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보부상의 장점. (1)
“충고해주신 덕분에 일이 잘 해결되었사옵니다.”
“허허. 이야기 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임방과 일을 해결했다는 게 놀라우이.”
호조판서 구치관은 그 왈패 같은 보부상들과 부딪히는 거 없이 본자기를 파는 일을 처리했다는 것에 감탄했고.
역시 신숙주가 손녀사위 삼을만한 재주를 지녔다고 수긍했다.
“마침 인선이 끝이나 분원으로 파견시킬 저기(書吏)를 정했으니 온 김에 데리고 가게나. 일일이 올리지 말고 한 번에 신고할 수 있게 사정을 봐주라고 했네.”
“감사합니다.”
호조를 벗어나 나서는데, 키가 140cm를 겨우 넘긴 것 같은 작은 관원이 자신이 분원으로 가게 되었다며 따라붙었다.
“소한당(所閑堂) 어른의 팔촌 조카인 권항필이라 하옵니다.”
“응? 소한당?”
이 시대에는 워낙에 호(號)로 사람을 부르는 게 많다 보니 순간 누구인지를 몰랐다.
“길창부원군 권람 대감의 호입니다.”
한명회와 함께 계유정난의 주축이었던 권람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몇 년 전에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 권 대감은 이미 소천하시지 않으셨소?”
“네. 혹시나 궁금하게 여기실까 하여 이야기를 드린 것입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의 호를 들먹이는 꼴을 보니, 왜 한성부에서 경기도 광주의 분원으로 파견 가는 사람으로 뽑힌 건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자 조상이나 가족을 끌어들여 자신을 자랑하고자 하는 이들 중에 제대로 된 자를 본 적이 없었다.
“제조 어르신이 조선 상관의 북경 상행단에 깊게 연관이 되어있다고 들었사온데, 한다리 끼일만한 방법은 없는지요?”
“안타깝게도 늦었네.”
“그럼, 다음 상행단에는 낄 수 있겠는지요? 그렇게 되면 제가 올릴 사람은 올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올리지 않는 방식으로 제조어른께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요.”
“호적을 올릴 사람만 올리겠다는 건가?”
“그것도 있사오나. 글도 모르는 무지렁이들이지 않습니까? 적당한 숫자만 양민으로 호적을 올리고, 나머지는 그냥 대감의 노비로 쓱싹~ 하는 것이지요. 흐흐흐. 아마 그렇게 노비가 되어도 잘 모를겝니다. 나중에 분원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갈 때나 드러나겠지만, 그때는 아니 이놈들이 무슨 소리냐며 호통으로 내리누르면 다 되는 법이지요.”
권항필의 이야길 듣고 황당해서 길을 멈췄는데, 권항필은 제대로 이야길 듣기 위해 선 것인 줄 알고, 어떻게 양민을 노비로 만드는지를 떠들기 시작했다.
글을 모르는 이들에게 호구단자를 적어 호적에 올리는 것처럼 해서는 실제로는 그걸 노비 문서로 만들어서 멀쩡한 양민을 노비로 만드는 것이 대단한 재산 불리기인 양 떠들어 대었다.
“그리고, 호적에 올려 양민으로 만들게 되면, 또 다른 곳에서 부역으로 다리를 만든다, 국경의 방비를 시킨다고 도공들을 이리저리 빼가려고 할 것입니다요.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노비로 만들어 대감의 그늘에 있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지요.”
권항필은 자신의 말이 맞다며 양민을 노비로 만드는 것에 자부심마저 내비치었다.
“양민이 되어 부역이든 노역이든 세금이든 힘들게 내고 사는 것보다는, 대감님처럼 좋은 주인을 만나 마음 편히 사는 것이 그놈들에게는 더 이득일 겁니다요.”
권항필의 말이 일견 맞는 말도 있었다.
조선의 양민은 부역, 군역, 노역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군역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기에 일견 권항필의 말이 맞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이런 이익에 영합하는 놈을 분원에 데려갔다가는 분위기만 흐리고, 여차하면 본자기의 비밀까지도 팔아먹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제조법을 알아내는 게 힘들면, 분원의 도공들을 노리는 놈들에게 노비 팔 듯이 도공들을 팔아치울지도 몰랐다.
“이야길 듣고 보니 자네는 경기도 광주까지 내려가기에는 아까운 인재로구만.”
“헤헤헤. 제가 그렇지요.”
