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91화 (91/327)

91. 이것도 붓 통에 숨겨갈 수 있나? (2)

눈이 녹지 않은 아직 쌀쌀한 날씨임에도 어린 소년, 소녀들이 돼지와 양을 데리고 움직였는데, 물을 먹이러 가는 듯했다.

아직 다 크지 않은 돼지들은 얼룩 털을 가지고 있었는데, 흰색과 검은색 털이 섞여 있어 단연 눈에 띄었다.

‘원종에게 듣기로는 돼지는 허리가 길고 다리가 짧으면 고기가 많아 좋다고 했는데, 저 돼지를 보니 딱 그 말에 부합하는구나.’

원종이의 말과는 달리 돼지의 머리가 좀 크긴 했지만, 다리가 짧고, 허리가 길어 배가 축 처져 있는 것이 고기가 많아 보였다.

“이 돼지들이 종자가 있는 것이냐?”

원길은 북경에서 역관을 따라다니며 배웠던 말로 아이들에게 물었다.

“종자요? 그게 뭐지? 넌 아냐?”

“몰라. 그런데, 옷이 뭐 저래?”

“머리에 이상한 모자도 쓰고 있는데.”

“아! 혹시 조선 사람이세요?”

원길의 질문에 아이들은 서로 중구난방으로 떠들다 한 소녀가 조선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래. 우린 조선의 사신단이다. 이 돼지의 종자를 아느냐? 새끼를 몇 마리 사 가고 싶은데.”

“종자는 몰라요. 그저 주인님이 키우는 돼지예요.”

“그럼. 네 주인에게 가자구나.”

돼지와 아이들의 주인에게 가자고 했는데, 아이들은 그저 멀뚱히 눈치만 보며 움직이지를 않았다.

“저희 주인님은 아무나 만나지 않으셔요. 집에 가서 주인님께 물어보도록 할게요. 야 가자!”

소녀의 말에 아이들은 돼지와 양을 챙겨 급히 움직였는데, 뒤를 따르려고 하다 그만두었다.

왠지 저 아이들의 주인이 탕산에서 알아주는 거부나 관리일 수도 있을 것 같아 무턱대고 따라가기엔 부담이 있었다.

“우리는 내일 정오에 탕산을 떠나니 내일 정오까지는 세선루에 연락을 다오!”

원길은 이후 탕산의 종자 상인들을 만나 새로운 채소의 씨앗을 찾았으나 조선에 없는 새로운 씨앗은 없었다.

고기가 많아 보이는 돼지의 종자라도 구해가야 했지만, 다음 날 정오가 되었음에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문 참봉은 그새 정인이라도 만든 것이오? 뭘 그리 세선루의 문만 바라보는 거요?”

“정인이었다면 이렇게 아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새로운 먹거리 씨앗을 들고 가는 것이 목표였는데, 그걸 이루지 못해 아쉬울 뿐입니다.”

“자네도 전조의 삼우당(三憂堂 문익점의 호)처럼 되고 싶어 했구만. 하긴, 어떻게 보면 역모를 두 번이나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명을 이었고, 오히려 존경을 받고 있으니 삼우당처럼 새로운 작물을 찾으려는 것도 이해가 가는구먼.”

윤 별제의 말마따나 문익점은 고려 공민왕 시절 원나라에서 옹립한 덕흥군의 편에 서서 한번 죽음의 위기를 넘겼고, 이후 조선이 개창 할 때는 정몽주의 편에 서서 다시 한번 위기를 겪었다.

두 번 다 자신이 서 있는 편이 패하여 떼죽임당할 때도 목화씨를 들여온 공로로 인하여 문익점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고, 처벌이라고 해도 파직이나 100리 귀양 같은 약한 벌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러니 중원을 드나드는 관리라면 삼우당 문익점처럼 씨앗으로 공을 세우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했다.

“자! 움직이세.”

미련이 남아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원길도 어쩔 수 없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신단이 탕산을 벗어나려는데, 명의 관리들이 사신단을 막아섰다.

“대명천지에 이게 무슨 일이오?”

“우리 주인님께서 그대들 조선의 사신들을 보고 싶다고 하오.”

“우리를 보고 싶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길을 막는 것은 결례요. 그대의 주인이 누구인데 이러는 것이오?”

예조판서 홍윤성은 사신단을 막무가내로 막아서는 자들의 결례에 화가 나면서도 이렇게 자신들을 보자고 하는 이가 누구인지도 궁금했다.

“일단 가보면 아오. 관리들은 모두 따라오시오. 사신단의 짐이나 인력은 탕산 현감이 맡아줄 것이오. 따라오시오.”

홍윤성은 탕산의 현감이 관리에게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조아리는 모습을 보고는 거물이구나 싶어 얼른 관리들을 인솔해 따라나섰다.

***

“그래. 예전에는 내게도 매년 인사를 왔었는데, 이제는 나도 잊힌 것인가? 이리 내가 불러 엎드려 절을 받아야 하겠는가?”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어찌 마마님을 잊었겠습니까. 북경에서 마마님께 갔었으나 뵙지 못했었습니다. 여기 계신 것을 알았다면 먼저 와서 인사를 올렸을 것입니다. 노여움을 풀어주시옵소서.”

