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76화 (76/327)

76. Honey My Honey. (3)

공처럼 둥글게 뭉쳐 만든 밀랍 외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작은 솥으로 밀랍을 끓였다.

방금 막 잘라 온 대나무는 사람 손목만큼 굵은 왕대였는데, 두껍게 꼰 명주실을 나무젓가락에 달아 대나무 통 입구에 걸쳐두었다.

이 명주실이 양초의 심지가 될 터였다.

밀랍이 녹아 기름처럼 뻑뻑한 액체가 되자, 대나무 통에 밀랍을 조심스레 부었는데, 양초 중앙에 있어야 하는 심지실이 밀랍 물에 밀려 이리저리 움직여 댔다.

결국, 처음으로 만들어본 양초는 심지가 중앙에 위치하지 않는 불량품이 되었다.

“양초 심지가 중앙에 없다면 상품으로서 아무 소용이 없다. 밀랍을 아주 천천히 조심스레 넣어보자꾸나.”

다시 한번 조심스레 밀랍 물을 부어봤지만, 역시나 심지실은 밀랍 물에 휩쓸려 고정되지 않았다.

불량 양초는 다시 녹여서 만들면 되었지만, 어떻게 심지를 중심에 위치하게 할지 답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사진과 글에서 봤을 때 밀랍으로 만들 때는 속이 비어있는 대나무 통에 이렇게 실을 늘어트려 만들었는데, 이 심지는 그럼 어떻게 고정을 한 것이지.’

“도련님. 저 실 끝이 움직이는 게 문제라면, 실 끝에 작은 돌 같은 것을 달아두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얇은 나무젓가락 끝에 실을 묶어 나무를 심지실과 같이 쓰는 건 어떻습니까?”

제대로 뭔가가 안 만들어지니 지켜보던 이들도 여러 의견을 내었다.

“도련님. 뒤집는 건 어떤가요?”

“뒤집다니? 어떻게 말이냐?”

대나무 통을 뒤집으면 당연히 밀랍이 흘러내리는데, 뒤집으라는 석동이의 말이 뭘 뒤집으라는 건지 몰랐다.

“그게... 초의 심지를 바닥으로 내는 것입니다. 대나무 마디막이 막고 있는 바닥 중앙에 구멍을 뚫어 심지실을 아래로 빼서 고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밀랍을 붓는 위쪽은 반대로 초의 바닥이 되겠지요.”

“심지를 아래로? 아!! 그렇구나!”

석동이의 말을 듣고 보니, 초를 만들 때 무조건 심지를 위로 둬야 한다는 고정 관념으로 초를 만들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석동이의 말처럼 바닥에 구멍을 뚫어 심지실을 밑바닥으로 빼게 한다면 밀랍을 붓는 입구가 바닥 쪽이 되어 명주실을 중앙에 고정할 수 있었다.

초가 타는 것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석동이였기에 이런 고정 관념을 무시하는 역발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나무젓가락에 묶은 실을 대나무 통 입구에 걸쳐둬서 고정하고, 바닥 쪽은 송곳으로 구멍을 꿇어 명주실을 바닥으로 빼내 고정했다.

그리고, 다시 밀랍 물을 부으니 뜨거운 밀랍 물이 명주실이 통과하는 구멍도 막아버리며 굳어갔다.

당연히 양쪽으로 고정된 심지실은 정확하게 초의 중앙에 위치했다.

“아차! 이걸 잊고 있었구나.”

거기다 양초가 거꾸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고 보니 잊고 있었던 것도 바로 보였다.

‘촛대에 꽂을 수 있는 밑 공간이 있어야지. 거꾸로 하지 않았다면 이 구멍도 생각하지 못했겠구나.’

아직 다 굳지 않은 밀랍의 바닥 부분을 나무 조각으로 깊게 눌러 촛대 꼬지를 만들었다.

밀랍이 완전히 굳자 대나무 통을 도끼로 살살 내려쳐 부수었는데, 대나무 통이 결대로 갈라지며 양초의 겉면에 자국을 내었다.

대충 보기에는 괜찮아 보였지만, 고급품으로 판매를 한다면 이것도 옥에 티가 될 수도 있었다.

‘아예 미리 두 쪽이 나 있는 대나무 틀을 만들어보자. 초를 만들 때는 붙여서 끈으로 묶어두고 다되면 줄만 풀면 되니 틀을 제거할 때 생기는 불량도 줄일 수 있겠지.’

바로 대나무 틀을 만들어 조립형 틀로 초를 만들어보니 마치 공산품처럼 같은 크기의 똑같은 양초가 만들어졌다.

“도련님. 이 틀과 솥에 남은 자투리 밀랍은 어떻게 할까요? 그냥 버립니까?”

자투리다 보니 대나무 틀에 넣어 만들기에는 양이 적었는데, 다른 형태로 만들수는 있을 것 같았다.

“다 긁어모아 다시 밀랍 물을 만들게.”

다시 액체가 된 밀랍을 김밥 김을 만들 듯이 넓고 얇게 폈다.

그러곤, 심지실을 밀랍의 한쪽에 붙여두곤 김밥을 말 듯이 굳어가는 밀랍을 말았다.

