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75화 (75/327)

75. Honey My Honey. (2)

“죄송합니다. 나무 속에 있던 벌집이다 보니 여왕벌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무 속이라 연기를 더 피웠던 게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석청을 챙긴 이후 다음 날 속이 빈 나무에 집이 있는 목청을 떼러 왔는데, 그만 여왕벌을 놓치고 말았다.

“뭐 죄송한 것까지 있나. 솔직히 어제가 운이 좋았던 거네. 그건 그렇고, 저렇게 집을 놔두고 도망친 벌들은 겨울을 넘길 수 있겠나?”

“꿀이 꽉 찬 집을 우리게 빼앗겼으니 겨울을 못 넘길 것입니다. 세력은 있지만, 다시 집을 만들고 하기에는 뭐든 다 부족할 겁니다.”

“그렇겠지. 그럼, 여기 목청에는 꿀을 좀 많이 놔두고 가지. 저들이 다시 돌아와도 좋고, 아니면 다른 벌들이 와서 살아도 좋고.”

만길 조손이 꿀을 따는 동안 남은 벌집을 손으로 부수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에 꿀을 발랐다.

곰이나 짐승들이 대부분 핥아먹겠지만, 이 꿀 향을 맡고 분봉하는 벌들이 안착하게 되면 그때부터 또 이득이 생길 터였다.

***

“해서 자네와 석동이는 물론, 가족들까지 문경현의 호(戶)가 되었네. 노역에서 빼주는 것도 허락을 받았으니 속히 집으로 가서 가족들을 데리고 오게나.”

“도련님. 그럼 저희는 양봉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네. 내 밑에서 양봉 일을 좀 맡아주게나.”

“저.도련님. 이런 말을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소인의 아들까지 저희 삼대가 양봉 일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석동이의 아비이자 제 아들 말용이는 양봉을 하다 죽었습니다.”

“양봉을 하다 죽다니? 어떻게 죽은 건가?”

“벌통을 덮친 곰을 내쫓으려다 크게 다쳐 이레 넘게 고생하다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도련님 밑에서 양봉을 하게 되면 금산 무사님이 계속 같이 있는 것입니까?”

만길에게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금산은 어깨를 으쓱했다.

만길의 이야길 듣고 보니, 산에 맹수가 많은 조선에서 양봉은 위험한 일이었다.

사람이 단맛 나는 꿀을 좋아하듯이 곰은 물론이고 호랑이나 늑대도 꿀을 좋아했다.

죽은 나무 속에 만들어지는 목청이나 바위들 사이에 만들어지는 석청의 경우에는 접근이 힘든 위치가 많아 동물들이 달려들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양봉의 경우에는 접근이 어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사람이 오가기 쉽게 접근이 가장 좋은 곳에 벌통을 놔두었다.

그러다 보니 짐승들에게서 꿀을 지키는 게 중요했다.

이건 현대에서도 문제가 되었는데, 반달곰 복원 프로젝트로 인해 지리산에 방사한 반달곰이 양봉하는 벌통을 덮쳐 1년 양봉 농사가 날아가 버리는 사건도 있었다.

함정 우리를 아무리 설치한다고 해도 모든 동물을 막아낼 수는 없었고, 금산이 양봉장에 상주 할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건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내가 생각하는 양봉에는 동물의 습격이 있을 턱이 없었다.

“금산은 내 수행원이다 보니 늘 양봉장에 있을 수는 없네.”

만길은 곰은 물론이고 호랑이까지 때려잡아 버릴 것 같은 금산이 있어 줄 수 없다는 말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범이나 곰의 습격은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양봉은 산에서 하는 게 아니네.”

“네? 산에서 양봉을 하지 않는다면 어디서 하시겠다는 말입니까?”

“바로, 강변이네.”

“강변이면... 도련님. 강변이 넓어 꽃이 많이 피는 것을 보시곤 강변에서 양봉하신다고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십니다. 아무리 강변이 넓어도 산보다는 모자랍니다. 그리고, 산은 강변과 달리 높낮이가 있어 높이에 따른 온도 차이로 피고 지는 꽃의 종류가 다릅니다. 여러 종류의 꽃이 피고 지기에 양봉을 산에서 하는 것이옵니다.”

“그래. 자네의 말이 맞네. 산의 고도에 따른 개화 시기의 차이가 있기에 봄부터 가을까지 꽃을 늘 볼 수 있는 산이 양봉에 적합하지. 그게 맞아. 하지만, 나는 같은 이유로 강변에서 양봉을 하려는 것일세. 자 이걸 한번 보게나.”

원종은 기억을 더듬어 그린 지도를 펼쳤다.

한양으로 가는 길에 어디쯤인지 구분하기 위해 대충 만든 지도였는데, 만길은 이런 지도 자체를 처음 보는 눈치 같았다.

