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96화 (96/327)

96. 춘봉가패(春逢加貝). (1)

“그러면 상단의 이름이 춘봉상회인가?”

“네. 송상처럼 지역의 이름을 따기보다는 양반도 상업을 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제 호를 상단의 이름으로 했습니다. 대감마님과 했던 약속을 저는 지켰사옵니다.”

“그래 이름을 걸고 상업을 한다는 약속을 자네는 지켰지. 헌데 내가 그 약속을 못 지키게 되겠어. 시포의 정례화는 안 될 것 같으이. 난전이 전국적으로 펼쳐져야 화폐가 돌게 될 것인데. 반대가 너무 심하니... 휴우.”

“상업을 부흥시키면 전조의 잔당이 나올 수 있어서 반대한다는 말이 있던데, 그러면 내수사(內需司)를 내세워 아예 국영 상단을 만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국영 상단? 나라에서 운영하는 상단을 말하는 것인가?”

“네. 상업이 부흥해 전조의 세력이 암약한다 하더라도 내수사가 운영하는 국영 상단으로 그들을 견제할 수 있다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무서워 시포를 정례화 시키지 못한다는 말은 구더기 무서워 장을 못 담그는 상황과 같지 않습니까.”

“오호. 그들을 견제하고 발본색원 할 수 있는 국영 상단이 있다면 반대하는 명분이 확실히 약해 지겠구만. 아주 좋은 수로군.”

“네. 그래도 반대한다면, 국영 상단에 투자도 할 수 있다고 하시지요.”

“국영 상단에 투자? 그렇게 되면 내수사에 투자를 하게 되는 것인데... 흠...”

투자를 한다는 것만으로 신숙주가 고민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내수사를 생각하자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상업은 발달시키고 싶지만, 내수사가 부유해져 왕권이 강해지는 것은 또 부담된다는 것이로군.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균형과 상업의 부흥... 고려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많구나.’

“투자가 문제가 될 것 같으면 투자 비율을 투자자에게 유리하게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상단 이익의 대부분을 투자자들이 가져가게 만들면 대감이 지금 고민하는 일은 애초에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이익의 비율이라... 하하하. 그렇구만. 자네는 참으로 뛰어나군. 그럼 비율은...”

“대감. 여기는 듣는 귀가 많습니다.”

“하하하. 그렇지. 가패지.”

신숙주는 가패 내를 둘러보며 웃었다.

“내 마음이 조급했나 보이. 그러면 오늘 저녁에 내 집으로 오게나 이야기를 좀 하세. 그리고 자네 사주는 어찌 되는가?”

“네? 갑자기 사주는 왜?”

“시포를 정례화시켜 자네 상단에 공랑 점포를 내어주는 약속을 못 지켰으니 다른 것이라도 줘야 하지 않겠나? 혼처가 정해지지 않은 손녀들이 셋이 있으니 맞춰 보고 합이 좋은 손녀라도 하나 줘야 내가 미안하지 않을 것 같거든.”

“에... 그러면... 왠지 제가 더 큰 손해를 보는 것일 수도 있겠는데요.”

“하하하. 손해인지 아닌지는 직접 대어봐야 아는거 아니겠나? 그럼 나중에 봅세.”

신숙주는 가패를 나서면서 끝내 내 사주를 알아갔다.

사실, 신숙주의 손녀라면 조선에서 최고의 규수로 꼽을 수 있었다.

신숙주가 권력의 핵심이면서 그의 아들들도 나름 활약을 하고 있었기에 명문가의 재녀로 꼽을 수 있었다.

문제는 내 미적 기준이었다.

다른 이들은 관기였던 채월이나 유화의 넓은 이마와 앙다문 턱, 작은 코와 큰 얼굴이 미인의 조건이라며 천생 우물이라고 손을 치켜세웠으나, 현대의 미적 기준을 가진 나로서는 그 미적 기준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외모와 사람만 보고 결혼할 수는 없으니 결국은 가문을 보고 혼례를 올려야 할 것인데, 이것도 고민이구나. 휴우...’

