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허(許)해 주십시오. (2)
[콰앙!]
난로에서 카스테라 틀 그릇을 꺼내 나무 도마에 내팽개치듯이 강하게 내려쳤다.
국왕의 면전에서 큰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불경죄에 몰릴 수 있었지만, 카스테라가 틀 그릇에 달라붙은 것을 떼려면 어쩔 수 없었다.
뒤집은 틀 그릇을 흔들어 들어내자 겉면이 갈색으로 탄 것 같은 카스테라가 흰 김을 뿜어내며 먹음직스럽게 자태를 드러냈다.
이미 치킨버거를 하나씩 먹고, 끓여 낸 차로 입가심을 한 사람들이었지만, 카스테라가 뿜어내는 단내에 이끌리듯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저건 아까 그 빵이란 것과는 다른 것이군.”
“그런가 보이 그래서 난로라는 기물을 두 대 설치한 것이겠지.”
“어찌 저리 먹음직스러울꼬. 치자(梔子)를 쓴 것도 아닐진대 어찌 저리 색이 노랗고 고울꼬.”
샛노란 색으로 구워진 카스테라의 모습은 맛을 보지 않았음에도 귀하고 고급스럽게 보였다. 잘 구워진 노란색의 힘이었다.
원종은 빵을 자르기 위해 만든 긴 칼로 겉의 갈색 부분을 잘라내었고, 손가락 2개 크기의 사각 벽돌 모양으로 카스테라를 잘라내었다.
기미를 보는 내시에게 미리 카스테라 자투리를 주어 맛보게 했고, 카스테라 5개를 삼각형으로 쌓아 예종에게 올렸다.
“달걀과 밀가루, 사탕(沙糖)으로 만드는 가수저라(可秀咀懶)라고 하옵니다. 만사가 귀찮고 의욕이 없을 때 맛을 보면 새로운 의욕이 생기고 옳게 된다는 뜻의 이름이옵니다.”
“늘 옳게 된다라. 재미있는 이름이구나.”
예종은 카스테라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집어 살짝 깨물어 봤다.
“오! 이건 마치 달달하면서 따뜻하기도 한...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먹는 듯하구나. 눈처럼 부드러운 질감이야. 으음. 이 단맛이 너무 좋구나. 사탕(설탕)의 단맛이 이 노란 가수저라에 다 녹아 있다니. 입속에서 침과 섞여 풀어지는 몽실몽실함이라니. 놀랍구나.”
씹으면 씹을수록 입안을 가득 채워가는 부드러운 단맛에 예종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올라오는 유자향이 입안을 채우자 자신도 모르게 카스테라를 꿀꺽 삼키고 말았다.
“아... 맛을 더 음미하고 싶었는데, 절로 넘어가 버리는구나.”
예종은 젓가락을 써야 한다는 체통마저 잊고, 석탄 얼룩이 남은 손으로 카스테라를 주워 먹었다.
“전하 따뜻하게 데운 우유와 함께 드셔보시옵소서.”
그렇지 않아도 살짝 목이 메였던 예종은 따뜻한 우유를 받아들고 마셨다.
“오옷! 이거다. 이거! 따뜻한 우유가 가수저라와 만나자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둘이 어울려 같이 녹아 버리는구나.”
예종은 따뜻한 우유가 가수저라와 만나 녹아들기 무섭게 목구멍을 넘어가 버리니 너무나도 신기했다.
“자네들도 한번 맛을... 응? 지금 꺼내는 그 가수저라는 다른 것이냐?”
“네. 전하 사탕을 넣어 만든 가수저라는 전하와 왕비마마, 군마마께 드릴 것밖에 없사옵니다. 지금 구운 것은 사탕 대신 꿀과 조청을 써서 만드는 것이옵니다.”
잘산군 내외를 비롯한 왕족에게는 원종이 직접 접시에 담아 올렸고, 대신들에게는 두 번째로 구워낸 가수저라를 잘라 한 조각씩 돌렸다.
“사탕 대신 꿀과 조청으로 만들어도 맛이 기가 막히는구나.”
