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춘봉가패(春逢加貝). (2)
“팥빵이라면 팥을 밀가루처럼 갈아서 만드는 것이옵니까?”
“아니, 팥은 속에 들어가는 소로 쓰인다.”
“아하! 그럼, 버거빵 속에 팥을 넣어서 만드는 거군요. 빵 반죽을 하고 그 속에 팥을 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만들기 쉬울 것 같습니다.”
참렬이의 말처럼 빵 사이에 단팥을 넣으면 단팥빵이긴 했다.
하지만, 왠지 참렬이에게 그런 단순한 단팥빵 외에 다른 빵을 알려줘야 할 것 같았다.
참렬이는 처음 배운 것이 제빵 계열이라 그런지 뭐든 반죽해서 빵처럼 난로 오븐에 넣으려는 성향이 강했는데, 이렇게 하다간, 녀석의 요리 재능이 오븐이란 공간에 가두어져 발전이 없을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네 말대로 그렇게 난로에 구워내면 되지만, 가패에는 난로가 2개 밖에 없다. 다른 빵을 굽는다고 난로를 쓸 수 없으면 어찌하겠느냐?”
“아, 그럼 난로를 하나 더 만들... 기에는 비용이나 그런 부분이 걸리는군요.”
참렬이는 내 눈치를 슬그머니 보더니 맞는 답인 것 같자 말을 이었다.
“그럼, 떡처럼 앉히거나 구워내는 팥빵으로 가야겠군요.”
“그래 맞다. 팥떡은 과정이 더 복잡하여 바로바로 만들어 낼 수가 없으니, 빵 반죽을 해서 굽는 형태의 팥빵을 만들어 보자구나.”
불판에 빵 반죽을 바로 구워내는 것의 대표는 서양으로 치면 팬케이크, 동양으로 치면 도라야끼(どらやき)가 있었다.
‘고객의 눈앞에서 바로 구워준다는 즉흥성 있는 푸드 쇼의 장점과 소를 바꿔서 여러 변형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
팬케이크는 말 그대로 팬에 구운 케이크를 말하는 것이었고, 도라야끼의 도라(銅鑼)는 징을 뜻하는 말이고 야끼(やき)는 굽는다는 말로 그대로 번역하면 징을 굽는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가 익히 아는 사물놀이에 쓰이는 큰 징이 아니라,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징인 동라(銅鑼)라는 작은 징을 뜻한다.
동라 징처럼 둥글납작하게 구워지는 모양으로 인해 도라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사실 서양의 팬케이크와 그 모양이나 색, 재료가 같았다.
팬 케이크와 다른 점은 일본에서는 구워진 빵을 반으로 접어 그 안에 팥소를 넣어 먹지만, 서양은 그냥 빵에 시럽을 뿌려 먹는 차이가 있었다.
현대인들이 흔히 아는 위아래 빵 사이에 팥이나 크림, 밤, 고구마무스를 넣어 먹는 형태는 물산이 풍부해지는 1960년대 이후로 나온 형태였다.
물론, 그러한 발전형을 우리는 지금 선보일 것이고 기록을 남겨 우리가 먼저 해 먹었다고 널리 알릴 것이다.
“먼저 알맞은 불판부터 만들고 준비할 게 많겠군.”
널찍한 불판에 여러 개를 한 번에 구워내기 위해 야장에게 무쇠로 만든 불판을 주문했고, 속에 들어가는 단팥 소를 공급해 줄 수 있는 자를 수소문했다.
하지만, 팥이 콩보다 비싸기도 하고, 거기에 조청을 넣어 삶은 단팥을 만들어 공급해야 했기에 단팥을 공급할수 있는 상인 자체가 없었다.
“조청은 엿쟁이들에게 사 올 수는 있을 것 같긴 한데, 제가 엿쟁이들이 조청 만드는 것을 보니 쌀을 쓰지 않고 가격이 저렴한 싸라기로 조청을 만들고는 마치 쌀로 만드는 것처럼 가격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금산을 시켜 도성 밖의 엿쟁이들에게 조청을 공급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더니 다들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꼼수로 조청을 만들어 파는 이들밖에 없었다.
“엿쟁이들은 신뢰가 가지 않고 제대로 된 조청은 다들 집안에서 자기들 먹을 만큼만 만드니 어디서 조청을 사 오는 것도 막막하구나.”
이제까지 조청이나 꿀을 내 물건 마냥 들고 와서 썼던 한명회의 부유함이 이제야 체감되었다.
판매를 위한 대용량의 조청이 필요했는데, 이건 직접 하는 게 아니면 답이 없었다.
‘프랜차이즈에 물건을 납품해주는 그런 식자재 유통사가 그립구나.’
괜히 팥빵을 하자고 했나. 하는 후회도 되었지만, 다른 빵으로 도넛이나 꽈배기를 했더라도 애로사항은 비슷했을 것 같긴 했다.
‘그리고, 지금 단팥을 만들어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되면 다른 곳에도 두루두루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아예 사람을 두고 부자재를 책임질 수 있는 인재를 키워야 할 것 같은데.’
