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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54화 (54/327)

54. 좌광우도.

가지가 중국을 통해 들어온 채소이기도 했지만, 전통적으로 한반도에서 재배되던 채소들과는 색이 다르기에 특별한 취급을 받았다.

짙은 보라색의 과실은 처음이기도 했고, 그 속의 질감은 그 어떤 채소와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오죽했으면, 가지를 자를 때도, 쇠로 만든 칼로 자르면 색이 변하니, 뼈나 대나무로 만든 칼로 잘라야 한다고 <제민요술>이란 책에 쓰일 정도였다.

더구나 시기가 맞지 않은 때 구한 것이라 더 비싸다 보니 그냥 뭉텅 잘라서 꼬치에 꽂아 굽는 게 뭔가 아쉬웠다.

하지만, 화로를 앞에 두고 직접 가지를 굽는 외할머니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지윤이가 문경으로 시집가기 전에 가장 좋아했던 것이 가지였단다. 더운 여름에 자줏빛으로 익은 가지를 생으로 먹는 것도 좋아했지.”

외할머니는 마치 옛날 이야길 해주듯이 내게 어머니가 어떻게 가지를 먹었는지 알려주셨다.

“네 어미는 한여름 잘 익은 가지를 껍질 벗기고 먹으면 다 자란 대추의 퍼석퍼석한 식감과 같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가을에 접어들면 설익은 사과의 맛이 난다고도 했지.”

할머니의 이야길 듣고 생각해보니, 가지는 정말 특이한 식감을 가진 채소였다. 그리고 그런 특이한 가지를 생으로 먹었던 어머니도 독특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이 가지를 가지라 부르지 않고, 별명으로 불렀단다. 너는 가지의 별명이 무엇인지 아느냐?”

외할머니는 굽고 있는 가지에 소금과 산초가루를 뿌리며 물었다.

“곤륜과(崑崙瓜)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 곤륜산에서 나는 오이라고 곤륜산의 신선들이 즐겨 먹었다고 하지. 그래서 가지를 먹을 때마다 신선이 먹는 것을 자신도 먹으니 오래 살 수 있을 거라고 했었지. 이 좋은 곤륜과를 그리 많이 먹었는데도 어찌 그리 일찍 가버렸누. 어이구, 숯에서 매운 연기가 나는구나.”

외할머니는 숯에서 난 연기로 눈이 맵다며 눈물을 훔치셨지만, 잘 구워진 숯에서 연기가 날 턱이 없었다.

“자, 네 어미가 좋아했던 가지구이란다.”

대나무 꼬치에 끼여진 가지는 숯에 구워져 탄곳 없이 몰랑몰랑해 보이게 익었는데, 가지 특유의 물컹한 식감을 제대로 살려 구운 것 같았다.

“잘 먹겠습니다.”

원종은 외할머니가 내민 가지구이를 입으로 가져갔다.

[칙, 물컹]

가지의 껍질은 불에 익어 어느 정도 단단해졌지만, 가지의 속은 그 반대로 퍼석거리던 속이 더 물컹거렸다.

그리고 소금의 짭짜름한 맛이 산초와 같이 혀를 때렸다.

그 뒤로는 마치 열을 받아 몰캉거리는 스트랭스 치즈를 씹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 가지가 귀한 대접을 받은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기도 하지.’

가지 특유의 향취는 젖으로 만든 버터나 치즈의 향취와도 비슷했기에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올리브 기름에 후춧가루만 뿌리고 가지를 구워도 맛있는데, 아쉽구나.’

원종이자 춘봉은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현대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조리된 가지 음식을 차려드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컸다.

“어떠냐? 가지구이가 먹을 만하냐?”

“네. 외할머니. 이 가지구이에 들기름을 살짝 발라서 구우면 더 맛있을 것 같습니다.”

“허허. 물만밥을 할 때 직접 조리해서 어멈들에게 가르쳤다고 하더니 그 말이 빈말이 아니었구나.”

“네. 식료의로서 배우고, 다음에 들릴 때는 가지로 만드는 많은 요리를 외할머니께 올리겠습니다.”

“홀홀홀 그렇다면 내 기대하마.”

‘막내아들이 다 컸고 제 앞가림을 하는 것 같으니 지윤이도 원이 없겠구나.’

구운 가지를 먹는 외손자가 혹여 체할까 싶어, 보리 끓인 물을 챙기는 할머니였다.

***

“도련님. 숭례문(崇禮門)이 보입니다요.”

외삼촌이 내어준 말을 타고 움직이니 하루 만에 수원에서 한양으로 올 수 있었다.

아이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어 걷던 속도에서 내가 말을 타니 빨라진 것이었다.

숭례문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빌딩들 대신 숭례문과 이어진 성벽이 그대로 좌우로 뻗어있자, 그 첫 모습이 주는 시각적인 느낌이 현대와는 사뭇 달랐다.