“전하께서 절로 넘어간다고 하신 말이 어떤 느낌인지 나도 알겠구나.”
“어찌 이리 부드러울꼬. 끝에 남겨지는 유자 향이 아련한 것이 한 조각만 더 먹어 봤으면... 쩝...”
한명회는 자신이 건네준 사탕이었음에도 자신은 맛보지 못하자 아쉬웠지만, 잘산군의 부인인 자신의 딸이 맛보았으니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탕보다는 부족하지만, 꿀로 만든 가수저라를 맛보자 언제 그런 불만이 있었는지도 까먹어 버렸다.
“가수저라라는 이름에 담긴 뜻만큼, 이걸 먹기만 해도 기쁜 마음이 생겨 옳은 일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사옵니다.”
“하하하 영상도 그렇게 느꼈구랴.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는 오만한 이름이라고도 생각했는데, 먹어 보니 전혀 오만하지 않았어. 이름 그대로 이 부드러운 단맛을 본 자는 무엇이든 하겠다는 의욕이 생기겠어.”
예종은 아래에 앉아 있는 왕비와 잘산군 내외도 챙겼는데, 다들 웃으며 다과를 즐기는 모습에 자신의 기분도 좋아졌다.
하지만, 대신들은 손가락 두 개 크기의 작은 조각들만 먹었기에 아쉬워하며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상선. 대신들도 더 먹을 수 있게 밀가루와 달걀, 꿀과 조청을 더 들고 오라. 가수저라를 좀 더 만들어 대신들도 더 먹을 수 있게 하라.”
“저.전하. 혹시 궐에 사탕이 더 있으신지요. 설탕이 있어야 제대로 된 가수저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원종은 이때다 싶어 사탕이 더 있는지 물었다.
예종은 설탕이 더 있는지 알지 못했기에 상선을 쳐다봤다.
“사탕은 있사으나, 왕대비마마를 위해 남겨두셔야 합니다. 예전 소헌왕후 마마의 일이 있고 난 이후 언제나 비상용으로 챙겨두고 있사옵니다.”
소헌왕후의 일이란, 문종의 어머니인 소헌왕후가 병이 들어 병상에 누웠을 때 설탕을 먹고 싶어 했는데, 당시 설탕을 구하지 못했었다.
결국 설탕을 먹지 못하고 소헌왕후는 승하를 하셨다.
이 일 이후, 궐에서는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중요한 먹거리들을 비축용으로 얼마씩은 들고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예종은 가수저라를 더 먹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 마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원종은 설탕이 더 있다는 말에 여기서 멈출 수가 없었다.
“전하. 사탕을 들고 있는 연유가 무엇이옵니까? 꿀과는 다른 단맛이었기에 사람들이 사탕을 좋아하는 것이옵니다. 즉, 특별한 단맛이라는 이유이온데, 사탕으로 특별히 만든 가수저라를 왕 대비(정희왕후 예종의 어머니)마마께 올리는 것이라면 그 사탕을 알맞게 쓰는 것이 아니 올는지요.”
예종은 말을 듣고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상선, 사탕을 들고 오고, 왕대비 마마와 월산대군은 물론이고 지금 궐에 있는 종친들은 다 부르게. 이리 맛난 가수저라를 모두가 맛을 보아야지.”
예종은 무조건적인 설탕 아끼기보다는 다 같이 먹는 것을 결정했다.
내시들이 양 사방으로 뛰어다니기 시작했고, 수라간에서도 달걀과 재료들을 들고 오기 시작했다.
원종과 참렬은 난로 두 개에서 계속 가수저라를 만들어 내었고, 한 명씩 도착하는 종친들에게는 꿀과 조청으로 만든 가수저라와 연근차가 내어졌다.
그리고, 예종의 어머니인 정희왕후가 도착하자, 제대로 설탕을 써서 가수저라를 구워냈고, 마지막으로 남은 뜨거운 우유와 함께 올렸다.
