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흐름에서 빗겨서다.
태조 왕건이 궁예의 밑에서 힘을 쌓을 수 있었던 것도 개경의 왕 씨 일가가 무역으로 벌어들이는 금력 덕분이었고, 추후 견훤과의 싸움에서 견훤의 수군을 격파한 것도 무역으로 잔뼈가 굵었던 무역 상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선이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왕 씨들은 해상 무역으로 부를 늘려가고 있었고, 언제든지 조선의 우환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내부의 안정을 원한 이성계의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은 명나라의 태조 주원장이었다.
해상 세력으로 인해 생기는 머리 아픈 일을 주원장은 이미 겪었었고, 그 문제들을 해결했었기 때문이었다.
주원장과 끝까지 싸웠던 장사성은 절강지방의 염민(염전 세력)을 규합해서 세력을 모았던 자였고, 방국진은 은주를 비롯한 무역항구를 점령하여 해상 무역으로 세를 불렸었다.
이에 주원장은 상인들이 해외로 나가 무역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아예 원양으로 나갈 수 있는 큰 배를 건조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렸다.
바다를 폐쇄하고 관리되는 육로의 무역만을 허용하게 되자 자연스레 돈이 통제되었고, 주변 국가와도 육로로 조공무역을 하게 되니 대외적으로도 안정이 되었다.
이성계는 당연히 성공한 주원장의 해금령을 참고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도 성공적이었다.
배를 통한 무역으로 상계를 좌지우지하던 개경상인의 힘은 육로를 따라 무역이 이루어지자 의주상인과 한양상인에게 흘러갔고, 배를 통한 유일한 무역인 왜와의 무역마저도 동래상인에게로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해금령으로 개경상인이 피해를 보았듯이 명나라와 조선의 해금령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곳이 한 곳 더 있었는데, 바로 왜였다.
섬이었기에 조선과 명나라와의 무역이 필요했는데, 해금령이 내려지니 왜는 먹고 살길이 막막해졌다.
결국, 살기 위해 왜구들은 해적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중국 남부와 조선의 해안가는 늘 왜구들의 침입을 걱정하게 되었다.
해양 세력을 없애기 위해 내린 해금령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왜의 해양 세력이 커지게 되는 일이 생긴 것이었다.
“마마. 호초도 호초이지만, 저 멀리 남만(南蠻)으로 가면 사탕도 엄청나게 저렴하고, 조선에는 한 번도 들어온 적이 없는 먹거리도 많다고 합니다. 제대로 배만 띄우기만 하면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해금령을 없애야...”
“마마! 큰일이옵니다!”
잘산군에게 해양 무역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고 해양으로의 진출을 위해 해금령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방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마마. 내일 남이가 저잣거리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진다고 합니다!”
“뭣이? 정말이냐? 투옥된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왜 이리 급하게 정해진 것이냐?”
멀긴 하지만, 남이가 태종의 외증손자이기에 피가 이어진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랬기에 설령 역모를 획책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빨리 형이 집행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전도령은 이만 돌아가게.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며칠 동안은 궁에도 나가지 말고 집에만 있게나. 내 다시 연락을 하겠네.”
내일 거열형에 처해지는 남이를 위해 잘산군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장인인 한명회에게 가든지 그게 아니면, 종친부에라도 가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날 전해지길 남이는 몸이 줄에 묶여 다섯 조각이 나 죽었다고 했다. 남이가 투옥된 지 나흘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
“전도령 이 어멈들에게 요리를 알려주시면 됩니다.”
남이의 죽음이 가져오는 파장이 컸는지, 며칠 동안 잘산군은 나를 찾지 않았고, 결국 한명회 집안의 어멈과 잘산군 집안의 어멈 둘을 데리고 청지기가 왔다.
이미 요리숙에서 가르치는 요리는 절산군 집의 어멈에게 다 가르쳐 주었었다. 박복이를 통해 언문도 가르치고, 요리책도 주려고 했지만, 책은 일부러 주지 않는다.
“도련님. 요리숙에서 가르치고 했을 때 보니 책이 없으면, 꼭 한두 가지를 빼먹게 되어 요리가 달라졌었습니다. 책을 줘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 책은 주지 않는다. 그렇게 요리가 좀 바뀌어야지 좋을 것 같구나.”
