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치실과 칫솔.
“이 당면이란 요리는 전분이 나오는 작물이라면 그 무엇으로든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사리로 만드는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고사리는 진자리 무른 자리 구분 없이 어느 곳이든 자라기 때문에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긴, 어디서든 흐드러지게 피어나지.”
“다만, 고사리는 일반 풀들과는 달리 꽃이 피지 않고, 씨도 없기에 밭을 일구고자 하면 뿌리를 캐서 심어야 합니다. 가팔라서 농사가 힘든 곳에 고사리 뿌리를 심어두기만 해도 뿌리를 뻗쳐 군집을 만들어 자랄 테니 노는 땅이 있다면 고사리를 심어 보십시오.”
“오호, 그렇다면 김매기도 필요 없고 알아서 자라 전분을 준다니 최고의 작물이구만.”
자리에 있는 자들이 다들 양반들이라 그런지 고사리가 자라있는 것만 봤지, 고사리의 생태는 아예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고사리는 가지가 펴지기 전 말려있는 어릴 때 채취해야 하고, 가지가 다 펴지면 독이 강해져 먹지 못하니 채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독? 독이 있다고? 독이 있는데도 먹어도 되는 것인가?”
“독이 있지만 먹어도 됩니다. 고사리에 있는 독은 가지가 다 펴지기 전에는 약합니다. 그리고, 건조해서 뜨거운 물에 데치기만 해도 독은 다 날아가며, 전분으로 당면을 만들어 먹을 경우에는 독이 없다고 보면 됩니다.”
고사리의 독소인 프타퀼로사이드(Ptaquiloside)독은 발암물질이기도 했는데, 말린 고사리에는 0.1~0.6% 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고사리가 많이 자라는 곳의 지하수에도 이 성분이 녹아들어 동물들의 발암률을 높인다는 보고도 있었지만, 뜨거운 물에 데치면 90% 이상의 독성이 사라졌고, 고사리의 전분을 만들어 열에 익히는 경우에는 독성이 없다고 봐도 되었다.
다만, 그런 과정이 복잡하여 생으로 먹는 이들이 있을까 싶어 무조건 말리고 익혀 먹으라고 강조했다.
집이 가까운 이들은 집에서 어멈들을 데리고 와서 전분으로 지전을 만드는 것과 지전을 썰어 당면을 만드는 것, 그 당면으로 잡채와 잡채탕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이 요리들을 먹어보고 요리법을 궁금해 하는 이들이 있다면 아끼지 마시고 방법을 퍼트려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네. 친우들과는 잡채를 먹고, 어버이께는 잡채탕으로 봉양하는 일인데, 비밀로 숨겨둬서 뭘 하겠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10여 명의 사람으로 인해 당면 잡채가 경상도에 퍼지고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되면 식문화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터였다.
사실 조선에서 잡채가 널리 알려지게 되는 사건은 따로 있었는데, 바로 광해군 때의 잡채판서(雜菜判書)라 불리었던 이충(李沖)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공과(功過)가 확연히 구분되는 호불호가 있는 왕이었는데, 식문화와 관련해서도 한 획을 그은 왕이기도 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전선을 돌며 배고픔을 느껴봤기 때문인지 왜란 후에도 먹는 것에 욕심이 많았는데, 좋게 말해서 욕심이지, 식탐(食貪)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맛있는 음식에 욕심을 부렸다.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판서인 한효순이 더덕이 들어간 꿀떡을 바치자 그 떡이 마음에 들어 그의 벼슬을 좌의정으로 올려주었고, 연좌제로 인해 벼슬이 한미했던 이충이 올린 잡채에 반해 그를 호조판서로 임명할 정도였다.
이충은 집안에 온실을 만들어 상추와 호박, 파 등을 재배하여 한겨울에도 신선한 채소로 잡채를 만들어 광해군에게 올렸는데, 그 맛이 기가 막혀 양반들에게도 잡채가 유행하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하였기에 욕이란 욕을 다 들을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광해군이 반정으로 폐위되는데 한몫 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 없이 당면 잡채가 전국으로 퍼져나간다면 채소요리이면서 면 요리로 이름을 떨쳐 조선의 식량 사정에 도움이 될 터였다.
그리고, 조선의 노동력이나 수명연장을 위해서 개인위생에 대한 것도 알리고 퍼트려야 할 것 같았다.
“자, 그리고 이걸 봐주십시오. 노부인의 예를 보셨듯이 치아를 관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실 겁니다. 오복(五福) 중 가장 와닿는 복이 치아가 성한 것입니다.”
“응? 오복(五福)에 그게 있었나?”
“상서(尙書) 홍범편(洪範篇)에 나온 오복에는 치아가 없는데. 수(壽 장수), 부(富 재물), 강녕(康寧 건강), 유호덕(攸好德 덕망 있게 사는 것), 고종명(考終命 죽음 복 편안히 죽는 것) 이지 않나.”
