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판을 키워라. (1)
“제대로 들은 거 맞네. 3천 개의 방설환을 만들어 주게나.”
뭐가 문제냐며 당당하게 이야길 하는 음성 현감의 말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아, 물론, 들어가는 약재는 내가 준비해 주도록 하겠네. 보름이면 다 만들 수 있겠는가?”
만들 약재를 준비해 주겠다는 말은 그냥 대 놓고, 방설환에 뭐가 들어가는지 그 성분을 보겠다는 말이었다.
그냥 두 눈 멀쩡히 뜨고 방설환을 빼앗길 판이었다.
그리고, 기분 나쁜 것이 또 있었는데, 음성 현감은 내가 거부하지 않고 당연히 방설환 3천 개를 만들어 줄 것으로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이 괘씸했다.
‘이자는 자신의 말에 거역하거나 안된다고 거부 의사를 밝히는 사람을 겪어보지 못한 것 같구나.’
그리고 이 시대에 이런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라면 뒷배가 아주 든든한 자일 확률이 높았다. 그 뒷배가 어느 정도 인지를 파악하고 나서 뭘 하든 해야 할 것 같았다.
“네. 재료만 충분하다면야 보름 만에 만들 수는 있습니다. 헌데, 현감께선 이 방설환을 어디에 쓰려고 하시는 건지요? 설마, 천박하게 이 방설환을 팔아 돈을 번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은 아니 하고 계시겠지요?”
“물론이네. 자네가 만들어 주는 방설환은 현청에 놔두고, 배앓이를 하는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네. 어찌 양반이 상행위를 한다는 말인가?”
“아! 현청에 방설환을 두고 아픈 백성들을 챙겨주시겠다니 대단하십니다. 백성을 위하신다는 말에 감동하였습니다. 그러면 아예, 일만 개를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일만 개의 방설환으로 백성들을 챙긴다면, 현감님의 인망이 하늘을 찌르게 될 것입니다.”
“하하하. 일만 개를 만들어 주겠다니 좋지. 아주 좋아!”
음성 현감 이종수는 기분이 좋아져 손뼉까지 쳐대었다.
“헌데, 현감께선 약값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설마 다 무료로 나누어 주실 요량이십니까?”
“그건 아니네. 그렇게 해버리면 백성들이 나태해지지 않겠나. 자네가 재인 무리들과 방설환을 처음 팔았을 때 세 알에 닭 한 마리 값으로 팔았다고 들었는데, 이번엔 내가 약재를 대는 것이니 여섯 알에 닭 한 마리 값으로 어떤가?”
재료를 대었기에 아주 많이 쳐주는 것 같았지만, 결국 반값에 조제 성분까지 가져다 바치란 말이었다. 아주 날로 먹으려는 행태에 속에서 열불이 났다.
“여섯 알에 닭 한 마리 값이라고 해도 닭이 천마리 가까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 큰 비용을 현감님이 들여서 방설환을 현청에 갖추시겠다는 말에 이 전모는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백성을 살피는 목민관(牧民官)의 표본과도 같으십니다.”
원종의 칭송하는 소리에 이종수는 기분이 좋아졌다.
“하하하. 종친으로서 당연한것이지. 나와 같은 어진 종친이 백성을 살피지 그 누가 백성을 살피겠는가. 하하하.”
현감의 입에서 종친이라는 말이 나오자, 원종은 가슴에 돌이 올려진 것처럼 답답해졌다.
‘시파. 종친이라면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잖아.’
뭔가 건방져 보이면서 뭐든 이야기하는 대로 사람들이 다 따라줬을 것 같다는 인상이 왜 생겼는지 알 것 같았다.
보통 조선 시대라면 종친들이 벼슬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예종 시기까지만 해도 종친들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고, 합격 여부에 따라 벼슬을 할 수도 있었다.
문종 시절의 세조와 세조 시절의 구성군 이준 같은 종친들이 과거를 통해 관직에 올랐었고, 영의정까지도 지낼 만큼 종친들도 실력이 있으면 관직에 나설 수가 있었다.
허나, 12살의 어린 성종이 왕이 되자, 단종 시절의 계유정난(癸酉靖難)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대사간 김수령의 제안으로 종친이 출사하지 못하게 법으로 막아버렸었다.
그랬기에 지금 시절에 현령으로 종친이 있다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이 종친이라는 신분은 역모를 꾀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법에도 얽매이지 않았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종족이라 가까이 있다 보면 얼떨결에 횡액을 당할 수도 있었다.
