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69화 (69/327)

69. 길목에서 건설을 외치다. (2)

“세동아, 좀 더 힘줘서 삽질 못 허냐? 저기 풀이 따로 놀고있잖여. 진흙이랑 잘 섞으란 말이여.”

“아따, 아재가 해볼라요? 내 딴에는 열심히 삽질하고 있는것인디.”

웃통을 벗어 던지고 바지도 허벅지까지 끌어 올린 젊은 청년은 진흙밭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삽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삽질을 별로 해보지 않았는지 영 익숙해 보이지는 않았다.

“재주 넘는 놈이 삽질을 하려니 당연한 거긴 하지. 여 나무 틀 왔다. 담아라.”

황토와 풀을 섞어 만든 진흙을 나무틀에 담자, 사각형의 진흙 벽돌이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진흙 벽돌은 널찍한 공터에 줄을 지어 놓였다.

재주를 넘고 북을 치던 재인 무리는 저수지 옆 공터에서 황토와 풀을 섞은 벽돌을 만들었고, 햇빛에 이틀 동안 말려졌다.

말려진 벽돌은 사기장들의 손에 들려 가마 벽을 만드는데 들어갔다.

가마의 벽돌 벽에는 다시 진흙을 발라 틈을 메꾸었는데, 가마 안쪽에는 진흙을 바르지 않았다.

“이보게. 내가 아는 가마는 아래에서 불을 붙이면 그 열기가 타고 오를 수 있게 비탈길에 비스듬히 만들던데 이 가마는 그냥 평평한 곳에 만들어도 되는가?”

“네. 도련님. 비탈을 끼고 만드는 가마는 자기를 생산하는 가마이옵니다. 불길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품질이 달라지기에 그렇게 비탈길에 만드는 것이옵니다. 하지만, 기와와 전돌 같은 것들은 그렇게 불길을 조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처럼 벽돌로 벽을 만들고, 말발굽 모양으로 지붕을 맞물리게 만들기만 해도 충분합니다.”

나흘 동안 충분한 벽돌이 만들어졌고 벽이 세워지자 아치형 지붕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나무로 아치형 지붕을 떠받드는 지지대를 만들고 그 지지대 위로 벽돌을 쌓았다. 그러곤 지지대를 빼자 서로 내려오는 무게로 인해 지붕이 지지가 되는 형태가 되었다.

채 보름도 되지 않아 20m 길이의 긴 가마가 만들어졌고, 말린 진흙 벽돌을 가마 안으로 옮겼는데, 이것도 내가 아는 방식과 달랐다.

“가마의 입구에서 끝까지 통로는 비워두고 양옆 바닥에 나무를 먼저 깝니다. 가지가 달려도 좋고 덜 마른 나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 위로 벽돌을 일렬로 쭉 세우고, 다시 벽돌 위에 가지를 깐 후 그 위로 다시 벽돌을 쌓는 겁니다. 이렇게 5~7번을 높게 쌓으면 됩니다.”

“그럼, 바닥에 불을 붙여두면 자연스레 불이 번져 벽돌의 위아래 나무가 불타 벽돌을 굽게 되는 것인가?”

“네. 맞습니다. 벽돌은 직접적으로 불에 닿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바깥쪽 벽 쪽으로는 기와를 세워 넣으면 됩니다. 그러면 벽돌 아래 깔린 나무가 타는 열기에 기와도 구워집니다.”

편수인 지관이 가마 안쪽에서 불을 붙이고 나오자, 사기장들이 진흙으로 뒤덮여 있는 나무 문으로 가마의 입구를 막았다.

공기가 들어가는 구멍이 바닥에만 뚫려 있었는데, 그 구멍을 통해서 안쪽의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이제 일은 끝난 것이요?”

“네. 도련님. 이제는 옆에 뚫어둔 구멍과 끝에 뚫어둔 구멍으로 바람 관리만 해주면 됩니다. 하루종일 가마 안에서는 불이 날 것이고, 그 열기가 식는데, 이틀이 걸릴 것입니다.”

진흙 벽돌을 만들고 햇빛에 말리는데 사흘, 굽는데 사흘, 벽돌을 넣고 빼는데, 이틀이 걸린다고 보면 8일이 걸리는 일이었다.

거기에 날씨가 좋지 않을 때는 말리는데 기간이 더 늘어날 터였다.

