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전순의 영감. (2)
“그러니깐. 전순의 대감의 손자와 같이 죽을 끓이라는 말입니까?”
내가 목적했던 산가요록(山家要錄)을 필사해 갈 일에 들떠있었는데, 전두길이 찾아와 이상한 소릴 했다.
“정확히는 각자 죽을 끓여서 아버지께 올리라는 것이네.”
“그게, 서재를 이용하게 해주는 조건입니까?”
“그건 아니네. 그저... 아버님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지.”
전두길은 아들인 전현재가 할아버지의 바람과는 다르게, 의술을 배우지 않고, 과거를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길 해주었다.
이야길 듣고보니 어떻게든 손자에게 의술을 가르치고 싶어 하는 전순의 영감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의술의 절전(絶巓)을 염려해서라기보다는 손자에게 자극이 되었으면 하시는 거겠군요.”
“맞네. 이제까지 아버님께 의술을 배우러 온 자는 많았고 배워간 자도 많아, 의술이 끊어질 이유는 없네. 하지만, 양반은 자네가 처음이네. 비슷한 연배이기도 하니 아버님은 어떻게든 자네를 통해서 의술을 배울 마음을 현재에게 만들어 주고 싶으신 게지.”
사실, 지금 곁채만 봐도 중인들이 십여 명이나 머무르며 전순의 영감을 만나 배움을 원하고 있었다.
전순의 영감의 의술은 마음만 먹는다면 다른 의원을 통해 전해내려갈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여, 자신의 의술이 남의 손을 통해 전해지는 것보다는 자신의 핏줄을 통해 전해지길 원하는 게 당연했다.
‘아, 이러고 보니 왜 전순의 영감이 남긴 책들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는지 알 것 같구나.’
아마도, 역사 그대로였다면, 손자인 전현재가 의술을 등한시했을 것이고, 할아버지가 남긴 의서나 책들도 자연스레 관리가 소홀해지면서 산가요록 같은 여러 책이 후대로 전해지지 못했던 것 같았다.
“좋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어르신의 죽을 끓이도록 하겠습니다. 헌데, 의술을 배우기 싫다는 손자보다는 아들에게 전수해 줘도 되는 게 아닌지요?”
눈앞에 있는 아들인 전두길은 이제 갓 서른 중반 정도로 보였는데, 왜 아들을 건너뛰고 배우기 싫다는 손자에게 가르치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말이지... 내가 까막눈이네. 하하하. 양반입네 하고 갓을 쓰고는 있지만, 아무리 배우려고 해도 천자문을 배우는 게 잘 안되더군. 허허.”
까막눈이라며 웃는 전두길을 보니 이해가 되는 것도 같았다.
‘아마도, 전순의 영감이 의술로 제대로 된 대우를 받기 전에 아들을 낳았을 테고, 어릴 때 제대로 교육시키지 않아 지금은 배우고 싶어도 안 되는 것일 테지.’
한자를 깨우치지 못했기에 안된다고 이야길 하는 전두길을 보니 양반의 차림새를 하고 있어도 뭔가 서글펐다.
‘한자로 쓰인 서재의 책들을 한글로 다 만들어 주고 가야겠구나.’
***
“네에? 도련님 진짜 이 씀바귀로 죽을 끓인다는 겁니까요?”
나를 도와 죽을 끓이는 걸 돕고 있던 삼식이는 깜짝 놀랐다.
“그럼 가짜로 죽을 끓인다는 것이냐?”
“아니, 그게 아니구요. 도련님도 이 씀바귀를 먹어보셨지 않습니까? 쌉싸름한 맛을 넘어 쓴맛이 난다구요. 이걸로 죽을 끓여 전순의 대감에게 올리게 되면 그냥 먹다가 뱉어 버릴 것입니다요.”
삼식이가 큰소리까지 치며 말리고 있는 씀바귀는 어떻게 보면 민들레와 비슷하게 생긴 잡풀처럼 보였다.
씀바귀를 한자로 쓸 때는 도(荼)라고 썼는데, 이를 파자하면 풀 초(艸)에 나머지 여(余)로 떨어지게 된다.
즉, 남겨진 풀이란 뜻인데, 먹을 수 있는 맛있는 풀을 제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남은 맛없는 풀이란 뜻이었다.
먹을 수는 있지만, 가장 맛없는 풀이라고 하는 이유는 먹었을 때 입 안을 씁쓸하게 만드는 쓴맛 때문이었다.
“이런 쓴맛 나는 씀바귀 죽 대신, 다른 것을 넣어 죽을 끓여야 한다니깐요.”
