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허(許)해 주십시오. (3)
고려를 개창한 태조 왕건이 궁예의 아래에 있을 때 궁예는 견훤과의 싸움을 위해 배 100척을 만들라고 왕건에게 명을 내렸었다.
왕건은 송악(개성)의 호족 출신으로 산둥반도를 통한 해상 무역으로 부를 쌓았기에 그의 아래에는 뛰어난 수부가 많았고, 배를 만들 수 있는 이들도 많았다.
그래서 왕건이 만든 100척의 배 중에서 길이가 16보(30m)가 넘는 대형 함선을 따로 10척 만들게 했는데 왕건은 이 대형 함선을 앞세워 나주 상륙작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왕건이 궁예를 벗어나 자립할 수 있는 나주라는 발판을 함선들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
이때 사용된 대형 전함은 고려 초기 과선(戈船)이라 불리며 군함으로 운용이 되었었다.
여진구(여진족 해적)와의 싸움에서 포로로 잡혔던 왜인이 본국으로 돌아가 기록에 남기길 '고려의 배는 선체가 크고 넓으며, 배의 좌우에 망루가 있고, 뱃머리에 쇠를 씌워 적 배를 들이받았다.'라고 기록을 남겼다.
그런, 과선을 개량한 것이 누전선(樓戰船)인데,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도 사용되었었다.
‘고려사’에 기록되길 원나라 우승이 세조 쿠빌라이에게 ‘강남(중국 남부)의 배는 약하나, 고려의 배는 강하기 때문에 고려에서 배를 건조하여 다시 일본을 정벌하면 이길 수 있다’라고 보고를 올릴 정도로 누전선을 높게 쳐주었다.
나라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 이 누전선을 대신할 수 있는 배가 ‘세조’ 때 나오게 되는데, 군함으로도 쓸 수 있었고, 조운선으로도 쓸 수 있는 병조선(兵漕船)이란 배였다.
이 병조선이란 배는 신숙주가 세운선인 초마선과 병선인 누전선을 따로 운용하는 것이 낭비라고 생각하여 두 기능을 같이할 수 있는 겸용 배를 만들자고 주장하여 만들어진 배였다.
이 배는 건조 초기에는 병조선으로 불리다가 ‘경국대전’에 맹선(猛船)으로 기록되는데, 추후 조선 수군을 대표하는 판옥선을 만드는 기술의 축적이 시작되는 의미 있는 배였다.
그리고, 고려 때의 누전선을 새로 나온 병조선으로 교체하는 시점이 바로 지금이었다.
“군함인 누전선을 내려 달라는 말이냐? 군함을 달라?”
“네 전하.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사오나, 언젠가 해금령이 거두어지게 되면, 저 멀리 더운 나라에 사탕을 사러 소신이 가장 먼저 배를 출발시킬 것이옵니다. 그러기 위해 배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미리 해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누전선이 꼭 필요하옵니다.”
“응? 으하하하. 그래. 그렇지. 배를 타는 뱃사람이 되어 먼 바다로 나간다면 미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겠지. 사탕을 사 오기 위해 두려워하지 않는 그 열정이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
예종은 손가락 2개 크기의 건번(건빵)이나 나이기온 옷을 진상 받을 때만 해도 새로운 것에 들고 오는 원종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신숙주와 한명회의 줄을 잘 잡은 어린놈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사탕을 사 오기 위해 망망대해 먼바다로 가장 먼저 나가겠다고 하는 모습을 보니 그런 호기심과 용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아바마마가 남이를 보며 느꼈던 감정이 이런 것일 수도 있겠구나. 자신이 가지지 못한 열정을 보여주며 일에 몰두하는 모습. 그런 행동을 아바마마도 좋게 보고 남이와 구성군 이준을 이끌어 주셨던 거겠지.’
남이를 죽일 때만 해도 예종은 남이에 대한 질투가 가득했다.
같은 연배의 종친인 남이를 아들인 자신보다 더 챙겨주며 치켜세우는 아버지의 모습에 화가 났었고, 그런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듯이 공을 세우며 커갔던 남이를 질투했었다.
그리고, 자신이 왕이 되었을 때 부담이 될 수도 있는 종친들을 고위직에 앉히는 아바마마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남이를 죽이고 구성군 이준을 귀양보내고 나니 그제야 아바마마가 왜 젊은 종친들을 끌어 올렸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단순한 훈구 세력의 견제라는 뜻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젊은 종친들을 보며 자신의 옛 모습을 떠올리고, 젊었던 자신과 닮은 열정 있는 이들을 이끌어 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예종은 그런 아바마마의 마음을 원종의 열정있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느끼게 되었다.
