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144화 (144/327)

144. 잡어 중 최고! (1)

“인삼?”

“네. 초피와 가죽을 팔러 가니 우리가 압록강 근처에서 왔다는 걸 알고는 인삼을 가져오면 상태에 따라 한 근(약 600g)에 천은 350냥에서 500냥까지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350냥? 한 근에?”

약방에서 본 인삼 한뿌리가 얼마의 무게인지는 몰라도 1근이면 인삼 3~4뿌리는 있어야 할 것 같았는데, 그 인삼 세 뿌리가 천은 350냥이라는 말에 원길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350냥도 최소 가격이라 했으니 인삼이 가지는 가치에 놀랐다.

“그리고, 인삼을 캐서 들고 오다 보면 상하기도 하니 인삼으로 만드는 홍삼이란 것을 가져오면 돈을 더 쳐주기로 했습니다. 그 홍삼이라는 것은 조선에서도 구하기가 어려운 것입니까?”

“홍삼? 그건 나도 이름만 들어보았기에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구나.”

“목사님 같은 조선의 고위 관리도 보지 못했다면 그 홍삼이라는 것이 정말 귀한 것이겠군요. 뭐, 하긴 그러니 한 근에 그리 돈을 주는 것이겠지요.”

무찰라타의 아들인 무철호는 고관인 전원길조차 홍삼이라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말에 홍삼으로 돈 벌 생각을 접었다.

하지만, 무철호와는 반대로 원길은 인삼 한 근에 은 350냥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뭔가 이때까지 쌀 한 섬에도 아웅다웅하며 살아왔던 과거의 자신이 참으로 작게 느껴졌다.

본자기도 그렇고, 북경에 상행을 오길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넓은 만큼 거부도 많고, 돈을 물 쓰듯이 쓰는 이들이 많다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본자기를 만들었듯이 인삼으로 만든다는 홍삼도 왠지 원종이라면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믿음도 생겼다.

의주를 출발하기 전에 배를 가지러 부산포로 간다는 원종의 편지를 받았었는데, 언제 배를 가지고 의주로 올는지 궁금했다.

제대로 배를 움직일 수만 있다면 배를 타고 명나라와 교역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고, 남경의 상인들과 안면을 텄으니, 배를 타고 남경으로 내려가 재미를 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

“여기가 영덕이다. 그리고 저기 저 집이 내 처가다.”

안동을 떠난 지 삼 일째에 영덕에 도착했는데, 저 멀리 마을 넘어 파란 동해 바닷가가 보이자 감회가 새로웠다.

문경과 한양을 오가며 내륙의 환경은 익히 보았지만, 이 시대의 바닷가는 처음으로 보는 것이었다.

작은형의 처가에 도착하여 사장어른들께 인사를 드린 후 원상은 천자문 글씨를 받기 위해 집을 나섰고, 원종은 부엌어멈들에게 고사리 당면과 잡채를 만드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어멈들과 이야길 하다 보니 내가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그렇다면, 영덕에 대게가 많이 안 난다는 건가?”

“네. 도련님. 영덕에서 많이 나는 것은 청어(靑魚)이지 대게는 간혹가다 잡힙니다요.”

“허허. 그렇구만.”

영덕하면 대게가 기본이었기에 게 등껍질 볶음밥을 해 먹으려고 벼르고 있었다.

헌데, 기대와는 달리 영덕에선 대게가 잘나지 않는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게나 갑각류는 수심이 깊은 바닥을 기어 다니기에 낚시로 잡거나 게통발로 잡아야 했는데, 통발을 사용하려면 물에 뜨는 부표가 있어야 했다.

그런 부표는 스티로폼같이 물에 가라앉지 않는 소재가 있어야 했는데, 지금 시대에는 부표로 쓸만한 게 없었다.

우선은 이 시대의 어구(漁具)가 어떤지 확인하기 위해 포구(浦口)로 나갔다. 하지만, 포구도 내 생각과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었다.

영덕이 나름대로 이름있는 곳이었기에 고기잡이하는 수십 척의 배가 드나들며 고기 손질하는 아낙들이 포구에 즐비할 거라 생각했는데, 고기 잡는 배가 그렇게 많지도 않았고, 잡아 온 고기들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고깃배가 채 50척도 되지 않았고, 그 크기도 채 10명이 타기 힘들 정도로 작은 배였기에 해산물로 유명한 영덕이 여기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배에 실려 있는 어구들도 짚으로 만들어진 그물들이었는데, 현대의 합성 인조 실로 만들어진 그물에 비교하면 너무 두꺼웠다.

짚으로 만들었기에 터지지 않게 두껍게 꼬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런 짚으로 만든 그물로 과연 제대로 고기가 잡힐는지 걱정이 되었다.

“이보게 그물을 갈피(葛皮)나 마(麻 삼베)로 짠 것은 안 쓰는가?”

짚을 꼬고 있는 이들에게 물으니 다들 양반이라고 눈치를 보다 한 노인이 나서서 대답했다.

