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고향 음식. (1)
“네 저희는 조선에서 온 자들입니다.”
역관은 동창(東廠)에서 나온 사람이라는 말에 바로 허리가 굽어졌다.
원길도 동창에 대해 들은 게 있어 잘 알았다.
영락제가 만든 정보조직으로 말 그대로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가는 짐승도 못 가게 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다고 했다.
물론, 불알을 깐 내시들로 이루어졌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일로 공신 부인 댁에 온 것인지 물어도 되겠는가?”
“이번에 조선에서 왔기에 인사차 들린 것이옵니다.”
“인사차? 이 밤에 인사를 드리러 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괜히 의심스럽군.”
동창 위사의 말에 반박할 말이 없는 역관은 입이 굳어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낮에 오면 사람들의 눈이 있을 것 같아 밤에 온 것인데, 그것이 더 눈에 띄게 된 것 같았다.
“예전에 제가 만든 음식이 드시고 싶다 하시어 밤중에 오게 된 것입니다.”
원길은 의주에서 중국 상인들에게 배운 중국어로 답을 했다. 공신 부인의 저택에 온 것을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 없었기에 원길이 나서 예전에 만들어 드렸던 음식을 핑계로 대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하구료. 내 알기로 머리에 관을 쓰고 소매를 길게 입은 조선의 귀족은 직접 음식을 하는 일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안 그렇소?”
“조선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구랴. 그대의 말이 맞소. 하지만, 유일하게 예외가 있소이다. 바로 궐에서 일하는 남자 숙수들이오.”
“흠. 그렇다면 그대가 궐에서 일할 정도로 실력 좋은 숙수란 말이요? 얼굴을 보면 그리 나이가 있어 보이지 않는데.”
위사는 원길의 위아래를 살펴보았는데, 그런 눈길을 본 원길은 일이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믿지 못하겠다면, 요리하는 것을 직접 보여주겠소. 그러면 믿겠소?”
오히려 직접 요리하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강하게 나오는 원길을 보자 이젠 동창 위사들이 망설였다.
그런 그들의 옆으로 다른 이들이 나타났다. 비슷한 복장과 어깨를 움츠려 걷는 모습을 보니 그들도 환관인 듯싶었다.
“요리 솜씨가 좋아 공신 부인께 드릴 음식을 했다는데, 그게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건번이라고 하오. 견과류와 조청을 섞어 만든 요깃거리요.”
“건번?”
“그걸 그대가?”
“공신 부인께서 건번을 알려주었으니 맞겠군.”
원길이 건번이라는 이름을 대자 환관들은 잘 알고 있다는 듯 탄성를 뱉어냈다.
“그 건번이라면 나도 알고 있지. 궐에서 몇 번 먹어보았지. 그대가 진짜 그걸 만든 이라면 그 솜씨는 인정할 수 있지. 그리고...”
나중에 나타난 환관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는 원길에게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는데, 먼저 왔던 환관들에게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태감. 이일은 저희 서창(西廠)이 맡도록 양보해주십시오.”
“흠. 서창이 이리 나온다면, 약간 미심쩍은 부분이 있지만, 그쪽에 맡기도록 하지.”
동창 위사는 서창의 왕태감이 저자세로 나온 것이 신기한지 조선에서 왔다는 이를 넘겨주고 물러났다.
“두 분은 따라오시지요. 간단하게 물어 볼 것이 있소이다.”
우리가 도망치지 못하게 서창의 위사들이 앞뒤로 섰는데, 서창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영락제가 만든 황제 직속인 동창의 위세가 커지자 성화제가 그런 동창을 견제하기 위해 올초에 서창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만귀비가 만든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동창의 태감들이 황제가 아닌 만귀비의 지시를 잘 듣지 않자, 만귀비가 동창을 견제해야겠다며 서창을 만들어 자신이 데리고 있던 태감들로 만든 것이 서창이었다.
그런 서창의 태감들에게 둘러싸여 걷고 있으니 역관은 이미 혼이 나간 것처럼 입술이 파래졌다.
***
“한번 먹어 보시오.”
서창의 태감이 우리 앞으로 작은 그릇을 내어주었는데, 그 안에는 눈에 익은 것이 담겨있었다.
“공신 부인께서 견과류가 붙은 건번을 궐에 알려주어 다들 입이 심심할 때는 건번을 먹고 있소. 그대가 만든 것에 비해 어떻소?”
