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참 아까운데. (1)
“재인백정(才人白丁)이로구나.”
“예예. 맞습니다요. 헤헤. 혹시 계집은 안 필요하십니까요? 저희가 원래 이러지는 않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보니...”
손을 마주 잡아 비비며 이야기하는 자의 얼굴를 보니 삶의 고단함과 애절함이 느껴졌다.
그런 얼굴로 뒤에 있는 여자들을 앞으로 내밀어 얼굴을 보여주었는데, 다들 아직 어린 얼굴이었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이들을 재인 백정이라 부르지만, 화척(禾尺)이라 불리며 도살을 업으로 하는 백정이 되는 자들과는 다른 무리였다.
쉽게 이야기하면 소, 돼지를 잡는 백정은 유목민의 후손이라 할 수 있었고, 재인백정은 원나라 시절 아시아로 넘어온 집시들의 후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재인백정들이 조선 중기 이후 사당패가 되어 절의 불사로 여는 연회에서 일해주고, 전국으로 퍼져 소리와 줄타기를 보여주는 잡것들이 되었다.
물론, 부업으로 이처럼 매음을 하기도 했다.
“계집은 되었다. 일단 밥이나 먹고 재주나 보여주게. 삼식아 가지고 있는 곡식을 다 내어주거라.”
“네? 전부다요?”
“그래, 뒤에 저숫자를 보거라.”
“하지만... 휴우... 알겠습니다요.”
삼식이는 오승포로 바꾸어온 한 말이 넘는 잡곡을 모두 모가비(某甲 재인백정의 대가리)에게 넘겨주었다.
낮에 캐 두었던 냉이와 쑥도 주고 가지고 있던 뽕잎장아찌도 주었다.
“감사합니다요. 아 이것들아 뭐 하는 거야? 어서 불 안 피우고 뭐 해!”
다들 며칠은 굶었는지 후다닥 준비해서 밥을 했고 채 뜸이 들기도 전에 떠먹었다. 그리곤, 물을 부어 숭늉과 죽의 중간쯤 되는 것을 만들어 나누어 먹었다.
제대로 된 반찬도 없었지만, 다들 웃으며 먹는 것이 행복해 보이면서도 안타까워 보였다.
“그래, 뭘 잘하나? 소리를 잘하나 춤을 잘하나? 아님, 재담줄(곡예보다는 줄을 타며 노는 것)을 잘하나?”
“네 저희는 춤을 잘합니다요. 자, 다들 먹었으면 춤 한판 춰보자구나.”
장구를 옆으로 맨 처녀 셋이 나와 장구를 두드리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장구를 치며 판이 만들어지자, 우리에게 방을 내어준 집주인도 나왔고, 붙어있는 다른 집안에서도 사람들이 고개를 삐쭉 내밀어 구경을 했다.
이제까지 봐왔던 펑퍼짐해서 몸매를 가리는 한복이 아닌, 몸에 찰싹 달라붙게 만들어진 한복을 입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남정네들의 눈은 처녀들의 몸매를 훑어보기 바빴다.
물론, 미의식이 다르고 현대에선 거의 다 벗고 추는 댄서들도 보았기에 원종은 그저 덤덤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장구춤을 추던 처녀들이 들어가자, 아이들을 어깨에 세워 올린 남자들이 나왔는데, 아이들의 손에는 기다란 장삼 소매를 달아 흔들어 대었다.
그리고 중간마다 날쌘 자가 나와 재주를 넘으며 흥을 돋웠지만, 원종이 보기엔 그저 그랬다.
하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입을 벌린 채 재미있게 쳐다보며 즐겼다.
“여기서 재담줄을 타야 하는데, 밤이 늦어 힘들 것 같습니다요.”
“그렇군. 잘봤네.”
원종은 잘봤다고 3냥을 주었다.
“어이쿠, 감사합니다요.”
“이런 재주가 있는데, 재주로 벌어먹을 것이지, 왜 빌어먹으려고 하는 것인가?”
“아, 그게 저희도 음성 오일장에서 난장질해서 춘궁기를 넘길 준비를 하려 했는데, 사람이 죽어 오일장이 안 열리지 뭡니까요. 그래서 호남지역으로 내려가는 중입니다요.”
“허허, 너희도 오일장 금지의 피해자로구나.”
“네네. 가지고 온 먹을거리도 다 떨어지고, 가진 게 없어 줄창 굶기만 했습니다요. 저 애들 살 빠진 거 보십시오. 비쩍 골아서 이제는 계집을 사라고 해도 사는 자들이 없을 판입니다요.”
“그런데 호남까지는 갈수 있겠나?”
“한번 해봐얍죠.”
