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봄의 명약!
“도련님. 이건 냉이가 아닙니까? 흔하디흔한 것인데, 이게 어떻게...”
오추는 말을하다 말고 입을 닫았다.
“그래, 인삼만큼 약효가 있는 게 아니지. 하지만, 이 냉이란 놈이 땅을 뚫고 올라오면 봄이 왔다고 알려주는 것이니 춥고 시리던 몸을 낫게 해주는 거 아니겠는가?”
“그렇게 치면 뭐, 명약이 맞겠지요.”
“그래, 더구나 이 냉이로 된장국을 끓여 먹으면 입안 가득 봄 내음을 채워주니 그건 다른 명약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자 다들 냉이 좀 뜯게. 뿌리까지 다 캐야 하네.”
원종의 말에 다들 손칼을 꺼내 들고 냉이를 캐기 시작했다. 처음엔 남자가 이런 것도 해야 하는 건가 싶어 손이 더디던 달유와 오추도 재미를 붙여갔다.
“여기 쑥도 있는데, 쑥도 캡니까?”
“그래 캐게. 식량 구하기도 어렵다는데, 좀 챙겨 가지.”
사실, 이 시대의 냉이와 쑥은 어떤 면에서는 인삼보다 더 중요한 식물이었다.
비타민 약이 없는 시대에 신선한 채소를 먹지 않고 겨울을 보낸 사람들은 몸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뿌리까지 다 먹는 냉이가 가장 먼저 올라와 사람들에게 비타민과 미네랄류를 공급해줬다.
이런 부분만 따진다면, 인삼보다 더 좋긴 했다.
‘냉이와 봄동에 고추장, 간장, 식초 해서 버무려 먹는 겉절이가 진짜 최고인데.’
원종은 새콤달콤한 겉절이를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게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현대에서는 봄나물을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했기에 1년 내내 먹을 수 있는 식자재가 되었지만, 지금 시대에는 오로지 이 시기에만 먹을 수 있는 봄나물이었다.
고추장이나 고춧가루가 없지만, 간장과 식초만으로 겉절이를 해도 맛있을 것 같았다.
덕분에 욕심을 부려 냉이와 쑥을 캐다 보니 길이 늦어져 네다섯 집이 모여 있는 작은 마을에서 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먼저 갔던 양반네들의 모습은 안보입니다요.”
“아마도 여긴 작으니 묵을 곳이 없다고 여길 그냥 넘어갔겠지. 달유! 잠시만 있게!”
가장 큰 초가집에 묵을 수 있는지 물으려 했던 달유 제지했다.
“일단 마을을 한번 둘러보지.”
문경새재를 오르며 보았던 지금 시대의 초가집 청결도를 알기에 우선 둘러보기로 했다.
집주변이 가장 깨끗해 보이는 집을 찾아 그 집에 숙박을 부탁하려 했다.
“여기 이집으로 하자구나. 삼식아 가보거라.”
다섯집 중에서 마당이 가장 넓고, 주변 정리가 잘되어 있는 집을 골랐다.
마당에는 텃밭이 있었으나, 잡다한 것이 떨어져 있지도 않았고,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이보시오. 지나가는 객인데, 이집에 묵어갈수 있겠소?”
“아니 될 것 같습니다. 이 집에 방이 3개가 있다 하나, 손을 받을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댁에 알아보시지요.”
삼식이의 물어보는 말에 집에서 나온 이는 20대의 젊은 여자였는데, 소복을 입고 있었다.
“이집이 이곳에서 가장 깨끗해 보여 왔소이다. 아니 되겠소?”
혹시나 삼식이나 사냥꾼들의 외모 때문에 안된다고 하는 것 같아 뒤에 있던 내가 나섰다.
도포에 갓을 쓴 양반이 물었기 때문인지 젊은 여자는 안으로 들어가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와 함께 나왔다.
“그럼, 저 방을 쓰십시오. 그리고 밤에는 나오지 마셔야 합니다.”
다행히 허락을 해주어 방문을 여는데, 삼식이가 나를 잡았다.
“도련님.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흰소복에 사내는 없고, 여자만 있는 게 좀 그렇지 않습니까요? 마치, 그 사내들 간을 빼먹는 구미호의...”
삼식이는 전형적인 무서운 이야기의 시작과 같다며 께름칙스러워 했다.
“흰소복을 입고 청소까지 깔끔하게 되어 있다면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요?”
“그러고 보니 너무 깔끔하긴 합니다.”
달유까지 나서서 의심스러워 하는 게 웃겼다.
“깔끔한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여길 보거라.”
원종은 살짝 열었던 방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아! 누에로군요. 그렇다면 이렇게 집안이 깔끔한 게 이해가 됩니다.”
“뽕잎 냄새도 은은하게 나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요.”