자신이 세자시절 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하지 못하고 그저 참아야 했던 모습과 해금령으로 가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가장 먼저 사탕을 가지러 가겠다는 원종의 모습이 교차하자 키워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나이가 어려 괜찮지만, 추후 커서 한명회와 신숙주의 편에 서서 국정 운영을 방해할 수도 있었고, 전조의 신하였던 최영과 혈연적으로 가장 가까운 후손이라는 부담감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저 열정을 꺾기는 싫었다.
“좋다. 수영 중에서 가장 큰 경상우수영에서 병조선과 교체되는 누전선을 한 척 인수하도록 하여라.”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원종은 정말 진심으로 성은이 망극하다고 크게 외쳤다.
이후 난로를 군기시에서 제작하여 근정전을 비롯한 궐내에 설치토록 했고, 난로에 사용할 석탄 광산을 찾는 일은 공조에서 맡기로 하며 상참이 끝났다.
***
“이보게, 전도령. 아니 이제는 전 제조. 내 노모께서 온양에 가셔서 다음 달에나 돌아오시는데, 그때 가수저라를 구할 수 없겠나? 사탕으로 만든 것은 생각지도 않네. 꿀이나 밀가루 비용은 내가 내겠네.”
상참(常參)을 끝내고 나서는데 공조판서인 양성지 대감은 물론이고, 몇몇 당상관들이 나를 따라왔다.
“우리 집에도 저 난로를 설치할 수 있겠나? 아니, 자네를 초대하고 싶은데, 시간 되는가?”
“이보게. 나도 저 난로를 설치하고 싶은데 되는가?”
“난로는 궐내에 설치가 끝이 나면 그 이후에 생산하여 설치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수저라는 아예 육조거리 근처에 가게를 열까 생각 중이옵니다.”
“가게를?”
“길거리에서 가수저라를 팔겠다는 말인가?”
“네. 여러 대감님은 물론이고, 이게 소문이 나게 되면 가수저라를 찾는 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어느 대감은 만들어 주고 어느 대감은 안 만들어 준다는 말이 나올 수 있으니 아예 공랑 점포에 가게를 낼까 생각 중입니다.”
“허허 파벌에 따라 말이 나오는 것까지 벌써 생각을 한 것인가?”
“네. 말이 도는 것이 무섭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가게를 만들어야 밀가루나 꿀, 달걀 같은 재료의 낭비가 줄어들 것이옵니다.”
“하긴, 이야기만 주워듣고 만들려고 하다 비싼 재료를 날려 버릴 수도 있으니 아예 장인이 구워서 파는 것이 맞을 수도 있겠어.”
“그렇다면, 언제든지 사 먹을 수 있으니 따로 난로를 설치 안 해도 되겠구먼. 에헴.”
“네. 다음 달이면 언제든 원하시는 때에 사서 드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럼 가게 여는 날 보세나.”
이후 원종은 군기시와 경공장의 장인들에게 난로를 만드는 법과 빵을 굽는데 필요한 유기그릇의 제작을 알려줬고, 수라간의 숙수들에게는 버거 빵과 가수저라를 만드는 방법을 전수해주는데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래서 이제 숙수들의 교육을 마무리 짓는 단계인데, 형님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요?”
“하하하. 그래서 너도 관복을 입고 있었구나. 더구나 조제라니. 목사의 자리를 받고 좋아했는데, 네가 더 높게 승차했구나.”
“저야 뭐, 임시직이니 형님이 더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형님은 수라간에는 웬일이십니까?”
“나도 숙수들에게 조청 튀김건번과 주돈피아를 알려주기 위해 온 것이다.”
“아! 토끼고기 대신 돼지고기를 쓰셨군요. 꽤 괜찮을 것 같은데, 돼지 비린내가 많이 나지 않았습니까?”
“포도로 담근 담금주가 없어 난감했지만, 오히려 중원의 돼지가 조선의 돼지에 비해서 비린내가 심하지 않았다. 참, 그리고, 이것을 구해왔다.”
원길은 품에서 붓 한 자루를 꺼내 붓대를 돌려 그 안의 씨앗을 꺼냈다.
“형님. 이건 무슨 종자이옵니까? 혹시, 몰래 들여온 것입니까?”
