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51화 (51/327)

51. 참 아까운데. (4)

“저기입니다. 혹시 모르니. 머리를 더 숙이십시오.”

달유와 오추를 따라 산을 오르는데, 도포와 갓이 문제였다.

‘내가 진짜 의복도 바꾸고 만다.’

비단으로 만든 도포와 한복이 멋은 있었지만, 활동성이 정말 불편했다.

달유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옷에 흙이 잔뜩 묻은 네 사람이 보였는데, 그리 몸이 커 보이지 않았고, 어디서나 흔히 볼수 있는 장정들로 보였다.

“우리가 몸을 드러내더라도 이길수 있겠는가?”

“네. 오추가 계속 지켜보았는데, 몸가짐이 무예를 익힌자들이 아닌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가? 그럼 우리 이렇게 하지.”

***

“한길이 고갯길에 들어서는 자는 없던가?”

누워있던 자는 이제 막 돌아온 자에게 물었다.

“지관 아저씨 전혀 없습니다. 개미한마리도 없어요.”

“제길, 우리가 고갯길에 있다는게 다 알려진것인가.”

“아, 그러게 오늘 산하마을을 떠나는 그놈들을 덮쳤어야지.”

“그 놈들 덩치보지 않았나. 그리고 들고 있던 나무 지팡이가 갑사들이 쓰는 창대였다니깐 그러네. 덮쳤다면 오히려 우리가 당했을거야.”

“쳇, 그전에 뱃가죽이 등가죽과 들러붙어서 우리가 먼저 죽겠다.”

“그러면 마을로, 엇! 누누구냐!”

누워있던 지관이란 자가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며 달유를 노려보자 다른 이들도 갑자기 나타난 달유를 쳐다봤다.

“엇! 저쪽에도.”

달유의 반대편에선 오추가 창을 들고 나왔는데, 달유와 오추가 들고 있는 날선 창에 움찔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왼편에는 삼식이가 기다란 몽둥이를 들고 나왔고, 오른편에는 박복이와 내가 나섰다.

“그러고 보니 이들은 분명 마을을 떠난 그자들인데.”

“아! 그렇구나, 오늘 아침에 재를 넘어간 놈들이구나.”

그제야 네 명은 옆에 있는 몽둥이를 주워들었는데, 몸이 근육질도 아니었고, 굴러먹던 느낌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도깨비가 있다고 하던데, 그저 배고픈 유민이었구나. 힘도 그리 세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마을 사람들을 물리친 것이냐?”

“어린놈이 혀가 짧구나.”

“채우 말조심해. 양반이다.”

“퉤! 양반이 뭐?”

말을 험하게 하는 채우라는 자도 자기가 말을 해 놓고는 움찔했다.

원종이 보기에는 암만해도 마을 사람들을 물리친 것이나 도깨비로 불린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들고 있는 몽둥이도 그렇고, 제대로 된 것이 없는 전형적인 떠도는 유민들로 보였다.

그러다 땅에 떨어진 나무판이 눈에 들어왔다.

“저거 가면인가?”

“그렇소. 마을 사람들이 우릴 찾을 때 도망다니다 나무 가면을 쓰고 밤에 들이치니 알아서 도망치더이다.”

“자기들끼리 넘어져서 다쳐놓고는 우리 때문에 다쳤다고 하니 웃겼지.”

“마을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은 것이로구만.”

뭔가 임꺽정 같은 흉적이 있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지금은 짐이나 먹을 것만 빼앗았기에 관군이 오지 않지만, 계속 재물을 뺏게 되면 결국 너희들을 잡기 위해 군사가 올 것이다. 너희들이 그리 악독하지 않은 것 같으니 충고해주는 것이다. 우린 그만 가자.”

달유나 오추도 이들이 크게 위협적이지 않다는 걸 알곤 포위 진형을 풀었다.

“우리도 알고 있소. 계속 이렇게 고갯길에서 재물을 털게 되면 목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허나 갈 곳이 없소.”

“니미랄! 목숨 걸고 도망쳤는데, 굶어 죽거나 목이 잘리거나 하겠네.”

“도망쳤다니? 관노인가?”

“관노보다 못한 사기장(沙器匠)이요.”

“사기장? 도자기를 만드는 장인(匠人)을 말함인가?”

“맞수다.”

“하면 관요(官窯) 소속의 장인이라는 말인데, 왜 관노보다 못하다는 말인가?”