평상시에는 절대 요리의 순서나 과정을 빼먹거나 바꾸지 말라고 하는 도련님이었는데, 이젠 요리가 좀 바뀌어야 좋다고 하니 박복이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이 편지를 한명회 대감의 청지기에게 전하고 오거라. 사촌누이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 한양을 떠난다는 편지다.”
***
“전 도령. 다음에 한양에 올 때는 이제 다른 곳에 묵지 말고 내 집으로 와서 묵도록 하게나.”
잘산군은 한양을 떠난다는 소식에 안타까워하며 나를 불러들였는데, 말에 다 싣기 힘들 정도로 비단과 포목을 챙겨주었다.
“마마.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야. 자네가 우리 집에 묵는다면 내 언제나 환영하겠네.”
“네. 그럼, 다음에 한양으로 오면 꼭 마마님의 집에 머물도록 하겠습니다.”
잘산군은 그렇게 다시 보자는 약속을 한 것이 마음에 드는지 기뻐했다.
‘마마. 그럼 내년에는 궁으로 가서 궁에서 묵어야 합니다요.’
내년에 왕이 된 잘산군에게 환영받는 손님이 된다면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한명회의 청지기가 말 두 마리에 후추와 수유를 잔뜩 실어서 준비해 주었는데, 수원 외가까지 가는 길을 지켜줄 호위들까지 준비해 주었다.
“대감나리께서 전도령께 아주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한명회의 편지에는 나로 인해 잘산군 부부가 건강해졌다며 나중에 자신이 도울 일이 있다면 꼭 도와주겠다고 쓰여 있었다.
***
사촌누이가 시집을 가게 되면 이후로는 얼굴 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 급하게 내려왔는데, 기우였다.
흔히 조선 시대의 혼례식을 생각하면, 꽃가마를 타고 시집을 가는 걸 생각하지만, 실제 조선 중기까지는 시집살이가 아니라 처가살이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신랑이 장남이라거나 할 때는 예외였지만, 짧으면 1, 2년 길면 10년 이상까지도 처가에서 살았다.
대표적으로 신사임당이 그랬는데, 19세에 이원수와 결혼해 20년간 친정집에서 살았다. 친정집에서 살았기에 집안일과 시어머니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었고 덕분에 시·서·화의 삼절이라고 불릴 정도의 예술적 소양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사촌 누이도 장남과 혼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지 처가살이를 한다고 했다.
고려말 주자학과 같이 들어온 주자가례(朱子家禮)가 퍼지며, 점점 처가살이를 안 좋게 보는 경향이 생기긴 했지만, 아직 예송논쟁이 벌어질 만큼의 문제는 아니었다.
“정말, 잘산군 마마가 이 비단을 다 주었다는 말이냐?”
“네. 절반은 외가에서 쓰시면 됩니다.”
“어머나,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나.”
“그리고, 할머니와 가족들을 위해 준비한 음식도 있습니다.”
한명회가 챙겨준 수유로 황금밥을 해주었고, 일반 돌솥으로 하는 돌솥밥도 만들어 가족들에게 먹였다.
“외삼촌. 이 비단과 오승포로 곡식을 최대한 구매해 주십시오.”
“아니 왜? 마마에게 받은 비단은 촉금이라 불리는 아주 비싼 비단이다. 이런 귀한 물건을 내리신 것이라 판다는 것은 좀 그렇지 않겠느냐? 네 혼례를 치를 때 필요한 물건이다.”
“팔지 않고 그냥 들고 있어봤자. 짐짝처럼 쌓여있을 뿐일 겁니다. 비단을 팔아 곡식값이 저렴한 지금 곡식을 사두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혼례를 올릴 때가 되면 그때 또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허허. 마마의 총애가 깊구나. 그럼, 백미를 사두면 되겠느냐?”
“어떤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그저 양이 많은 것을 사주시면 됩니다. 내년쯤에 다시 올라오면 그때 잡곡을 팔아 밑천을 만들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내 신경 써 보마.”
비단을 전부 맡겼지만, 실질적으로 화폐처럼 쓰이는 오승포도 많았기에 외가에서 장정들을 붙여줬다.
그리고, 장정들은 음성에서 전도령을 보고 달려드는 사람을 보고 기겁했다.
