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걸리는 게 많다. (2)
이 조폭 조직 같은 보부상들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었다.
관의 권력으로도 처리하기 힘들고, 전국에 산재 되어 있다 보니 일망타진하려 해도 힘들었다.
결국, 보부상들과 타협을 어느 정도 해야 되는 거 말곤 답이 없었다.
“금산아. 네 이름으로 보부상에 가입해서 물건을 팔게 되면 어떻게 되겠느냐?”
“오, 괜찮은 방법 같습니다. 제가 간자로 들어가는 거지요?”
“간자? 잠시만...”
금산이의 말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전매권을 받아 보부상이 정식으로 임방을 차렸지만, 훨씬 옛날부터 보부상 조직이 만들어지고, 수십 수백 년을 버텨온 조직이었다.
즉, 외부의 억압이나 탄압은 그 누가 되든 버텨낼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누군가가 조직을 깨트리려고 하면 그것도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금산아. 이참에 내가 보부상이 되는 것은 어떻겠느냐? 내가 보부상이 되어 보부상의 자격으로 본자기를 팔면 뭐라고 못할 것이 아니더냐.”
“네에? 도련님이 보부상이 되시겠다고요?”
금산은 양반이 보부상이 되겠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기... 기발하긴 기발합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요?”
“그냥 해본 것이지. 보부상이 아니면 전매 물품을 거래하지 못한다고 하니, 아예 보부상이 되어 전매 물품을 다 거래하는 걸로 해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 것이지. 어떻겠느냐?”
“그게, 보부상 안에도 보부상의 법도가 있는데, 먼저, 그 법도에 양반이 가입해도 되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요.”
“옳거니. 보부상들만의 법도가 있다면, 그 법도의 허점을 찾으면 되는 것이지. 금산아 보부상의 가입 조건을 알아보고 네가 가입해서 그 보부상의 법도와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좀 알아 오거라.”
금산은 갑자기 일이 이렇게 변해 버리자 정신이 없었다.
졸지에 예전의 목표였던 보부상이 되기 위해 경기도의 도접장(都接長)을 찾아갔다.
***
“자네의 우람한 덩치에 단단한 모습을 보니 자네는 부상(負商)을 위해 타고난 것이구만. 참으로 듬직하여 좋아 보이네. 그래, 소금 장사를 했다고?”
흰 수염을 턱밑으로 탐스럽게 기른 도접장 길용은 금산의 덩치가 마음에 든다며 몇 번이고 칭찬했다.
“네. 소금장수로 돈을 모아 가입비를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장사하셨으니 우리 형제가 되기 충분하네. 이리 좋은 형제를 받아들이는데, 어찌 아무 날에 하겠는가? 마침 8도 도접장이 이달 말에 모이기로 했으니 그날 다른 형제들이 많을 때 그때 우리 형제가 되는 것으로 합세. 그날은 나름대로 가리고 가려 뽑은 날짜이니 형제의 앞길에도 좋을 것이네.”
“날을 가려 뽑은 날이 있다면 그렇게 해야지요. 헌데, 그날까지 그냥 쉬고 있기가 뭐해서 그러한데, 보부상의 규율이 쓰여진 그런 것은 없사옵니까?”
“오! 글도 아는가? 그렇다면 일일이 설명을 해주지 않아도 되지. 언문과 같이 쓰여 있으니 모르는 한자가 나와도 그 뜻을 알아볼 수 있을걸세.”
금산은 규율집을 들어 꼼꼼히 읽고 길용에게 물었고, 길용은 글을 안다는 이유로 문무를 겸비했다며 대단하다고 금산을 칭찬했다.
“아 그런데, 같이 소금 장사를 하던 친구도 보부상이 되고 싶어 하는데, 그날 같이 데리고 와도 되겠습니까요?”
“뭐 미리 가입비로 백미 한 섬만 미리 낸다면 괜찮네.”
