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부산행. (2)
“돼지 종자가 중국에서 와서 그런지 새끼가 일찍 들어섰습니다. 젖꼭지도 15개가 넘는 것으로 봐서는 새끼도 많이 낳을 것 같습니다요.”
“먹이도 따로 챙겨 주셔서 그런지 수퇘지의 몸무게가 200근(약 120kg) 가까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근수가 많이 나가다 보니 여기저기서 새끼를 낳으면 달라고 줄을 섰습니다요.”
공조에서 철간을 선정해줄 동안 여의도 국영 목장에 들렀는데, 형이 중국에서 받아 온 네 마리의 금화저(金華猪)가 무럭무럭 자라 어느새 새끼를 배고 있었다.
“다행이구만. 새끼가 10마리 넘게 태어나면 절반은 여기서 키우고 나머지 절반은 계속 키워 숫자를 늘릴 수 있는 곳으로 분양해주게나.”
금화돈은 빨리 크는 조숙종에 한배에서 10마리 이상 낳는 품종이라 3세대만 지나면 수십 마리로 늘려나갈 수 있었다.
“20마리 넘게 불어나면 그때 우리 왕십리 농장에서 절반을 데리고 갈 것이니. 그때까지 잘 키워주게나.”
“그렇지 않아도 왕십리 농장에서 달걀 껍데기부터 잡채소까지 돼지들이 먹을 것을 챙겨 주니 이렇게 빨리 큰 것입니다요. 먹을 것이 풍부한 만큼 최대한 많이 기르도록 할 터니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맙네. 내년쯤에 수가 많아지면 그때 잡아먹을 테니 그때 같이 즐겨보세나.”
“소문난 제조 어르신의 요리 솜씨를 기대하겠습니다요.”
왕십리 농장에도 가 보니 함덕 일가가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채소를 키우며 닭 농장의 닭도 늘리고 있었는데, 이제 키우는 닭이 천마리에 가까워져 있었다.
육계인 서라벌 닭이 400마리였고, 산란계에 가까운 닭들이 500여 마리였는데, 가패에서 소비되는 달걀을 맞춘다고 닭이 느는 속도가 느렸다.
그래도 올가을부터는 치킨을 팔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회회총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네 한번 수확하여 씨앗을 받았는데, 두말 가까이 나왔습니다. 그걸 그대로 두 마지기에 뿌려서 키우고 있습니다. 이제 막 싹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양파를 먹지는 못하겠지만, 두 마지기에 양파 씨를 뿌렸으니 절반 정도는 먹어도 될 것 같았다.
나머지 한 마지기에서 씨앗을 제대로 거두어들인다면 경기도 일대에 회회총을 보급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지방에도 양파를 보급하기 위해 비상용으로 들고 있던 씨앗에서 한 줌을 챙겼다.
***
“함경도 김책에서 온 김고도개라고 합니다.”
“김고도개?”
철간(광부)이라며 4명이 왔는데, 이름이 특이하고, 사투리의 억양도 특이해서 이름을 제대로 들었는지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네. 저는 김고도개 이옵고, 저치는 김아을사라고 하고, 저기는 김파보하, 저기 어린놈은 김지하리이옵니다.”
다른 세 명의 이름까지 듣고 나니 왜 이들의 억양이 특이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자네들 여진족 출신인가?”
“네. 대왕께 성을 받아 조선인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세종대왕 때 4군 6진을 개척하며 조선으로 귀화한 여진인들 같았다.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말게나, 내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네. 북방의 성 아래 산다는 성하 여진인들과는 다른 것인가?”
“네. 성하 여진인들은 조선에 살지만, 여진인의 풍습을 완전히 버리지 않은 자들이옵니다. 그리고 대부분이 건주 여진족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에 반해 대왕께 귀순했던 우리 여진인들은 풍습을 버리고 김씨 성을 받아 조선 사람이 되었습니다.”
