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103화 (103/327)

103. 약속하기로 해요. (2)

“네 맞습니다. 하지만, 세종대왕께서 하셨던 것처럼 단순히 통보를 찍어 유통하는 방법이라면 다시 한다고 해도 실패할 것이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어떻게 화폐를 만들어 유통해야 화폐가 돌게 된다고 생각하는가?”

한명회도 화폐를 사용하면 생기게 되는 이득을 신숙주에게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득이 있음에도 추진하지 못하는 이유는 화폐를 찍어 내더라도 제대로 유통이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통보를 만들 때 예전처럼 구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은으로 통보를 만들어야 합니다.”

“은으로? 그렇게 하면 칭량금은화(秤量金銀貨 무게로 거래되는 금은)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아주 큰 차이가 있사옵니다. 은으로 통보를 만들게 되면 통보가 권위를 가지게 될 것이옵니다.”

“권위? 통보에 권위가 어떻게 생긴다는 말인가?”

“통보에 권위가 생긴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세종대왕께서 만들어 유통한 조선통보를 예로 들겠습니다. 대왕께서는 고액은 종이돈인 저화로 쓰고, 소액은 구리 돈인 통보를 쓰게 하면 사람들이 손쉽게 사용할 것으로 생각하셨습니다. 허나, 저화는 종이일 뿐입니다. 찢어지기 쉽고, 훼손되기 쉬우며, 종이 자체가 가지는 가치가 거의 없습니다.”

말을 하다 말고 원종은 소매에서 심하게 훼손된 종이돈 저화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이 저화가 100냥짜리 저화라고 하더라도 훼손되어 알아보지 못하면 그 100냥의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그 누구도 이 종이가 100냥짜리인 것을 인정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 구리로 만들어진 통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통보 1전의 가치가 같은 무게의 구리보다 싸지게 되면, 사람들은 통보를 녹여 유기그릇을 만드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당시 조선에선 구리가 나지 않았기에 구리를 모두 왜에서 수입해서 썼었다. 그러다 보니, 수입이 원활하지 않을 때는 구릿값이 폭등해 구리보다 싸진 통보를 녹여 쓰는 일이 빈번했었다.

“이는 통보의 화폐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옵니다. 통보가 은으로 만들어져 있다면 그 누가 훼손하려 하겠습니까? 그래서 통보 자체를 은으로 만들어 통보에 가치와 권위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돈의 교환 가치보다 원재료의 가치를 올려 통보의 가치를 올리겠다는 말이로군.”

“네. 은으로 만든 통보가 큰 금액의 가치를 가져 거래되기 시작한다면, 자연스레 소액을 거래하기 위한 동전의 필요성이 대두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은으로 만든 고액권의 권위와 가치가 그대로 구리로 만든 소액 동전에도 생기게 될 것입니다.”

“아주 좋은 생각이야. 허나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구만. 통보를 만들 그 많은 은은 어디서 구할 것인가? 조선통보가 40만 냥 조금 넘게 만들었으니 은으로 만든 통보는 못 해도 10만 냥은 찍어야 할 것인데, 그 은은 어디서 가져올 것인가?”

“그야 당연히...”

당연히 함경도 단천 은광에서 채굴하면 되는 게 아닙니까? 하며 이야길 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시기가 맞지 않았다.

단천 은광이 주목받게 되는 것은 잘산군의 아들인 연산군 시절 연은 분리법이 나오고 나서부터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단천에서 은을 채굴하긴 했지만, 태종 7년 전국의 금광과 은광을 폐쇄하면서 단천 은광도 문을 닫았었다.

“다시 단천 은광에서 채굴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은광을 다시 열자라... 전 제조는 왜 태종 대왕이 단천 은광을 폐쇄한 것인지 아는가?”

“네. 알고 있습니다. 채굴 기술이 없어 폐쇄하였다고 하지만, 중국에서 금, 은광이 있으면 금과 은을 조공하라고 압박을 하니 그 압박을 피하고자 폐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네. 그렇다면, 화폐를 만들기 위해 은광을 다시 열면 어떻게 되겠는가? 명나라가 가만히 있겠는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시발 중국 놈들. 욕이 절로 나왔다.

유럽은 은으로 만든 은화라면 어느 나라에 가서든 그 가치를 인정받았기에 환율이라는 것으로 그 가치를 재평가하여 그대로 다른 나라의 은화를 인정하고 사용했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는 금과 은을 먹어 치우는 중국이란 놈이 버티고 있었다.