원종이 알기로는 조정에서 사옹원(司甕院)이란 관청을 만들어 나라에서 쓰이는 도자기 그릇을 생산했고, 꽤나 장인들을 우대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경국대전에는 사기장의 자손은 다른 부역을 시키지 말고 대대로 가업을 잊게 한다고 명시했을 정도로 사기장에 대해 관리를 했다고 알고 있었다.

경국대전은 물론이고, 조선 시대 그 어느 직종에서도 법으로 가업을 이으라고 했던 경우는 사기장이 유일할 정도였다.

한데, 그런 사기장의 후예들이 관노보다 못하다고 이야길 하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야 관노보다 못하게 일을 하니 그런 거 아니겠소. 놋그릇은 한번 만들면 10년을 쓰고, 쇠그릇은 5년 나무로 만든 목기는 한번 만들면 3년을 쓰는데, 사기그릇은 얼마 동안 쓰는지 아시오?”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자가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

“사기그릇이니 목기처럼 갈라지지도 않을 테고, 쇠그릇처럼 녹이 슬지도 않을 테니 한 6~7년 쓰는 거요?”

“아니오. 사기그릇은 얼마 동안 쓰라는 게 없소이다.”

“그럼 놋그릇보다 더 오래 쓰는 거요?”

“그 반대요. 사기그릇은 한번 떨어트려 깨지면 끝인 거요. 그래서 얼마 동안 쓰라는 게 없는거요. 사옹원에 몇백 명의 사기장이 있지만, 늘 궁이나 관에서 쓰는 그릇을 만든다고 허리를 제대로 펴기도 힘드오.”

“몇백 명의 사기장이 있는데도 그렇다는 말이오? 몇백 명이 하루에 하나씩만 만들어도 수량을 다 맞출 수 있는 거 아니오?”

나서기 좋아하는 삼식이가 몇백 명이나 사기장이 있는데도 일이 힘들다고 하니 의문을 품었다.

“그 몇백 명이 다 사기를 만드는 게 아니오. 조(組)를 짜서 만드오. 흙을 고르게 거르는 수비장(水飛匠), 흙을 그릇 모양으로 만드는 조기장(造器匠), 그것을 건조 시키는 건화장(乾火匠),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화청장(畵靑匠), 가마에 불을 때는 감화장(監火匠)까지 여러 명이 조를 짜 가마에서 그릇을 굽게 되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다 잘 나오면 되지만,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오.”

이야길 듣고 보니 왜 경국대전에서 사기장의 자손들에게 다른 부역을 시키지 말고, 가업을 잇게 하라고 한 법으로 정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때의 도자기는 초 하이테크 과학의 결과물이구나. 그래서 대를 이어 기술을 익힐 수 있도록 법으로 정해둔 것이구나. 그게 아니면, 일이 힘들어 도망치는 사기장이 많으니 사기장이 줄어들지 않게 하려는 방편이었겠지.’

“관요에서 일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가?”

“힘만 들면 다행일 겁니다. 한겨울을 빼곤 그릇을 계속 만드는데, 그러면 먹을 거라도 제대로 주고 해야 하는 거 아니겠소? 그릇을 계속 굽다가는 그대로 말라죽을 것 같아 도망친 것이오.”

이야길 듣고보니, 가슴이 답답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갓던 도공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이 조선으로 돌아올 수 기회가 있었음에도 대우가 좋은 일본에 남겠다고 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만큼 조선에선 사기장에 대한 대우가 좋지 못했다.

세종대왕 때만 해도 관노였던 장영실에게 관직을 주었을 정도로 장인(匠人)에 대한 대우가 좋았는데, 그 이후 조정에서는 장인들에 대한 대우가 좋지 않았다.

‘과학자인 장인들에 대한 대우를 하지 않았기에 중국이나 일본에게 늘 치이고 산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렇게 사기장들을 대우하지 않았기에 조선백자의 수준은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고, 19세기에는 한중일 삼국중에서 가장 수준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화려한 중국풍의 도자기를 만들어 내었고, 일본은 정교하고 얇은 도자기를 만들어 내어 서양인들에게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혹자는 조선의 백자가 질박하고, 견고하여 실용성이 있다고 하지만, 외국인들이 멋지다고 보물이라고 할 만큼의 대우를 해주는 자기는 화려하고 멋진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뿐이었다.

세월이 지나면 기술이 쌓여 발전해야 하는데, 조선은 그 반대로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청자의 기술도 잃어버리고, 질박한 그릇만 만들게 되니 현대까지 사기장의 명맥이나 이은 것이 다행이라고 할 판이었다.

‘시발. 이것도 요리와 관련이 있으니 내가 어떻게든 키운다.’