50줄의 예조판서 홍윤성은 식은땀을 흘리며 절을 올렸는데, 단상에는 곱게 나이가 든 노 부인이 앉아 있었다.

‘아니, 도대체 누구이기에 성격 칼칼한 홍윤성이 저리 안절부절못하는 거지. 그리고, 명나라 말이 아니라 분명 조선의 말인데...’

“부인 한 씨네. 부인 한 씨. 이분이 여기에 계시는데도 우리가 먼저 인사를 드리지 않았으니 이거 큰일났구만.”

윤 별제의 말에 사신단으로 뽑힌 이후 교육받은 내용이 떠올랐다.

단순히 부인 한 씨라고 불리는 노부인은 세종대왕 시절 공녀(貢女)로 명나라에 보내어졌던 여인으로 그녀가 가지는 의미가 단순하지 않았다.

원길은 노부인의 정체를 알고 나자 예조판서 홍윤성이 저리 식은땀을 흘리며 절을 하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당금의 황제인 성화제가 폐태자가 되었을 때 안아 키운 사람을 우리가 잊고 있었으니. 이거 보통 일이 아니구나.’

그랬다. 토목의 변(1449년)으로 정통제 영종이 오이라트 부족의 에센에게 붙잡히자, 명나라 조정은 부랴부랴 정통제의 이복동생 주기옥을 경태제로 즉위시키는데, 이때 지금의 황제인 성화제는 폐태자가 되었었다.

당시 성화제의 나이가 2살이었다 보니 그 누구도 끈 떨어진 폐태자를 키우려 하지 않았는데, 선덕제(성화제의 할아버지)의 후궁이었던 부인 한 씨가 죽음을 무릅쓰고 성화제를 거두었었다.

그리고, 정통제가 탈문의 변으로 황제로 복위하자 다시 성화제가 태자가 되었는데, 그 8년간의 폐태자 기간을 부인 한 씨가 거두어 키웠던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성화제는 어린 자신을 키워준 부인 한 씨를 어머니처럼 공경하고 중히 모셨기에 명 황실의 숨은 실력자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녀가 이런 명나라의 신분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인 한 씨는 공녀로 명나라에 받쳐졌으나, 그 가문이 청주 한 씨로 한명회와는 일문이었다. 한명회가 계유정난으로 실권을 잡기 전에도 양반 가문이었고, 그녀의 조카가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와 혼인할 정도로 권세가 있는 집안이었다.

이런 부인 한 씨가 탕산에 있었음에도 찾지 않았으니 예조판서 홍윤성이 바짝 엎드려 죄를 청할 수밖에 없었다.

“뭐 하긴, 나도 조선의 사신단이 이때쯤에 온다는 것을 잊고 있었지. 어제 돼지 종자를 사겠다고 말을 걸었던 자가 아니었다면 너희들이 지나가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돼지 종자를 사고 싶다고 한 자가 누구더냐?”

갑자기 돼지 종자를 사려고 했던 이를 찾자 원길은 깜짝 놀라 앞으로 나섰다.

“소인이옵니다. 참봉 전원길이옵니다.”

원길이 배례를 하며 앞으로 나서자 부인 한 씨는 원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중인이 아닌 양반이 왜 돼지 종자를 사 가려고 하는 것이냐?”

사실, 부인 한 씨가 어제 종들에게 돼지 종자를 팔라는 조선 사람이 있었다고 알렸을 때, 그 이야길 듣고 호기심이 돌았다.

탕산은 북경과 그 인근에 농작물을 보급하는 곳이었기에 조선 사신단도 돌아가는 길에 들려 채소의 종자를 가져가는 일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개고기보다도 낮은 취급을 받는 돼지 종자를 사 가려 했다는 말에 궁금증이 생겼던 것이었다.

단순히 북경의 유행처럼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라면 조선에도 돼지가 있었기에 종자를 사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소인이 요리를 즐기어 멧돼지도 구워 먹고 하였었습니다. 물론, 멧돼지 고기는 부족함이 있었사옵니다. 그러다 어제 돼지를 보니 머리가 크고, 다리가 짧으며 배가 처진 모습에 그 고기 맛이 특별하지 않을까 싶어 종자를 사 가려고 했었사옵니다.”

“흠. 요리를 즐겨 한다고? 너는 본래 소속이나 하는 일이 무엇이냐?”

“소인은 호조의 참봉으로 이번 사신단에 뽑힌 이유는 ‘건번’이 원행(遠行)에도 쓰일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뽑힌 것이 옵니다.”

“건번? 그건 또 무엇이냐?”

부인 한 씨는 처음 들어 보는 건번이란 말에 호기심을 나타내었다.

원길은 짐을 풀어 건번 상자를 내밀었는데, 부인 한 씨는 물론이고, 다른 명나라 사람들도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알아보지를 못했다.

“잡곡을 갈아 만든 음식 이온데, 군사들의 비상식량으로 쓸 수 있으며, 보릿고개 때도 도움이 되는 음식이옵니다. 사신단처럼 원행 중 불을 피우지 못할 때 먹을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제가 사신단에 포함이 되었습니다.”