정희왕후도 설탕과 가수저라의 단맛에 감탄했고, 이런 맛있는 것은 처음 먹어본다며 내게 상을 내리라고 입을 모았다.
“그럼 이제 가수저라에서도 아주 특별한 분들만을 위한 배(培) 가수저라를 올리겠습니다.”
“배(培)? 더 기운을 나게 한다는 말이냐?”
“네. 전하. 일반적인 가수저라가 아닌 두 배로 더 단맛을 내는 배 가수저라를 왕대비마마와 전하께 올리겠사옵니다.”
방금 먹은 가수저라만 해도 단맛에 반할 정도였는데, 더 단맛의 배 가수저라가 있다고 하자 예종은 물론이고 종친들도 기대를 했다.
원종은 설탕을 넣어 카스테라를 한판 구워냈고, 카스테라를 조각내어 달걀노른자로만 만든 달걀 물에 넣어 카스테라 전체가 달걀 물을 흡수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설탕을 열로 녹여 설탕물을 만들었고, 달걀 물을 입힌 카스테라를 설탕물에 넣어 전체에 설탕물을 입혔다.
설탕물을 입은 카스테라를 그릇에 놓고 그 위로 설탕 가루를 솔솔 뿌리자, 아직 굳지 않은 설탕물에 설탕 가루가 박히며 마치 보석 가루가 뿌려진 듯 노란 카스테라 위에 설탕이 내려앉았다.
“이것이 배가수저라(培可秀咀懶) 이옵니다.”
원종이 올린 접시를 보며 예종은 침을 삼켰지만, 어머니인 정희왕후에게 먼저 드시라고 접시를 넘겼다.
“주상의 배려에 내가 먼저 먹어 보겠소이다.”
정희왕후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설탕이 뿌려진 카스테라를 입에 넣었다.
“어머나! 어찌 이런 맛이!”
정희왕후는 아까워서 제대로 씹지 못하겠다는 듯이 입을 조심스레 움직여 씹었다.
“주상! 놀라운 맛이에요. 놀라워! 먼저 먹었던 가수저라도 훌륭했는데, 이 배가수저라는 그걸 뛰어넘었어요. 입안에서 바삭거리며 씹히는 사탕 알갱이가 천상의 맛이에요. 어쩜, 이리 단맛을 느끼게 될 줄이야. 주상 덕분에 이런 귀한 음식을 먹게 되었으니 참으로 행복하오.”
정희왕후의 찬사를 듣자 예종도 한 개를 집어 입에 넣었는데, 어머니의 말마따나, 가수저라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사탕 알갱이가 단맛을 뿜어내자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배 가수저라라고 할만하구나. 마치 보석을 씹는듯한 이 식감에 단맛이 더해지니 천상의 맛이로다.”
예종마저 감탄하며 평을 하자 종친들도 어서 먹어보고 싶다고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수라간의 궁녀들과 내가 움직여 일일이 배가수저라를 챙겨주었고, 남는 것은 벼슬 순으로 한 개씩 챙겨주었다.
그리고, 배가수저라를 먹은 신숙주가 난데없이 통곡하며 울기 시작했다.
“좌의정은 왜 우는 것이요? 그만큼 배가수저라에 감동을 한 것이오?”
“흐으윽. 흑흑 전하. 맛있는 것에 감동한 것은 맞사오나,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하옵니다.”
“아! 그대도 노모가 있었지. 좋은 것은 나누어야 하는 법.”
예종은 고민하다 조청과 꿀의 남는 한도 내에서 가수저라를 구워 대신들에게 나눠주라고 명을 내렸다.
“흑흑. 전하. 그것도 있사오나. 한편으로는 서러워서 눈물이 나왔사옵니다. 소신이 사신으로 중국과 왜국에 가보니 그곳도 사탕이 귀한 음식이긴 하였으나, 우리 조선만큼 사탕이 귀하고 비싸지는 않았사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않나. 중원은 저 멀리 남쪽이긴 하지만, 사탕이 나고 있고, 왜국의 경우에도 직접 사탕을 재배 할 수 있는 더운 땅이 있으니 우리 조선보다 사탕이 쌀 수밖에.”