삼식이는 씀바귀의 쓴맛을 잘 알기에 어떻게든 다른 재료로 만들자고 몇 번이나 매달렸다.
“아 이놈아. 전순의 영감이 원한 게 바로 이런 음식이란 말이다. 입에 착 달라붙는 맛있는 죽보다는 약이 되는 죽을 원하는 거라고. 그러니 그만 방해하고 저기 가서 서 있어. 방해하지 말고 저리 가!”
“하지만, 도련님...”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가 있으라니까!”
삼식이는 전순의 영감이 지금 자신이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을 죽을 끓여 오라고 했는데, 왜 흉년이 아니면 잘 먹지도 않는 씀바귀로 죽을 끓이느냐며 끝까지 태클을 걸었다.
삼식이의 말이 일견하기로는 맞는 거 같았지만, 전순의 영감은 일반적이고 입에 달라붙는 맛있는 죽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식료의였던 전순의 영감이 지금 가장 필요한 죽은 어떻게 식료의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병을 막아주는지를 직접 보여주는 것이겠지.’
그런 의도를 가지고 내게 죽을 올리라 했으니, 그 의도에 맞는 씀바귀 죽을 끓이는 게 맞았다.
‘입에 쓰면 몸에는 좋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이 쓴 씀바귀 죽이 지금 전순의 영감에게는 가장 알맞은 음식이겠지. 그것이 식료의로서 맞는 선택이기도 하겠고.’
실제, 현대에서는 씀바귀 추출물에서 암을 고치는 성분을 찾아내었으며, 비타민도 과일보다 더 많다며, 약용식물로 연구가 되는 식물이기도 했다.
원종은 죽을 챙기며 아들과 손자의 몫까지 챙겼다.
양반이 되어 당상관의 후손으로 태어났기에, 입에 맞는 맛있는 음식만 먹었을 터이기에 이런 씀바귀 죽은 처음일 터였다.
***
“씀바귀 죽입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아침상이 올랐는데, 내 독상까지 4개의 독상이 차려졌다.
그리고, 씀바귀의 초록빛에 물든 죽그릇을 보자 전두길과 전현재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하하하. 근도여이(菫荼如飴 씀바귀가 엿처럼 달다는 뜻)의 씀바귀 죽이로구나.”
몸이 아파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던 전순의 영감이 크게 웃으며 상에 앉아 한 숟가락 떠먹었다.
“씀바귀가 엿처럼 달다는 말이 있지만, 전혀 달지 않구나. 하지만, 지금 내게 가장 딱 맞는 죽이로구나. 아암! 딱 맞아!”
전순의 영감이 크게 좋아하며 죽을 먹으니 아들과 손자도 죽을 떠 입에 넣었다. 하지만, 씁쓰레한 죽 맛에 인상을 썼다.
원종도 씀바귀 죽을 끓이며 먹어보았지만, 쉽게 좋아할 수 있는 쓴맛이 아니었다.
정말, 흉년이 들어 먹을 게 없을 때나 먹을만한 그런 죽이었다.
“할아버지. 제게 죽을 끓이라고 하셨다가 아침 죽은 저치에게 끓이도록 하셨는데, 저는 왜 이 씀바귀 죽이 지금 할아버지에게 딱 맞는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런 것을 모르니 이 할애비가 답답한 것이다. 네가 식료의로서 자격을 갖추었다면, 저 도령이 씀바귀 죽을 올린 이유를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응? 그냥 입에 쓰면 몸에 좋은 죽이니 아픈 병자에게 딱 맞는 그런 것이라 씀바귀 죽을 끓였는데. 뭔가 씀바귀에 다른 뜻이 있는 거야?’
원종은 그 이유를 자신에게 말하라고 할까 봐 쫄았다. 하지만, 다행히 전순의 영감이 이야길 해주었다.
“너는 시경(詩經)에 보면 주나라의 태왕(太王)이 왜 씀바귀가 엿처럼 달다는 근도여이를 외쳤는지 아느냐?”
“네. 씀바귀도 엿처럼 달다고 할 정도로 주 태왕이 검소한 생활을 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인데, 크게 보면 초창기의 어려움을 기억해 초심을 잃지 말라는 뜻입니다.”
전현재는 과거 준비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시경에 나온 고사의 뜻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 초심(初心). 그 초심을 잃지 말라고 저 도령이 씀바귀 죽을 나와 너희들에게 올린 것이다. 우리 집의 초심이 무엇이겠느냐?”
“...”