“금산아 삼식이나 박복이가 한양으로 올라오기 전에 사람을 데려다 써야 하는데, 어디에서 사람을 구할 수 있겠느냐?”
“종으로 사람을 구하신다면야 자매(自賣)하는 이들을 구하시는 가장 좋을 것입니다요. 헌데, 그렇게 자매 하는 자를 찾는데 시일이 걸릴 것이옵니다. 그래서 한양의 양반네들이 급히 사람 쓸 일이 생기면 청계천이나 마포로 가서 걸인을 데려와 씁니다.”
“걸인? 거지?”
“네. 청계천까지 흘러들어와 장타령을하며 밥을 빌어먹는 사지 멀쩡한 놈들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유리걸식하게 되어 청계천으로 흘러들어오는 자들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흘러들어오게 되는 건 주로 어떤 사연이냐?”
“수해를 입거나 해서 아예 고향이 쓸려나가 돌아갈 곳이 없는 경우도 있고, 북방에서 들어온 백정같은 자들이나 북방에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온 개척민 같은 자들도 있습니다.”
“흠. 걸인이라... 아무리 걸인이라도 데려와 종을 만드는 것은 좀 그런데.”
“도련님 이건 부정적으로만 보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통은 양반네들이 집안의 가노로 들여 먹고살게 해주니 배를 곯는 걸인보다는 종이 되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좋을 것입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굶어 죽지 않게 잘 먹이는 것만으로도 주인이 할 일은 다 했다고 여기는 시대이다 보니 자유보다는 종이 되어 배부르게 잘 먹고 잘사는 게 더 좋다고 여기는 이들도 많았다.
강제로 거지를 데려오는 것은 좀 그렇겠지만, 거지를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거지는 데리고 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금산과 참렬이를 데리고 청계천과 마포 인근을 둘러보다 북방 개척민으로 갔다가 모든 걸 잃고 내려온 함덕이라는 자를 만났고, 그의 처와 두 아이를 거두었다.
30대의 함덕은 고생을 해서 그런지 본래 나이보다 더 들어 보였고, 그의 처도 비쩍 말라 안고 있는 젖먹이 젓이나 제대로 먹이고 있는지 걱정이 되는 자들이었다.
“도령 어르신! 나도 좀 데리고 가주면 아니 되겠소?”
멀리서 우리가 함덕 일가를 데려가는 걸 보곤 눈퉁이가 퍼렇게 멍이 든 젊은 거지가 달려와 매달렸다.
“밭일이든 산일이든 시키면 하겠으니 나도 좀 데려가 주시오. 빌어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못하겠소이다.”
“너는 뭘 하다 여기로 흘러들어온 것이냐?”
“날 때부터 동가숙 서가식 하며 살아서 날 때부터 이 바닥입죠.”
“그럼 하루 이틀이 아니지 않으냐.”
“에이.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않수. 그래도 이거 하나는 확실하우. 빌어먹을 짓도 이제는 못하겠수다. 두들겨 맞더라도 이유나 알고 두들겨 맞아야지. 고기 한 덩이를 얻어와 받쳐도 이유 없이 두들겨 패니 더러워서 이 짓도 못 해 먹겠소이다.”
거지 패들에게도 텃세 같은 게 있는 건지 두들겨 맞는 게 신물이 나서 거지 생활을 접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네가 게으름을 피우면 여기 금산이 지금 멍든 것보다 더 심하게 매질을 할 수도 있을 터인데 괜찮겠느냐?”
“에이. 매질을 하더라도 매질 당하는 이유가 확실하다면야 맞아야지 어쩌겠수. 그저 이유 없이 때리지만 마슈 그럼 똥간에서 잠을 자고 해도 괜찮수다.”
천하장사인 금산에게 두들겨 맞는 것도 이유가 있다면 괜찮다는 놈의 말을 들으니 어떻게 보면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데려가 주는 것이오? 희희희. 희재올시다. 자자 어서 갑시다요. 가요!”
***
“흠. 이렇게 보니 또 괜찮아 보이는구나.”
진짜 거지 같던 함덕 일가와 희재란 녀석을 씻기고 제대로 된 옷을 입히자 말끔한 일꾼처럼 보였다.
“자네들이 할 일은 조청을 만드는 일이네. 온종일 불 앞에서 일해야 하는 고된 일이야. 하지만, 매일 매일 조청을 만들어 내고 한다면 먹는 걱정은 없을 것이고 일 년에 세 번 분기별로 곡식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일이 힘들더라도 단내 나는 향기를 맡으면 고비를 넘길 수 있을 겁니다요. 희희희.”
“그래. 조청은 조제해서 만든 꿀이라는 뜻이다. 이 조청을 만들려면 먼저 식혜부터 만들어야 한다. 엿기름은 곡물 상인에게서 공급받기로 했으니 함덕네가 매일 식혜를 담아야 하네.”