원종은 음성 현감을 골탕 먹일 생각을 접어야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그냥 방설환을 빼앗길 수는 없었다. 그러다 좋은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현감님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에 감탄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방설환의 값을 현감님이 내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니,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다른 곳에 쓰셔도 될 것 같습니다.”
“오! 그럼, 자네가 그 비용을 다 내겠다는 건가?”
“그렇게 하고는 싶으나 소생도 그리 부유하지 않습니다. 하하하. 해서,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이 방법으로 하게 되면 현감님이나 저나 들어가는 비용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비용이 거의 안 들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방설환을 만들게 되면 결국 백성들이 가져갈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미리 백성들에게 약값을 받는 것입니다.”
“으응? 약을 만들기도 전에 약값을 미리 받는다고? 그게 말이 되나?”
“네. 미리 방설환 다섯 알에 닭 한 마리 값을 정해서 신청을 받는 것입니다. 일만 개의 방설환 이니 2천 명에게 신청을 받으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먼저 돈을 당겨 받게 되니 좋고, 우리는 약을 만들 때 들어가는 비용이 필요치 않게 되니 좋을 것입니다.”
“우리 돈이 들어가지 않고, 살 사람에게 미리 돈을 받아 약을 만든다라...”
이종수는 6알에 닭 한 마리 가격으로 약을 사고 더 남겨 먹을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백성들에게 먼저 돈을 받으면 초반에 들어가는 비용 자체가 없어진다는 말에 마음이 끌렸다.
“허허. 이런 신묘한 방법이 있었을 줄이야. 헌데, 신청을 받고 하는 일이 복잡할 듯한데.”
“그 일에 재인 무리를 쓸 생각입니다. 그러니 재인들만 풀어주신다면 나머지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음성 현감 이종수는 곰곰이 생각해보니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방설환을 만들 때 현의 의원들을 동원해서 일을 시키면 환을 만드는 비법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고, 언제든 추가로 만들어 낼 수 있으니 손해는 없다.’
그리고, 이종수는 자신의 돈을 들이지 않고도 약을 만드는 이 방법을 다른 것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좋네. 자네에게 일임하지.”
원종은 음성 현감이 종친이라는 소리에 방설환의 제조법을 지키겠다는 생각을 버렸었다. 그리고, 여름철 세균성 배앓이를 막아주면서 가격도 저렴한 약을 독점해서 판매할 욕심도 없었다.
아니 물론, 욕심은 있었지만, 내가 제조법을 손에 쥐고 벌어들이는 돈 보다, 조선 팔도의 의원들이 만들어 팔아 조선의 백성들이 아프지 않아 생기는 혜택이 더 클 것 같았다.
‘이왕 이리 된 거 판을 크게 해서 이름을 떨치는 걸 목표로 한다.’
***
“자아! 줄을 서시오! 방설환을 예약 구매할 수 있는 창구가 여기요!”
“어서들 이리와 예약하시오!”
목청 큰 재인들이 오일장에서 크게 외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뭔가 싶었다. 그리고 방설환이라는 단어가 들리자 배앓이에 도움을 받았던 자들은 급히 움직여 왔다.
언문을 쓰고 읽을 줄 아는 박복이, 삼식이, 달유, 오추가 각각 창구 책상에 앉아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방설환을 주시오! 10알 주시오!”
“방설환은 3알씩 종이에 싸주니 9알, 아니 12알을 주시오!”
“내가 줄을 먼저 섰다고! 저리 비켜!”
“무슨 소리야? 내가 먼저라고!”
“질서를 지키지 않는 자는 쫓아내겠다!”
자기 키보다 더 긴 장봉을 든 금산이 금세 나타나 장봉으로 사람들을 줄 세웠다.
마스크 형태의 두건을 썼음에도 험상궂고 흉악해 보이는 얼굴이 가려지지 않았고, 큰 키에 몽둥이를 든 모습에 사람들은 두려워 금세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질서 정연하게 창구 앞에 줄을 섰다.
“현감님과 도련님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에 6알에 닭 한 마리 가격으로 판매하니. 어서 신청하시오! 수령 날짜는 20일 후요.”
“엥? 그럼, 지금 당장 약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오?”
방설환을 구할 수 있다는 말에 양손에 닭 두 마리를 들고 찾아온 상인은 달유의 지금 당장 약을 주지 않는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이번 여름에 방설환을 300알 넘게 만드셨는데, 그 수가 부족했네. 허나, 부족했다고 무턱대고 그 생산 수를 늘릴 수 있는 게 아니잖나. 그래서, 이렇게 사전구매 예약을 받아 몇 개의 알약을 만들어야 할지 수량을 파악하려는 것이네.”