“네. 전하의 말이 맞사옵니다. 허나, 우리 조선의 상인이 직접 중국의 남부와 왜국의 남부로 가서 사탕을 사오게 되면 지금의 가격보다는 훨씬 저렴하게 구해올 수 있을 것이옵니다. 지금 조선에 들어오는 사탕은 명에 사신으로 간 역관들이 들여오다 보니 그 가격이 몇 배나 비싸게 들어올 수밖에 없는 것이옵니다.”
“그럼, 직접 배를 띄우자는 말이오?”
“네. 전하. 상인이란 족속은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천길 물속이라도 뛰어들 자들이옵니다. 배를 띄어 사탕을 사 올 수 있게 윤허(允許)해 주시면 상인들이 달려들어 사탕을 저렴하게 구해 올 것이옵니다. 해금령을 거두어 주신다면 사탕을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흠. 그렇긴 하나...”
예종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사탕을 저렴하게 구해올 수만 있다면 이런 가수저라 같은 단 음식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호사를 누릴 터였다.
하지만, 명나라에서 내린 해금령이 문제였다.
명나라에서 내린 해금령은 배를 타고 움직이는 교통이나 무역은 물론이고, 고기잡이를 위한 어업까지도 막을 정도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것을 엄금하는 조치였다.
그 조치에 따라 조선도 해금령을 내렸는데, 고기잡이는 풀어뒀지만, 무역이나 교통은 철저하게 막고 있었다.
사탕을 싸게 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치더라도, 조선의 왕이 이런 해금령을 해제하여 명나라의 명을 거역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면 그로 말미암아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전하 사신단이 명에 갈 때마다 바닷길의 해금을 주청 드려보시면 어떻겠습니까? 명 조정에는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부인 한씨도 있사오니, 계속 주청드리면 풀리지 않겠사옵니까?”
“어마마마 이 건은 부인 한씨라도 안될 것이옵니다.”
예종은 아무리 성화제를 안아 키운 부인 한씨라 해도 명을 세운 홍무제가 직접 내린 해금령을 해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주상. 안된다고 하더라도, 주청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수저라라는 단 요리를 부인 한씨에게 바쳐 명의 궁중에서도 유행하게 된다면, 분명 사탕에 대한 수요가 늘어 남방에서 북경으로 올라오는 사탕의 양도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물량이 많아진 것이니 우리 조선의 역관들이 사 오는 사탕의 가격도 내려갈 것이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어마마마의 말이 맞습니다. 북경에 유행하게 된다면 저 멀리 더운 지방에서 사탕을 더 많이 만들어 북경으로 올리겠군요. 영상(한명회)! 이제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에는 숙수를 추가하도록 하시오.”
예종은 마음 같아서는 원종을 직접 보내고 싶었으나, 아직 어리다는 것을 알기에 아쉬웠다.
“그리고, 원종은 사옹원의 자문역인 제조(提調)를 수여한다. 사옹원의 숙수들에게 가수저라와 참렬빵을 만드는 것을 전수하라.”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제조(提調)라는 벼슬을 내린다는 말에 원종은 깜짝 놀랐다.
보통 잡무와 기술계통 기관에 겸직으로 고위 벼슬아치들이 제조로 임명되는 것이 관례였는데, 그런 제조라는 벼슬에 자신이 가게 되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때에 따라 다르긴 해도 종1품에서 정3품까지 되는 당상관의 자리였기 때문에 너무나도 파격적인 인사였다.
이런 파격적인 인사에 들고일어나는 자가 당연히 있기 마련이었지만, 원종이 한명회와 신숙주의 줄을 잡고 있다는 걸 아는 자들도 많았고, 한번 맛을 본 가수저라의 기술 전수를 위한 임명이라는 걸 알았기에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그리고 벼슬과는 별개로 왕대비께서 네게 큰상을 내리라고 하셨으니,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느냐?”
“그, 그것이... 누전선을 한 척 내려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