“네 그럼 그날 같이 오도록 하겠습니다요.”
***
“도련님. 호조판서님이 충고해주신 것이 맞았습니다요. 보부상의 전국 8도 도접장들이 모이기로 했다고 하는데, 제가 이것저것 물어보며 확인해 보니, 우리 본자기 때문에 8도 도접장들이 오는 듯 했습니다요.”
“이런. 보부상의 규율집은 가져왔느냐? 한자와 언문 두 종류라. 어디 보자.”
원종은 보부상들이 지켜야 하는 규율들을 보는데, 길에서 만난 이를 도와야 한다는 기본적인 도덕규율부터,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성 문제 규율까지 보부상이 지켜야 하거나 하지 않아야 되는 것들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내 예상처럼 양반은 보부상이 되지 못한다와 같은 항목은 없었다.
“역시. 없구나. 설마 양반이 보부상이 될까 싶었겠지. 이거면 되었다. 허점을 찾았어.”
원종은 이달 말 도접장들이 모일 때 일을 한 번에 처리하기로 했다.
***
“먼 길을 마다하고 다들 와주셨으니 다행이외다.”
경기도의 도접장 길용은 전국 팔도에서 올라온 도접장들을 한번 둘러보았다.
작은 방 가득히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니 예전 총접장을 선출하고자 모였던 일 이후 오늘이 처음이었다.
“총접장을 뽑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다고 하니 만사를 제쳐두고 왔소이다. 도대체 무슨 문제요?”
“성질이 참으로 급하시외다. 바로 이 물건 때문이오.”
경기도의 도접장 길용은 조심스레 상자에서 물건을 꺼내었는데, 금박으로 글씨가 들어간 본자기였다.
그 뒤로 접시 두벌과 손잡이 잔이 한 벌 나왔는데, 지방에서 올라와 처음으로 본자기를 보는 사람은 그 뽀얀 흰색과 금박이 뿜어내는 금빛에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귀물이 어디에서 났소이까? 쉽게 구하기 힘든 물건 같은데.”
“맞소이다. 나도 이걸 처음 보았을 때는 옥황상제가 쓰는 물건이 하늘에서 떨어진 줄 알았소.”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겠구만. 우리 같은 소상인은 그림의 떡이겠어.”
“지금 이 문병과 접시, 잔은 기존 한 조에서 반만 가져온 것이외다. 온전한 한 조는 백미 10섬의 가격으로 팔리고 있소이다.”
“백미 10섬? 가격이 장난 아니구만. 중국에서 수입해 오는 거요?”
“중국에도 이런 물건을 만들지 못한다고 하오이다. 그래서 오늘 모이자고 한 것이오. 이 본도기는 사옹원 분원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우리의 전매권에 걸면 걸리는 물건이오.”
“사옹원 분원에서? 거기서 이런 것이 나왔다는 말이오? 그럼 호조에서 관리하고 있소? 생산량은 어떻게 되는 것이오?”
상행으로 밥을 먹고 사는 이들이었기에 본자기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보았고 다들 본자기를 취급하는 이야기를 쏟아 내었다.
“조용조용 하시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소.”
“문제? 무슨 문제요?”
“이 본자기라고 하는 것을 도공들이 만든 게 아니라 양반이 만들었다는 거요. 더구나 한명회와 신숙주 같은 실세들의 비호를 받는 자라 섣불리 건드릴 수가 없는 자요.”
“대신들과 연관이 있는 자라 건들기 힘들다라... 그럼 오늘 왜 모이라고 한 거요?”
“말을 끝까지 들어주시오. 다들 알다시피 사옹원 분원은 부역으로 전국에서 온 도공들이 모여 일을 하고 있소.”
“그렇다면 부역 중인 도공들을 빼돌리자는 것이오?”
