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전순의 영감. (3)
전순의 영감의 칭찬을 한껏 듣고 나오고 보니 느껴지는 게 있었다.
‘이거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한 건가.’
씀바귀 죽을 만들어 올리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
아니, 어쩌면 전순의 영감의 고민을 가볍게 여겼는지도 몰랐다.
왕의 총애를 얻어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자신의 의술을 배우기 위해 사람들이 줄 서 있는데도 끝까지 손자에게 의술을 전해주겠다는 그 생각을 전근대적이라고 여겼는지도 몰랐다.
말을 물가에 끌고 가도 물을 억지로 마시게 하지 못하듯이 자신이 원해야 하는 일을 음식으로 마음을 돌려 보겠다는 전순의 영감의 생각 을 쉽게 생각한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 일을 가볍게 생각했던 것인데, 씀바귀에 그런 고사가 있고, 초심을 되돌리는 음식이었다고 칭찬을 듣고 보니, 아직 배울 것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바로 서재로 가자.’
전순의 영감의 서재에는 한쪽 벽을 가득 채우듯이 책이 있었는데, 대충 숫자를 세어보니 621권이 있었다.
‘우선 책의 목록을 만들고 분류부터 하자.’
종들을 불렀으나 박복이도 한글은 알지만, 한자를 몰랐고, 다른 이들은 아예 글자를 몰랐다.
“박복이는 먼저 셋에게 한글부터 가르치거라. 그래야 뭐든 해볼 수 있겠구나.”
박복이가 요리숙에게 어멈들을 가르쳤듯이 한글을 가르쳤고, 원종은 책들의 제목부터 한글로 옮겨적었다.
“어디 그 손자가 뭘 하는지 한번 가 볼까.”
저녁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 되자 발걸음을 부엌으로 움직였다.
***
“뭘 보러 왔는가?”
전현재는 원종이 부엌에서 자신이 무슨 죽을 끓이는지 보고 있자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타락(駝酪)죽을 하는 겁니까? 우유입니까? 양유입니까?”
“우유네.”
우유라는 말 이후로는 그냥 아무 말도 없이 타락죽을 끓이는 걸 지켜봤다.
이미, 곱게 간 쌀가루에 우유를 넣어 나무 주걱으로 계속 젖고 있었는데, 뻑뻑해지면 다시 우유를 더 넣어 점도를 맞추고 있었다.
‘아마도 올릴 때가 되면 소금이나 꿀을 넣어 간을 할 것 같은데. 저걸로 전순의 영감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손자도 나처럼 쉽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일단, 타락죽은 조선 시대에는 왕이나 왕족들만이 먹을 수 있었고, 은퇴한 노신들이 들어가는 기로소(耆老所)에 든 노신들이나 가끔 맛볼 정도로 귀한 음식이었다.
농경시대이다 보니 송아지가 먹어야 할 우유를 뺏어 먹으면 송아지가 자라지 못한다고 하여 우유를 먹지 못 하게 했었다.
그리고, 병석에 누운 나이 든 환자에게 먹이기에도 꽤 좋은 음식이었다.
‘버터로 쌀가루를 볶아서 끓이면 더 맛있는데 아쉽구만.’
그리고, 저녁을 올릴 시간이 되자, 전현재는 소금으로 간을 했고, 그릇에 담으며 후춧가루를 뿌렸다.
희디흰 타락죽에 검은 후춧가루가 뿌려지자 흑백 대비가 되며 그럴듯해 보였다.
“타락죽이로구나. 이걸 할애비에게 끓인 이유가 있느냐?”
전순의 영감은 상을 받곤 숟가락을 들지도 않은 채 물었다.
“아침에 먹은 씀바귀 죽은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궁해질 때 먹는 죽이었습니다. 그래서, 추후에 잘살게 되더라도 어려울 때를 기억하라는 의미로 쓰이는 음식입니다.”
“그렇지. 네가 올린 타락죽과는 극과 극에 선 음식이라 할 수 있지.”
“네. 타락죽은 군왕의 음식과 같이 존귀함을 상징하는 음식입니다.”
“씀바귀 죽을 먹으며 초심을 기억하기보다는 타락죽 같은 존귀한 것을 먹으며 존귀하게 살자는 말이더냐?”