나이가 어리다는 핑계도 올해 12살이 되어 키도 한 뼘이나 더 컸기에 계속 써먹기는 힘든 핑계였다.

“흐음.”

방금까지 신숙주가 앉아 있던 자리에 은근슬쩍 앉는 이가 있었는데, 공조판서인 양성지였다.

“신숙주 대감이 갔으니 이제 나와 이야기 좀 하세. 가수저라만 먹고 가려고 했는데, 저 계산대 앞에 쓰여진 글씨를 보고는 그냥 갈 수 없었네.”

“어떤 글씨 말이옵니까? 그리고 양 대감님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사옵니다.”

“내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누구에게 들은 겐가? 안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던가?”

양성지는 자신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들었는지 물었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방금 나간 신숙주만 해도 양성지를 이야기할 때 뛰어난 자라고 이야기를 했고, 가장 유명한 사례는 세종대왕이 젊은 양성지를 보고 ‘해동의 제갈량’이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로 그의 능력은 인정받았었다.

다만, 삼정승이라 불리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는데, 이는 정치력에 문제가 있기보다는 가진바 재주가 너무 많아 6조에서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는 걸로 여기면 될 정도였다.

“그 반대이옵니다. 저 또한 중원의 요순(堯舜)임금 보다 우리의 단군(檀君)이 국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옵니다. 양 대감이 이야기하신 우리만의 동국사(東國史)를 배우고 알려야 한다는 의견에 저 또한 동의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그런가? 중국의 학문을 닦다 보니 다들 요순시대를 이상향으로 꼽으며 중원을 숭상하는데, 자네는 깨어있구먼.”

“단군을 부정하는 자들이 이상한 것이지요. 저는 조선이 중국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내 자네에 대해 듣기로는 아직 어리지만 기발한 물건을 만들어 내는 재주 있는 자라 들었는데, 그렇게만 자네를 파악한 이들은 자네의 겉만 보았구만. 제대로 내실까지 갖춰진 양반이었구만.”

양성지는 자신과 같이 중원의 풍속에 휩쓸리지 않고 우리만의 풍속을 존중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원종이 마음에 들었다.

“가수저라가 먹고 싶어 가패에 와 5조각에 1냥이라는 비싼 가격에 화가 났었네. 그래서 자네를 돈 욕심이 많은 위인인가 싶어 나쁘게도 보았네. 헌데 저 앞에 쓰여져 있는 것처럼 수익금의 일부를 지방의 의관 건설에 쓴다고 하니 참으로 기분 좋게 가수저라를 사 먹었네.”

“네. 전의감에 주부로 있는 김현재가 저의 사형이온데, 각 지방의 의원들을 불러 교육을 하고 다시 지방에 돌아가 병을 돌보게 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사옵니다. 거기에 수익금의 일부를 기부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방에 전의감 같은 기관을 만들자고 경연에서 10번 이야기한 것 보다 자네의 이런 기부가 열 배는 더 좋은 방법이라 생각되네. 여기에 나도 얼마간 기부를 하고 싶네.”

“기부에 동참하시겠다는 말이옵니까?”

“그렇네. 어디로 쌀을 보내주면 되겠는가?”

양성지 대감의 이야길 듣고 보니 생각해둔 것을 이 사람에게 맡겨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감마님. 그렇게 기부를 하시는 것보다는 기부단체를 대감님께서 만들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기부단체? 그건 뭔가?”

“예를 들자면 ‘조선 난민위원회’를 만드는 것이옵니다. 아픈 병자나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을 사람을 돕는 단체이온데, 기부를 하면 그 기부를 했다는 것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포고문 형식으로 공지를 하는 것입니다.”

“공지를 한다? 만약 내가 쌀 10섬을 기부해서 빈민들을 도왔다면 그 내용을 써서 알린다는 말인가?”

