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사촌. (2)
“도련님. 찻잎을 가져왔습니다요.”
박복이가 외갓집 광에서 찻잎을 가져왔는데, 소엽종의 찻잎이었다.
맛을 알아보기 위해 한번 마셔보니 대엽종에 비해서 맛이 섬세했고, 색도 맑고 영롱했다.
이 찻물로 밥을 말게 되면, 은은하게 올라오는 찻잎의 향기를 느끼기는 힘들 것 같았다.
‘더구나 내가 준비한 저 재료에서 나는 냄새도 생각해야 하니. 이걸로는 부족하다.’
소엽종 찻잎으로 우려낸 물에 연근과 둥굴레를 넣어 좀 더 흙의 맛을 가미했다.
“도련님. 도착했다고 합니다요!”
“부채질한 것은 식었는가?”
원종은 한쪽에서 열심히 부채질하고 있는 달유와 오추에게 음식의 온도를 확인했다.
“차가운 기운은 없으나 뜨거운 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거면 되었네. 덕주 어멈은 내가 알려준 대로 물만 밥을 올려주면 되네.”
“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올리겠습니다요.”
***
“부사 영감이 온다는 소식에 의술을 배우고 있는 제 조카가 특별한 물만밥을 준비했습니다.”
“특별한 물만밥요? 물만밥이 뭐 특별한 게 있겠습니까? 허허.”
대도호부사인 이임호는 같은 스승에게 동문수학한 예조 첨정 정여일의 부탁으로 수원까지 내려왔다.
물론, 공무가 있어서 왔기에 겸사겸사 온 것이지만, 근래 이런 초대가 많아 힘들기도 했다.
‘아들놈이 잘나서 내가 피곤하구나.’
이임호는 작년 식년시에 3등인 탐화랑(探花郞)에 뽑힌 둘째 아들 이규환만 생각하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열흘에 한 번씩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초대의 이유가 아들 때문이라는 생각에 정신을 바로 잡았다.
‘탐화랑에 뽑힌 이가 아직 성혼전이다 보니 이리 나를 초대하는 것이지. 나를 반기는 것이 아니다.’
이임호는 저녁 대접을 받다 보면 나이가 찬 여식이 뭔가를 들고 들어 올 것이고, 은근히 술상을 봐오며 어떻게든 자신을 취하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술 취한 자신에게 아들의 성혼 약조를 받아내려 했던 집안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직 저녁 전이기도 하고,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으니 시원하게 들이켤 수 있는 물만밥을 준비했습니다.”
아직 어려 보이는 도령이 손짓하자 독상 4개가 올라왔다.
“음. 찻물에 밥을 말았구랴. 그리고 이건...”
“네. 김치와 오이입니다.”
원종은 호평을 받았던 명란이 올라간 물만밥 대신 잘게 썬 김치와 오이지가 올라간 물만밥을 내었다.
그리고, 다들 보는 데서 볶음 참깨와 들기름을 한 방울씩 떨어트려 주었다.
“오! 찻물의 구수한 향에 들기름의 향이 가해지니 좋구나!”
외삼촌은 코를 벌렁거리며 향기를 맡았고, 이임호도 들기름의 은은한 향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한양에서 수원까지 공무 겸해서 내려왔던 피곤이 고소한 기름 향에 날아가는 것 같아 숟가락을 들어 찻물을 한입 머금었다.
“오, 뭔가 특이하다, 했는데, 단순한 찻물이 아니구만. 뭐를 넣었기에 이리 담백하면서 굳건한 맛이 나는 건가?”
“소엽종 찻잎에 연근, 둥굴레를 넣어 끓였습니다.”
원종은 부사 이임호가 나름대로 혀가 살아 있는 것 같자 마음이 놓였다.
[후루룩~.]
이임호는 마치 국물 요리를 먹듯이 물만밥의 찻물을 마셨다.
그러곤, 숟가락으로 위에 올려진 잘게 썬 김치와 밥을 먹었다.
[아삭, 아삭!]
“음 식감이 정말 좋구만. 연근과 둥굴레의 담백한 맛에 흰 김치의 맛이 섞이니 깔끔하구만. 으음. 홍대감이 특별한 물만밥이라고 했던 이유를 알겠구만.”
이임호의 호평에 외삼촌은 입이 찢어질 것처럼 옆으로 벌어졌다. 그 한껏 벌어진 입에 둥글게 썰린 오이지를 물만밥과 같이 먹었다.