“칡 껍질인 갈피는 꼬는 것이 힘든데, 쓸 수 있는 기간은 짚으로 만든 그물과 비슷해서 그냥 짚으로 만드는 것이 더 편합니다. 그리고, 삼베로 그물을 짜려고 하다가는 집안 기둥이 날아갑니다요.”

“삼베 그물을 사용하지 않는 건 비싸서 못쓴다는 것이로군.”

“네. 그렇습죠.”

노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물 같은 어구가 원시적이라 제대로 어획을 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사실 농업도 조선 중기 남부에서 이앙법이 보급되기 전에는 수확량이 적었었다. 벼농사의 이앙법과 같이 산업 판도를 바꿀만한 어구가 보급되어야 어획량을 늘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원 역사대로였다면 1800년대 후반 일본이 외국에서 생산된 합성 인조 실을 들여오고, 그걸로 그물을 만들어 연근해 어족자원을 싹쓸이할 터였다.

이후 조선도 그런 그물이 들어왔지만, 이미 나라가 일제 치하에 들어가면서 제대로 된 조업을 하지 못했었다.

“양반나리. 혹시라도 고기잡이를 해보려고 이리 물어보는 거라면, 생각을 아예 마십시오. 요즘은 좀 뜸하다고는 하나, 왜구 놈들이 언제 고기잡이배를 습격할지 모릅니다요. 괜히 풍류를 즐기려고 하시다 큰 변을 당하십니다요.”

“왜구? 요즘도 왜구가 많은가? 세종대왕 때 대마도를 정벌한 이후 왜구가 거의 없어졌다고 하던데.”

“많이 없어지긴 했으나, 여전히 있습니다요. 예전과 다르게 이제는 내륙으로 깊게 들어오지 않고, 바닷가 포구만 털어가는 왜구들이라 그렇게 크게 소문이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요.”

“그렇군. 여전히 왜구 놈들이 설치는군. 저녁으로 먹게 오늘 나가서 잡은 생선이 있으면 좀 팔게.”

“아이고, 부사댁에 오신 손님인데, 어떻게 값을 받겠습니까요. 그냥 가지고 가시면 됩니다요.”

작은형의 처가에 손님이 왔다는 게 다 알려진 것인지 돈도 받지 않고, 청어 세 마리를 새끼줄에 묶어 주었다.

“청어가 많이 잡힌다고 하던데, 이렇게 창자를 빼서 말려서 두고두고 먹는 건가?”

“그렇습죠. 잔가시가 많아서 먹기가 힘이 들어도 청어만큼 잡히는 게 없기에 말려서 두고두고 먹습니다요.”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청어가 바로 과메기가 되는 것이었다.

현대 한국에서는 청어가 이렇게 많이 잡히지 않아, 청어 대신 꽁치로 과메기를 만들어 먹지만, 지금은 청어가 많이 잡히는 시대였기에 청어 과메기를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포구 구경을 마치고 돌아오며 보니 짧게 펼쳐진 백사장에 다시마가 밀려 들어와 있었는데, 대충 몇 장을 주웠다.

“도련님. 물에 쓸려 온 것인데, 이것도 먹을 수 있는 것입니까요?”

희재는 내가 백사장에 밀려온 것들을 줍고 있자, 이게 먹을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해했다.

“물론이지. 바닷속에서 웃자라 밀려 나온 것이니 다 먹을 수 있다. 다들 다시마를 줍거라. 저건 미역이니 따로 챙기고. 이걸로 내가 맛있는 주전부리를 만들어 주마.”

주전부리를 만들어 주겠다는 말에 금산이나 희재는 물론이고 아직 어린 진기도 다시마를 주웠다.

여진족 출신인 김고도개는 미끈거리고, 바다 비린내가 나는 이걸 먹는다는 말이 의심스러웠지만, 양손 가득 챙겨 들었다.

주워온 다시마는 말리기 위해 밖에 널었고, 미역은 토막을 쳐 국을 끓였는데, 생미역으로 끓이는 미역국은 훨씬 더 깊은 맛이 났다.

“청어는 굽거나 간장을 넣은 찜을 하는 것이 기본인데 뭘 하려는 게냐?”

“초절임을 해드리겠습니다. 이제까지 늘 그렇게 굽거나 찜으로 먹어왔으니 달리 먹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처음에는 원종도 어부에게 받아온 청어를 작형 말처럼 구이로 해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청어를 만져보니 살이 무르지 않고 아직도 탱탱하여 날것으로 먹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청어의 비늘을 제거하고, 머리와 내장, 배지느러미까지 제거한 이후 청어의 뱃속 안 검은 막도 꼼꼼하게 씻어 주었다.

그러곤, 칼로 청어의 등 척추 부위와 배 부위를 미리 따주고, 꼬리 부위에 칼집을 넣어 포를 뜨듯이 칼로 비스듬히 살을 들어 올렸다.

그 들려진 살을 손으로 잡고 강하게 잡아 뜯었다.