“나름의 합리적인 생산 방식이기는 하나... 만약 먼저 낸 제 약값을 들고, 사라져 버린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요?”
“허허. 음성 현감님은 종친이시네. 나랏님의 핏줄인 종친을 못 믿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시게나.”
달유의 핀잔을 들은 상인은 그제야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고는 두말하지 않고, 닭 두 마리를 내며 구매 예약을 했다.
“이 표를 절대 잊어서는 아니 되네. 표가 없으면 약을 받지 못하네.”
상인은 도장이 찍혀있고 언문이 가로로 쓰인 표를 받았는데,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입을 한번 잘못 놀린 죄로 뭘 더 물어보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원종은 위조 방지를 위해 예약 표에 도장을 찍었고, 아라비아 숫자로 순서를 표시했는데, 거기에 가로쓰기와 띄어쓰기, 마침표를 적용한 한글을 썼다.
이렇게 쓰다 보니 원종에게 직접 한글을 교육받지 않은 자들은 읽지도 못했다.
예약구매 첫날에 80여 명이 예약했고, 오 일 후 장날에는 인근 괴산은 물론, 충주, 진천에서도 사람이 와서 예약을 했다.
돈이 있는 자들은 한 번에 수십 알씩 예약했기에 보름 만에 7천 알 가까이 판매할 수 있었다.
***
“이 방설환은 상호군 전순의 영감이 제게 알려주신 약으로 조제법을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만들어서 판매하셔도 됩니다. 다만, 방설환의 가격은 세 알에 닭 한 마리 이상으로 비싸게 팔지는 말아 주십시오. 그걸 약조해 주신다면 조제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사실 여기서 약속을 하고, 그걸 어겨도 되었지만, 그래도 이런 약조를 받아 두는 것이 내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의원들도 그런 내 마음을 아는 건지 더 비싸게 팔지 않겠다는 연판장에 자신의 도장을 찍어 약속을 했다.
“그럼, 이 방설환에 들어가는 약재 중 가장 중요한 백초상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
“이거 뭔가 땅 짚고 헤엄치는 그런 느낌이구만요. 물건도 없이 이렇게 닭이나 곡식을 다 받아 내다니.”
금산은 자신이 소금을 팔았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장사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건, 한번 효과를 본 사람들과 그걸 지켜본 자들이 방설환을 신뢰하고 있기에 이런 판매가 가능한 것이다. 아마, 네가 파는 소금도 신용있는 금산이란 상인이 파는 소금이라고 알려졌다면, 이렇게 판매가 되었을 것이다.”
“물건을 판다는 건 신뢰와 신용이 있어야 하는 것이었군요.”
“그렇지. 그리고, 종친이라는 신분을 가진 현감이 같이 판다고 했기에 더 신뢰하고 값을 미리 치른 것이다.”
원종은 음성현 내의 의원들이 무슨 약재를 얼마만큼 가지고 왔는지를 확인하고 있는 이종수를 보았다.
이미 의원들에게 현감이 따로 방설환을 만들어 바치라는 명을 내렸다고 전해 들었는데, 현감은 의원들끼리 자신을 속이는 게 아닌가 싶어 저렇게 확인하고 있었다.
종친이라는 신분에 걸맞지 않게, 밴댕이 소갈딱지였다.
‘마치... 원길 형을 보는 것 같은 기시감이...’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이종수는 환하게 웃으며 뭔가를 들고 왔다.
“우리 전도령 방설환을 만든다고 고생했는데, 이거 하나 드시게나.”
이종수는 소매에서 뭔가를 하나 꺼내어 내게 주었는데, 둘러싸고 있는 흰 종이를 풀자, 갈색의 둥근 것이 나왔다. 약과였다.
“한양에서 가지고 온 약과인데. 하나 먹게나. 내 특별히 자네에게만 주는걸세. 하하하.”
그러고 보니 이 약과는 종친들이나 먹던 귀한 음식이었다.
*
[작가의 말]
성종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자 구성군 이준 같은 능력 있는 종친들이 다시 군사를 일으킬까 겁을 내었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그런 난을 없앨 목적으로 종친들의 출사를 막아버렸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종친이 아무리 능력있다고 해도 그냥 술이나 마시고 한평생 놀기만 하다 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선 시대 가장 큰 인재 풀을 그냥 날려버리는 일이었습니다.
역사에 IF는 없다지만, 종친이 출사를 했다면 조선 후대 왕권이 약해지고 붕당정치나 세도정치 같은 형태의 폐해가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