[아사사삭!]
“오옷! 이게 어떻게 오이지의 맛이냐?”
깜짝 놀라, 이야길 하는 외삼촌 홍전택의 말에 이임호와 정여일도 오이지를 물만밥과 같이 먹었다.
[아사사삭!]
“이건... 이런 오이지는 처음 먹어보는군. 식감은 물론이고, 단맛이 나는 오이지라니. 오이지에 꿀을 넣은 것이냐?”
“네. 맞습니다. 보통 담는 오이지와 오이장아찌는 간장으로만 만들기에 짜기만 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색다르게 신맛과 단맛이 나는 오이지도 먹을 만하지 않으십니까?”
이제 10살이나 되었을까 하는 어린 도령이 식초의 신맛과 어울리는 단맛을 가진 오이지가 어떠냐고 물어보는데, 뭔가 시원한 맛인 것 같았다.
‘분명 차가운 얼음에 담긴 오이지는 아닌데, 식초의 신맛 때문인지 왠지 시원하구나.’
신맛과 단맛이 입안에 오래 남아 시디신 탱자를 머금은 것처럼 이임호의 혀 아래에선 침이 계속 올라왔다.
마치 입에서 오이지를 원한다는 것 같은 느낌에 이임호는 자신도 모르게 오이지와 물만 밥을 다시 먹었다.
그리고, 담백한 물만밥을 오이지가 시고, 달게 만들어 특별한 별미로 둔갑시켰다.
아삭거리는 식감은 둘째치고, 이런 신맛을 담은 음식이 이렇게 맛있었는지를 처음 알았다.
오이를 이렇게 만들어 먹는 방법을 배워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아차!’
이임호는 입속에서 계속 집어넣으라는 오이지를 멀뚱히 든 채, 숟가락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오이를 물만 밥에 올린 이유가 있구나. 오이 과(瓜)자는 과년(瓜年)한 딸을 뜻하는 것이로구나.’
흔히, 혼기가 찬 딸이 있을 때 ‘과년한 딸이 있다’라고 말을 하는데, 여기에 오이 과(瓜)자가 쓰였다.
오이 과(瓜)자가 혼기가 찬 딸을 나타내게 된 이유는 이 과(瓜)자를 반으로 자르면 팔(八), 팔(八)자로 두 개의 팔이 되기 때문이었다.
즉, 8+8 하여 16살의 딸이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이었다.
물론, 과년(過年)으로 써서 혼기를 놓친 딸이라는 말로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홍전택의 딸이자 원종의 사촌 누이는 오이 과(瓜)의 파자(破字)처럼 올해 16살이었다.
다 익어 수확해야 할 오이와 같은 16살의 딸이 있다는 것을 물만 밥으로 드러내고 있는것이었다.
‘이거 내가 한 방 먹었구나. 아니지. 이제까지 봐왔던 집안들과는 그 수준이 다른 것이다.’
이임호는 그제야 지금껏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내려 놓았다.
성혼하지 않은 아들을 어떻게든 사위로 삼아 이득을 보려 하는 집안이 아니라 은근히 에둘러 강조할 수 있는 재주를 가진 집안으로 보였다.
그리고, 홍씨 며느리를 얻게 되면 이 시면서 달달하기까지 한 오이지를 계속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홍대감이 특별한 물만밥이라고 하더니. 내 감탄을 금치 못하겠소.”
“하하하. 대감이 오신다고 하는 소릴 듣곤 조카가 실력을 발휘해보겠다고 했는데, 제대로 마음에 드시는 것 같아 나도 다행이요.”
“궐에 일이 있어 술은 먹지 못하지만, 내 언제 다시 와서 중한 이야기를 하며 술을 한잔하겠소이다.”
이임호가 중한 이야기를 술과 함께하겠다고 하자, 홍전택은 되었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하하 그날을 언제든지 기다리겠소이다. 기분이 아무리 좋다지만, 지금 같은 시기에 술을 먹을 수는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오.”
홍전택은 사실 이임호를 취하게 하기위해 유명한 도송주(道松酒)까지도 구해두었었다.
“헌데, 주상전하의 병세가 많이 위중한 것입니까?”
“올해 들어 벌써 세 번이나 졸(拙)하시어 큰일이 날뻔했소. 다행히 어의들이 늘 붙어 있기에 겨우 정신을 차리셨다고 하네.”
“큰일이군요. 그렇지 않아도 그...”