“그런데, 춤을 잘한다고 했는데, 방금 보여준 춤이 전부인가? 그걸로는 벌어먹기 힘들 것 같은데. 아, 몸을 파니 그걸로 먹고살 수는 있겠군.”
“휴우. 저희를 그렇게 욕하셔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요. 저희가 먹고 사려면 몸이라도 팔아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습니다요.”
모가비인 남자는 자신도 매음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며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며 얼굴을 굳혔다.
“그럼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닌가. 다른 재인 무리에 비해서 특이한 게 있어야 벌이가 좋아질 것 아닌가. 다들 똑같이 춤을 보여주고, 소리를 하고, 줄을 타기만 하면 너무 재미가 없지 않은가. 혹시 이런 건 할 줄 아나?”
원종은 삼식이의 짐에서 콩과 잡곡이 든 주먹만 한 주머니 3개를 들어 허공에 던졌다.
처음엔 약간 어설프게 곡식 주머니가 돌았지만, 금세 3개의 주머니가 휙휙 거리며 저글링(Juggling)을 했다.
‘군대에서 동기끼리 재미 삼아 했던 저글링을 이렇게 쓰는구나.’
주방에 양파 같은 채소나 사과가 들어오면 이렇게 저글링을 하며 놀았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를 생각하며 저글링을 하는 동시에 앞뒤로 움직였고, 한쪽 다리를 드는 것도 보여줬다.
“이걸 할수 있겠나?”
“그리 어려워 보이지는 않습니다요. 주머니를 줘 보십시오.”
모가비는 콩주머니를 받아 허공에 던졌는데, 2개까지는 되어도 3개가 되자 손이 어지러워지며 제대로 저글링을 하지 못했다.
“아, 모가비 어르신 그것도 못하우? 이리 줘 보시우.”
재인 무리에서 젊은 남자가 나와 콩주머니를 들고 저글링을 했는데, 역시나 쉬워 보이는 저글링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하하. 나도 하는 걸 재인이라는 그대들은 왜 못하는 건가? 이건 기본 중의 기본이네. GIBBON! 혼자서 이걸 하게 되면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주머니 6개로 할 수도 있네. 나는 그걸 할 수 있는데, 같이 할 사람이 없구만 이거.”
저글링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들 앞에서 다시 한번 저글링을 해주며 약을 올렸다. 그리곤 콩주머니를 삼식이에게 던져 줬다.
“보게. 내가 이걸 하니 다들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보지 않았나. 이런 특이한 재주가 있어야 재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이야. 다들 하는 소리나 춤, 줄타기는 이제 신기하지도 않아. 이런 특이한 걸 연습하게나. 그래야 어디 가서 재주로 밥을 벌어먹는 것이야.”
모가비는 물론이고 재인 무리의 젊은이도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곤, 둥근 주머니를 만들어 흙을 채우고는 저글링을 연습했다.
‘그저 매음이나 하는 사당패는 아닌 것 같아 다행이네.’
사실, 원종은 이들이 탐이 났다.
문경이나 상주가 아닌, 한양에서 장사하며 상업을 일으키려면 이런 사당패가 필요했다.
고급 한식집에서 가야금을 타게 하거나 레스토랑에서 교향악을 연주하는 게 그냥 돈이 남아돌아서 하는 게 아니었다.
그곳의 특별함을 위해서였다.
그냥 음식을 파는 것은 저렴한 가격에 양이 많고, 맛이 있으면 저절로 팔릴 수 있었다. 하지만, 고급음식은 특별함을 팔아야 했다.
그리고, 조선의 부자인 양반들은 허세를 부릴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는 곳에서 저런 사당패가 재주를 보여준다고 하면 금세 소문이 퍼져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다.’
특급 호텔에서 공연장을 만들고 유명한 공연을 유치하는 이유였다.
재인들의 우두머리인 모가비를 휘어잡아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어 아쉬웠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은혜를 입혀두는건 좋겠지.’
***
“어떻습니까? 되지요?”
모가비와 젊은 남자는 물론, 장구춤을 추던 젊은 처녀도 저글링을 했다. 셋 모두 밤새 연습했는지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3개 주머니로 하는 사이에 내가 다른 주머니를 던져 넣자 금세 손이 어지러워지며 주머니를 흘려 버렸다.
“서거수(瑞巨輸 크게 상서로운 일을 나르다란 뜻)의 가장 기본이 되는 저글리(抯契理 잡아당기고 다스리다란 뜻)를 했다고 좋아하면 쓰나. 3개가 아니라 4개 5개는 해야 아~ 좀 하는구나 하며 칭찬받을 수 있는 법이네.”
“4개, 5개로 하는 게 되긴 되는 것입니까요?”