보통 여진족이라고 하면 명나라 건주위 지휘사의 통제를 받는 건주여진(建州女眞 요동지역)과 후룬강 유역에 거주하던 해서여진(海西女眞 요동 위 몽골 방향) 그리고 최북방의 야인여진(野人女眞 동북으로 러시아 연해주 지역)으로 세 개의 여진족으로 불렀는데, 이 구분이 혈통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사는 지역에 따라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성씨를 받고 귀순한 함경도에 있던 여진인들은 굳이 따지자면 야인여진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저희 일족은 오래전 구려(句麗 고구려)때 구려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왕 시절 조선으로 귀화를 한 것입니다.”
“오, 그렇구만. 옛 구려의 후손들이었다면 우리가 남이 아니네. 그리고, 성씨를 받고 여진의 풍습을 버렸다면 자네들은 완전한 조선 사람이네. 그래, 김책에서 왔다고 했는데, 그럼 그 옆의 단천 광산에서 일을 했는가?”
“네. 맞습니다. 김책과 단천은 가까워 돈을 벌기 위해 단천 광산에서 일을 했습니다요.”
“그러면 제대로 일을 배웠겠구만. 그럼 가세나.”
철간이 준비되면 바로 출발할 수 있게 짐을 싸고 있어서 바로 출발하려고 했다.
금산이와 희재, 배다른 남동생인 진기, 서기 겸 수발을 위해 남장한 언년이까지 다섯 명이 일행이었다.
여기에 철간 4명이 더해지니 9명이 되었다.
“헌데, 자네들은 뭔가? 자네들은 어디까지 따라오는 겐가?”
문제는 철간들을 데리고 온 나졸 4명도 가지 않고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소신들은 공조에 소속된 나졸이온데, 공조판서께서 제조 어르신을 호위하라고 보내셨습니다요. 저는 양필이라고 합니다요.”
“그런가? 나는 문경의 석탄 광산에 들렀다가 부산으로 내려갈 것인데, 그렇게 되면 어디까지 따라올 것인가?”
“판서께선 그런 일이 있다면, 그냥 문경 석탄 광산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양성지 대감이 나를 아껴 공조 소속의 나졸을 붙여 준 것 같았는데, 호의를 거부하기가 애매했다.
그리고, 나졸들이 삼지창이라 부르는 당파(鐺鈀) 대신 검과 활을 패용하고 있는 모습이 나름대로 멋도 있었다.
거기다 청색의 나졸 옷을 입고 있으니 문경까지 거슬리는 일도 없을 것 같아 나졸들의 동행을 허락했다.
“좋네 출발하지.”
“그런데 말은 안 타시옵니까? 문경까지 괜찮으시겠습니까?”
양필은 말이나 가마 없이 그냥 무작정 걸어가려는 나를 보곤 놀라워했다.
“난, 걷는 것을 좋아하네. 어서 가세.”
***
“그런데, 자네 말이야. 진짜 나를 호위하기 위해 온 것이 맞는가?”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요? 당연히 제조 어른을 호위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양필은 절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이틀 동안 같이 생활하다 보니, 눈에 보이는 것이 있었다.
양필을 비롯한 나졸들은 나를 호위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닌 것 같았다.
호위 대상자인 나보다도 철간인 여진계 조선인들을 더 살펴보고 움직임을 확인했다.
“저들을 문경 탄광까지 감시하는 일을 맡은 겐가?”
“아니고, 아닙니다요. 제조 어른을 호위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요.”
“그래. 위에서 그렇게 시켰다면 어쩔 수 없겠지.”
양필은 끝까지 아니라고 했지만, 아마도, 여진족 출신 귀화인이라는 것 때문에 나졸들이 붙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면 철간들이 죄를 짓고 문경에 가는 죄인이라서 나졸이 붙은 것일 수도 있었다. 공조에서는 내게 죄인을 붙여주는 게 미안해서 나를 호위하는 것이라고 말하라고 시킨 것 같았다.