“상서(尙書) 통속편(通俗編)에도 자손중다(子孫衆多)는 있어도 치아는 없어. 어디의 오복인가?”
원종이 기억하는 오복(五福)은 치아가 좋고, 자손이 많으며, 부부가 해로하며, 손님을 접대할 부가 있고, 죽어서 좋은 묏자리에 묻히는 것이 오복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 오복이란 것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았다.
“그 강녕(康寧)에 이 치아의 건강도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들 식사를 한 이후에 이쑤시개를 쓰는 것을 보았는데, 이쑤시개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 한번 배워 보시겠습니까?”
“오, 치아 사이에 끼인 것을 더 손쉽게 빼낼 방법이 있는가?”
“네 바로 이겁니다.”
원종은 손가락 두 개를 붙인 것 같은 나뭇가지를 꺼내었는데, 나뭇가지의 끝은 새총처럼 Y자로 갈라져 있었다.
“이 끝에 견(絹 명주)사를 이렇게 걸어 이 실로 찌꺼기를 빼는 것입니다.”
원종은 뜨거운 물에 삶았던 견사를 나뭇가지 양쪽에 걸어선 치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른 양반들이 잘 볼 수 있게 최대한 입을 크게 벌리고 일일이 보여주며 나무 치실 대를 움직여 청소했다.
[퉷!]
“이걸 보십시오.”
일부러 흰색의 천에 입안에서 빼낸 찌꺼기를 뱉어내었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 흰색의 천에 뱉은 것이었다.
“이런, 입안이 깨끗해 보였는데, 이리 음식 찌꺼기가 많이 나온다는 말인가?”
“네. 겉으로 보기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얇은 견사로 치아와 치아 사이를 끓어 보면 찌꺼기가 나옵니다. 다들 하나씩 드릴 테니 실을 걸어서 해보십시오.”
손재주 좋은 희재가 미리 만들어 두었던 치실 대를 나눠주고, 치실을 걸어 사용하게 했다.
치실로 인해 치아 사이에 끼어있던 찌꺼기들이 나오자 다들 이리 많은 찌꺼기가 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음식물이 치아 사이에 있으면서 썩게 되면 그 썩는 것이 치아에도 옮겨가게 되어 치아가 썩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치아가 아프게 되고, 결국 더 썩게 되어 이가 빠지게 됩니다. 버드나무 가지(양지)를 드리거라.”
“버드나무 가지를 짓이겨 치아를 닦는 것은 알고 있네.”
“네. 그 양지에 모(毛)를 달아 만든 양지 솔입니다.”
“양지 솔?”
붓을 만들 때 쓰는 아교로 붙인 염소 털을 버드나무 가지 끝을 갈아 끼우고 견사로 묶은 칫솔이었다.
“견사 치실로 찌꺼기를 뺀 이후에는 이렇게 모를 붙여 만든 양지 솔로 치아를 청소해야 충치(蟲齒)가 예방되고 치아의 건강을 늙어서까지 지킬 수 있습니다.”
“오호라! 양지 솔로 청소하듯이 해야 치충(齒蟲)을 없앨 수 있는 거구먼.”
조선 시대에도 버드나무 가지를 짓이겨 치아를 청소했는데, 버드나무 가지에서 나오는 쓴 성분이 치충을 막아준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때의 이쑤시개도 버드나무 가지로 만들어 휴대하였다.
“꼭 식후에는 치실을 쓰고, 양지 솔로 치아를 청소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가지고 있는 치아를 나이 들어서까지 유지할 수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치실은 한번 쓰고 버려야 하며, 여의치 않을 때는 꼭 펄펄 끓는 물에 삶아서 다시 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쓰게 되면 오히려 병이 오게 됩니다.”
“허허. 이것도 까다롭구먼. 그래도, 치아를 건강하게 지켜 맛있는 것을 계속 먹으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위생 관념이란 것이 아예 없는 시대였기에 일일이 양반들에게 손발톱을 깎아야 하고, 손을 자주 씻고, 목욕도 자주 해야 한다고, 개인위생을 강조했다.
하지만, 다들 검은 쇠로 만든 가위로 손톱을 다듬는 게 힘들다고 입을 모았기에 손톱깎이부터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버드나무 가지 칫솔은 붓을 만드는 장인들에게 만들게 하고, 손톱깎이는 주물로 작업이 가능한 대장장이를 찾아야 할 것 같았다.
***
“이거 받게나. 영덕과 포항의 양반들에게 보내는 편지네. 4분 모두 벼슬을 은퇴하신 분이라 천인천자문에 글을 받으면 좋을 것이네.”
형은 천인천자문에 명망 있는 이들의 글자를 받을 수 있게 되어 좋아했다.