말을 마친 원길은 상자에서 건번을 꺼내 하나를 입에 넣었고, 상자째 올렸다.

부인 한 씨가 먹기 전에 어린 계집종이 기미 하듯이 한 개를 먹었는데, 딱딱한 건번을 씹어 먹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마마. 퍼석거리는 곡물가루를 굳힌 것 같사옵니다.”

계집종의 말에 부인 한 씨도 한 개를 집어 먹었지만, 이내 두세 번 씹더니 뱉어 버렸다.

“요리를 즐겨 한다는 자가 어찌 이런 것을 먹을 것이라고 내놓는다는 말이냐?”

“마마. 이 건번은 보리와 밀과 같습니다. 밥을 해도 보리와 밀에는 아무런 맛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밥에 반찬을 먹고, 국에 말아 먹으면 맛이 생기듯이 이 건번도 맛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만, 맛있게 만드는 수고를 할 시간이 없을 때 바로 먹을 수 있게 만든 것이라 아무 맛이 없는 것이 옵니다.”

“흠. 이걸 맛있게 할 수 있다고? 그럼, 한번 만들어 보거라. 네가 만든 것이 내 마음에 들면 내가 키우는 돼지의 종자를 주도록 하마.”

“네. 알겠사옵니다.”

원길은 졸지에 요리를 하게 되자 뭘 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없게, 예조판서 홍윤성이 조여왔다.

“전 참봉. 이건 단순한 일이 아니네. 조선의 사신이 왔음에도 부인 마마께 인사를 드리지 않았다는 말이 전하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삭탈관직을 당할 것이네. 말이 삭탈관직이지, 운이 없으면 천 리 밖 귀양이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마마께서 한 번도 드셔보시지 못한 음식을 해 보이겠습니다.”

원길은 원종이가 해주던 것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계집종에게 조청과 들기름, 잣, 호박씨, 호두, 계핏가루, 검은깨, 흰깨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마마님의 유흥을 위하여 바로 여기에 화덕을 만들어 요리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겠나이다.”

원길은 원종이 하던 요량으로 화덕을 만들었고, 작은 솥에 들기름을 넣어 기름을 달구기 시작했다.

그리고 들기름에 온도가 오르자 건번을 기름에 넣어 튀겼는데, 퍼석하고 딱딱한 건번이 기름을 빨아들이며 연한 갈색으로 튀겨졌다.

알맞게 튀겨진 건번을 건져 그릇에 담고는 조청을 넣어 조청이 스며들 수 있게 숟가락으로 휘저었다.

건번에 조청이 슬며 들어 꾸덕꾸덕하게 들러붙기 시작하자, 계핏가루와 깨를 뿌렸고, 잣, 호박씨, 호두도 넣어 섞어주었다.

그러곤, 젓가락으로 하나하나 떼서 그릇에 식혔다.

“다 되었사옵니다. 튀긴 조청 건번이옵니다.”

원길은 그릇째 건번을 올렸고, 이번에도 역시 계집종이 기미 하듯 먼저 하나를 먹었다.

[오독오독]

“오! 마마님! 맛이 천양지차입니다! 맛이 있어요!”

처음 건번을 먹고 퍼석거린다고 했던 계집종은 튀긴 건번을 먹고는 눈이 똥그래지며 같은 건번이 맞는 것인지 놀라워했다.

“그렇느냐? 그럼 어디... 음... 조청의 달콤함이 스며들어 곡물 맛을 더 맛있게 하는구나. 너의 말처럼 건번에 이렇게 양념이 발리니 맛있어졌어. 조청의 단맛에 곡물의 맛이 섞여 나도 모르게 손이 계속 가는구나. 오호호 참으로 알맞은 간식이로구나.”

“맛이 있으시다니 감사합니다.”

“무료했던 내 입에 즐거움을 주었으니 나도 너희의 입에 뭔가를 내려주어야겠지. 예희야 가서 그 씨앗을 가지고 오려무나.”

*

[작가의 말]

공신 부인 한 씨의 오빠인 한확의 딸(소혜왕후)이 낳은 아들이 잘산군 성종입니다.

성종에게는 고모 할머니가 되었기에 부인 한 씨가 명나라에 살아 있는 동안 조선 사신단은 명나라에 갈 때마다 문안 인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언니인 여비 한 씨도 공녀로 명나라에 보내어졌는데, 그녀는 영락제의 후궁이 되어 내명부를 총괄할 만큼 총애를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원나라의 관습인 순장 문화가 있어. 여비 한 씨는 영락제가 죽자 같이 순장 당했습니다.

다행히 공신부인 한 씨는 선덕제에게 승은은 입었으나 총애를 받지 못해 순장 당하지 않고 살아남았고, 어린 성화제를 키워 추후 예우를 받게 됩니다.

참고로 순장 문화는 오이라트 부족에서 포로로 잡혀가 고생했던 정통제가 원나라의 남은 문화를 다 혁파하면서 순장 문화도 없애 버렸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