“하하하. 회회총(回回蔥)이라는 파의 종자니라. 몰래 들여오는 것이 아니더라도 종자는 삼우당(三憂堂 문익점의 호)처럼 붓대에 가져오는 것이 기본 아니겠느냐.”
“하하하. 종자는 그렇게 붓대에 숨겨 오는 것이 국룰이긴 하지요. 그런데, 회회총이라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원종은 이름을 곱씹다 깜짝 놀랐다. 회회총이란 양파의 아종이 있다는 문헌만 보았었지, 그 종자를 구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원길이 가져온 것이었다.
“국룰? 또 이상한 말을 쓰는구나. 그리고, 이 회회총뿐인 줄 아느냐? 금화(金華)라 불리는 돼지 종자의 새끼도 4마리를 가져왔단다.”
“금화요? 새끼돼지요?”
원종은 금화라는 종자가 무슨 종자인지 생각하다 떠오르는 돼지가 있었다.
“머리와 엉덩이만 검은 금화저(金華猪, Jinhua) 진화돈이군요. 맞습니까?”
“응? 어찌 머리와 엉덩이만 검은지 아는 것이냐?”
“형님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당장 돼지를 보러 갑시다.”
원길은 현대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네임드 돼지 종자를 당장 보고 싶었다.
“허허허 기다리거라. 내 요리를 숙수들에게 알려주고 같이 가자꾸나. 아니면 여의도 목장으로 먼저 가도록 하여라.”
원종은 여의도 목장에 돼지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뛰어나갔다.
“허허. 회회총보다 돼지 종자가 그리 중요한 것이었나?”
원길은 조선에도 있는 돼지보다는 조선에 없는 회회총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원종이 회회총보다 돼지를 더 반가워하자 이유를 할 수가 없었다.
***
“어디에 있나? 명에서 들여온 새끼돼지 4마리가 있다는데, 어디에 있는가?”
“돼지라면 저쪽 우리 입니다요.”
원종이 우리로 뛰어가 보니 새끼돼지가 아니라 벌써 어느 정도 자라난 돼지가 있었다.
“금화저가 맞구나. 절강성(浙江省 저장성)에서 만들어진 금화저가 맞아.”
금화저 돼지의 가장 큰 특징인 머리와 엉덩이 부분만 검은색이고 몸통은 백색인 특징이 4마리 모두 나타나 있었다.
조선 재래돼지는 만주 지역에서 서식하던 멧돼지를 길들여 키운 종자로 중소형의 흑돼지로 분류가 되었고, 크기도 수컷이 아무리 큰다 해도 80kg를 넘기가 힘든 종자였다.
하지만, 이 금화저라 불리는 돼지는 110kg까지 클 수 있는 중형종이었다.
더구나, 빨리 자라는 조숙성도 가지고 있고, 한배에 12마리 이상 낳는 우수한 번식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 금화 돼지라면 제대로 된 돼지 사육이 가능할 터였고, 고기와 기름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이 돼지들은 나이가 들어 죽으면 몰라도 절대 죽이면 아니 되네.”
“네. 중원의 높으신 분이 보내신 것이라고 들었사옵니다. 어떻게든 새끼를 많이 낳게 하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그래그래. 다른 돼지 종자와 섞이게도 하면 안 되니 관리를 잘해주게. 이 돼지들이 커서 새끼를 낳게 되면 내게 연락해주게.”
“공조의 어디로 연락을 드릴깝쇼?”
“궐로 연락하기는 힘들 것이니 육조거리에 있는 춘봉가패(春逢加貝)로 연락을 주게나.”
“아! 새로 생겨 장안의 화제라는 거기 말입니까요?”
“그래 맞네. 다음에 내 돼지를 보러 올 때는 맛난 것 좀 싸 오도록 하지. 그러니 저 돼지를 키우는데 신경을 써주게나.”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춘봉은 여의도 목장을 벗어나 육조거리로 향하는데, 육조거리 초입부터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 좌의정 대감께서 이 시간부터 여기에 계시면 어떻게 하십니까요?”
“허허. 이 팥빵에 숭늉 한 사발이면 낮 밥이 되니 밥을 먹으러 온 거 아닌가. 이리 오시게. 상단 이야기를 좀 하세.”
신숙주가 앉은 탁자에 앉으며 가게를 둘러보니 다들 현대식 탁자와 의자에 어색함 없이 앉아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게 여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