“맞소이다. 각 도접장들이 각 지역 출신의 도공들을 빼내자는 거요. 하지만, 부역 중인 자를 마음대로 빼낼 수 없으니 3년 후 부역이 끝나면 그때 우리 보부상들의 도자기 가마로 불러들이는 거요.”
“부역이 끝나기까지 도공들에게 공을 들여야 하겠구만.”
“흠. 그렇다면 이거 오랫동안 추진해야 하겠는데. 토기라는 것은 쉽게 만들어 낼 수 있겠지만, 이 본자기는 아마도 만드는 게 어려울 것이야. 도공을 데리고 와서도 저 물건같이 비싼 것은 몇 년이나 걸려야 생산할 수도 있을 거야.”
“이거 수지타산을 제대로 계산해봐야 하는 거구만.”
각 지방의 도접장들이 나름의 계산을 하며, 머리를 굴릴 때 금산이를 앞세워 원종이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아니, 수지타산을 할 필요는 없을 거네.”
“응? 자네는 금산이 아닌가? 보부상의 가입은 조금 더 있다가 진행할 것이네. 나가 있게나. 엇? 당신은 누구요? 아무리 반가의 사람이라고는 하나, 이리 마음대로 이곳에 들어오시면 아니 되오.”
“나도 보부상에 가입하러 온 것이네. 금산이를 통해 이야기를 하니 오늘 오라고 하지 않았는가.”
“에? 반가의 자손이 보부상?”
“말이 되는 소리인가? 양반이 보부상이라니. 옷을 보니 나름 잘 사는 댁 도령 같은데.”
“여기서 농을 부리시면 아니 되니 나가주시오.”
“허허. 이 사람들 어디서 농만 들었나. 나는 진짜 보부상이 되기 위해 온 것이네. 그리고 저 본자기를 만든 것이 바로 나네.”
“에? 정말이요?”
“저 어린 양반이?”
“못 믿겠으면 돌아가도 되겠소? 난 나름대로 보부상들에게 거래를 제안하러 온 것인데, 이리 사람을 믿지 못해서야 원. 쯧쯧.”
“자... 잠시만 멈춰주시오! 정녕. 저 본자기를 만드신 분이 맞소이까? 내 듣기로는...”
길용은 한명회와 신숙주의 총애를 받고 있는 가패의 주인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정녕 전원종 제조가 맞소이까?”
“이제 이야기할 준비가 되었소? 금산아 의자 하나 가져오거라.”
원종은 금산이 가져온 의자를 도접장들이 앉아 있는 사이에 두고는 앉았다.
“그래 듣기로는 사옹원 분원의 도공들을 빼서 각자 만든 가마에서 저 본자기를 생산할 거라고?”
“허허허. 오해요. 오해입니다요.”
길용은 물론이고 도접장들은 웃으며 아니라고 부인했다.
“오해라고? 그럼 도공들을 보내주지 않아도 되는 것이오?”
“억! 그건 또 아니외다.”
“나부터 보내주시오.”
“하하하 바로 들통날 거짓말은 왜 하는 것이오. 다들 장사꾼의 신용은 없는 것이오?”
비꼬며 웃는 원종의 말에 몇몇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 본자기가 돈이 된다고는 하나 각자 가마를 만들고 제작하려면 힘이 들 것이오. 그래서 내 하나 제안할 것이 있소. 도접장들에게 제안하는 게 아니라, 보부상의 모임체인 임방에 제안을 하는 것이오. 받겠소?”
“흠. 우선 들어보고 판단하면 아니 되오이까?”
“그럼, 나부터 먼저 보부상으로 가입시켜 주시오. 이미 가입비로 백미 한섬은 내었소.”
“아무리 가입비를 내었다고는 하나 양반이 보부상이 되는 것이 가당키나 하는 일이옵니까?”
“왜 안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이리들 눈이 코앞에 달려서야. 쯧쯧. 눈이 이마에 달린 사람들처럼 멀리 내다보게.”