“...네.”
조손의 이야길 듣고 보니 전현재는 초심으로 돌아가 지지리 궁상을 떨지 말고, 좋은 음식을 먹고 떵떵거리며 살자는 그럼 의미를 타락죽에 담은 것 같았다.
‘그럴듯해. 이미 부귀영화를 다 가졌는데, 다시 입에 쓴 음식을 먹을 이유가 없긴 하지. 더구나 맛만 좋은 게 아니라, 몸에도 좋은 타락죽이라면 할아버지의 희망 사항을 거부하는 답으로는 최선의 답이다.’
전순의 영감은 손자의 대답을 듣곤 망설이더니 숟가락을 들어 타락죽을 먹기 시작했다.
아들인 전두길과 원종도 숟가락을 들었다.
“...존귀한 타락죽처럼 존귀한 사족이 되고 싶다는 것이겠지. 어쩌면 내 아집으로 인해 너의 앞길을 막으려 했는지도 모르지.”
전순의 영감은 타락죽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생각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내 마음은 여전하구나. 너의 의지가 들어간 타락죽을 먹었음에도 이러니, 너도 매한가지였겠지... 산파가 아무리 애를 잘 받아 준다고 해도, 애를 낳는 것은 산모인 법. 산파가 할 수 있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휴우... 내 이제 너에게 의술을 배우라고 이야길 하지 않으마. 물러가거라.”
“내일 아침 인사드리고 다시 절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전순의 영감의 소원이었던 손자가 의술을 배우는 것은 그저 희망 사항으로 끝 나버렸다.
***
“도련님. 뭔가 이상합니다. 일어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잠이 들었는데, 달유가 급히 깨웠다.
“무슨 일인가? 이상한 일이라니.”
“그게, 전순의 영감이 계신 사랑에 불이 밝혀졌고, 의원들이 들락날락하고 있습니다.”
달유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손자의 일 때문에 충격받은 것인가.”
급히 의관을 차려입고, 사랑으로 움직였다.
“곽란(霍亂)인 듯싶네.”
위로 토하고 아래로 싸는 증상을 말하는것이었다.
이미 사랑채에는 여러 의원이 와있었고, 곽란의 치료법인 배꼽 위에 뜸을 놓는 치료도 시행했다고 했다.
“상호군께서 저녁에 무엇을 드셨는지요?”
“타락죽을 먹으셨네.”
“타락죽을요?”
모여있는 의원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의원이 인상을 썼다.
“멀쩡하시던 분에게 곽란 증상이 나타난 이유가 되겠군요. 상호군께서는 평시에도 타락죽을 드셨는지요?”
“아니네. 타락죽이 귀하다 보니, 평소에는 드시지 않았네. 아마, 궐에 계셨을 때나 가끔 드셨을 거네.”
“그것 또한 확실하지 않은 것이군요.”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는 건가?”
전현재도 막 도착하여, 자신이 끓여 올린 타락죽의 이름을 듣고는 나섰다.
“송구하오나. 타락죽이 군왕의 음식이라 불리우는 이유가 있습니다. 신분이 되지 않는 자는 타락죽을 먹고 나면 곽란 증상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유당불내증이구나!’
의원을 말을 듣자마자 바로 떠올랐다.
처음 왔을 때는 슬픈 마음으로 타락죽을 먹다 체한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의원의 이야길 듣고 보니 유당불내증으로 인한 곽란이 맞는 것 같았다.
유당불내증은 우유에 든 유당을 소화하지 못할 때 배앓이를 하는 증상을 말하는데, 한국인의 경우 70% 가까이 이 유당의 소화에 어려움을 겪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같이 먹었고, 아들과 손자도 같이 한 그릇씩 먹었는데, 왜 전순의 영감만 이런 거지.’
“그게 무슨... 할아버지는 예전에도 타락죽을 드신 적이 있으시네.”
“그때와 지금은 다른 것이겠지요. 평상시에는 건강했기에 넘어갈 문제도 병석에 누운 환자에게는 크게 다가오는 법입니다.”
“어르신이 피를 토하십니다.”