“네. 옛말에는 선한 일을 함에 자랑하지 말라 했지만, 포고문으로 선한 일을 했다는 것을 위원회에서 알려주면 기부한 사람도 기분이 좋을 것이고, 밥을 얻어먹게 된 이들도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 알게 되니 그 이름이 향기롭고 높게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흠. 그럴듯하군. 진휼책이 있고, 향약, 사창, 동약 등의 향촌 규약이 있다지만, 그래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지. 그런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직접 찾아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단체라...”

양성지는 좋은 방안이라 보았는지 한참이나 고민했다.

사실, 원종은 자신의 가문이 천한 상업에 종사한다고 백안시 당할 때를 대비해서 기부단체를 운영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돈을 벌어 욕심을 채우는 게 아니라 번 돈으로 어려운 이를 도우려고 상업을 한다는 그런 대의명분을 내세우기 위해 생각한 아이디어였다.

원종이 직접 하기보다는 나름 깨어있는 양성지가 맡아준다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흠. 단순히 어려운 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보다는 일할 의지는 있는데, 일할 곳을 찾지 못하는 자에게 밥을 먹이고 공조의 경공장에서 기술을 익히게 하는 것까지 연계시킨다면 좋을 것 같구만. 내가 한번 추진해 보겠네.”

양성지는 기부단체에 더해 직업기술원을 더하겠다고 했는데, 역시 6조의 모든 일에 통달했다는 해동의 제갈량다웠다.

“양 대감님이 나서 주신다면 저도 힘껏 돕도록 하겠습니다.”

“나라를 위한 좋은 방안을 이 가패에 와서 얻고 가는구만. 내 자주 들리겠네.”

양성지 대감이 돌아가고 한숨 돌리고 보니, 여전히 가패 안에는 관복을 입은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궐내에서 딱딱하게 논의하기보다는 맛난 간식과 차를 마시며 논의하는 것이 어떤 때에는 더 빠르게 돌아간다는 걸 은연중에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따뜻한 연근차를 마시다 보니 관리들의 아지트화가 된 가패를 만든 것이 추억처럼 떠올랐다.

***

수라간의 숙수들에게 가수저라를 가르치면서 형조의 관리를 만나 공랑 점포 3칸을 빌릴 수 있는지를 물어봤다.

“봄, 가을에 한 칸에 돈 120문만 세를 낸다면야 아무 문제가 없지만, 세 칸이나 필요하시오? 그리고 3칸이 붙어서 비어 있는 점포는 육조거리 끄트머리의 모서리 부분인데 괜찮겠소?”

관리들이 돌아다니는 육조거리와 가까울수록 공랑 점포의 목이 좋다고 볼 수 있었는데, 원종은 오히려 이런 길 끝 모서리가 좋았다.

“그럼 그 옆에는 공랑 점포가 더는 없는 것이오?”

“옆으로는 민가요.”

“그렇다면 더 좋소이다. 내가 3칸 모두 하겠소이다.”

“허허. 대리인도 아니라, 양반이 그것도 제조(提調)의 직에 있는 관리가 직접 와 이러니 뭔가 어이가 없소이다.”

공랑의 전권을 맡은 호조의 관리는 말로는 양반이 직접 와서 이리 계약하는 게 처음이라며 어이없어했지만, 사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양반이 그것도 당상관에 해당하는 관리가 직접 와 계약을 하니 챙길 게 없어 어이없어하는 것이었다.

“하하. 내가 아랫사람을 잘 믿지 못해 이리 직접 챙기는 것이오. 여기 미리 3칸 1년 치에 대한 돈이요.”

원종은 세종통보로 돈을 내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공랑 한 칸에 대략 15평의 넓이인데 1년에 돈 240문이면 거저나 마찬가지지.’

서울의 살인적인 가게 월세와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였다.

조선 시대의 부동산 업자인 집주름과 소목장을 불러 공랑의 내부 회칠을 새로 하고, 3칸의 벽을 터서 큰 공간으로 만들라 지시했다.

그리고 소목장에겐 서양식 탁자와 의자를 그림을 그려 가며 의뢰했고, 옆의 민가도 사서 허물고, 외부에서 볼 수 있게 기둥만 세워져 있는 야외 테라스 같은 공간을 만들었다.