“갈 곳이 없다면, 나를 따라가겠느냐?”

“네? 도련님. 이런 화적들을 집안에 들이면 아니 됩니다.”

박복이가 안된다며 펄쩍 뛰었다.

“자매(自賣)를 하라는 말이오?”

“자매를 해도 좋지만, 내가 만든 민요(民窯)에서 일해줬으면 하네. 일단 관요보다는 일의 부담이 없을 거고, 일단 먹을 것 하나는 확실히 챙겨주지. 어떤가?”

“그 말을 어떻게 믿으란 말이오? 같이 일하자고 해서 끌고가서 관에 우리를 팔아 넘길수도 있는거 아니오?”

“하하. 그놈 아까부터 입이 험하더니 생각하는 것도 밴댕이 소갈이구나. 너희 놈들을 관에 넘길 생각이었다면 저치들에게 창을 써서 때려잡았을 것이다. 그게 더 쉽지 않겠느냐?”

사기장들은 그제야 속이기보다는 무기를 휘둘러 자신들을 때려잡는 게 더 쉽다는 걸 깨달았다.

“그 민요는 어디에 있는 것이오?”

“문경이네. 뭐, 아직은 가마도 없고 하지만, 자네들이 원하는 대로 가마도 만들고 다른 것도 만들게 해주겠네.”

“흠.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소?”

“그대의 이름은 뭐요?”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자가 네 명을 대표하는 듯하여 물었다.

“지관이라 하오. 저 입이 험한 놈은 장청이고, 저 눈 큰 놈은 채우, 점이 있는 놈은 한길이라고 하오.”

“그럼, 생각할 시간을 가지고 결론이 나면 내 집으로 가시오. 지금은 내가 어디로 가야 하니, 사정을 편지에 써주도록 하겠소.”

원종은 그 자리에 앉아, 아버지와형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를 들고 온 자는 중히 쓸 자들이니 집에 머물게 해달라는 편지였다.

“내 밑에서 일하겠다는 결론이 나면 이 편지를 들고 문경현 전씨댁을 찾아가면 될거요. 문경에서 요리숙이 있는 집이라고 물으면 다 알 것이오. 그대들을 먹고 자게 해줄 것이오.”

멀뚱히 선 지관이란 자에게 편지를 쥐여줬다.

“생각해보고 같이 일하는 게 안될 거 같으면 편지는 불태우면 될 것이요. 이만 가자 갈 길이 멀다.”

지관은 손에 편지를 쥔 채 멀어져가는 원종 일행을 지켜봤다.

“변수(邊首) 어른 어떻게 하실 거요? 편지에 진짜 그 전씨 가문을 찾아가면 먹고 자게 해준다고 되어 있소?”

“그래. 진짜 우리를 먹고 자게 대우해 줘라고 썼다.”

“그럼, 뭐 고민할거 있소? 지금 뱃가죽이 등가죽이랑 만날 판인데. 어서 문경으로 갑시다.”

“어유, 불 때는 화장(火匠) 놈들은 생각이 없다니깐. 우리가 저 도령 말을 듣고 문경에 갔는데, 관요보다 더 힘들게 착취당하면 어떻게 할 거냐?”

“일이야 뭐 더 힘들어도 밥이라도 제대로 준다면 좋은 거 아니겠소? 뭐, 밥도 제대로 안 주면 또 도망치면 될 것이고.”

“하긴.”

장청과 대거리를 하던 한길도 이리되든 저리되든 매한가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럼 일단, 문경으로 가보자. 진짜 우리를 대우해서 그릇을 만들게 해준다면야 무엇인들 못 하겠느냐. 짐을 싸라.”

***

“홍씨댁? 형조좌랑을 지낸 홍 씨라면 저 길로 쭉 가다 보면 나올걸세.”

수원에 도착하여 외갓집을 찾았는데, 한 번도 외갓집에 와본 적이 없다 보니 집 주름(부동산업자)을 찾아 물어물어 찾았다.

‘다행히 외갓집이 몰락하지는 않았구나.’

헌데, 외갓집을 찾아온 것이 원종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도령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가 먼저 들어가겠소이다.”

웬 중년 여인들이 문 앞에 선 우리를 밀어내고 들어갔는데, 그 뒤를 엉거주춤 따라 들어갔다.

“매분구가 왔습니다요!”

*

[작가의 말]

실제 문경에는 조선 말기 관요들이 폐쇄되면서 관요에서 나온 사기장들이 모여 문경 민요를 만들었었습니다.

지금도 문경에는 도자기가 지역 특산물입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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