“이놈들! 물러나거라 뭣 하는 놈들이냐!”
“나리! 도련님! 모가비 길근입니다요! 헤헤헤. 한참을 기다렸습니다요!”
이제는 거지꼴을 면한 재인무리가 나를 반기며 맞았는데, 한양으로 올라간 이후 매일을 기다렸다고 했다.
“내가 남기고 갔던 이들은 어찌 되었는가?”
“아! 그 호랑야차 같은 떡대와 다른 이들은 문경 본가로 다들 갔습니다요.”
“다행이군. 그럼, 자네들도 잘 가게.”
“저... 저기 도련님. 저희도 문경으로 따라가면 아니 되겠습니까요?”
“문경에 자네들이? 왜?”
“저 그게... 극락 서거스단도 방설환 없이 하니깐 재미가 그렇게 없더라굽쇼. 헤헤헤.”
“재주만 보여줘도 먹고살 것인데, 그걸로 모자란다는 건가?”
“저... 도련님. 방설환을 팔며 느꼈던 보람이나 값어치와 저희들이 파는 재주로 인해 느끼는 것이 너무 천양지차인지라, 이 썩을 놈들이 이제는 재주를 보이는 게 재미가 없다고 합니다요.”
“허나 나를 따라간다고 해도 극적으로 변하는 것은 없을 텐데. 그리고 늘 방설환을 파는 것처럼 즐겁고 흥이 나지 않을 수도 있어.”
“괜찮습니다요. 그저 가슴이 뛰는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요.”
“맞습니다요. 그냥 빌어먹기 위한 재주 말고 다른 의미있는 재주를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요.”
젊은 재인들이 모가비보다 먼저 나섰는데, 천한 재인으로 천대만 받다가 방설환을 팔면서 제대로 사람대접을 받다 보니 생긴 일 같았다.
“재주를 보여주는 일 말고, 다른 잔일도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따라가겠느냐?”
“잔일이야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저 몸을 팔아 먹고사는 일만 없게 해주십시오.”
여 재인들은 먹고살기 위해 매춘도 했는데, 그런 일만 하지 않게 되어도 좋다고 나섰다.
“좋아. 그럼 따라오게.”
***
“이건 또 뭐냐? 뭘 또 데리고 온 것이냐?”
재인들을 데리고 집에 오니 원길 형이 나를 반겼는데, 말 세 마리에 가득 실린 오승포를 더 반겼다. 그리고 내 뒤의 23명의 재인을 보곤 얼굴 표정이 삐딱해졌다.
“형님. 또 데리고 왔냐니요? 뭔가 다른 사람이 온 것입니까? 아! 금산이라는 자는 제 수신호위로 부리기 위해 거둔 사람입니다.”
“그 야차처럼 생긴 놈이야 한 놈이니 괜찮다지만, 30명이 넘는 거지 떼를 보내지 않았느냐? 그놈들이 어찌나 잘 먹는지 기둥뿌리가 뽑힐뻔했다.”
아무리 잘 먹는다고 해도 기둥뿌리를 뽑아줄 형이 아니었기에 형의 말은 반만 믿었다.
“거지 떼라고요? 그것도 30명이 넘는다고요?”
“그래. 네 곁채에 둘 수는 없어 움막을 따로 만들어 두었다. 집 뒤로 가보거라.”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올 일이 없는데, 왔다고 하니 누구인지 나도 궁금했다.
“엇! 드디어 왔다. 드디어 왔어! 화장 어르신께 알려!”
형님의 말처럼 숯검정이 잔뜩 묻은 거지 같은 옷을 입은 자들이었는데, 남녀노소가 다 있는 것이 일가족인 것 같았다.
문제는 누군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도련님. 그 있잖습니까? 도자기 굽다가 도망쳤다고 했던 그치들입니다.”
내가 왔다는 소식에 달려온 오추가 알려주자 그제야 기억이 났다.
“기억이 나는구먼. 한데 30명이나 온다는 말은 없지 않았나?”
원종은 재인 무리까지 50명이 넘는 이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사실에 힘이 빠졌다.
‘방설환을 만들어 벌었던 재물이 바닥나기 전에 자력갱생할 수 있는 방책을 만들어야겠구나.’
“삼식아! 우선 명단부터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