의녀의 고함에 의원들이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토사곽란에는 정로환... 아니 방설환이 꽤나 도움이 되는데, 유당불내증이 원인이라면 세균 문제가 아니니 도움이 안 되는 것인가.’
원종이 골똘히 생각하며 도울 방법을 찾는데, 전현재는 멘탈이 붕괴되었는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노비들이 겨우 평상에 앉혀주었지만,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하긴, 자신이 끓여 올린 타락죽을 먹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었으니 혼이 나갈 만도 하지.’
그렇게 해가 뜨고, 날이 밝자 다행히 전순의 영감의 곽란도 수그러들었다.
“고비는 넘긴 것 같은데, 의식이 돌아오시지 않고 있으니 계속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고비를 넘겼다는 말에 전두길과 전현재도 정신을 차렸고, 나도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이틀이 되고 사흘이 넘어가자 원종은 서재의 책들을 한글로 필사하는 일을 시작했다.
사랑채 앞에 서 있어봤자 할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갔다.
***
“이렇게 문 앞에 온종일 있는다고 바뀌는 것은 없다. 절로 돌아가 과거를 준비하도록 하거라.”
그저 멍하니 방문 앞에 앉아 있기만 하는 아들을 보니 전두길은 답답했다.
자신이 올린 타락죽으로 인해 이리되었다는 자책감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전형. 할아버지가 이렇게 문 앞에 앉아 시간 낭비하는 것을 원하시겠소?”
두 달 동안 매일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들려서 얼굴을 보고 같이 밥을 먹다 보니 어느새 전현재에게 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럼, 내가 뭘 해야 한다는 말이냐? 과거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절로 가야 하는 것이냐? 아니면, 할아버지의 바람처럼 의술이라도 배워야 한다는 것이냐?”
“굳이 따지자면, 의술을 배우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의술을 배워 저렇게 의식 없이 누워계신 할아버지를 깨우는 방법을 익히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의술을 배우라는 원종에 말에 전현재는 머리끝이 쭈뼛 섰다.
“뭐, 그런 의술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사람의 노력이 쌓이면 쌓일수록 의술이 높아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다 보면 명의가 되어 할아버지를 깨울 수도 있고요.”
한국 의학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이야기였다. 가족의 병을 낫게하기 위해 의대로 진학한다는 클리쉐 같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원종의 말을 들은 전현재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래. 어쩌면, 할아버지께서 내게 의술을 익히라고 한 이유가 이것인지도 모르지. 할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는 방법을 내게 부탁하신 것이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흑흑흑...”
“동생. 동생은 이미 의술을 어느 정도 익혔을 터인데, 어떻게 배운 건가?”
전현재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내 팔을 잡고 의술을 어떻게 배운 것인지 물었다.
“그게... 교과서 위주로 정통의 방법부터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과서? 의서들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그렇군. 그래서 자네가 서재에 들어박혀 있었던 것이군.”
“그리고, 좋은 스승을 만나야 하겠지요. 어르신께 사사한 의원들이 많으니 형님에게 의술을 전해줄 의원들은 많을 것입니다. 그분들께 배우고 의서로 따로 익힌다면 빨리 실력이 느실 겁니다.”
전현재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 앞을 벗어나고 있었다.
이후로는 사랑방 앞에서 대기하며 의원들에게 의술을 배웠고, 시간이 될 때마다 의서도 읽기 시작했다.
전순의 영감이 그토록 원했던 의술을 드디어 손자가 익히게 된 것이었다.
‘나야 전현재가 배울 때 옆에서 같이 배울 수 있어서 좋지만. 어쩌면, 내가 끼어들어서 일이 역사와 달라져 버린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그렇게 한 달이 더 지난 어느 날, 궁에서 세조가 죽었다는 소식이 왔고, 그 소식이 전해진 다음 날 전순의 영감도 이어져 오던 숨을 멈추었다.
전순의 영감의 장례식은 조촐할 수밖에 없었는데, 관에 속한 이들은 한양으로 다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역의 유향소는 천민 출신으로 양반이 된 그를 유향소의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방문하는 이가 없었다.
그저, 친인척과 의술로 맺어진 의원들이 찾아와 조문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