성벽을 잃고 혼자 동떨어진 섬처럼 남아있던 숭례문이 한양을 지키는 굳건한 도성의 모습으로 서 있자 감개무량하기도 했다.

‘현대에서는 불에 타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고, 그 무너지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었지.’

실제 한양으로 들어가는 이들과 병졸들이 있는 숭례문을 넘자 이야기만 들었던 한양 땅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양을 둘러보고 싶지만, 육조거리만 한번 둘러보고 양주로 가자꾸나.”

현대 서울에서의 기억을 되살려 대충 방향만 잡고 움직이자 광화문이 보였다.

광화문 앞의 광장과 세종대왕 동상이나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없었지만, 대신에 육조거리가 있었다.

경복궁의 남쪽 정문인 광화문 앞의 좌ㆍ우에는 의정부를 비롯한 이조ㆍ호조ㆍ예조ㆍ병조ㆍ형조ㆍ공조의 육조(六曺) 관아가 늘어서 있고, 관리나 양반들이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고, 정도전이 계획하여 세운 육조거리를 보자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반가웠다.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도 이 육조거리는 유지되었지만, 일제 치하에서 관아들이 하나둘 없어졌고, 결국 총독부 건물이 들어서게 될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조선 시대로 온 김에 임진왜란도 막아야 하는구나.’

연도를 계산하면 아무리 장수한다고 해도 임진년이 일어나는 그때까지 살 수는 없겠지만, 임진왜란이 생기지 않게 미리 발전을 시키는 것은 가능할 것 같았다.

‘조총의 전래가 1543년인가 그러니깐. 우리가 먼저 마카오에 진출해서 네덜란드 애들에게 총을 받아오든지 해서 먼저 테크를 올려야 한다.’

“쉽지 않아. 쉽지 않아.”

배를 만들던지 중국에서 사 오든지 해서 마카오까지 가야 한다는 생각에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급제하셔서 육조거리에서 일하기가 쉽지는 않지요. 하지만, 도련님의 의술이면 내의원에는 충분히 들어가실 수 있으실 겁니다요.”

박복이가 내 혼잣말을 듣고는 제 딴에는 아부를 했다.

“되었다. 밥이나 먹고 바로 가자꾸나.”

점심 낮 밥을 먹기엔 어중간한 시간이었지만, 새벽 일찍부터 출발하였기에 다들 출출했다.

“도련님. 저기 어떠십니까요?”

삼식이가 가리킨 곳을 보니 공랑(公廊) 건물의 뒤로 평상이 놓여진 집들이 보였다.

관공서라고 할 수 있는 육조거리의 지척임에도 대로가에서 영업을 하는 음식점이 없었다.

뭔가 이상해서 생각하다 보니,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아! 그렇구나. 아직, 공랑(公廊)의 시대로구나.’

다들 고등학교에서 난전(亂廛)과 육의전(六矣廛)에 대해서 배웠을 거다.

그리고, 그 난전을 단속하기 위해 금난전권(禁亂廛權)이란 것이 생긴다는 것도 알 것이다.

하지만, 이 난전, 육의전, 금난전권은 다 임진왜란이 터진 이후에 생기게 된 것이었다.

조선 초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며 개경의 발달한 상업 거리를 그대로 한양에도 만들려 했었다.

그래서, 계획적으로 한양의 주요 대로 양옆으로 공랑(公廊)이라는 점포를 만들어 시전을 꾸리려고 했다.

그런 공랑을 바탕으로 하는 시전은 태종대에 이르러 완성이 되는데, 이때 공랑을 빌리는 데는 공랑 1간(間)당 춘추로 저화(楮貨) 20장(張)의 임대료를 내야 했다.

이 임대료가 모여 조선의 재정을 받쳤다.

나라에서 만들어 주는 공랑이 들어서기 전에는 조그마한 공터만 있으면 상인들이 모여 무질서하게 장사를 하여 혼란했지만, 공랑이 들어선 이후로는 정리가 되었다.

상인을 공랑 상인, 좌상, 행상인으로 구분하고 각각 거래장소를 지정하여 주자 자연스레 그 근방에는 시전이 형성되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겪으며, 공랑이 불타 없어지고, 상인을 구분하던 모든 자료가 사라져 버리자, 조선의 재정을 떠받치던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

결국, 왜란 이후 재정이 부족해지자 다시 공랑을 만들지 못했으며, 상인들에게서 세금을 얻기 위해 난전을 단속하는 육의전에게 금난전권을 주어 단속하게 하였던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상업이 왜란 이후의 상업보다 좋은 점도 있구나.’

그런 금난전권을 받은 육의전 상인들이 없으니 돈이 돌지 않는다는 것을 빼면 상업이나 장사를 하기에는 지금이 더 좋은 조건이었다.

