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길목에서 건설을 외치다. (4)
아전 김율시와 이야길 끝내고 내용을 곱씹어 보다 보니 열 받는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한배를 탔다고 말을 은근히 까네.’
같이 도적질을 해 먹는 작당에 끼었기에 편하게 보는 건지, 아니면 나이가 어리기에 그렇게 보는 건지는 몰라도 은근히 높임말과 낮은말을 섞어 쓰는 게 거슬렸다.
화강석 대신 벽돌을 써서 돈을 남겨 먹게 되면 결국 제 놈들과 같은 수준의 사람이 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싸움터가 되지 않는 성이라고는 하지만, 안을 그렇게 벽돌로 바꾸어도 될까? 만약, 내가 만들어 내는 변화로 인해 싸움터가 아닌 이곳에서 싸움이 일어나게 된다면? 내 벽돌로 인해 승패가 바뀌는 일이 생긴다면?’
만약이긴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조선 시대 성(城)을 생각하다 보니 조선 후기 정약용이 건설에 참여했던 수원화성도 떠올랐다.
정약용이 거중기를 만들어서 건설 기간을 단축했다는 이야기는 대부분 알고 있겠지만, 수원성을 축조할 때 최초로 벽돌을 사용해서 성을 건축한건은 대부분이 몰랐다.
물론, 성의 겉면은 모두 기존과 같은 화강석을 다듬어 썼기 때문이었다.
겉면을 빼고 그 안쪽으로는 벽돌을 써서 만들었는데, 현대에서도 잘 만든 성으로 평가를 받았다.
이 벽돌을 써서 건축하는 것은 조선 초중기에 명나라를 다녀온 사신들을 통해 알려졌는데, 상국(上國)에선 건물을 짓는데, 벽돌을 쓴다며 우리도 따라가야 한다는 말이 나왔었다.
해서 벽돌로 건물을 지었지만, 당시 벽돌은 건축 현장에서 나온 흙으로 만들어졌고, 그걸 그냥 쌓은 후 그 위에 장작을 올려 굽는 조잡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다 보니 벽돌이 쉽게 깨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선은 중국과 달리 자연석이 흔한 환경이었기에 조선 후기까지 벽돌이 건축에 거의 쓰이지 않았다.
그런 위험을 안고 있는 벽돌을 성 개보수에 쓰자고 하는 걸 보니 그저 다 같이 해 먹는 분위기가 팽배할 것 같았다.
원종은 찝찝한 마음이 들었지만, 다음 날 고모산성으로 올랐다.
산 초입을 지나고 있는데, 나졸들이 두 사람이 드는 들지게들 들고 있었다.
“나리. 업히시겠습니까?”
“아니 되었네. 그런데, 오늘 고모산성에 오르는 이들이 많은 건가? 이렇게 나졸들이 대기를 하고?”
“몇 분이 있으시다고 이방 나리가 내려가 있으라고 했습니다요.”
“그리고, 윗분들을 들지게로 옮겨드리면 그래도 뭔가 생기는 게 있을 것 같아 더 많이 내려왔습니다요. 나리 편하게 올라가실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대신 먹을 것이나 좀 주십시오.”
나졸들은 어린 내가 들지게에 타야 다른 사람에 비해 편하다고 생각하는지 계속 권했다. 마치, 여행지에 있는 가마 호객꾼들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들도 직업이 아니라 군역으로 있는 것이지.’
조선 시대든 현대 한국이든 결국 강제로 끌려와 군역을 치르는 건 같았다.
더구나, 나졸은 아전들과 마찬가지로 녹봉이 없었다.
전문 직업군인인 갑사(甲士)들이라면 관직이기에 녹봉도 받았고, 공을 세우면 품계도 오를 수 있었지만, 나졸은 역(役)의 의무로 끌려온 자들이기에 그냥 밥만 먹고 몇 년을 일하다 돌아가야 했다.
이런 용돈벌이라도 해야 호주머니에 뭔가를 채울 수 있었으니, 안타까운 생각에 그냥 들지게에 올랐다.
들지게에 올라 산을 오르고 있으니 군데군데 양민들이 오르는 모습도 보였다.
“요역(徭役)을 치르기 위해 벌써 모여든 모양입니다요.”
조선 시대에는 조세의 의무와 더불어 역(役)의 의무도 양인들이 지어야 했는데, 나졸들처럼 군역을 지는 자도 있었고, 저들처럼 노동에 동원되는 노역을 지는 자도 있었다.
물론, 양반들도 군역을 지어야 하지만, 대부분은 군포를 내고 군역을 피했다.
가진 것 없는 자들이 더 힘든 일을 짊어져야 하는 곳이 조선이었다.
산성에 오르자 나졸들에게 고생했다고 한 냥씩 쥐여줬는데, 내려갈 때도 모시겠다며 대기하겠다고 했다.