원길은 중국에서 만들어 먹는다는 건번이 신기하여 맛을 보았는데, 꿀에 견과류를 버무려 건번과 같이 볶은 제대로 만들어진 건번의 맛이 났다.
“제대로 만들었습니다. 이게 궐에서 유행하고 있다니 제가 다 기분이 좋습니다. 하하하.”
태감들도 먹는다는 건번을 보니 서창의 태감들이 나쁜 의도로 우리를 데리고 온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만. 이 견과류 건번을 직접 만드는 것은 공신 부인의 요리사들이 보았지만, 건번을 굽는 법은 다들 알지 못해 몇 개월이나 걸려서 만드는 법을 알아냈었다오.”
“아, 그때는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이라 제대로 알려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공신 부인댁에 음식 때문에 방문한 것이 맞구만.”
“그럼 저희는 이제 가봐도 되는 것입니까?”
공신 부인의 저택에 방문한 것에 대한 의혹이 풀렸으니 우리를 보내줘야 했지만, 서창의 태감들은 미적거리며 서로 눈치를 보았다.
“흠. 사실은 솜씨 좋은 그대가 필요해서 데리고 온 거요. 정말 궐에서 숙수로 일하는 정도의 실력이고 건번을 만들 정도로 뛰어나니 우리를 위해 요리를 하나 해주시오.”
음식을 위해 자신을 데리고 왔다는 걸 알게 되자, 원길은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이젠 칼자루를 원길이 잡은 것이었다.
“어떤 요리를 하면 되는 겁니까?”
“내 고향 음식인데... 우렁이 국수라고 들어봤나?”
“내 고향이기도 하지.”
“나도!”
“우렁이 국수요? 논이나 밭을 기어 다니는 달팽이 같은 그것 말입니까? 그게 고향 음식인 겁니까?”
“맞네. 우리는 호광성(湖廣城) 출신으로 요족(瑤族)이지.”
“호광성이면 중원에서도 가장 아래에 있는 곳 아닙니까? 거기서 어떻게 북경까지...”
“우리가 왜 태감이 되었겠나? 대등협(大藤峽) 민란 때 잡혀서 태감이 되었다네.”
“그래서 고향이 그리워 어릴 때 자주 먹던 우렁이 국수가 먹고 싶네. 우렁이 국수 좀 해주게.”
“우렁이 국수라면, 우렁이라는 재료가 흔치 않을 뿐이지 만들기는 쉽지 않습니까? 솜씨 좋은 숙수에게 만들라고 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맛이 다르더군. 아무리 솜씨가 뛰어난 숙수라고 해도 북경 출신이나 화북 출신들은 호광성의 그 맛을 모르더군.”
“그렇다면 호광성에 사람을 보내어서...”
“우리가 살던 고향은 초토화되어 살아남은 자들이 없어. 호광성 출신인 숙수를 구해도 우리와 같은 요족이 아닌 한족이나 다른 족이라 그 맛을 만들어 내지 못했네.”
“그렇다면 저는 조선인인데, 그 맛을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호광성은 이야기만 들었을 뿐인데.”
“그래서 한번 해달라고 하는 것이네. 웬만한 지역 출신의 숙수는 다 불러서 우렁이 국수를 만들게 했는데, 조선 출신 숙수는 처음이라 시켜보는 것이네.”
“흠. 그렇다면 한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은 그 먹었다는 우렁이 국수에 대해서 이야길 해주십시오. 언제 먹었고, 어느 시기에 어떻게 나왔다 하는 그런 이야기들 있잖습니까?”
원길은 4명의 태감에게 어릴 때 추수를 끝내고 처음 수확한 햅쌀을 갈아 쌀국수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우렁이의 속살이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신맛이 나는 죽순이 위에 올려졌는데, 식초를 뿌린 것이 아니라 삭힌 것 같은 그런 냄새가 났었네.”
“죽순을 삭혔다라... 그럼 특이한 냄새가 났습니까?”
“맞아. 시큼하면서 더운 여름에 나는 그런 냄새였어.”
태감들의 이야길 듣고 보니, 뭔가 이질적인 국수 같았다.
삭힌 음식을 올린 국수가 있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었다.