지금 우리가 낮 걸이를 먹기 위해 가는 집만 해도 공랑의 뒤 공간에 집을 세워 장사하는 음식점이었다.

왜란 없이 공랑이 계속 유지된다면 자연스레 상업혁명이 일어나 화폐유통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공랑 임대료만 낸다면 바로 장사를 할 수 있는 것이고.’

“여긴 낮 밥으로 뭘 파오?”

“아직 봄이다 보니 쑥국이 있소. 그리고, 마포에서 들여온 접어(鰈魚)를 넣은 접어 쑥국도 있소. 뭘 드실라우?”

나름 애교살이 푸짐하게 찐 주모가 있었는데, 접어 쑥국이라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접어면 도다리나 광어를 말하는 거요?”

“네. 어린 도령. 도다리나 광어, 가자미를 일컫지요.”

“그럼, 좌광우도라고 하는데, 눈이 왼쪽에 있던가? 아님, 오른쪽에 있던가?”

“호호호. 이미 토막이 나서 솥에 들어가 있는데, 그걸 어찌 기억하우? 그래서 접어 쑥국으로 하실려우?”

“그래야겠구만. 접어 쑥국 다섯 그릇 주시게나.”

주모는 펑퍼짐한 엉덩이를 흔들며 큰상 하나와 독상 하나를 내어주었는데, 양반과 노비가 함께 오는 일이 많은지,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양반인 원종에게는 밥을 말지 않고 따로 밥을 내주었고, 양반이 아닌 자들에게는 국에 밥을 말아서 바로 내어주었다.

‘양반들이 자주 오는 가게로구나.’

보통 양반들은 국에다 밥을 통째로 말아 먹는 것을 상스럽다고 여겼기에 양반에 맞춰서 따로 밥을 내어준다는 것만 봐도 얼마나 많은 양반이나 육조거리의 관리가 이 가게에 오는지 알 것 같았다.

“봄의 전령사라는 쑥은 물론이고, 냉이도 들었수다. 그리고 뭉텅이 고기를 넣었으니 잘 드시우. 그리고 도령의 국에는 접어 대가리도 넣었으니 한번 어떤 생선인지 보시우.”

주모의 말에 국에 들어있는 생선 대가리를 보니 눈이 오른쪽으로 몰려있었다.

“도다리구만. 오늘 손님들에겐 도다리쑥국이라고 하게나.”

“봄철 도다리쑥국 세 그릇이면 여름을 수월하게 난다고 하니 여름이 오기 전에 두 번은 더 오시구랴.”

넉살 좋게 이야기하는 푸짐한 주모를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바다에서 봄을 알리는 도다리와 땅에서 봄을 알리는 쑥이 만났으니 그녀의 말처럼 세 그릇을 먹으면 더운 여름을 쉽게 보낼 힘을 얻는다는 것이 마냥 흰말은 아니었다.

익은 눈이 달린 도다리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며 밥을 먹는 것은 부담이 되어 얼굴을 뒤로 돌려서 살을 숟가락을 떴다.

푹 끓인 국과 고기이다 보니 도다리의 살은 숟가락으로도 쉽게 떠졌다.

‘오! 살이 녹는구나 녹아.’

이곳에 오고 처음 먹는 생선이었기에 입에 도다리 살이 들어오기 무섭게 녹는 것 같았다.

시장도 하였기에 밥과 국이 절로 씹어지며 뱃속으로 사라졌다.

‘쑥국의 상큼함이 도다리의 살에 베여있어. 비린내도 거의 나지 않는구나.’

마포에서 바로 받아 왔다는 도다리가 싱싱한 것도 있겠지만, 손질해서 쑥국과 같이 내어주는 주모의 손맛이 큰 역할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도다리가 아닌 광어가 들어갔었다면 얼마나 더 맛있었을까 하는 기대감도 들었다.

얼굴이 찌그러진 것은 도다리나 광어나 같지만, 그 고기의 질감이나 맛은 광어가 더 좋았다.

지금 시대에는 다 자연산이니 제대로 크게 자란 광어를 한번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잠시만, 어쩌면 육고기보다는 바닷고기를 위주로 하는 것이 조선 시대에는 더 맞으려나.’

미래, 한국 연근해는 물론이고, 전 세계의 바다에서는 어획량이 엄청나게 줄어들어 과거에 흔했던 대구의 가격이 몇 배나 오르고, 참치는 금값이 되어 가는 게 현실이었다.

그리고, 지금 시대에는 사료가 필요 없는 생선이 단백질 공급원으로는 더 좋을 것 같았다.

‘해상왕 장보고 님의 유지를 받들어야겠구만.’

*

[작가의 말]

참고로 도다리도 이제 양식이 됩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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