며칠간 카페에서 저화와 포로 계산하며 스트레스를 받았기에 은본위제(銀本位制)가 답이라고 화폐의 유통도 그렇게 바뀌어야 한다고 고민하고 고심했었다.

하지만, 거기에 민폐 중국을 변수로 넣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세종대왕이라고 돈의 가치 자체를 높여 귀하게 여기는 방법을 몰랐을까. 천재 축에 드는 신숙주는 물론이고 양성지도 그 방법을 알았을 터였다.

하지만, 다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조선 초 공녀와 말을 조공으로 바치라고 해서 끌고 갔듯이 금과 은도 조공하라고 했었고, 결국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는 자원이 있었음에도 빼앗길까 두려워 조선은 개발을 포기했었다.

그렇게 조선은 가지고 있는 자원조차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쇠락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쓰지 못한 자원은 일제 치하 왜놈들이 희희낙락하며 뜯어가는 것이 역사였다.

결국, 통보를 만들 수 있는 금속은 구리밖에 없었고, 통보 자체의 가치를 올리는 방법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리고, 그 구리도 채굴이 안되다 보니 왜에서 수입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었다.

스트레스를 줄여준다는 달달한 과자를 먹고 있어도 암울해졌다.

“왜 보한재(신숙주의 호)가 은으로 통보를 만드는 쉬운 방법을 쓰지 않고, 상업을 부흥시켜 자연적으로 돈의 필요성을 느끼게 만들려 하는지 이제 알겠는가?”

“네. 이제야 보한재 대감의 고뇌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깨우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하. 깨달음을 얻었다면 되었네. 아직 어린 자네가 이 정도의 식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이. 아니 오히려 또래 중에서는 월등할 것이야. 그 누가 나라의 돈이 돌아가는 것에 이리 고민을 했겠나? 미래를 맡길 수 있는 동량지재를 오늘 확인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쁘이.”

한명회는 즐거운 이야기를 했다는 듯이 웃어댔다.

“지금 마시는 이 어매일가노의 의미에 딱 맞는 이야기였어. 옳은 일에 대해 말하고 논할 때 필요한 음료라는 이 이름이 참으로 딱이야. 오늘은 이만 가네.”

***

“휴우...”

“군마마. 무슨 일로 그리 한숨을 쉬시는 것입니까?”

“춘봉가패에서 장인어른과 전 제조가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답답하여 그렇습니다.”

“은광이 있어도 채굴하지 못하는 상황이 갑갑하신 것이옵니까?”

“뭐, 그것도 있지만, 저보다 어린 전 제조의 식견을 제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아 그렇습니다. 전 제조는 장인어른과 논쟁을 벌일 만큼 화폐의 유통에 대한 지식이 있는데, 저는 그런 식견을 가지지 못해서 가슴이 답답합니다.”

한명회는 사위인 잘산군의 고민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자괴감일지 몰라도 다 늙어가는 한명회의 눈에는 자기 발전을 위해 고민하는 될성싶은 떡잎의 고뇌로 보였다.

“마마. 하지 않아도 될 고민을 지금 하고 계신 것이옵니다.”

“...왜 하지 않아도 되는 고민이라 생각하십니까? 위로 형님도 계시고 전하가 젊고 후세가 있다손 치더라도 종친 된 자로서 나라 경제를 생각하며 고민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 않습니까?”

“마마. 그 이야기가 아니옵니다. 전 제조가 그런 재주를 가지게 된 것은 태생이 들판에 핀 꽃으로 힘든 역경을 겪어내었기에 그런 식견과 재주를 갖출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저는 어떤 꽃입니까?”

“종친은 비원(祕苑)에 핀 꽃으로 들꽃과는 태생이 다르옵니다. 들꽃이 자극적인 향을 피워 벌과 나비를 불러들여야 하지만, 비원에 핀 꽃은 향을 내지 않아도 고개를 숙이며 찾아오는 법이 옵니다.”

“같은 꽃이라도 위치가 다르고 그 쓰임새가 다르다는 말입니까?”

“맞습니다. 전 제조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나, 결국 마마의 발아래 서게 되는 신하일 뿐입니다. 그의 재주를 부러워하고 같아지고 싶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를 어찌 쓸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종친이 가져야 할 사고방식이옵니다.”

