 수군, 사옹원의 도공까지도 신량역천의 신분이 되어 대를 이어 일을 해야 했다.

“신량역천의 신분이지만, 나리를 따라가면 그 굴레를 벗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도 있습니다.”

개인의 힘으로는 신량역천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드니 양반의 밑으로 들어가 그 굴레를 벗어나겠다는 것이었다.

당당하게 신분을 벗어나 성공하고 싶다고 이야길 하는 청남이를 보니 이 친구는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 뛰어들 줄 아는 능동적인 인재라는 게 느껴졌다.

조선의 하층민 대부분은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그 신분에 맞게 그냥 살며 안주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스스로 판단을 내려 여기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원종의 입장에서는 어부 출신으로 배에 대해 거부감이 없는 젊은 선원을 구하게 된 것이니 나쁠 것이 없었다.

“좋다. 널 선원으로 받아주마. 내일 아비와 함께 찾아오거라. 그리고, 선원이 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있으면 더 데리고 오거라.”

“네. 감사합니다.”

청남이가 이제 갓 성인이 된 16살인지라 그 아비가 반대하지 않을까 싶어 다음 날 같이 오라고 한 것이었는데, 청손이 말고도 다른 어부 세 명이 자식들을 데리고 왔다.

청남이 또래의 아이들은 청남이가 어떻게 꼬드겼는지 다들 선원이 되고 싶어 했고, 그 아비들도 자식들을 선원으로 받아 달라고, 대게나 생선을 들고 온 것이었다.

“사실 몇 명이 더 있었는데, 그 애들은 외동이거나 동생이 너무 어려서 오지 못했습니다.”

아들들과 함께 온 어부들도 다 큰 자식들이 선원이 되는 것을 원했는데, 아무리 신량역천을 벗어나는 일이라고는 하나 의외였다.

“어부나 선원이나 배 밑이 저승이라고 해서 언제 물에 빠져 죽을지 모르는데, 그래도 큰 배지 않습니까요. 조각배를 타고 나가 고기 잡다 죽는 거보다는 큰 배를 타는 것이 더 오래 살지 않겠습니까요?”

“맞슴더. 우리 집이 4형제였는데, 지금 남은 건 저 밖에 없슴니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물에 빠져 죽는 팔자라면 큰 배를 타고 돌아댕기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꺼.”

“영덕 여기서 비린내 나는 고기만 잡는 거보다는 동래도 가보고, 한양도 가보고 할 수 있는 상선을 타는 게 더 좋은거 아니겠습니까요.”

아무리 새 그물이 생기고, 변화의 기회가 왔다지만, 결국 영덕의 어부들은 물에 빠져 죽기 전까지는 조각배에 몸을 기대어 생선을 잡아야 할 팔자였다.

물 위에 떠 있는 위험은 같지만, 그래도 어부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에 자식들을 보내고 싶어하는 아비들의 속마음을 알게 되니 신량역천이고 사농공상이고 하는 신분제가 역겨워졌다.

노예는 아니지만, 노예처럼 그 일에 묶여 자기 의지 없이 평생 똑같은 일만 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을 알게 되니 가슴이 답답했다.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에 들어가 있는 직업선택의 자유라는 것이 왜 국민기본권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내 권한으로 상선에 이들을 태워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고 싶었다.

“네 명 모두 선원으로 받아주겠네. 내일 우수영(右水營)으로 출발할 것이니 오늘은 가족과 보내고 내일 아침 일찍 오게나.”

***

“내 김부사댁 부엌어멈에게 듣기로는 문경 전씨 집안의 삼형제가 모두 높은 벼슬을 하고 있고, 한양에서 크게 상단을 하고 있다고 하더구나. 그러니 저 도련님만 잘 모신다면 네 신분이 다시 양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비린내 나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래 형. 아버지를 도와서 물고기 잡는 건 내가 할 테니깐 형은 큰 배를 타고 한양도 가보고 천자가 있다는 명나라도 가보고 해봐. 물론, 올 때 선물 사 오는 거 잊지 말고.”

“이놈아 아직 배는 구경도 못 했는데, 벌써 명나라 선물 타령이냐.”

“형은 이제 신량역천을 벗어났으니 내게 그 정도 선물은 해야지.”

청남이는 자신을 대신해 아버지를 돕겠다는 청솔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 상선을 타고 자릴 잡으면 그때는 우리 가족을 다 물질 안 해도 살 수 있게 할 테니깐 어떻게든 안전하게 고기 잡고 하세요. 바람이 좀 세게 부는 날에는 집에서 쉬고요. 알았죠?”

“형. 그건 나만 믿어. 바람 많이 부는 날은 내가 아프다고 할테니깐. 헤헤.”

“그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티거라. 꽃피는 봄날 산으로 놀러 갈 수 있게 만들어 줄 테니.”