뜨겁던 밀랍이 서서히 굳어가며 김밥처럼 말리자 나름 한자 길이의 얇은 초가 만들어졌다.

“될까 싶었는데, 되는군. 이 초는 말아서 만드는 초이니 말초라고 부르지. 다른 초를 만들고 남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니 말초(末燭)라고도 부를 수 있겠지.”

대나무 통으로 만든 초 8개와 말아서 만든 초 1개까지 총 9개의 초가 만들어졌다. 채취한 벌집 2개로 양초 9개를 만들어 냈으니 시중에 양초가 비쌀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대나무 통으로 만든 초는 아까워서 말초 심지에 불을 붙여보자, 향긋한 꿀 냄새를 풍기며 밝게 초가 타들어 갔다.

“와! 도련님 성공입니다! 귀물(貴物)을 만드실 수 있게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와! 초가 이렇게 타는 걸 가까이서 보는 게 처음이야.”

“나도 그래. 우리 같은 놈들이 이리 가까이 볼 일이 있어야지. 진짜 그을음이 거의 나지 않는구만.”

단순히 초에 불이 붙어 있는 것이었지만, 다들 신기하다고 난리였다.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 초가 너무나도 귀했기 때문이었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양반들도 제사를 지내거나 혼례식이 있을 때가 아니라면 이렇게 초를 켜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양민들은 밝게 타오르는 양초를 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해했다.

“어서 불을 끄십시오. 이 비싼 걸 그냥 켜두면 아깝지 않습니까요?”

촛불을 끄고, 녹은 촛농이 혹여나 흘러내리지 않을까 입으로 후후 불어 밀랍을 굳히는 모습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분명 만길 노인처럼 양봉하는 자도 있는데, 왜 이리 밀랍으로 만든 초가 비싸고 귀한 것인가? 돈이 된다면 당연히 여럿이 뛰어들었을 것인데. 설마, 이것도 양반이나 아전들의 수탈 때문인가?’

왜 제대로 상업화가 되지 못한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바로 전통 방식 양봉의 한계 때문이었다.

움직이지 않고, 한곳에 머물러 양봉을 하다 보니 인근 산에서 나는 꽃나무에만 의지해야 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상업성을 가진 대규모 양봉이 불가능했을 터였다.

거기다 소비장(모판식 벌집) 형태가 아닌 일체형의 통나무 양봉이라 1년에 1번 수확했을 것이니 제대로 사람들이 뛰어들 만큼의 수익이 나오기 힘들었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의 양봉처럼 소비장을 쓰고, 꽃을 따라 움직이는 양봉을 하게 된다면 상업화가 가능한 규모로 키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아버님 어떻습니까?”

“이걸 네가 만든 것이라고?”

아버지는 사랑방이 환하게 밝아진 것에 기뻐하면서도 금세 얼굴을 굳혔다.

“이걸 몇 개나 만든 것이냐?”

“이것과 똑같은 것 7개가 더 있고, 이것보다 못한 초가 1개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서 국왕 전하께 진상하도록 하거라.”

“네? 초를 진상해야 한다고요?”

“그렇다. 이 초가 무슨 색상이냐?”

아버지의 말에 초를 보니 벌집에서 나온 노란색의 밀랍으로 만들었기에 연한 노란색을 띠고 있었다.

“노란색인데... 설마...”

“그렇다. 노란색은 천자의 색이다.”

현대인들은 그저 밀랍으로 만들었기에 노란색의 초가 된 것인데, 왜 이렇게 전기환이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하지만, 노란색은 현대에도 행복, 권력, 명예로운 지위를 상징하는 색이었고, 이는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아시아에서는 노란색 황색은 황제를 상징하는 색이었고, 붉은색은 왕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이 시대에는 색을 잘못 쓰기만 해도 역적으로 몰려 떼죽임당할 수도 있는 시대였다.

“이렇게 굵고 밀랍을 가득 담아 만든 초는 예사 귀물이 아니다. 누가 보든지 탐을 내게 될 것이고, 이로 말미암아 화가 미칠 수도 있는 법이다. 얼마 전 죽은 남이가 죄가 있어 죽었겠느냐?”

남이는 떨어지는 혜성을 보며 새로운 별이 뜨겠지 하는 말을 했다고 하여 새로운 별은 새로운 군주를 뜻하고, 그것은 역모라는 괴이한 3단 논법으로 인해 예종에게 죽임을 당했다.

아무리, 벌집의 밀랍으로 만들었기에 노란색으로 만들어진다고 이야길 해도 그걸 다른 의미로 귀에 걸어 귀걸이, 코에 걸어 코걸이라고 하게 된다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네가 일전 한양에서 잘산군과 한명회와 친해져 연을 맺었다고 들었다. 우리가 아니라, 그들을 치기 위해서 우리 가문을, 이 초를 이용할 수도 있음이야. 자중하고 먼저 숙여야 한다.”

아버지의 말처럼 미리 예종에게 진상해서 이런 색으로 만들 수밖에 없음을 알려야 나중에 화가 미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버님.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남은 6자루를 진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종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은 미리 조심하는게 맞았다.