그것도 아니라면, 철간 일이 힘들기에 도망칠까 감시를 위해 따라온 건지도 몰랐다.
아 잠시만, 그러고 보니, 내 호위를 한다면서도 내가 부산으로 갈 때는 문경에 남는다고 했구나. 이러면, 나졸들은 철간들의 감시를 위한 것이로군.
며칠 같이 움직이다 보니 귀화 여진족 철간들은 과묵했고, 험한 일을 해서 그런지 다들 밝지 않았다. 우울해 보이는 이들을 보니 철간도 도공들처럼 도망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는 것이 떠올랐다.
본래, 철을 캐는 철간에게는 구분전(口分田)이란 땅을 내렸는데, 철간으로 일을 하는 동안 거기에서 나는 물산으로 먹고살라는 의미였다.
병장기에 들어가는 철의 생산이 그만큼 중요했기에 철간들이 마음 놓고 철만 생산할 수 있게 내려진 조치였다.
그러다 철간을 그만두게 되면 구분전을 반납하여 다음 철간에게 구분전이 돌아가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일이 언제나 정해진 법대로 돌아갈 수만은 없는 법이었다.
분명 구분전으로 내려온 땅이었지만, 함경도나 평안도의 경우에는 상황에 맞게 구분전이 군전으로 바뀌기도 했으며, 하나의 구분전에 철간 두세 명이 묶여 나눠 살 수밖에 없기도 했다.
이렇듯 구분전에 대한 변화로 먹고살기는 힘들어졌는데, 철 생산의 고통은 크다 보니 도공들처럼 도망치는 철간들이 많았고, 조선 중기 이후로는 철간도 역(役)으로 바뀌어 농민들을 광부로 동원하는 막장이 되어 버렸다.
이런 폐단이 반복되고 나라의 재정이 부족해지자 효종 때(1651년) 설점수세제(設店收稅制)를 시작하여 은광을 민간에게 운영할 수 있게 해주었는데, 부역으로 농민을 부려 얻는 이익보다 광산의 운영권을 주고 세금을 받는 게 더 이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나름 수익이 되자 숙종 때는 금광을 설점수세 했고, 영조때는 동광마저도 민간에 다 넘겨주었다.
이후 조선 말기에는 이 제도 덕분에 미국인들도 광산을 소유하고 개발할 수 있었는데, 그때 나온 말이 바로 노다지였다.
광산에서 나온 금에 손대지 말라고 노 터치(No Touch)라고 백인들이 외쳤는데, 그게 와전되어 노다지는 금덩어리, 금광을 뜻하는 말이 되었고, 현대까지도 쉽게 이익을 얻었을 때 ‘노다지다’라고 말하는 어원이 되었다.
안성현의 현청에 들러 하룻밤을 보내는데, 양필과 김고도개까지 한자리에 있자 궁금했던 것을 대 놓고 물었다.
“그런데, 성씨를 받아 조선에 귀화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천성이 유목민처럼 돌아다니거나 사냥을 하는 것이 더 맞는데, 철간으로 있었다는 걸 보면, 함경도의 철간들이 벌써 다 도망치거나 한 건가? 그래서 귀화 여진인들을 문경으로 투입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나리. 그것이... 이들의 솜씨가 제일 좋기에 문경 석탄 광산으로 보내지게 된 것입니다.”
“그건 양필 자네 생각이고, 김고도개의 입을 통해 듣고 싶네. 함경도의 철간들 사정이 많이 안 좋은가?”
“휴우. 네 좋지 못합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지요.”
양필과 나졸들이 입 다물라고 눈을 부라렸지만, 김고도개는 계속 이야기를 했다.
원래 단천에도 조선인 철간들이 있었지만, 다 도망치고 귀화한 여진인들을 강제로 철간으로 등록해서 일을 시키고 있다고 했다.