“형도 왜구 놈들 조심하고. 건강해야 해.”

청남이는 봇짐을 싸며 가족들과 속 깊은 이야기를 했고, 어떻게든 성공하여 가족들에게 씌어진 어부라는 직업을 버릴 수 있길 빌었다.

이런 다짐을 하는 영덕의 젊은 어부는 아직까진 4명이었지만, 얼마나 그 숫자가 늘어날지는 알 수 없었다.

***

“도련님. 이 다시마 초절임은 씹을수록 맛이 우러나는데요. 백사장에서 주운 다시마가 이런 주전부리가 될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요.”

영덕을 떠나 해안 길로 쭉 내려오면서 다들 새끼손가락 두 마디만 하게 자른 다시마를 씹으며 걷고 있었다.

햇볕에 말린 다시마를 잘게 썰어 식초에 끓여서 졸이는데, 식초가 졸여지며 다시마에 흡수되는 것이 전부인 레시피였다.

물론, 그렇게 식초를 듬뿍 머금은 다시마를 다시 말려 종이에 싸면 이렇게 걸어갈 때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주전부리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점심때가 되어 주먹밥처럼 가져온 밥을 먹을 때는 소금을 넣어 볶은 미역 줄기가 반찬이었다.

“미역을 먹다 보니 생각나는데, 장인어른께 듣기로는 울산에 이 미역과 다시마가 나는 바위가 있다고 하더구나. 그 바위들을 예전에는 공전(公田)처럼 여겨 바위를 신하들에게 하사했다고 하던데 아느냐?”

“아,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고려 태조가 건국의 공으로 미역과 다시마가 나는 바위를 내렸다는 건 들어봤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려가며 한번 들려볼 생각입니다. 얼마나 미역이 많이 나기에 그렇게 밭으로 취급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고려의 왕건이 박윤웅이란 신하에게 울산 지역을 식읍으로 내리며 미역이 나는 바위 12개도 공전처럼 하사했는데, 이게 자연적으로 형성된 미역밭이라 어떤 구조와 원리인지가 궁금했다.

원리만 파악한다면 바다 중간이 아닌 해변의 얇은 물에서 미역, 다시마를 양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포항까지 하루 만에 가지 못했기에 바닷가에 접한 마을에 하루 묶었는데, 마을의 어른이 저녁 요기나 하라고 말린 생선을 이십여 마리를 주었다.

“도련님. 이 생선은 넙치입니까요? 광어입니까요?”

생선을 받은 희재는 생선의 눈이 한쪽으로 쏠려있자 이게 어떤 생선인지 궁금해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청남이가 나섰다.

“이건 기름가자미라고 하는 것이 온대, 청어 다음으로 이 근방에서 흔하게 잡히는 생선입니다. 1년 내내 잡히고, 썩거나 상하더라도 파리가 잘 끼지 않아 부엌에서 말려서 구워 먹습니다.”

“이름이 기름가자미라고?”

“네. 이 녀석을 잡아 올리면 등쪽에서 미끌거리는 물을 내는데, 그것 때문에 기름을 바른 것 같다고 기름가자미라고 불립니다.”

어부답게 설명하니 청남이를 잘 들인 것 같았다.

“미주구리구나. 나름 맛있지.”

사실 기름가자미나, 갈가자미, 물가자미 등등 비슷하게 생긴 여러 가자미가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가자미들을 다 구분하기가 사실 너무 힘들었다.

비슷하게 생긴 개체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냥 뭉텅 그려서 가자미라고 부르는 게 편했다.

“한양에서는 이 기름가자미를 미주구리라고 부릅니까요?”

“아니, 그냥 가자미로 부른다. 미주구리는 잘못 나온 말이다.”

원종은 어부인 청남이가 꼼꼼하게 물어보자 말을 얼버무렸는데, 영덕 포항 등지에서 쓰이는 미주구리라는 이름이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이 물가자미를 일컫는 미즈가레이(みずがれい)가 일제 치하를 거치며 미주구리로 조선인들에게 정착되었는데, 미즈(みず)는 물, 가레이(がれい)는 가자미를 뜻하는 말이었다.

미주구리가 일본말로 물가자미이지만, 영덕, 포항일대에서는 기름가자미든 갈가자미든 비슷하게 생긴 작은 놈들은 그냥 다 미주구리로 불렸다.

어떻게 보면 구분이 어려운 여러 종류의 가자미를 뭉텅 그려서 미주구리라고 부르는 게 더 알맞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일제 치하에서 우리 동해의 싱싱한 해산물을 징발해가며 남겨진 이름이었기에 무턱대고 쓰기엔 기분이 좀 그래다.

나중에 왜놈들에게 먹혀 또다시 틀린 이름을 맞는 이름처럼 쓰는 일이 없게 만들려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고 보면 왜관이 이 시기에는 진해와 울산, 부산에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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