‘가마 하나에 구울 수 있는 양은 벽돌 800개에 기와 300개이니 초반에는 가마 한 개로 충분할 것 같군.’

“도련님. 쇤네 들이 추어탕(秋魚湯)을 끓이려고 하는데 드시겠습니까요?”

모가비 길근이 쭈뼛거리며 이야기를 했는데, 다른 이들도 눈치를 봤다.

가마를 만들고 벽돌을 굽는 기간 동안 사기장과 재인들은 저수지 한쪽에 솥을 걸고 천막을 쳐서 먹고 자고 했고, 나는 일이 있을 때만 왔었기에 이들과 같이 밥을 먹은 적이 없었다.

오늘은 가마에 불을 지피는 날이라 해 뜨기 전에 도착했기에 아침밥을 먹는 시간에 걸린 것이었다.

“아, 길근이 추어탕은 양반 나리들은 안 드시는 음식이라니깐.”

같이 일하며 어느새 친해진 건지 사기장 지관이 핀잔을 줬다.

가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가을에 생선을 넣어 끓이는 탕을 추어탕이라고 하는데, 보통 현대에서는 미꾸라지로 끓인 국을 추어탕이라고 했다.

한자로 보면 가을 고기로 끓인 탕인데, 다른 생선이 아닌 미꾸라지로 끓인 탕을 추어탕이라고 지칭하게 된 이유는 농사와도 관련이 있었다.

벼 수확을 위해 논에서 물을 뺄 때 잡히는 고기의 대부분이 미꾸라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을 수확을 할 때 먹는 어탕에는 대부분 미꾸라지가 들어간다고 하여 추어탕에는 미꾸라지라는 공식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 초 중기에는 물을 댈 수 있는 논이 많지 않았기에 수확할 때 잡는 미꾸라지가 많지 않았고, 개울가의 붕어, 모래무지, 여울마자, 꺽지 같은 잡어도 그냥 같이 넣어 탕을 끓였다.

그래서 지금 시대에는 말 그대로 가을에 잡은 물고기로 끓이는 탕이 추어탕이었다.

“아니네. 같이 먹도록 하지. 한번 맛있게 끓여 보게나.”

솥을 걸어둔 곳으로 가 여자들이 탕을 끓이기 위해 준비하는 것을 보았는데, 미꾸라지와 작은 고기들이 바짝 말려져 있었다.

“진흙 벽돌을 만들기 위해 저수지 주변과 유입되는 개울에서 흙을 퍼 올렸는데, 미꾸라지와 고기들이 많더군요. 그래서 잡아다 말렸습니다요.”

꺽지나 다른 고기들은 비늘도 제거되어 있고, 창자도 다 제거가 되어 있는데, 미꾸라지는 그대로 통마리로 말려져 있었다.

“미꾸라지를 해감하고 말린 건가? 안 그럼 흙냄새가 심할 터인데.”

보통 추어탕을 끓일 때는 깨끗한 물을 3~4번 갈아주며 이틀 이상 놔두어 뻘을 토하게 만들어줘야 탕을 끓였을 때 흙내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미꾸라지 몸통을 뒤덮고 있는 진액도 걱정이 되었다.

붕장어만큼은 아니라도 미꾸라지도 그쪽 계통이다 보니 피부를 뒤덮고 있는 진(점액)이 엄청나게 나오는 고기였다.

현대에서도 점액 제거를 위해 왕소금을 뿌리고 호박잎으로 박박 문질러 진을 제거했는데, 소금이 비싼 이곳에서 과연 어떻게 진을 제거했을지 궁금했다.

‘아니면 아예 진을 제거하지 않고 먹는 건지도. 그러면 비린내가 엄청날 터인데.’

진액을 제거하지 않고 끓인다는 생각에 추어탕에 대한 기대가 사라져 버렸다.

“냄새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미꾸라지를 말리기 전에 뜨거운 물을 끼얹어 흙을 토하게 만들었습니다요.”

“뜨거운 물을 끼얹었다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방법에 호기심이 일었다.

“네. 미꾸라지에 뜨거운 물을 갑자기 부으면 놈들이 놀라서 뱃속에 든 것을 모두다 토해냅니다요. 그리고 물이 식으면 그때 손으로 자박자박 주물러 피부에 끈적이는 것들도 다 떼어내면 됩니다요. 뜨거운 물에 놈들의 피부가 익어 진이 잘 떼어집니다요.”