몇몇 양반은 물론이고 문경과 연풍 현감까지 오자 산성을 한번 둘러보고는 이끼가 끼어 있는 가장 오래되어 보이는 성벽 아래에 섰다.
“자, 이쪽 벽을 허물도록 한다.”
역을 치르기 위해 온 농민들과 말이 줄을 당기자, 미리 작업이 되어 있던 성벽의 화강석들이 기우뚱거리더니 무너졌다.
“겉은 멀쩡해 보이는데, 성벽을 허물고 왜 다시 만드는 겁니까? 그냥 보수만 하면 안 되는 겁니까?”
“사실, 싸움도 겪지 않은 성벽에 무슨 문제가 있겠소이까? 그저 감사 어른이 왔을 때 가장 오래된 성벽 한곳을 새롭게 개축했다고 하기 위한 것입니다. 더구나. 여기처럼 눈에 잘 띄는 곳을 고쳐줘야 제대로 일을 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아전의 말에 답이 없다는 걸 느꼈다.
문경 현감인 최철환은 물론이고, 연풍 현감도 이걸 다 아는 것 같았다.
결국, 다같이 합심해서 보여주기식 일을 한다는 말이었다.
“도련님. 보시다시피 안쪽에 벽돌을 쌓게 되면 일정을 더 줄이는 것은 물론이고 일이 수월할 것입니다.”
“그건 그렇게 보이네만 찝찝하구만.”
괜히 멀쩡히 잘 있다 비리 사건으로 이들과 같이 도매금으로 엮일까 봐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도련님. 저 현감들이 위정자로 보이십니까? 눈에 보이는 멀쩡한 곳을 허물고 다시 쌓아야 하는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것으로 보이십니까?”
미온적으로 답하는 나를 보고 김율시가 이야길 꺼냈다.
“어느 정도는 그렇게 보이오.”
“아마, 공맹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저들은 소인배라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성인들은 늘 옳고 바른 것을 위해 선을 행해야 한다고 이야길 하지만, 그게 배를 곯아가며 그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나도 아전들에게 녹봉이 나오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소.”
“네 녹봉뿐만 아니라, 성을 보수하라는 예산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현지에서 걷어지는 물산에서 떼서 처리하라고 합니다.”
“응? 그런 예산이 내려오지 않는다는 말이오?”
“거두어들이는 물산은 언제나 한양으로 가기만 하지, 내려오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먹고는 살아야 하고, 감사가 내려오면 그 감사의 눈도 피해야 하니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야 판을 바꾸어야 하는데... 흠흠.”
김율시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닫았다.
그의 말처럼 이런 상황에서 공맹의 도를 따르면서 굶어 죽거나 그게 아니라면 역성혁명이라도 해야 판을 바꿀 수 있었다.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알수 없게 되었다. 특히나 성을 보수하는 예산도 없다는 말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증보수 하라는 일이 내려오면 올려보낼 물산에서 크게 떼어둡니다. 그래야 서류상의 문제가 없어지니깐요. 이런 곳에서 떼어둬야 아전들은 물론이고 나졸들과 노역을 위해 온 양민에게 먹일 양식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바보처럼 배를 굶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가 없다는 말에 누굴 탓해야 할지 몰랐다.
‘빌어먹을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조선을 탓해야 하는 건가.’
기본적으로 나라를 위해 일하는 아전이나 나졸 같은 군인들에게 월급을 주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병신같은 일이었다.
현의 일을 하며 눈치껏 알아서 착복해서 아전이나 나졸들을 먹여 살려야 하니 비리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고, 그런 돈 떼먹는 비리에 둔감해지다 보면, 진짜 제 배를 불리기 위해 비리를 밥 먹듯이 저지르게 될 터였다.
한편으로는 조선의 조정이 진짜 여력이 되지 않아 아전들에게 녹봉을 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정치학적으로 보면 고의로 아전들에게 녹봉을 지급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정에 대한 불만과 삶의 고난에 대한 분노를 중간에서 착복하는 아전들에게 돌려 버리는 고도의 정치 수법일 수도 있었다.
백성들이 못 살겠다고 들고 일어나면, 아전들이 그렇게 비리를 저질러 살기 힘든 것이었다고, 아전들의 목을 치기만 하면 백성들을 다독일 수 있을 터였다.
백성들의 분노를 조정이 아닌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비리를 저지르는 아전에게 돌릴 수 있는 최고의 정치 술수였다.
결국, 아전도 시대의 피해자일 뿐이었고, 나도 그들과 같이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휴. 어쩔 수 없구만. 그럼, 내게 돌아오는 이득은 노역에 동원된 양민들의 먹거리에 쓰도록 하겠네. 양민들을 먹이는데 책정된 예산은 얼마인가? 그걸 내게 주면 내가 농민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하겠네.”