“자. 우리가 있는 문경은 여기쯤이네. 그리고, 이렇게 구불구불 이어진 이 선이 낙동강이네. 남쪽 바다인 남해까지 이어지지. 내가 이야기한 강변은 이 낙동강의 주변에 있는 모든 강변이네.”

“네? 어떻게 이 낙동강 전부에서 양봉을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만길은 지도를 보면서도 전도령을 이해하지 못했고, 원종은 그런 이해하지 못하는 만길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 시기 전통 방식 양봉은 봄부터 가을까지 한자리에서 양봉을 하는 것이지 현대의 양봉처럼 꽃을 따라 움직이며 양봉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겨울 동장군이 물러가면 가장 먼저 따뜻해지는 곳이 바로 여기 지도의 가장 아랫부분인 남해네. 동장군이 서서히 북쪽으로 올라가면 따뜻한 기온이 남해에서부터 점점 따라 올라오게 되지. 그렇게 되면 강변을 따라 꽃이 피게 되네.”

“...그럼. 양봉을 꽃을 따라가며 하겠다는 말입니까?”

“맞네. 바로 그거네. 남해 끝 낙동강 변에서 양봉하고, 꽃이 피는 것을 따라 여기 문경까지 거슬러 올라오는 것이네.”

“양봉을 하며 벌통을 들고 움직이겠다는 말은 처음 들어 봅니다.”

양봉을 수십 년 넘게 해온 만길이 이런 방법은 처음 들어 봤다고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꽃이 피는 날짜에 맞춰 위로 올라가며 하는 양봉은 1950년 이후니깐. 처음 들어보는 게 당연할 걸세.’

정확하게는 아카시나무(아까시나무 Robinia pseudoacacia)가 한국에 전래 된 시기부터 시작되는 양봉의 형태였다.

아카시나무(아카시아 나무가 아님)는 북미 동부를 원산으로 하는 나무인데, 우선 흙을 가리지 않고 자라는 속도가 빨랐다.

더구나, 콩과에 속한 나무였기에 흙에 질소 성분을 만들어 주변을 비옥하게 해주는 일도 했다. 그래서 1950년대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반도의 산림 녹화 사업에 많이 심어진 나무였다.

그리고, 그때 심어진 나무가 퍼져 현대 한국에서 생산되는 꿀의 80%는 이 아카시 나무에서 채취되는 꿀이었다.

물론, 이 아카시 나무 군락을 따라 남해 끝자락에서 임진각까지 두 달 동안 움직여야 하는 양봉업자들은 고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만큼 돈이 되는 일이 양봉이었다.

꿀을 아낌없이 뿌려주는 아카시 나무는 이 시대에 없었지만, 강변에 피고 지는 들꽃들은 많을 터였다.

“6월 이후 여름이 되어 꽃이 피지 않는 시기가 되면 그때는 산으로 벌통을 옮겨야 하겠지만, 움직이며 채취하는 꿀의 양이 휠씬 더 많을거네.”

“양봉을 꽃을 따라 한다니... 생각지도 못한 방식입니다.”

“그래서.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이네. 자네가 하는 전통적인 방법의 양봉에 내가 아는 것들을 섞어서 새로운 양봉을 해보지. 우선은 연기를 피우는 방식부터 바꿔야 하네.”

“연기부터 말입니까? 그저 벌들이 매운 연기를 피해 도망치게 만드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네. 자네도 봐서 알겠지만, 처음 연기를 피워 올리면 벌들이 몸을 움츠리게 되고, 행동이 느려지는 것을 보았을 것이네. 사실, 이 연기를 정당히 잘 쓰면 벌들을 벌집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게 해서 피하게 할 수도 있네.”

현대 양봉에서는 연기를 뿜어내는 뿜뿜이를 손에 들고 연기를 조절해 가며 벌들을 안정시켜 소비장(모판식 벌집)을 빼고 넣고 했다.

물론, 현대 한국에서 양봉하는 꿀벌 자체가 우리나라 종자가 아니라, 수입 꿀벌 종자였기에 연기에 대한 반응이 그렇게 나오는 것일 수도 있었다.

꿀을 벌집에서 빼내는 방식도 전통적인 양봉에서는 벌집을 잘게 부수어 채로 걸러 꿀을 모았다. 문제는, 이렇게 꿀을 모으게 되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게 문제였다.

그리고, 채에 남겨지는 것도 많아서 단점이 명확했다.

벌집 아이스크림으로 오픈했던 카페는 박살이 났었지만, 제대로 된 벌집을 파는 양봉 집을 찾아 꿀을 채취하는 것까지 직접 보고 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소비장(모판식 벌집) 채로 넣어서 돌리는 원심분리기 같은 게 있어야 꿀을 수월하게 수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려면 준비할 게 많겠구나.’

현대 방식으로 벌집에서 꿀을 채취하려면 장비가 필요했다.