“우선 어떤 것인지 저도 좀 알아볼 터이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음식을 조리하는데, 도구도 있어야 하니 그걸 준비하여 여기로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 어느 분을 찾으면 되겠습니까?”
“나 왕직을 찾으면 될 것이오.”
다시 태감들에 이끌려 건물 밖으로 나왔는데, 역관이 지리를 알아보고는 여기가 바로 자금성이라고 했다.
둘 다, 무사히 자금성을 나왔다고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서거정에게 이야길 하니, 임기응변으로 잘 넘겼다고 이야길 했고, 한계희는 자신의 주장대로 공신 부인을 찾아갔다면 그게 다 동창과 서창을 통해 만귀비에게 알려졌을 거라는 생각에 두려워했다.
“그럼, 만귀비에게 먼저 가도록 합시다. 바로 출발하세.”
***
바로 그날 궁에 들어가기 위해 상행단이 줄을 섰는데, 서거정의 인맥과 우연히(?) 알게 된 서창의 왕직 태감 덕분에 그리 오래지 않아 만귀비를 만나 볼 수 있었다.
“이것이 조선에서 만든 본자기라고?”
희디흰 본자기 잔을 든 만귀비는 이제까지의 잔과는 다르게 손잡이가 달린 것을 신기해했다.
성화제가 이제 20대인 것에 비해 성화제의 총애를 받는 만귀비는 성화제 보다 18살이 더 많았는데, 마흔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20대 후반으로 보일 만큼 꾸며지고 관리가 된 여자였다.
“네 귀비마마. 오로지 조선에서만 생산이 가능한 것이 옵니다. 얇게 만들어져 태양을 향해 잔을 들고 있으면 햇빛을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오! 그렇게 얇은데, 잘 안 깨진다고?”
만귀비는 그대로 손에 있던 잔을 바닥에 던졌는데, 본자기 잔은 딱딱한 바닥이었음에도 깨지지 않았다.
태감이 얼른 잔을 주어 다시 바쳤고, 만귀비는 그런 잔을 다시 던졌다.
그렇게 4번째로 잔을 던지자 그제야 바닥에 떨어진 잔이 깨졌다.
“흠. 확실히 여사 물건이 아니구나. 그래, 이걸 진상하겠다고?”
“네. 귀비마마. 조선에서 올리는 진상품과 본자기를 처음 만든 사옹원 제조가 따로 올리는 진상품을 올리옵니다.”
조정의 진상은 서거정이 개인적으로 올리는 진상은 원길이 들고 가져다 바치니 만귀비는 슬쩍 한번 보곤 입을 열었다.
“내 마음에 드니 가지고 온 모든 것을 다 내어오거라.”
“네에?”
“내가 먼저 다 확인해 보고 신료들에게 나눠주겠다는 것이다.”
“마마, 그렇게 하시면... 아닙니다. 귀비마마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옵소서,”
서거정은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걸 깨닫자 그냥 모든 본자기를 만귀비에게 내놓았다.
만귀비는 화려하고, 자랑하길 좋아하니 조정 신료를 일일이 만나서 홍보를 하고 건네주기보다는 이게 더 효과가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왕태감에게 듣기로는 솜씨가 뛰어난 숙수가 있어 호광성의 우렁이 국수를 해주기로 했다는데, 누구인가?”
“소신이옵니다.”
“그래. 준비는 되었는가?”
요리해달라고 한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준비를 물어보는 걸 보니 서창의 태감들이 그날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다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궐에서 재료를 구할 수만 있다면 제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최선으로는 부족하지. 태감들이 어릴 때 먹었던 그 맛이어야 되는 것이지. 왕직. 이 숙수가 원하는 재료가 있다면 가져오게. 나도 그 우렁이 국수라는 것을 보고 싶군. 도대체 태감들이 꿈에도 잊지 못하겠다는 그 맛이 무슨 맛인지 한번 보지.”
원길은 입안이 바짝 말랐다.
‘이건 필패다 필패!’
단순히 서창 태감들의 고향 음식이라는 우렁이 국수는 아마도 토속적인 그런 맛일진대, 조정의 실세로 산해진미를 맛보는 만귀비의 입에는 당연히 맞을 턱이 없었다.
맛이 없다고 만귀비가 질책을 하면 문경으로의 낙향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곤장을 맞거나 형을 살아야 할지도 모로는 판국이었다.
‘아니, 일이 왜 이리 꼬이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