[후두드득~]

미리 따주었던 칼집을 따라 살이 뜯겨져 나왔는데, 청어를 먹을 때 가장 귀찮은 잔가시들이 살과 분리되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오, 그렇게 살을 뜯으면 잔가시들이 뼈에 그대로 있는 거구나.”

요리를 지켜보던 작은 형은 물론이고, 부엌어멈들도 이렇게 청어를 손질하는 것을 처음 본다며 신기해했다.

반대쪽 살도 칼집을 먼저 넣고, 꼬리 살을 들어 뜯어내자 청어를 먹기 힘들게 만들었던 잔가시들만 남기고 아주 깔끔하게 살이 분리되었다.

“이렇게 해도 잔가시가 남아 있지만, 그래도 9할 이상의 잔가시가 제거되었기에 먹기 편할 것입니다.”

손질된 청어살에는 앞뒤로 고운 소금을 발라 체에 두고 물이 빠지길 30분 정도 기다렸다.

그러곤 다시 소금기를 물로 씻었는데, 귀한 소금을 이렇게 씻겨 낸다고 혀 차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 소금으로 수분과 잡내를 빼는 과정이 중요한데, 이렇게 소금으로 물을 빼줘야 살도 좀 더 쫄깃쫄깃해지고 비릿한 피 냄새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을 알려준다고 해도 소금이 청어보다 비싸다 보니 이런 조리법이 널리 알려지긴 힘들 것 같았다.

종친들이 잡고 있는 소금도 얼른 천일염을 만들어서 혁파해야 했다.

씻어서 물기가 많은 청어 살의 물기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키친타올 같은 종이가 필요했는데, 거저 주는 값싼 청어를 먹기 위해 소금에 이어 종이를 쓴다고 하면 욕 들을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최대한 물기를 털어내곤 그대로 그릇에 담아 식초를 부었다.

20분이 지나 청어살을 뒤집어 주니 청어살이 식초에 하얗게 익어가는 게 보였다.

20분 후 식초에서 청어 살을 꺼내었는데, 해동지나 키친타올로 식초를 제거한 후 냉장고에 넣어 식초가 살 깊숙이 스며들도록 숙성시켜야 했지만, 종이는 물론이고 냉장고를 쓸 수가 없었기에 깨끗한 천으로 식초 물을 닦아주는 게 전부였다.

식초에 연해진 청어 살의 껍질을 손으로 잡아 뜯었는데, 식초에 껍질이 녹아 힘을 쓸 필요도 없이 그냥 벗겨져 내렸다.

청어 살을 손가락으로 살살 눌러 아직 남은 가시를 뽑아 주었고, 제거가 힘든 내장을 덮고 있는 갈비 부위의 잔가시는 칼질해서 잘라주었다.

이후 전체적으로 다시 한번 칼질을 넣어 십(十)자 칼집이 되게 다져주었다.

“그렇게 가시를 제거했는데도 아직도 있는 것이냐?”

작은형은 잔가시가 지겹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네. 이 잔가시 때문에 사람들이 청어를 먹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원종은 칼질을 다시 한번 더 넣었고, 이후 먹기 좋게 썰었는데, 여러 번의 칼질 때문인지 청어의 고기향이 식초와 섞여 코까지 올라왔다.

청어의 한쪽 살 한 덩이에서 8조각의 회가 나왔는데, 간장에 살짝 찍고 그 위에 잘게 채를 썬 생강 절임을 올렸다.

그러곤 지켜보고 있던 작은 형과 일행들에게도 한 조각씩 먹이고 나도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비릿한 생선 향이 날 것 같았지만, 초 생강 절임의 상쾌한 생강 향이 먼저 입안을 채웠다.

한번 씹으니, 생선회 특유의 탱글탱글한 식감이 입안을 즐겁게 만들어 주었고, 잔가시가 느껴졌지만 잘게 썰려 있었기에 이게 오히려 청어의 식감과 맛을 배가시키는 것 같았다.

이 재미있는 식감과 함께 식초 향과 간장 맛이 청어의 맛을 들어 올려주고 있었다.

‘풍부한 기름기가 정말 맛있구나.’

조선 시대로 온 이후 원종이 처음 먹어 보는 회 맛은 가을의 맛이 물씬 묻어있었다.

*

[작가의 말]

금과 은이 24k, 18k, 15k가 있었듯이 옛날에도 금이나 은의 함량에 따라 등급을 정해서 거래를 했습니다.

조선에서는 천(天)・지(地)・현(玄)・황(黃) 4등급으로 구분하여 천은의 가치를 가장 높게 취급했으며 주로 명에서 받은 것이나 조선에서 만든 은을 천은으로 취급했습니다.

왜은은 현, 황 등급으로 은 함량이 낮은 것으로 대우했는데, 조선 후기에 왜은의 품질을 문제 삼아 왜은을 받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때 일본에선 따로 인삼을 사기 위한 인삼대왕고은(人蔘代往古銀)이란 은 함량이 높은 은을 따로 만들어 조선의 인삼을 수입해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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