“오! 그런 방법이 있었나?”

왕소금 없이 해감이나 진액을 제거했다는 말에 놀랐다.

조선시대 추어탕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기에 단순히 현대의 방법처럼 추어탕을 끓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조선시대만의 방법이 있었다.

바짝 말려진 미꾸라지와 생선들을 두드려 잘게 부수어 솥에 넣었는데, 금세 국물이 뽀얀 흰색으로 바뀌며 구수한 고깃국의 냄새가 올라왔다.

듬뿍 뜬 된장 한국 자가 들어갔고, 마늘과 생강은 물론, 산초가루까지 듬뿍 넣었다.

국이 끓자 시래기와 파는 물론이고 고사리와 토란 줄기까지 먹을 수 있는 채소라면 뭐든지 다 집어 넣었다.

‘뭔가 잡탕인데도 냄새는 그럴 듯하구나.’

한양에서 받아 온 후춧가루도 반 움큼 넣으니 은근히 나던 풋내가 바로 사라지며 얼큰한 향을 만들어 내었다.

이어서 식은 조밥을 넣어 더 끓였는데, 국물이 줄어들며 뻑뻑한 어죽과 어탕의 중간쯤 되는 국물 요리가 만들어 졌다.

“도련님 그 호초 가루 때문에 더 맛있게 된 거 같습니다요. 한 그릇 드셔보십시오. 원래라면 이게 지금 끓여서 식힌 후 내일 다시 한번 더 끓여야 진짜 구수한 국물맛이 날 터인데 아쉽습니다요. 그래도 시장이 반찬이라고 어서 드십시오.”

받아든 그릇에선 된장의 짠 내와 고깃국의 담백한 냄새가 뒤섞여 그럴싸한 냄새가 났는데, 뜨거운 물을 끼얹는 방법이 제대로 효과가 있었는지 정말 비린내가 전혀나지 않았다.

영양분이 제대로 녹아들어 간듯한 뻑뻑한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먹자 입안에서 끈끈한 맛이 혀에 달라붙었다. 근기가 없어 흩어져 버린 조밥이 국물에 섞여 술술 넘어갔는데, 탕이아니라 죽과 같은 그런 식감이었다.

“크어. 국물이 끝내주는구만. 들큰한 것이 진하고 맛있어. 그런데 모가비는 어찌 이리 추어탕을 끓이는걸 잘 아는 겐가?”

“아, 그야. 어릴 때부터 강가에서 많이 잡아먹었으니깐 그렇습죠. 저는 아예 집 앞 개울에 작은 솥을 숨겨두고 했었습니다요. 솥을 집에서 들고 왔다 갔다 하기가 귀찮았습죠.”

“어쩐지 보통이 아니라고 했네.”

“헤헤. 강가에 살았던 이들이라면 어탕이나 어죽은 눈감고도 끓여야 하는 겁니다요. 그리고, 식후에는 이것도 한번 드셔보십시오.”

“그건?”

“고동(다슬기)입니다요. 이 저수지 근처에는 이걸 잡아먹는 사람이 없는 건지 저수지 안에 잔뜩 있었습니다요.”

언뜻언뜻 녹청색의 속살이 보이는 민물 다슬기를 삶아 내놓았는데, 구수한 냄새가 올라왔다.

“간장과 된장을 넣고 끓인 것인가?”

“역시 바로 아시는군요. 맑은 물에 끓이고 간을 간장과 된장으로 했습니다요. 이 탱자나무 가시로 속살을 빼 드시면 됩니다요.”

모가비 길근이 직접 탱자나무 가시로 고동의 속살을 빼주었는데, 뭔가 텁텁하면서도 조개 특유의 탄력 있는 고기 맛이 느껴졌다.

그리고, 속칭 똥이라고 부르는 조개 끄트머리 부분의 짭짜름하면서도 씁쓸한 맛도 입안에서 퍼져나갔다.

“이거 별미로구만. 맛이 있어. 이리 줘보게.”

원종은 오래전 현대에서도 먹어 보았던 것이었기에 오랜만에 먹으니 맛이 좋았다.

아예 고동이 담겨있던 통을 받아 가시로 살을 빼지 않고, 바로 입술에 붙여 쪽! 하며 힘껏 빨았다.