“내가 제대로 먹지 못해 죽을 날만 기다렸는데, 제조 영감 덕분에 부드러운 음식을 알게 되었으니 명이 늘어난 것과 같으니, 참으로 고마우이.”
노부인은 내게 고맙다고 하며 손에 작은 복주머니를 쥐어 주었다.
“이런 것은 아니 주셔도 되온데...”
“소싯적에 중히 여긴 패물들은 다 며느리에게 주고 이 옥가락지가 남았는데, 이거라도 주어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 그러오. 마음에 드는 처자가 있으면 그때 은근히 끼워주면 좋을 거요.”
노부인은 이제 곧 한창때가 올 터이니 그때 요긴하게 쓰라고 웃으며 주었다.
“문경 전씨 사람들이 오면 언제든 문을 활짝 열어 환대할 터이니 자주 들려주시오. 그리고 이것은 가는 길에 노자나 하라고, 친척들이 모아줬소이다.”
그냥 간단히 모아주었다고 하는 하는데, 오승포가 10필이 넘었다.
이미 가노 두 명을 빌려 칫솔과 치실, 치실 대를 문경으로 보내 생산하라는 편지를 보냈고, 한양의 참렬이에게는 당면과 당면 만드는 법을 보내어 생산하라는 편지를 보냈는데, 또 오승포까지 챙겨 주니 김덕형의 배포가 컸다.
“이것은 아끼고 있는 씨앗인데, 뒤 텃밭에 한 번 뿌려보시지요.”
한 줌 40여 알을 가지고 있던 회회 총 씨앗 10개를 김덕형에게 주었다.
“중국에서 들여온 씨앗으로 아직 조선에는 몇 없는 작물입니다. 둥근 뿌리를 먹는 것이 온대, 한번 키워보시지요.”
“조선에 몇 없다고 하니 기대가 가는구만. 아랫것들 시켜서 한번 키워보겠네.”
“본가와 처가를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했지만, 묵는 곳에서 이런 일이 없었는데, 너와 다니니 별일이 다 있구나.”
“그게 다 제가 인덕이 있으니 사람들이 모이는 것 아니겠습니다. 하하하.”
“이런 재미있는 일이 계속 일어난다면야 돌아다니는 재미가 있겠구나. 그래서 형님이 한양으로 가서 그리 좋아했고, 문경으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구나.”
“큰형이야 원래 그런 보여주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 보니 문경보다는 외지에 있는 것이 더 맞겠지요.”
“그래도 변경인 의주인데, 잘 계실는지 모르겠구나.”
***
“이것이 바로 철립 불판이라고 하는 거네. 철립(鐵笠)이 뭔지는 아는가?”
“저 밖에 조선의 군관들이 쓰고 있는 모자 아닌가?”
여진족 족장 무찰라타는 턱짓으로 밖의 군관을 가리켰다.
“맞네. 잘 아는구만. 저 무관들이 쓰는 모자를 본떠서 이렇게 불판을 만들었다네. 자 다들 앉게나. 그렇게 우두커니 서서는 이야기도 나누기 힘드네. 우리 난로회(煖爐會)를 한번 해보세나.”
관복을 입은 원길은 우두커니 서 있는 여진족 족장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리에 앉히려 했다.
“난로회?”
“저 중국의 송나라 때 만들어진 말인데, 이렇게 화로에 둘러앉아 고기를 구워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말한다네. 그냥 서서 할 말만 하고 이야기를 한다면 해결할 수 있는 일도 꼬이기 마련인 법. 이렇게 같이 고기를 먹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천천히 해야 꼬인 매듭이 풀리지 않겠나?”
세 명의 여진족 족장들은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며, 그제야 철립 불판 앞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왜 그대는 우리 초피(貂皮)를 사려는 조선 상인들에게 초피를 사지 말라고 하는 것이오?”
“맞소. 상인들은 사고 싶어 하는데, 그대가 명을 내려 사지 못하게 하니 상인들은 경을 칠까 두려워 초피를 사지 않고 있소이다.”
“허허. 그것 때문에 불만이었소?”
*
[작가의 말]
글에는 조선 사람들이 충치가 많았다고 썼지만, 사실 조선 시대 죽었던 미라들을 연구한 결과 의외로 충치가 없었다고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충치가 늘어나게 된 것도 설탕이 퍼지기 시작한 즈음과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선 시대 사람들은 양치를 제대로 하지 않았음에도 충치가 별로 없었고, 대신에 영양 불균형으로 인해 잇몸이 내려앉아 치아가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대신에 단 것을 자주 먹을 수 있었던 왕들은 또 달랐습니다.
실제 성종, 연산군, 고종 등 실록에 치통으로 왕들이 고생했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치아 관리나 치료방법이 없어 중국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천하의 그 허준도 치통은 못 잡았다고 하니 다들 커피 드신 후에는 양치 하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