“상행단에 관심이 많던데, 한양에서 장사를 배우며 상행단 준비를 해보겠나? 아차, 길창부원군의 팔촌 조카라 명문인 사람에게 장사를 권하다니 내가 미안하네.”
“어이쿠, 아닙니다요. 소생은 보한재 대감(신숙주)처럼 중국과 외국을 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싶사옵니다. 상행단에서 일을 하면 좋을 것이옵니다.”
“그런가? 다행이군. 그럼, 내 공랑점포가 있는데, 거기로 출근하게. 거기서 물건이 돌아가는 유통을 좀 배우게 그래야 다은 상행단에 자네를 추천할수 있지 않겠나?”
“네 감사하옵니다. 허면, 분원의 호적 일은 누가 하게 되는 것이옵니까?”
“분원에 있는 이에게 서류를 적어서 올리라고 하겠네. 그러면 자네가 확인해서 호조에 올리면 되는 일이니 그 일에는 신경 쓰지 않게 해주겠네. 상행단 일을 준비하려면 이런 하찮은 일에 신경이 분산되면 아니 되지.”
“하하하. 저의 재주를 알아주시니 감사하옵니다.”
권항필은 이제야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만났다고 좋아했는데, 이게 자신을 배제시키고,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는 일이란 것도 몰랐다.
덕분에 박복이에게 호적 일을 맡겨 갑, 을조의 호적은 따로 만들라고 시켰다.
호조에 신고는 갑, 을조에 들지 못한 일반 도공들만 신고해서 갑, 을조의 인력을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다만, 호구 대장을 적은 종이를 나눠주며, 다른 곳에서 못 빼가게 한 것이고, 나중에 이 호구 대장을 관에 보여주면 다시 양민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길 해주었다.
하지만, 글을 모르는 도공들은 그저 이게 호적이구나 여기며 관심을 가지질 않았다. 양민이나 노비나 결국 하는 일은 자기를 만드는 일이었으니 그런 것의 차이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박복이 마저도 왜 이런 귀찮은 일을 하는 것이냐며 의문을 품었다.
참렬이와 자청이를 양민으로 만들어 주었음에도 혼인을 하며 다시 노비가 되겠다고 했던 일까지 떠오르자,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현대의 교육에 길들여진 내가 잘못된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괜히 노비로 편히 살고 싶은 이들에게 인간의 존엄이니 인권이니 떠들며 양민으로 만들어줘서 군역, 노역에 끌려가 죽거나 다치는 것보다 그냥 노비로 좋은 주인 밑에서 사는 게 더 행복할 수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좋은 회사에 다닌다고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자랑하며 출퇴근을 반복하는 현대인도 그 회사의 노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의 복지가 좋고 연봉이 좋다고 서로 자랑하는 모습이 조선 시대 노비가 되어 우리 대감님은 쌀밥에 공탕 주신다고 자랑하는 모습과 별 차이가 없었다.
악질 주인을 만나게 되는 노비의 입장이라면 생각이 180도 바뀌게 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노비가 되는 게 더 좋다는 인식이 팽배한 시대다 보니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았다.
내가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시대가 해결할 문제다. 지금은 그저 내가 해야 하는 일을 열심히 하자.
그게 지금의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
보부상을 조폭, 양아치라고 욕을 했지만, 보부상의 임방에 이름을 올리자 이득인 부분도 많았다.
먼저, 분원에서 만들어 온 실생활용 토기들을 내 공랑점포나 삼식이를 통해 파는 것이 아니라 분원까지 찾아오는 보부상들에게 바로 넘기면 되니 일이 편해졌고, 운송에 들어가는 비용이 세이브 되었다.
보부상들도 일일이 물건을 구하러 다니지 않아 일이 편해졌다고 좋아했는데, 이런 보부상들을 위한 서비스를 만들어 주기로 했다.
“아직 식전인 보부상들은 저기로 줄을 서시오.”
“왜? 먹을 거라도 주는가?”
“당연한 걸 왜 물어보는 거요? 얼른 그릇을 들고 줄을 서시오.”
경남 김해 사람인 보부상 문훈은 공짜로 먹을 걸 준다는 소리에 얼른 줄을 섰다.
막사발에 딱딱한 밀 전병 같은 것을 넣어서 주었는데, 이걸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앞사람을 따라가다 보니 풀처럼 쑨 것 같은 뜨거운 국물을 국자로 넣어 주었는데 뻑뻑한 국물에는 고기 찌꺼기라도 들어가 있는지 새끼손톱 반만한 건더기들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곤, 기다랗게 만들어진 탁자에 앉았는데, 한쪽에 10명씩 앉을 수 있는 탁자다 보니 안성에서 왔다는 안면 있는 보부상과 마주 앉았다.