‘도자기로 큰 통을 만들고, 주석으로 회전축을 만들면 될 것 같기도 한데. 그리고 그런 장비를 활용하려면 지금의 세워진 전통 방식 벌통도 개선 시켜야 하고...’

전통 방식으로 통나무를 잘라 만들기보다는 사각 나무 틀을 짜서 세로로 올리는 현대 방식과의 접점을 고민했다.

양봉을 하려니 또 신경 쓸 것이 쏟아져 나왔다.

“우선, 집으로 가서 가족들을 데리고 오게. 그게 우선일 것 같군.”

***

“도련님. 꿀을 짜고 난 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장비가 없어 전통 방식으로 채에 걸러 꿀을 채취했는데, 일주일이 되니 더는 부서진 벌집에서 흘러내리는 꿀이 없었다.

“그럼, 가마솥에 물과 함께 벌집들을 넣고 끓이게나.”

불을 강하게 3시간 넘게 끓이면서 물을 몇 번이고 추가해서 열로 녹일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녹였다.

그러곤, 면포를 거름망으로 삼아 뜨거운 벌집 물을 쏟아부었다.

“면포에 걸러진 찌꺼기 들은 버려도 되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 뜨거운 김을 내는 물일세.”

면포에 걸러진 벌집 끓인 물은 온도가 식어 감에 따라 노란색의 결정이 물 위로 떠 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천연밀랍이네!”

원종은 팔을 걷어붙이곤 밀랍을 건져내기 시작했다.

천연밀랍의 느낌은 마치 따뜻한 돼지비계를 만지는듯한 느낌이었다. 밀랍을 두 손으로 모아 물을 짜내듯이 꾹꾹 눌러 둥근 공 모 양으로 만들었다.

“밀랍을 짜낸 이 물도 그냥 버리면 안 되네. 이건 천연 화장품이네. 유분 같은 기름 성분이 들어가서 피부를 촉촉하게 해주지.”

옆에서 일을 돕고 있던 자들의 얼굴에 내가 일일이 밀랍 짜낸 물을 발라 주었다.

“정말, 피부가 탱탱해지는 느낌입니다.”

“마치 기름을 바른 듯한 느낌인데.”

“얼굴이 당기는 느낌이 들었는데, 신기하구만.”

“이 밀랍 물은 겨울에 입술이 트는 것을 방지해 주기도 하고, 손등이 갈라지는 것도 막아준다네. 노역을 하는 자 중에 손이 거칠어진 자들에게 바르라고 하게.”

나도 겨울에 로션을 대신해서 얼굴에 바를 것을 고민했는데, 좋은 천연재료 화장품을 구한 것 같았다.

끓이고 식힌 물에서는 성인 남자의 주먹만 한 크기의 밀랍 19개를 얻었는데, 이 밀랍은 볶음 요리를 할 때 기름처럼 쓸 수도 있었고, 그게 아니면 밀랍을 녹여 양초를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조선 시대로 왔을 때, 양반가에서도 양초를 쓰지 못하고 기름 등을 쓰는 걸 보고 놀랐었지.’

드라마 사극에서는 양반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야간 씬이나 방안 씬 촬영에서 아주 당연하게 양초가 켜져 있었다.

하지만, 이 양초라는 물건은 그렇게 아무나 막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인기 있고, 비싸면 내려진다는 사용 금지령이 양초에도 내려졌었다.

태종 때 궁궐이나 민간에는 홍대초(붉은색의 양초)를 쓰지 못 하게 했는데, 대신 송거(松炬 : 소나무 횃불)를 사용하도록 명을 내렸었다.

이 붉은색의 홍초가 가격도 가격이었지만, 불교의 색채가 짙었던 행사에 주로 사용되었기에 조선 초기 불교의 화려함을 죽이기 위해서 이런 금지령을 내렸었다.

그리고, 세종대왕 때에도 수륙재(水陸齋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에게 공양을 드리는 불교의식)때 양초를 쓰지 말고 유등(油燈)을 쓰도록 명을 내렸었다.

물론, 양민들이나 가난한 자들은 어두워지면 빨리 잠을 잤고, 불을 꼭 밝혀야 할 때는 대나무의 솔이나 소나무의 송진에 불을 붙여 등불로 섰다.

그리고, 당연히 그런 것들은 밝지도 않았고, 검은 그을음을 뿜어내어 다른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현대에서는 생일이나 제사를 지낼 때 혹은 정전이 되었을 때 비상용으로 쓰는 것이 양초였지만, 이 시대에는 최고의 조명으로 가장 중요할 때나 킬 수 있는 것이 밀랍으로 만든 양초였다.

“양초를 만들게 대나무 통을 가지고 와라!”

*

[작가의 말]

조사하다 보니 양초 1개 가격이 비쌀 때는 소 한 마리 값만큼 나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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