“그래, 그리고 이 초의 색을 바꿀 수 있는지를 알아보거라. 불교의 행사나 화촉으로 혼례식에 쓰는 붉은색은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야 불(火)을 다루는 초를 만들면서도 화(禍)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네.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원길이가 한양에 가 있으니 더욱더 조심해야 한다.”

***

“...해서 이 초의 색을 바꾸어야 하는데, 무슨 방법 없겠는가? 사기장들은 사기를 만들 때 그림을 그리기도 하니 색에 대해 좀더 많이 알 것 같아 왔네.”

“흠. 도련님. 이미 만들어진 초의 색은 바꾸기 힘드오나, 이 초의 겉면에 그림을 그리거나 파내어 색을 입히는 것은 가능할 것 같사옵니다.”

“오! 역시. 여기에 오길 잘했군. 상감기법(象嵌技法)으로 파내서 색을 입히는 것인가?”

“네. 그것이 화려하기도 하고 농담(濃淡)을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그런가? 그럼, 혹시 용은 그릴 줄 아나? 초의 겉면에 용을 그리고 금색으로 색을 칠해주게.”

“저기... 도련님 금색과 용은 주상전하를 상징하는 색이 온대, 괜찮겠습니까요?”

“그래. 이 두 자루는 주상 전하께 올릴 것이고, 이 두 자루는 잘산군에게, 이 두 자루는 영의정 한명회에게 올릴 것이니 이 두 자루에만 용을 새겨주면 되네.”

“흠. 알겠습니다. 금색으로 용을 새기고, 나머지 두 분에게는 복을 뜻하는 은색 박쥐를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박쥐라... 뭐 건강과 복, 장수를 상징하는 것이니 괜찮겠지. 어서 서둘러주게나. 급히 한양으로 보내야 하니.”

그렇게 황룡촉으로 이름을 붙이게 되는 황금용이 새겨진 초가 만들어졌고, 은복촉으로 불리게 되는 은색 박쥐가 새겨진 초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

“여~ 원길이! 드디어 문경의 좁쌀영감이 한양으로 와버렸구만. 하하하. 그런데 무슨 짐이 이리 많은가?”

진기주는 소달구지를 3대나 끌고 올라 온 원길의 짐에 놀랐다.

“형님. 이게 다 나이기온 옷입니다.”

“헐. 이렇게나 많이 들고 오다니. 놀랍구먼. 그렇다면 먼저 신숙주 어른을 뵈러 가세나.”

“에? 형님. 실세는 한명회 어르신이 아닙니까요? 그리고, 원종이에게 듣기로는 한명회 어르신과 인연이 있다고 하던데. 그분을 통해 전하께 이 나이기온 옷을 진상하려고 합니다.”

“그건 나도 알아. 헌데, 한명회 어르신을 만나려면 올겨울이 다 지나서야 만날 수 있을 것이야. 이번에 다시 영의정이 되셨거든.”

“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하하. 이보게. 신숙주 어르신도 우의정을 지내신 분이고, 지금은 승정원의 원로대신으로 계시지만 언제든지 정승으로 올라가실 분이라 쉽게 만나기 힘든 분이시네.”

진기주는 신숙주의 대단함에 대해 한참이나 이야기했지만, 원길은 그래도 한명회지 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허허. 이거 원, 자네 형제들은 정녕 알다가도 모르겠구만. 일단, 신숙주 어른에게 드릴 나이기온 옷부터 챙기게.”

“네? 신숙주 어르신꺼는 따로 빼둔 것이 없는데...그 정도 분은 안 드려도 되는 거 아닙니까요?”

“아니, 진짜 신숙주 어른은 점오급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진기주는 답답해서 가슴을 쳤다.

*

[작가의 말]

사실 양초라고 우리가 쓰는데, 이 양초앞에 쓰이는 양도 서양의 양(洋)입니다. 양이들의 초 라는 말이었지요.

즉, 우리가 흔히 보는 흰색의 파라핀으로 만들어진 초는 조선 말기에 유입되어 기존에 밀랍이나 동물의 기름으로 만들던 초와 다른 이름이 필요했기에 서양의 초. 양초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비싼 밀랍이나 동물의 기름으로 만드는 초는 명맥이 끊겨 버렸고, 자연스레 양초라는 말이 초의 대표가 된 것입니다.

앞으로도 원래 이름인 초, 촉이 아닌 이해하기 쉽게 양초로 그냥 계속 쓰도록 하겠습니다.

+추가 덧글+

기후 변화가 심했던 효종과 현종 시절(경신대기근이 있던 시기) 연간에 기록된 밀랍의 생산지는 영서의 몇 읍과 호남의 무주, 호서의 청주지방 몇 곳에서 밀랍의 진상이 가능했고, 영남지방은 아예 밀봉이 절종되어 생산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후로도 밀랍이 귀하여 벼슬아치들에게 주는 뇌물이나 선물로 밀랍 초를 주었다고 하는데, 제사에는 등불이 아닌 초를 켜야 했기에 양반들에게는 최고의 선물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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