“그러면, 보부상에 가입하시면 어떤 장사를 하실 겁니까?”
“당연히 토기 장사네. 사옹원 분원에서 나오는 토기들을 보부상에게 맡겨 유통 시킬거네. 천 명의 도공이 만들어 내는 토기 량을 다 감당할 수 있겠나?”
“그럼 저 본자기도 저희에게 유통을 맡기실 겁니까?”
“물론.”
경기도 도접장 길용은 생각지도 않게 일이 진행되자 입이 절로 벌어졌다.
길용을 제외한 다른 도접장들도 큰 투자 없이 비싼 물건을 다룰 수 있게 되자 한양으로 올라온 값을 했다며 좋아했다.
“우선은 일반 토기부터 맡길 것이네. 그리고 10년 후에 본자기의 유통을 맡길 것이니 미리 너무 좋아하지는 말게.”
“10년?”
“왜 10년 이외까?”
“나도 저걸 만들기 위해 들어간 돈이 많은데 그건 회수해야 하지 않겠나?”
다른 이들이 왜 10년인지 고민하며 가마를 새로 만드는 비용과 10년을 기다려 유통하는 비용을 비교했는데, 길용은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내 듣기로 한 달에 10조의 물량만이 들어 온다고 들었다. 1년이면 120조, 10년이면 1200조다. 손에 익어 수량이 늘어난다고 해도 1500조 정도다. 양반들이 하나씩 다 산다고 보면 10년이 지나도 수요는 있을 것이다. 아니지. 한 집에 한 조만 살까, 혼수나 뇌물이나 해서 들어가는 수요까지 치면 10년이 지나도 계속 잘 팔릴만한 물건이다.’
“10년이 지난 이후에는 본자기의 유통을 확실히 맡기겠소이까?”
“약속하지. 내가 보부상이 된다면 그때는 서로가 형제들이니 더 확실하지 않겠나? 나는 여러 토기들을 자네들을 통해 편하게 팔 수 있는 이득이 있으니 서로에게 이득이네.”
“보부상이 되면 양반이라고 해도 특별 대우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저 전매품의 거래에 나도 참여를 하고 싶을 뿐이네.”
경기도 도접장 길용은 다른 도접장들과 이야기를 했다.
이미 계산을 하고 수지타산을 맞추어본 이들은 3년 후 도공을 빼돌려 가마를 만들어 생산하는데 들어가는 비용보다는 투자금 없이 10년이 지난 후 물건을 유통할 수 있는 것이 이득이라고 결과를 내었다.
“좋습니다. 보부상으로 받아들이겠소이다. 이제 우리는 형제요.”
“나이 든 형들에게 반말을 하는 건 이해해 주시오. 하하하.”
원종은 팔도의 도접장들에게 분원의 토기들을 유통하는 계약을 했고, 보부상들이 전매하는 물건들도 받아 팔기로 약정을 했다.
***
“저 도련님. 우리에게 이득인 계약을 어느 정도 했다고는 하나 10년 후에는 본자기를 넘겨줘야 하는데 그러면 손해가 아니온지요.”
“금산아 10년이면 뭐가 변한다고 하더냐?”
“강산이 변한다고들 하지요.”
“그래. 그 10년 후에는 저 도접장들이 그대로 도접장이겠느냐? 그리고, 내가 그냥 단순한 보부상으로 임방에서 조용히 있겠느냐?”
“아, 그러면... 총접장이 되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총접장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10년이면 조폭 양아치 같은 보부상단을 내 수족으로 만들기에는 충분한 시간 아니겠느냐?”
금산은 1년도 아니라 10년 후를 계획하는 원종의 계획을 듣자 소름이 돋았다.
“삼식이에게도 이야기해두었지만, 주먹 좀 쓰는 아이들을 10년간 키워야 한다. 네가 바쁠 것이다. 할 수 있겠느냐?”
“미... 믿고 맡겨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