“아! 그렇고 보니, 도련님이 식료의이자 음식으로 유명하셨지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
본격적인 증보수 공사에 앞서 노역으로 온 양민들을 이용해 벽돌 가마를 2개 더 만들었고, 크기에 맞는 벽돌 제작에 들어갔다.
그리고, 양민들에게 거적때기라도 덮고 잘 수 있게 임시로 머물 막사도 짓게 했고, 국을 끓일 화덕과 솥을 얹힌 화덕 5개도 만들게 했다.
‘이거 왠지 돈 안 되는 행보관의 일과 함바식당 일을 다 맡은 상황이잖아.’
물론, 아전들이 실무진으로 뛰고, 나졸들이 관에 비축된 잡곡을 들고 와 관노들과 같이 일을 해주었지만, 이게 쉽지만은 않았다.
우선, 매 아침밥을 하며 잡곡으로 주먹밥을 만드는 것이 문제였다.
이때의 조선에는 점심을 건너뛰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런 노역 현장에선 일이 힘들기에 삼시세끼를 다 주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점심, 저녁은 거의 언제나 주먹밥에 소금 친 것이 전부였다.
원종이 보기엔 좁쌀과 수수가 섞여 있는 주먹밥에 소금만 친 것이 너무 열악해 보였다.
그래서 어떻게든 주먹밥을 먹음직스럽게 하려고 매실을 넣기도 했고, 우엉이나 연근을 잘게 썰어 주먹밥에 넣어 주기도 했다.
아침밥은 그래도 국물이라도 있었지만, 현장에서 먹는 점심, 저녁 식사는 주먹밥일 수밖에 없었고, 최대한 잘해주고 싶었다.
물론, 힘든 노동 후 먹는 식사라 맛이 없더라도 살기 위해 다 먹어야 했고, 처음에는 우엉 조각이 들어가 있는 것만으로도 맛있게 먹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것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산나물이나 먹을 수 있는 풀을 잘 아는 이가 있는가?”
단풍이 지며 날이 쌀쌀해지고는 있었지만, 아직 산에는 먹을 수 있는 풀들이 있었기에 주먹밥에 넣을 산나물 채취를 위한 지원자를 뽑았다.
그중 수안보에서 노역을 왔다는 노소가 있었는데, 만길이라 불리는 노인이 먹을 수 있는 풀을 기막히게 잘 찾아왔다.
약초꾼을 하다 양봉을 하는 자라 했는데, 63살의 본인과 14살의 손자가 같이 노역에 동원되어 일하는 모습을 보니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을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 정도로 주먹밥이 잘 나오는 노역은 제 평생 처음입니다요. 주먹밥에 우엉 쪼가리라도 들어가 있고, 매실 향이 나는 것만 해도 최고입니다요. 여름에 동원되는 노역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밥이 쉬어서 난리였습니다요. 그 쉰밥이라도 먹어야 살기에 그걸 또 꾸역꾸역 먹었고. 밤이면 다들 배탈이 나서 잠도 못 자고 앓아눕는 게 일상이었습니다요.”
자신이 캐온 나물 넣은 주먹밥을 맛있게 먹는 손자를 보며 이야길 하는데, 이들 노소를 보고 있자니 주먹밥 말고 뭔가 다른 먹거리를 해주고 싶어졌다.
군에서 조리병으로 있으면서 대량급식이 해봤기에 머리를 굴렸지만, 한정된 예산과 재료를 보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대량생산... 여름에도 맛이 변하지 않는것... 그러면서 만들기 쉬운거... 잡곡 같은 한정된 재료로 만들 수 있는 먹거리... 그런게 있긴 있나.’
한참을 고민하다 보니 하나가 떠올랐다.
‘그래 건빵!’
그리고, 같이 만들 수 있는 비스켓이 떠올랐다.
*
[작가의 말]
사실 만리장성이 처럼 만들어 졌을때는 흙성이었고, 차후 시간이 흐르며 벽돌로 보강을 해 지금 우리가 아는 만리장성이 되었다고 합니다.
중국은 넓은 지역이다 보니 화강석이 나는 지역이 한정적이라 벽돌을 구워 성을 쌓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집을 짓는 것도 마찬가지였구요.
반대로 조선은 수원화성이 만들어 지기 전까지 모든 성은 다 화강석을 다듬어 세웠고, 그 안쪽에는 흙을 쌓았었습니다. 돌이 흔했으니깐요.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냉병기 시절에는 화강석으로 지은 성이 튼튼하지만, 총탄이 날고, 대포를 쏘는 시기에는 벽돌로 지어진 성들이 더 오래 버틸수 있었다고 합니다.
물리력으로 허무는 공성에는 화강석 같은 바위로 쌓은 성이 강하지만,
터트려 부수는 근대의 공성에는 벽돌로 지어진 성이 장점을 가졌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