보리에 물을 뿌려 싹을 틔운 후에 바짝 말린 것이 엿기름인데, 잘 모르는 사람은 엿을 만들 때 쓰이는 기름(油)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기름은 ‘길우다’, ‘기루다’의 명사형으로 기른다는 뜻을 가진 의미였다. 즉, 엿을 키우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 말린 엿기름을 면포에 싸서 물에 조물조물 주물러 주면 뿌연 전분물과 아밀레이스(아밀라아제)가 나오는데, 사람의 침 속에도 있는 그 아밀레이스가 곡물의 녹말을 엿당으로 만들어 단맛을 내는 것이었다.
엿기름에서 뽑아낸 물을 되게 지은 밥에 넣어주고, 상온에서 발효 후 끓여주면 식혜가 되는 것이었다.
“헉! 이게 끝이 아닙니까?”
희재는 식혜를 끓여 내어 밥알이 뜨자 이제 다 된 거라고 안심하며 주저앉았지만, 이제 시작이었다.
“이제 조청을 만드는 재료가 준비된 것이다. 가마솥에 면포를 펼쳐 잡고 있거라.”
나와 함덕네, 희재가 면포를 잡고 있으면 금산이 함덕이와 같이 식혜가 든 솥의 식혜를 부었는데, 삭힌 밥알은 조청을 만드는 데 필요 없기 때문이었다.
밥알에서 수분을 꾹꾹 눌러 짜내며 가마솥의 3할 정도가 식혜 물로 들어차자 그제야 힘든 일은 끝이 난 것이었다.
“이제 세 시진은 불 앞에 앉아 이 식혜 물을 졸여야 한다.”
“세, 세시진이나요?”
“그래. 나무 주걱으로 눌어붙지 않게 계속 저어주며 세 시진이다.”
“저는 이제 아까워서 조청 못먹겠습니다요.”
희재는 조청에 이리 공이 많이 들어가는지 몰랐다며 학을 뗐는데, 세 시진 동안 저어주는 일을 시키자 얼굴이 파래져서 나무 주걱을 저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이런 힘든 일을 해오신 것이다. 함덕네만 하더라도 아무 말 않고 일을 하는데, 네 녀석은 왜 이리 많은 것이냐? 왠지 네 녀석이 두들겨 맞은 이유를 알 것 같구나.”
“아니... 그게 아니라... 아, 아닙니다요.”
희재는 다시 말을 꺼내었지만, 금산의 굳어가는 표정을 보곤 입을 다물고 나무 주걱을 젓기만 했다.
“참렬아 저 식혜 물이 노란 갈색빛의 끈적이는 조청이 되면 그때 삶은 팥을 넣어 문대어주면 단팥이 되는 것이다.”
“이 단팥이 들어간다면 팥빵이 맛이 없을 수가 없을 겁니다요.”
“그렇지. 아마 가수저라와 더불어 우리 춘봉가패의 명물이 될 것이다.”
참렬이도 처음이기에 희재와 같이 앉아 불을 지피고 조청을 저어주는 일을 같이 시켰다.
***
깨어진 기와 조각을 그릇삼아 음식이 올려져 있었는데, 기와 조각을 마구잡이로 발로 차버리는 이가 있었다.
“왜 오늘은 이거밖에 없는 거야? 호조판서의 집에 제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어찌 육포 뭉개진 것밖에 없냔 말이다!”
떨어지고 해진 옷을 입고 있었지만, 체구는 장대한 자가 화를 내며 큰소리를 치자 거지들은 눈치를 보며 그저 오돌오돌 떨 뿐이었다.
“이 개 놈의 종자들이 제대로 구걸을 하지 않은 것이겠지. 일단 다들 두들겨 맞자 눈탱이가 반탱이가 되고 이빨이 서너 개씩은 빠져야 제대로 구걸을 해올 수 있을터!”
거지 왕초로 보이는 녀석은 날래게 몸을 움직여 닥치는 대로 거지들을 두들겨 팼다.
“왕초! 살려주십시오! 젖먹이를 안고 있는 비루먹은 계집 가족이 없어져서 구걸을 제대로 못 받은 것이옵니다요! 아야얏!”
“헉헉. 머어? 그 개척민 그놈들? 그러고 보니 그놈들은 어디로 갔느냐? 또 주접이 희재 놈도 안 보이는데 어디 간게냐?”
“웬 어린 도령이 데려갔수다.”
“뭐? 네놈은 그걸 안 막고 뭐 한 게야?”
왕초는 거지들을 데려가는데도 멀뚱히 보고 있었다고 또다시 거지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아악, 살려주쇼. 그 도령을 호종하는 종놈이 무서워서 아무 말 못했수다.”
“그래 그 종놈은 무섭고 나는 안 무섭다는 말이냐? 이놈 한번 죽어봐라! 누가 더 무서운지 알게 해주마!”
거지 왕초는 일각이 넘는 시간 동안 미친개처럼 거지들을 두들겨 팼고, 결국 제풀에 지쳐 주저앉았다.
“헉헉헉. 사흘의 시간을 줄 테니 어느 개 아들놈이 우리 애들 데리고 간 것인지 알아놔라. 감히 내 수족을 내 허락도 없이 끌고 가? 감히 날 뭐로 보고! 어느 집안에서 데리고 간 것인지 어서 알아내라! 알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