“...의술이겠지요.”
손자가 이야길 하지 않자, 아들인 전두길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 우리 집안의 초심은 의술이다. 지금 나와 너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지. 내가 저 도령에게 죽을 끓여 달라고 한 이유가 이것이다. 단순한 음식이 아닌, 사람에게 맞는 음식. 나와 너희들을 깨우쳐줄 음식. 그걸 원한 것이었다.”
“할아버지. 그건 너무 터무니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초심이 의술이라고 알려주는 음식이라고 하지만, 실제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게 식료의의 의술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아닙니까?”
“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냐? 만병의 근원은 울화(鬱火)다. 내 몸을 힘들게 하던 울화를 이 씀바귀 죽 하나로 해결해 주지 않았느냐? 우리 집안의 문제를 한 번에 알아맞히고 우리들에게 깨우침을 주는 이 음식 하나에 내 울화가 사라졌어! 하하하.”
전순의는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허나, 그 초심을 알려주고 할아버지의 울화를 없앴다고 하지만, 제 생각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쓰디쓴 씀바귀 죽을 먹는다고 해도 바뀌는 게 없다며 전현재는 일어섰다.
“그럼, 네가 저녁에 죽을 한번 끓여 올려 보아라. 네가 생각하는 이 할애비에게 필요한 죽이 무엇인지 음식으로 이야길 해보거라. 그 음식이 내 마음을 움직인다면, 네가 의술을 익히지 않겠다는 것을 인정해 주겠다.”
“네. 그렇게 하지요.”
전현재는 그렇게 사랑을 나가버렸다.
“자 우리는 듭시다. 도령이 포계에 대한 서찰을 올렸을 때 그걸 보곤 내가 쓴 식료찬요나 산가요록을 다 읽어본 제대로 된 식료의라 생각해서 일을 맡겼었소. 한데,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거 같소이다. 도령의 연치가 좀 더 있었다면 내 책임지고 내의원에 추천했을 것이오.”
전순의 영감의 칭찬에 웃으며 죽을 먹었는데, 완전 소 뒷걸음질에 쥐를 잡은 것 같았다.
‘시경의 주태왕이 누군지도 모르고, 근도여이 같은 말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씀바귀가 입에 쓰니 몸에 좋다고 선택한 것인데, 이게 이리될 줄이야.’
아침을 먹으며 전순의 영감은 기분이 좋은지, 내게 침통을 비롯한 여러 약재와 약탕기를 챙겨 주었다.
그러곤, 서재에서 책을 보다 모르는 게 있다면 언제든지 자신에게 물어보라며 거처로 언제든 찾아올 수 있게 허락해 줬다.
***
“쳇. 음식으로 병이 낫게 한다는 식료의로 뭘 하겠다는 거야. 초심으로 돌아가 의술을 한다 한들 다시 양반이 아닌 중인일 뿐이지.”
전현재는 투덜거리며 사랑을 나섰지만, 화가 가라앉지 않아 집안 여기저기를 한참이나 걸었다.
본시 천민이었던 할아버지가 의술로 양반이 되었지만, 결국 계유정난이 있었기에 양반이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사육신의 전답을 받아 떵떵거리며 양반으로 살아갈 수 있었지만, 자신을 보는 같은 양반들의 눈빛에는 격(隔)이란 게 느껴졌었다.
지금이야 주상의 총애를 할아버지가 받고 있으니 대 놓고, 자신의 가문에 뭐라고 할 사람이 없지만, 주상이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면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눈빛에 더더욱 격을 느끼게 될 터였다.
그런 눈빛을 받기 싫어 전현재는 과거급제하여 제대로 된 양반가가 되고 싶었다.
헌데, 어디서 굴러온 어린 도령까지 합세하여 자신에게 의술을 배우라며, 초심을 찾는 것이 의술이라고 강요하고 있으니 짜증이 났다.
“그깟 음식 그저 몸에 좋은 죽이면 되는 거 아닌가. 무슨 음식에 의미가 있으며 식료의술이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전현재는 음식에 의미를 두고, 그것이 울화를 가라앉혔다고 하던 할아버지의 말에 울화가 생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야.”
화가 나 한참을 걸었기에 어디인지 살피니 집안의 가축을 키우는 외양간까지 온 것 같았다.
“언제 여기까지 온 것이지.”
전현재는 다시 돌아가려는데, 그의 눈에 태어난 지 한 달 정도 된 송아지가 어미 소의 젖을 빠는 게 보였다.
“그래. 저거다! 저거로 죽을 끓이면 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