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문상을 꾸리다. (3)
“가장 큰 혜택은 내 총애를 받게 된다는 거지. 엄청난 혜택이지 않은가?”
“그... 그 혜택은 거부하겠습니다. 부담스러워서리...”
그러고 보니 신숙주가 자신을 보는 눈은 호의를 넘어 애정을 듬뿍 담아서 보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자네 아버지에게 벼슬을 내려줄 수 있는 것도 혜택이라고 할 수 있지. 부가적인 거라면... 문경 전씨 가문이 만든 상단에게는 조선 8도 어느 시포(市鋪)든 공랑 점포를 하나씩 내어주겠네. 엄청나지 않은가?”
시포는 5일 장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런 시장이 서는 곳에 공랑 점포를 주겠다는 것은 엄청난 특혜이긴 했다.
하지만, 특혜를 받는 만큼, 장사하는 상놈의 집안이라고 다른 양반들에게 모욕을 들어야 할지도 몰랐다.
‘양반 가문의 명예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야 하는 일이라면 공랑 점포를 받는 게 그리 대단한 특혜도 아니다. 다른 게... 아, 그래 그걸 달라고 하자.’
“시포의 공랑 점포를 받고 차후에 제가 주상전하께 요청드릴 일이 있을 때 저의 편에 서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주상전하께 할 요청? 어떤 요청이기에 내가 도와줘야 한다는 거지?”
“그것을 지금 밝히기에는... 저의 편에 서신다고 해서 역적이 되거나 하는 일은 아닐 겁니다.”
“흠. 좋네. 자네가 주상께 하는 요청이 인륜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면 내가 자네의 편에 서서 도와주겠네.”
‘뭐, 내 손녀사위가 된다면 그런 요청은 하지 않아도 될 테지만 말이지. 후후’
“감사드립니다.”
“편에 서서 편들어 주는 것이야 뭐. 그럼, 자네는 상단을 만들어 대외적으로 장사를 한다는 걸 공표해야 하네. 양반이 상업을 한다는 것 말일세.”
“네. 공식적으로 상단을 만들어 운영하는 양반가 1호가 되겠습니다. 이미 일을 함에 있어 모든 권리를 아버님께 받았지만, 가문의 이름이 걸려 있는 일이라, 아버님께 먼저 이야기를 한 이후에 공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지. 우선 내년 봄까지는 양반이 상단을 만들어 운영한다는 말이 내 귀에 들려왔으면 좋겠군.”
“그때는 구중궁궐 안에 계시겠군요.”
“그렇겠지. 그리고, 그래야 자네 상단에 물건을 주문할 수 있지 않겠나? 그리고, 고급 양초인 밀촉(蜜燭)도 좋지만, 포촉(布燭)도 만들 수 있으면 만들어 주게. 궐이나 양반가에서 주로 쓰는 것은 포촉이니.”
포촉은 면포에 기름이나 밀랍을 바른 후 둘둘 말아 양초로 쓰는 것을 말하는데, 전체가 100% 밀랍으로 만든 것에 비해서 조잡한 품질이었지만, 가격이 저렴해서 밀랍 초를 쓰지 못할 때 주로 사용되는 초였다.
“네. 내년 꿀을 수확할 때 포촉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좋군. 좋아. 이크, 고기가 너무 익어버렸구만. 어서 먹지.”
구워진 소고기를 먹으며 생각하니, 신숙주가 구상하는 개념은 완전히 민간에게 맡기는 자유시장보다는 몇 개의 대기업이 끌어주는 주도형 시장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상업으로 양민들이 자본을 가지게 되고 유통이 일어나는 것을 기다리기보다는 기업형 양반 상단이 주도해서 눈에 바로 보이는 성과를 원하는 것이구나.’
신숙주의 이런 구상은 조선 중후기 송상, 만상, 경상등이 커지며 어느 정도 이뤄지긴 했다.
물론, 그때도 상업에 뛰어든 양반이 없었기에 중인으로 이루어진 상단은 나라를 주도하는 큰 세력으로 성장할 수가 없었다.
‘대기업화된 현대 한국 경제의 오류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성장형 모델에는 이런 주도형 기업이 있는 게 훨씬 빠르게 결과가 나오지.’
원종은 상업과 유통이 나라를 살릴 수 있다고 여기는 신숙주가 살아 있을 때 최대한 많은 것을 해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칡을 말린 후 짓이겨야 가루를 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한명회 집안의 부엌어멈은 칡을 먹어 본 적이 있는지 가루로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가루가 아니었다.
“아니네, 떡메를 가져오게.”
이미 저녁을 다 같이 먹고 형들은 돌아갔지만, 내일 먹을 칡 요리를 준비한다고 원종은 남았다.
“힘 좋은 이가 돌아가며 떡메로 칡을 쳐 짓이기게.”
“말리지도 않은 칡을 치라고 하시니 명은 따르겠지만, 이거... 에이 모르겠슴다. 퉤퉤.”
젊은 노비는 손바닥에 침을 뱉어 손을 비비곤 떡메를 들어 내려찍기 시작했다.