실내에 12개, 민가를 허문 곳에 6개의 테이블을 놓을 수 있었다.

“도련님 그 차림 보기라는 것에 들어갈 가짓수가 조금 애매합니다요.”

“어떻게 애매하다는 말이냐?”

“이 단과자에서 말입니다. 가장 고급 음식인 가수저라와 1푼짜리 튀긴 건번과의 사이에 뭔가가 하나 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요? 그냥 빵이 들어가 있사오나, 이 빵은 제 이름을 딴 참렬버거의 빵이기도 하니. 단과자도 아니고.”

“네 말을 듣고 보니 가수저라와 건번 사이에 뭔가가 하나 더 있어야겠구나. 그럼, 거기에 팥빵이라고 일단 써넣거라.”

“팥빵요? 그럼 팥으로 만드는 빵입니까요?”

*

[작가의 말]

돈 가치에 대한 자료를 아무리 찾아도 1400년대 자료는 없네요. ㅠ.ㅜ

그래서 1700년대의 가치를 분석한 정주환님의 ‘18세기 이재 황윤석의 화폐경제생활’ 에 나와 있는 가치와 유사하게 금전 가치를 설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평통보의 경우(어림치입니다).

1문(1푼) - 현재 시세 200~300원.

1전 - 현재 시세 2,000~3,000원.

1냥 - 현재 시세 20,000~30,000원.

1관 - 현재 시세 200,000~300,000원.

으로 황윤석이란 양반은 1769년 1년 수입은 209냥 1푼, 1년 지출은 182냥 7푼 7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1년 수입이 400만원에서 600만원 정도입니다.

벼슬을 한 양반에 현감까지 한 나름 상류층의 수입과 지출이라고 생각하면 될것 같습니다.

물가는.

1759년 9월 18일 남중의 병충해로 쌀 4두에 1냥.

1768년 5월 서울의 쌀 1말이 1냥.

1783년 12월 1일 함경도 쌀 1말에 1냥 5전.

풍, 훙년에 따라 곡식 가격이 크게 바뀌는것도 있지만 15년의 차이가 있음에도 쌀 1말은 1냥이란 교환비가 지켜진 것 같습니다.

황윤석은 주막에도 묵었다고 기록을 남겼는데, 숙박비로 일박 당 1푼이 들었다고 하며 말을 맡기는데도 1푼이 들었다고 합니다.

물론 먹는 값은 1끼에 3~5푼가량으로 별도입니다.

황윤석이 현기증이 나서 몸보신을 위해 삶아 먹은 닭은 2전 3푼, 가자미 1마리에 2전, 작은 전복 10개는 1전 5푼, 개장국은 2푼으로 보통 한 끼에 싸게는 400원 비싸게는 7천 원 정도까지 음식의 가격은 천차만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종이 아파서 활인서에서 치료 받은 비용이 8전, 용하다는 의원에게 치료받은 비용은 3냥.

약값은 4전 5푼, 3전, 4전 5푼으로 3번 지불했다고 합니다.

특이한 것은 탈 수 있는 큰말이 40냥이었다고 나오는데, 이 가격이면 홍삼 1근 가격이 말 한 마리 가격이었다고 대충 계산이 됩니다.

요 물가 기준에 이리저리 맞추어 글 속 가격을 책정하도록 하겠습니다요.

ps:공랑 점포를 빌리는데 너무 싼 거 아니냐는 생각을 하실 수 있는데, 공식적으로 내야 하는 것이 봄과 가을에 내는 120문이며, 중간중간에 특별세 같은 형식으로 시시때때로 돈을 걷어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용 상단 비슷하게 공랑상인들이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시간이 흘러 상인들의 특권을 보장해주는 금난전권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왜란으로 인해 국고가 바닥이 나며 그 국고를 채우기 위해 금난전권을 시전 상인들에게 준 것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이로 인해 조선의 상업이 더디게 발달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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