“공탕잔국은 처음 먹어 보는가?”
“이게 국이요? 뻑뻑한데.”
“허허 이 사람 아직 배부르구만. 이 사람아 물을 넣어 찰랑찰랑하게 만들면 더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걸 이렇게 뻑뻑하게 해서 주는 건데 오히려 엎드려 절을 해야 하는 거야.”
“오, 그러고 보니 그렇구랴. 고마워해야 될 일이구만.”
문훈은 그제야 개인 숟가락으로 공탕잔국을 떠먹어 봤는데, 한입을 먹어보곤 눈이 똥그래져 마주 앉은 보부상을 볼 수밖에 없었다.
“어뗘? 맛이 끝내주지?”
“이거... 고기의 기름향이 진한데, 이거 진짜 공짜로 주는 거 맞소? 따로 돈 내라고 하던지, 아니면 나중에 물건값에서 제하던지 하는 거 아니오?”
“허허 이 사람 분원에 처음 오는 티를 내는구만.”
안성 사람 전채도 사실 이번이 두 번째 였지만, 많이 왔다는 듯이 거들먹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곳 분원의 주인이 문경 사는 거부인데, 소고기 공탕을 끓여 도공들에게 주고 그 밑에 남은 잔국으로 이걸 끓여 우리에게 주는 거네. 거 듣기로는 한 솥에서 나온 국을 도공과 보부상이 나눠 먹으니 한솥밥 먹는 가족 같은 사이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하더구만.”
“오! 어쩐지 뭔가 작은 크기지만, 고기가 씹힌다더니 그게 소고기였구만. 아니, 도대체 얼마나 부자이기에 이리 공짜로 고깃국을 주는 건가?”
“그거야 모르지, 그저 한 가족이니 맛있게 먹고 토기를 짊어지고 장사를 열심히 하면 그게 가장 좋다고 하더라고.”
“허허. 대인이구만 대인이야. 그런데, 이 딱딱한 밀 전병 같은 건 뭔가?”
“그 딱딱한 건 반 각만 기다리게. 건번이라고 하는 곡물 가루로 만든 거라는데, 공탕 잔국을 흡수해서 몰랑해 지면 그때 먹는 거네. 그것도 일품이라고 할 수 있지.”
문훈은 반 각을 기다려 국물에 불려 먹는 거라는 소리에 국물을 더 먹지도 못하고 꽂아 둔 숟가락처럼 한참이나 국을 보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 건번이라는 것이 국물에 불어 크기가 커진 것 같자 국물과 같이 먹었다.
“오오, 이거 밀인가? 아니 수수? 보리? 아니 고깃국의 기름 향인가?”
반각 가까이 불려 먹은 건번에서는 기름 국물을 머금은 곡식의 향이 뿜어져 나왔는데, 그 곡식의 향과 고깃국의 육향이 어우러지자 풍부한 맛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자신도 모르게 숟가락을 놀려 한 숟가락을 더 입에 넣었는데, 양 볼 가득 들어차는 무게감이 너무 좋았다.
양 볼 가득 음식을 넣어 즐겁고 맛있게 먹어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양 볼 가득 음식이 들어차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배가 부른 것 같았다.
“내 태어나 이리 맛난 것은 처음 먹어보오. 어찌 이리 맛난 것을 공짜로 준다는 말이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소이다. 돈이라도 내야 할 것 같은데.”
“하하하. 나도 처음에는 그랬소이다. 공짜 밥이 고마우면, 나중에 저기에 한번 가서 물어나 보시오.”
“저긴 또 뭐요?”
“도공들의 가족이 전국에 있는데, 혹시나 길이 같으면 그 도공들 집에 들러 편지도 전해주고 하는 일이오. 그리고, 분원에 같이 와서 살고 싶은 가족도 있다는데, 그 가족들을 데리고 오는 일을 저기서 주선해 주고 있소.”
“아, 먹을걸 주는 게 아니구랴.”
“하하하. 대신에 도공의 가족을 데리고 오는 일을 해주면 특별식이랑 따로 도기 값을 싸게도 준다고 하오.”
“일을 해주고 값에서 빼주는 것이라면 나쁘지는 않구만.”
문훈은 공짜로 먹은 밥이 너무나 맛있었기에 도공들의 가족들을 데리고 오면 해준다는 특별식이 무엇인지 너무나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