“된다니깐 그러네. 그리고,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주고받기도 되어야 저글리를 좀 한다고 할 수 있는 법이야.”
“대체 어느 재인무리가 이런 재주를 부리는 것입니까요?”
“저 바다 멀리 단풍국에 가면 태양의 서거수란 재인 무리가 있는데, 거기서는 이런 저글리는 기본 중의 기본이라네.”
“크흑. 그놈들이 오게되면 우리 밥줄이 끊어지겠구나.”
모가비는 대단한 놈들이 오게 되면 큰일이라며 좌절했다.
“그런데 지금 호남으로 갈 노잣돈도 없는 것 같은데, 음성으로 다시 가서 노잣돈이나 만들어서 가게.”
“네? 사람이 있어야 판을 벌릴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요? 오일장이 열리지 않는데, 사람들이 모이겠습니까요?”
“쯧쯧쯧 모가비라는 자가 어찌 그리 아둔한가?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면 사람을 모아야지.”
“아니, 어떻게 사람을 모은다는 말입니까요?”
“가서 긴 대나무를 베어오고, 천을 준비하게. 그리고 패랭이 모자 창을 만들 수 있으면 만들어 오게.”
내 지시에 모가비는 긴가민가했지만, 값싼 천을 사 오라며 돈까지 주자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
[극락 서거수단 極樂 瑞巨輸團]
[재밌다!] [즐겁다!]
[팔도유일 재주놀이!]
[음성 대사거리 난장판 예정!]
“아니 저게 뭐유? 언문으로도 되어 있는데, 처음 보는데.”
“나도 까막눈인데, 난들 아는감? 무슨 놀이꾼 같은데.”
“여럿이 저 주머니를 주고받는 저건 신기하구만. 구멍 뚫린 원반 같은 것도 주고받는 저것도 신기한데.”
“다들 들으시오! 음성 대사거리에서 극락 서거수가 열릴 예정이외다! 이틀 후 정오에 구경 오시오! 마당놀이! 재주놀이가 열리오!”
“오! 구경거리를 알려주는 것이로구먼! 신기한걸.”
“그렇게. 저렇게 깃발을 세우고 움직이는 것을 보니 뭔가 대단할 것 같기도 하구만. 이틀후라고?”
“그런데, 음성 대사거리면 장이 서는 곳 아니우?”
“그러네. 장이 다시 서는 것인가?”
“장이 서든 안 서든 한번 가보는 거지 뭐. 구경거리는 놓치면 안 되는 것이지.”
졸지에 서거수단이 된 모가비 길근은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깃발을 만들고, 저글리를 연습시키며, 무리에게 밥을 사주자 얼떨결에 어린 양반이 시키는 것을 다 따라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킨 대로 깃발을 들고 크게 소리쳐다 보니 속은 시원했다. 사람들의 눈을 보며 크게 외치다 보니 뭔가 쾌감도 있었다.
어디를 가든, 천것들, 잡것들이라 불리며 눈치를 보고, 딸자식 같은 아이들의 몸을 팔 때마다 이빨을 깨물며 무리를 지켰었다.
헌데, 정정당당하게 가진 재주로 판을 벌인다며 외쳤고, 사람들이 반응하자 재주로만 먹고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저 양반 어른. 한데, 이렇게 해서 사람을 모으고 재주를 팔아도 어르신이 쓰신 돈을 다 채워드릴 수 있을지 잘모르겠습니다요.”
“그건 걱정하지 말게나. 그저, 자네들은 이렇게 해서 사람들을 잔뜩 모으기만 하면 되네. 그리고 그들을 즐겁게만 해주면 되는 것이야.”
음성 대사거리에 도착하니, 과연 오일장이 열리는 곳인 만큼 넓은 곳이었다.
그리고, 오일장이 열리지 않았지만, 군데군데 눈치를 보며 장이 열리는지를 확인하는 자들도 있었다.
마당이 큰 집을 이틀 빌려서 숙소로 잡곤 명을 내렸다.
“모가비는 단원들을 데리고, 이 근방을 돌아다니게. 만약 현청이나 유향소에서 뭐라고 하면, 오일장과는 상관없이 재주를 팔기 위해 알리는 것이라고 하면 넘어갈 것이네.”
모가비는 이틀 동안 목이 터지라 알리겠다며 위쪽으로 움직였다.
“삼식이와 박복이는 이 근방에 의원들이 몇 명인지 알아보고 오거라.”
“의원의 숫자 말입니까요?”
“그래. 그리고, 백초상이라는 약재의 재고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 오너라.”
“백초상요?”
“백초상이라는 이름 말고도 ‘조돌묵’ 또는 ‘당묵’이라고도 불리니 의원마다 꼭 물어보고 몇 근이나 살 수 있는지 알아 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