-퍽! 퍼억! 퍼퍽!-
물기가 있었던 칡은 떡메에 떠져 나가기 시작했는데,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 떡메질에 두껍던 칡이 갈기갈기 짓이겨졌다.
“잘 빻아졌구만. 이제 큰 통에 물과 함께 넣어 칡에 들어있는 액즙을 짜내야 하네.”
떡메에 짓이겨진 칡을 물에 넣자, 금세 물은 흙빛으로 변해버렸다.
“도련님 정녕 이 흙탕물 같은 것을 먹을 수 있는 겁입니까? 짓이기는데 나오는 즙이 아주 썼는데, 그걸 먹을 수 있는 것입니까요?”
아낙들은 물에 담긴 칡을 주물러 액즙을 짜내면서도 이걸 진짜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가졌다.
“허허. 속고만 살았나? 꾹꾹 눌러가면서 빨래하듯이 칡을 치대게나. 그래야 먹을 수 있는 것이 나오네.”
주위에 있는 금산이나 다른 이들은 원종의 기행을 알기에 입을 다물고 쳐다보기만 했는데, 한명회 집안의 종들은 그런 것을 모르다 보니 양반 도령의 장난질에 말려든 것 같이 느껴져 아리송한 기분으로 일을 했다.
“이제 된 거 같구만. 건더기는 채에 걸러 이제 모두 다 빼게.”
채에 걸러진 짓이겨진 칡은 면포에 다시 담아 물을 끝까지 짜내었다.
“이제 시간이 지나기만 하면 되네. 여기서 흰색의 먹을 것이 나올 것이야.”
쓴 한약 같은 흙탕물이 물통에 가득했는데, 그걸 보던 자들은 고개를 저으며 물러갔다.
“저도 도련님을 믿고 있지만, 이 흙탕물에서 먹을 수 있는 흰색의 것이 나온다고 하니 믿음이 잘 안 가긴 합니다요.”
금산도 왠지 믿지를 못하는 투였다.
“좋아 그럼. 금산이 네가 밤새 이 물을 지키고 있거라. 흰색의 앙금이 생길 것이니 내일 점심때까지 잘 지켜야 한다.”
“끄응. 알겠습니다.”
흙탕물에서 먹을 것이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들 때문이라도 금산을 남겨 칡을 짜낸 물을 지키게 했다.
다음 날 오전 일찍 칡 물을 지키던 금산에게 가니 집안 노비들이 다들 모여서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있었다.
“도련님 참말로. 흰색의 앙금이 물 밑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그럼, 저걸 먹을 수 있는 겁니까요?”
금산의 말처럼 칡 물을 담은 통의 가장자리로 흰색의 앙금이 내려앉은 게 보였다.
“저게 칡에서 나온 전분(澱粉 녹말)이다. 바로 먹을 수도 있지만, 아직은 칡의 떫은맛이 있으니 한 번 더 물에 가라앉혀야 한다. 위에 물을 조심스레 버리고, 다시 물을 채워라.”
솜씨 좋은 어멈이 달라붙어 위의 갈색 물을 버리고, 깨끗한 새 물을 채워 넣길 2번이나 더 하자 이제 물이 갈색으로 보이지 않았고, 투명한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흰색의 전분이 제대로 보였다.
“어멈. 이 흰 물의 절반은 솥에 올려 끓이게. 바닥이 눋지 않게 한 명이 계속 저어야 할 것이야.”
“묵을 만드는 것이군요. 도토리로 묵을 만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맞아. 도토리묵을 만들 듯이 해주면 되네.”
다행히 어멈이 도토리묵을 해본 경험이 있었기에 어멈에게 맡기곤, 남은 전분 물을 면포에 싸서 물기를 최대한 뺐다.
“녹두 가루를 가져오게. 녹두 가루가 없다면 밀가루나 메밀가루도 되네.”
칡에서 나온 전분을 몇 번이나 물로 씻었다고 하더라도 칡의 쓴맛이 100% 없어지지 않았기에 단맛을 내는 녹두 가루를 넣어 반죽해야 했다.
물론, 녹두 가루가 없으면 밀가루 같은 것도 괜찮았는데, 역시나 한명회의 집인 만큼 녹두 가루가 갖춰져 있었다.
녹두 가루와 물기가 남은 전분을 섞어 반죽하기 시작했다.
물기를 없애야 하다 보니 녹두 가루가 한 말이나 들어갔고, 반죽한 양을 보니 20~30명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반죽을 끝내고 나니 부엌어멈도 칡묵을 사기그릇에 담아내며 식히고 있었다.
“전 도령 뭐 하는가? 어서 먹을 걸 주게.”
퇴청하고 오는 한명회나 신숙주를 기다려야 할 것 같았는데, 잘산군이 얼른 먹을 걸 내놓으라고 성화였다.
‘그러고 보니, 최고 어른이 잘산군이구나. 그럼 해야지.’
신분이 있다 보니 나이를 따질 필요가 없었다. 일찍 도착한 원길형과 기주형이 있었지만 작은 솥에 물을 올렸다.