“내 어느 정도는 예상했네. 나졸들을 감시역으로 같이 보내야 할 만큼 철간의 이탈이 일어나고 있다니 참으로 한탄스럽네. 함경도의 벼슬아치들은 도대체 뭘 하길래 철간들의 이탈을 막지 못하는 건가.”
“그것이. 군전으로 구분전을 돌린 것도 있지만, 함경도 땅 자체가 곡식이 잘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있던 구분전도 황폐해져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에휴. 그럼, 이들은 석탄 광산에서 할 일을 다 하고 나면 다시 단천으로 돌아가는가?”
“저... 그게 아닐 겁니다. 아마도, 저희와 같이 계속 문경에 있을 것이옵니다.”
“그래?”
원종은 나름 솜씨가 좋다는 철간 4명과 나졸들까지 문경 석탄 광산에 머물게 된다는 소리에 공짜로 인력을 구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이걸 드리라고 했습니다. 본래는 문경에 도착하여 철간들이 광산을 확인한 이후에 제조 어른께 드리라고 했지만, 지금 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 드리옵니다.”
양필은 품에서 편지를 꺼내 건네었는데, 공조판서 양성지 대감의 편지였다.
뭔가 문경 석탄 광산에 관해서 쓴 것 같았기에 얼른 편지를 읽었다.
【...자네의 말을 듣고, 석탄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확인해보니, 확실히 석탄이란 물건을 사용함으로 해서 생기는 이득이 많았네. 이에 공조와 호조에서는 석탄을 캐내는 곳을 정식으로 광산으로 인정하기로 했네.】
광산으로 인정하겠다고? 그게 뭔가 큰일인가? 아아!? 잠시만...
편지에 쓰인 정식 광산으로 인정하겠다는 의미를 어느 정도 알 것 같았기에 침을 삼키고 급히 편지를 읽었다.
【...대저 광산이라는 곳은 하루아침에 큰 재화가 생길 수 있는 곳이라 조선이 개창 하기 전에도 모든 광산은 조정의 소유였으며, 조선이 들어선 이후에도 광산은 모두 다 나라의 소유네. 그대가 발견해낸 석탄 광산이 법적으로는 광산이 아니었기에 이제껏 놔두었으나 호조와 공조가 상의한 결과 석탄을 자원으로 인정하고 정식으로 광산으로 등록하게 되었으니, 이제 자네는 문경 광산의 일에서 손을 떼기 바라네...】
이 시발, 이게 뭐야.
편지를 들고 있는 손이 다 떨렸다.
세조의 제갈량이라고 불린 눌재 양성지에게 당한 것 같았다.
아니, 내가 멍청했다.
설점수세제란 광산의 민영화 제도가 200년 후에나 적용된다는 걸 알면서도 석탄 광산을 내 것이라 여겼던 내가 멍청했다.
하는 일이 계속 성공하자 알게 모르게 조선을 얕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 얕보았던 조선이 지금 역습을 해왔다.
*
[작가의 말]
한 마지기에 대한 설명.
한 마지기란 한 말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땅이라는 뜻인데, 그래서 작게는 150평 많게는 300평까지 그 크기가 왔다 갔다 합니다.
글에서는 대충 200평으로 계산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포졸은 포도청의 나졸을 말하는 말로, 사극에서 삼지창(당파) 들고 다니는 병사들은 나졸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드라마에서 워낙에 당파를 들고 있는 나졸들만 나와서 조선 나졸들의 기본 무장이 당파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당파의 길이는 3m 이상의 장창으로 기본 무장이 아니었습니다.
티비에서 나오는 짧은 단창형 당파는 고증에 어긋난 당파입니다.
그리고, 나졸들도 방패와 검, 활 등 여러 가지로 무장을 했다고 합니다.
또 티비 사극은 예산 문제로 그냥 검정/흰색의 나졸 복장으로 통일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소속된 관에 따라 여러 가지 색의 옷이 있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