입천장에 뭔가 걸리는 느낌이 나며 고동의 속살이 쏙 빠져나왔다.

“하하하. 도련님은 이미 이 고동을 드셔보셨군요. 보라니깐 우리 도련님은 다른 양반네들이랑은 다르다니깐.”

모가비 길근은 양반의 체통이나 그런 걸 따지지 않고, 바로 고동을 입에 대고 빨아 먹는 원종의 모습이 너무나도 좋았다.

어렸을 때 같은 먹거리 문화를 겪었다는 것은 그만큼 같은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고, 윗사람으로서 자신들의 처지를 좀 더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이라고 여긴 것이었다.

“고동은 다들 이렇게 먹지 않나?”

“아닙니다요. 도련님이 특별하신겁니다요. 양반님네들은 아예 이런 추어탕이나 고동을 안 드십니다요.”

“아니 왜?”

“천한 음식이라서 그렇습니다요. 양반님들은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고기라서 추어탕을 안 드시는 분들이 많으십니다요. 추어탕을 먹으면 나중에 미꾸라지처럼 땅바닥을 기게 된다고 하는 미신도 있습니다요. 그래서 처음에 도련님께 이야길 할 때 눈치를 봤습지요.”

“미신일 뿐이지. 먹는 거로 팔자가 그리된다면 소나 개를 먹으면 안 되지. 안 그런가? 그리고, 아마, 자네들이나 사람들이 있을 때는 안 먹는다고 하다가도 밤에 몰래 먹든지 했을 것일세. 추어탕이 몸에 아주 좋거든.”

“그렇지요? 저희 잡것들이 이리 살아 있는 것도 다 이 미꾸리들 덕분입니다요. 다음에도 추어탕을 할 때는 꼭 도련님께 아뢰도록 하겠습니다요.”

“그래. 그렇게 해주게나. 맛있게 먹었네.”

원종은 든든하게 추어탕을 먹었지만, 손을 뻗어 고동을 한 줌이나 집었다.

그러곤, 집으로 가며 쪽쪽 빨아 먹었다.

‘그러고 보니, 모가비 길근에게 듣기 좋으라고 양반네들도 몰래 먹을 거라고 했지만, 이 추어탕을 자주 먹어야겠는걸. 아버지나 형님에게도 해드려야겠어.’

실제 본초강목에는 미꾸라지가 정력제로 나와 있었는데, 그게 제대로 서지 않는 사람도 엿새만 먹으면 양기가 북돋아 그걸 빳빳하게 제대로 설 수 있게 해준다고 쓰여 있었다.

아마도, 단백질 섭취량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시절에는 가을이 되어 영양분이 몸에 쌓인 미꾸라지와 고기들을 먹어 단백질이 보충되자 몸에 활기가 생기는 것을 정력으로 여겼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추어탕을 고급스럽게 만들어 파는 게 좋겠구만.’

*

[작가의 말]

사실, 조선 시대 말기까지 그 어떠한 요리서에도 이 추어탕이란 음식이 쓰여있지 않습니다.

가장 최초로 추어탕에 대해 언급한 책은 1850년에 나온 ‘오주연문장전산고’ 라는 책이 최초입니다.

이 책에는 추두부탕 이란 이름으로 추어탕이 나와 있는데, 이것도 평상시 우리가 먹는 추어탕과는 조금 다릅니다.

미꾸라지와 두부를 같이 넣어 물을 끓이면 미꾸라지들이 차가운 두부속을 파고들어 두부와 같이 익어버리는 형태의 탕이었는데, 이 추두부탕 음식 자체가 성균관의 관노들이나 먹는 음식이라고 쓰여져 있었고, 일반적이지 않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미꾸라지를 보통사람들은 먹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후 19세기 초반의 어류 사전인 '난호어목지'에 지금 우리가 익히 아는 추어탕이 소개 되는데, 시골 사람들이 벼 수확후 미꾸라지를 잡아 국을 끓여 먹는다고 소개된것이 전부입니다.

이후 일제강점기 1920년대에 일본식 선술집에서 아침 해장국으로 추어탕이 나오기 시작하며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이때, 전날 끓였다가 다음날 다시 재탕으로 끓여주는게 더 맛있다는걸 알곤, 이후로 추어탕은 바로 끓여 먹기 보다는 끓여두고 판매하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그럼 오늘 저녁은 추어탕 한 그릇 어떠십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