반죽한 것을 밀대로 길게 밀어 얇게 만들곤 칼질을 시작했다.
-샥샥샥-.
엉겨 붙지 말라고 밀가루를 툴툴 뿌려가며 칼질하다 보니 한국에서 먹었던 칼국수의 맛을 제대로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조선시대에 먹을 수 있는 것 중에서는 현대의 맛과 가장 유사한 맛의 음식이 되겠구나.’
현대 한국에서도 칼국수를 끓일 때 국물은 멸치를 사용했다.
그리고 한명회의 집에는 팔도에서 올라온 식재료가 가득하다 보니 잘 말린 멸치는 물론이고 약재로 진상된 다시마까지 있었다.
‘말린 굴에 조개도 있으니 가공된 굴 소스보다 더 국물맛이 좋겠구나. 이거 재료가 다 있으니 요리 할 맛이 나는구나. 음? 이건 칡묵에 쓰자.’
풍족한 한명회의 집안이었기에 쓸 수 있는 재료가 많아 기뻤다.
멸치와 조개류로 국물을 우려내고 거기에 애호박, 파, 마늘을 잘게 썰어 국물에 맛을 더했다. 소금을 넣어 간을 맞추고, 달걀도 휘저어 곱게 풀리게 졸졸 저어가며 넣자, 한국 분식점에서 파는 그 칼국수의 향이 났다.
그릇에 떠 국물을 맛보니, 머리가 기억하는 현대의 그 맛이었다.
물론, 약간의 다시다가 아쉽기는 했지만...
칼국수 면을 따로 삶을까 하다 칼국수를 먹을 때 울면처럼 뻑뻑해지는 그 국물맛이 포인트이기도 해서 국물에 면을 넣어 같이 삶았다.
“마마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따로 끓인 솥에서 잘산군과 그 부인 한 씨의 칼국수를 펐고, 따로 끓인 솥에서 두 형이 먹을 칼국수를 펐다.
“칡 칼국수입니다. 칼로 국수를 만들었다고 하여 칼국수라고 부른답니다. 어제 제가 가지고 왔던 칡이 이렇게 되어 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잘산군과 부인 한 씨에겐 칼국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그 앞에서 후추를 뿌려주었다.
“동생아 나도! 나도!”
잘산군과 같은 높이에서 식사를 하지 못하기에 단 아래 따로 만든 자리에 형들이 앉았는데, 형들도 후추를 뿌려 달라고 눈빛으로 아우성을 쳤다. 어쩔 수 없이 한 번씩 후추를 뿌려줬다.
“으흠. 호초의 향이 그윽하기도 하지만, 국물에서 올라오는 묵직한 그윽함도 있구나.”
후추를 좋아하는 잘산군은 후추 냄새와 섞인 칼국수 냄새가 마음에 드는지 코를 벌렁거렸다.
그리고, 국물을 떠먹었는데, 일반적인 국과는 달리 전분으로 인해 걸쭉해진 무게감 있는 국물에 감탄했다.
“겨울에 안성맞춤인 음식이로구나. 국물 한 숟가락으로도 추위가 달아나는 것 같소. 안 그렇소. 부인?”
“네. 정말 국물이 시원한 것 같습니다. 이제까지 먹어 본 국물들과는 맛이 다르네요.”
“멸치와 다시마, 파로 국물을 내었고, 거기에 굴과 조개로 맛을 우려내었습니다.”
“오호, 그래서 국물맛이 가볍지 않은 것이었구만. 육고기가 들어가지 않았으니 온전한 바다의 맛이라고 해야겠구만. 그럼 면을 먹어 볼까. 쓴맛이 난다는 칡으로 만든 면인데 어떤 맛이 날지 궁금하군.”
잘산군은 신숙주에게 칡은 아주 쓰다고 들었기에 과연 전원종이 그 쓴맛을 어떻게 했을지 궁금했다.
-후루루룩-.
“음. 쓴맛이 전혀... 아니다. 끝에 살짝 쓴맛이 나는구나.”
잘산군은 혀끝에 살짝 느껴지는 칡의 쓴맛을 음미했다. 쓰긴 쓰지만 그다지 기분 나쁜 쓴맛은 아니었다.
“이 정도의 쓴맛은 그냥 넘어가도 되겠는걸. 부인은 어떻소?”
“저도 살짝 쓴맛이 나오나, 약선 음식과 같은 느낌이라 아주 맛이 있습니다.”
부인도 만족스러워하며 칼국수를 먹자 잘산군도 칼국수를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했다.
형들도 칼국수를 흡입하듯 먹기 시작했는데, 후루룩거리는 소리는 거의 내지 않았다.
현대에서는 면 음식을 먹을 때 맛있다고 소리를 내주는 게 가게 사장들에 대한 예의라고 하지만, 그 면치기를 하며 소리 내주는 예의 자체가 일본 라멘집 예의였기에 원종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네 조상들은 지금 잘산군처럼 될 수 있으면 면을 먹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것은 칡으로 만든 칡묵입니다. 두 가지 맛으로 준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