“태생에 따른 사고방식이라... 장인어른의 충고를 들으니 확실히 달리 생각이 됩니다.”

잘산군은 대답하며 한명회를 보았다.

장인어른인 한명회의 재주는 난(亂)을 일으켜 왕을 바꿀 만했지만, 결국 그도 그의 말처럼 발아래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신하일 뿐이었다.

천하를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도 결국, 왕과 종친을 위해 일하는 일꾼일 뿐이었다.

그런 장인을 보자 잘산군은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잘산군은 물론이고 한명회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다.

한명회 자신도 들꽃으로 그 향기를 퍼트렸기에 난(亂)을 일으킬 힘을 얻을 수 있었다는 그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

“주인님. 추가로 야외 탁자를 놓았습니다.”

잘산군이 가패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 구경하길 좋아했듯이, 다른 양반들도 야외 탁자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을 구경하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웃돈을 주고 옆의 민가를 두 채나 더 사서 허물었고, 지붕만 있는 야외 테라스로 변경을 했다.

그로 인해 자리도 넓어지고 혼잡함이 사라져 여유가 생기자 육조거리의 관리는 물론이고 할 일없는 한량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친인들과 삼삼오오 시를 짓고 떠들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앞에는 어매일가노가 한 잔씩 놓여 있었다.

“주인님. 신숙주 대감께서 사람을 보내셨는데, 언제쯤 올 것인지 확답을 달라고 합니다요.”

가패의 여유는 여기까지였다.

신숙주 대감이 시간 확인까지 못 박는 이유는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혼사 이야길 하려고 몇 번이나 집으로 오라고 했으나 가지 않고 버텼기에 이제는 약속을 어기지 않게 시간 확답을 받으려는 것이었다.

“내일 미(未오후 1시~3시)시에 간다고 전해주게. 그리고, 점심은 먹고 갈 것이니 따로 차리지 말아 달라고 전해주고.”

“하하하. 어서 오게나. 자네가 오늘 온다는 말에 어깨춤이 절로 나오더군. 자자 이리 오르게. 내 아들들을 소개해주지.”

신숙주가 이끌어 사랑에 오르니 여섯 명의 중년인들이 있었는데, 신숙주의 아들들이었다.

“아니, 저런 덜 큰 놈 때문에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막고 기다리게 한 겁니까?”

“어서 앉지 못하겠느냐!”

신숙주의 호통에 밖으로 나가려던 자는 다시 주저앉았는데, 그의 얼굴에는 불만이 한가득했다.

“저 얼굴표정도 숨기지 못하는 이가 넷째 아들인 신정이지. 언제쯤 철이 들 것인지. 쯧쯧쯧.”

신숙주가 철없다고 혀를 찼지만, 이미 과거급제하여 현재 병조참의에 올라있었다.

이시애의 난 때 전사한 둘째 신면에 이어 가장 출중하다고 평가받는 아들이기도 했다.

물론, 신숙주 사후 호부견자(虎父犬子)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성종의 인신(印信 왕의 인감)을 위조하여 다른 이의 재산을 강탈하려다 사사(賜死)되는데, 명문 중의 명문이던 고령 신씨 가문에 똥칠을 하는 사람이었다.

“딸이 없는 신형과 신필을 제외한 넷이 보기에는 전 제조가 어떠냐? 사위로 삼을 만한지 묻는 것이다.”

갑자기 사윗감이라고 훅 들어오게 이야길 하니 불만 가득했던 신정도 호기심이 인다는 눈으로 이리저리 원종을 살폈다.

“그리고, 전 제조는 저 넷 중에서 장인으로 삼으면 좋을 것 같은 이가 있는가?”

“아니 아버지는 무슨 손녀의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를 관상만 보고 결정을 하려 하십니까?”

“너는 내가 관상만 보고 손녀사위를 정하는 위인으로 보이느냐?”

관상으로 혼처를 정하는 것 같기에 짜증 내던 신정은 아버지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 신숙주의 일 처리가 어떠한지 본인이 더 잘 알기에 이렇게 얼굴만 보고 결정할 정도라면, 이미 다른 준비는 끝난 것으로 봐야 했다.

“그럼 내가 먼저 물어보지. 그래 내가 자네 장인이 될 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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