홍전택은 말을 하다말고 입을 닫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소이다. 우리끼리니 이야기해도 되오. 졸하실 때마다 조카의 원혼이 저승으로 데리고 가려 한다는 그런 소문을 말하려는 거 아니었소?”
“크흠. 맞습니다. 부사 영감이나 이 친구나 남이 아니기에 이야기하지만, 장안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래서 졸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다들 그렇게 생각할 정도입니다.”
“어쩌겠습니까. 지울 수 없는 일인 것을.”
세조가 왕이 되며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죽은 이들도 많았고, 이후 단종을 죽이며 죽인 이들 또한 많았기에 다들 쉬쉬하고 있었지만, 그 원혼들이 세조를 저승으로 데려가려 한다고 믿었다.
“저 부사 어른. 혹시, 전순의 영감도 궐에 계십니까?”
“내의원을 하시고 자헌대부이신 분 말인가?”
“네 맞습니다. 전순의 영감의 의술이 뛰어나니 주상전하의 병세를 살피고 계신겁니까?”
“전순의 영감이 계셨다면 좋았겠지만, 그이도 노환으로 몸져누우셨다네. 그렇지 않아도 올 초에 궐에서 사람을 보내 입궐하게 했는데, 전순의 영감이 노환으로 입궐을 하지 못하셨다네. 그런데, 도령은 전순의 영감과는 어떻게 되기에 물어보는것인가?”
“그게, 소생이 의술을 배우고 있는데, 전순의 영감의 문하에 들고자 해서 그렇습니다.”
“허허. 그렇다면 빨리 가봐야 할 것이네. 노인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네.”
“네.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원종은 대답을 하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고 보니 전순의 영감의 생몰 연도를 아예 모르는구나. 그저 세조가 죽었을 때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만 알고 있었는데. 이거 큰일인데.’
세조가 음력 8월에 죽었고, 뒤를 이은 예종은 왕이 된지 13개월 만에 죽었었다.
이런 것들을 떠올리다 보니 삼촌이나 이임호의 이야기는 한 귀로 듣고 흘리기 바빴다.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이임호는 두런두런 이야길 하다 현청으로 돌아갔다.
***
“외숙부님. 급히 가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전순의 영감 때문에 그런 것이냐?”
“네. 뜻을 세우고 집을 나선 것의 이유가 전순의 영감의 문하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가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흠. 어제 네가 한 물만밥을 부사 영감이 아주 좋아했고, 다음에 아이들의 이야길 하자는 약조도 했다. 네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 단맛 오이지를 만드는 방법도 알려주었으니 참으로 고맙구나. 뭐라도 해주어야 하는데...”
“외숙부님.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허나... 그냥 보내는 것은 좀 그렇구나. 네가 타고 갈 말을 준비해 줄 터이니 하루만 기다리거라. 그리고 어머니가 네게 꼭 해주고 싶은 음식이 있다고 하시더구나.”
“제게 꼭 먹이고 싶은 음식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 내 누이이자 네 어머니인 지윤이가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음식을 꼭 네가 먹어 줬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아무리 급하다 하더라도, 돌아가신 어머니가 즐겨 먹었다는 음식을 해준다는 말에 하루를 더 머물 수밖에 없었다.
***
“한여름에 나는 이것을 찾기 위해 수원 시내는 물론이고 이웃 고을까지 노비들이 다 돌아다녔다.”
외삼촌이 자랑스레 내민 것은 검은색의 가지 3개였다.
“가지는 여름에 나는 채소이니 구하신다고 고생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 이 작은 세 개가 쌀 두 말이나 달라고 하더구나. 자 안으로 들어가자.”
현대에서는 제철 과일뿐만 아니라 하우스에서 재배되는 채소를 1년 내내 먹을 수 있지만, 조선 시대에는 그게 불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아직 덜 자라 손바닥만 한 작은 가지 세 개를 비싸게 구해왔다.
‘시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단순히 가지라서 비싼 것도 있겠구나.’
밭의 한쪽에서 콩과 함께 틈새 작물로 주로 심는 가지는 생김새가 특이한 만큼 토종식물이 아니었다.
삼국시대에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온 가지는 고급수입 채소였기에 그 자체로 비쌌다.
“네? 이걸 그냥 굽는다고요?”
비싸게 구해온 가지를 그냥 뭉텅뭉텅 잘라 꼬치에 끼워 굽는다는 말에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