방금전만 해도 간을 빼먹는 구미호니 머니 하던 삼식이는 뽕잎 냄새가 좋다며 콧구멍을 벌렁 거렸다.
원종은 마을에 누에를 치는 집이 있지 않을까 싶어 살폈고 청소가 깔끔하게 되어 있는 집이었기에 한 번 짚어 본 것이었다.
명주실을 뽑아내는 누에는 뽕잎만을 먹는 애벌레인데, 주위 환경이 깨끗하여 다른 벌레가 없어야 누에고치를 만들었다.
그래서 양잠을 하는 자는 집의 안팎을 깔끔하게 관리하여 잡스러운 동물이나 곤충이 오지 않게 관리를 했다.
방안의 한쪽에는 대나무로 만들어진 5층 선반이 있었는데, 층마다 누에들이 뽕잎을 갉아 먹는다고 난리였다.
“도련님. 이놈들도 먹을 수 있는 겁니까요?”
내 곁채 안방에서 지렁이와 달팽이를 길러본 경험이 있는 박복이는 이것도 먹거리인 줄 아는 것 같았다.
“먹을 수는 있으나, 먹는 거보다는 이 애벌레에게서 실을 뽑는 것이 더 이득일 거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밖에서 뽕잎이나 좀 떼오게나.”
사냥꾼 둘에겐 뽕잎을 따오라고 시키고 나머지 인원은 밥을 준비했다.
텐트나 캠핑 준비까지는 아니라도 밖에서 노숙할 때 쓸 수 있는 간이 화구와 냄비를 들고 왔었다.
한쪽에선 잡곡으로 밥을 안쳤고, 다른 쪽엔 냉이 된장국을 위해 물을 올렸다.
“도련님 된장은 써도 된다고 합니다요.”
우리가 먹는 건 우리가 하겠다고 말하러 간 박복이가 된장을 한 종발 들고 왔다.
소금을 많이 넣지 않은 된장이었는데, 낮에 캤던 냉이와 쑥을 다져 된장국을 끓이니 된장의 은은한 짠내와 봄나물의 수수한 풀내음이 섞여 맛있는 냄새를 풍겼다.
“따온 뽕잎 좀 이리주게.”
달유와 오추가 따온 뽕잎 대부분은 누에들에게 갔지만, 30장 정도는 깨끗이 씻어 된장을 발랐다.
“뽕잎 장아찌입니까요? 뽕잎 장아찌 두세 장만 있어도 밥 한 공기 뚝딱이지요.”
“그래, 반 각만 이렇게 두어도 뽕잎의 숨이 죽어 맛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밥에 뜸이 들자 밥 두 그릇과 뽕잎 장아찌를 덜어 주인집에 가져다주게 했다.
“잘 먹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안집에서 찬을 주셨습니다.”
박복이는 접시를 내려놓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것이 접시에 올려져 있었다.
“오! 번데기로구나. 하하하. 이리 보게 될 줄이야.”
누에가 달이 차면 실로 누에고치를 만들고 그 안에서 누에나방이 되기위해 번데기가 되었다.
물론, 실이 필요한 인간은 그렇게 번데기가 되어 들어있는 누에고치를 뜨거운 물에 삶아 실을 뽑았다.
결국, 실이 다 뽑히게 되면 주름 가득한 번데기만이 남게 되는데, 그렇게 만들어지는 번데기는 별미 중의 별미였다.
현대에서도 술집이나 포차의 기본안주로 나올 정도로 식감이나 맛이 빠지지 않는 식재료였다.
그리고, 이 번데기는 단백질 함량이 높아, 병을 앓고 난 환자라거나 기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최고의 보양식이었다.
“음. 간장과 뽕잎을 같이 넣어 볶은 번데기로구나. 다들 먹어보거라.”
상이 없어 바닥에 보자기를 깔고 각자 먹는 밥이었지만, 냉이 된장국에 뽕잎 장아찌가 밥맛을 살렸고, 번데기의 강한 고기 맛이 밥을 술술 넘어가게 했다.
‘고춧가루와 후춧가루를 넣을 수 있었다면 이 번데기 만으로도 밥을 다 먹었을 것 같구나. 향신료가 참 아쉽구나.’
그러고 보니 돼지나 다른 육고기를 기르기보다는 누에를 키워 이 번데기로 조선에 단백질을 보급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다.
‘그래, 누에는 진짜 버릴 것이 없구나. 사료 없이 뽕잎만 먹으며 번데기가 되고 우리에게 소중한 실을 준다. 실을 주고 난 그 번데기마저도 우리가 맛있는 몸을 주니 정녕 완벽한 곤충이로구나.’
현대에서도 육고기 보다 단백질을 얻는데 들어가는 에너지가 작은 곤충 고기가 대안 단백질로 떠오르고 있었다.
현대와 비교해서 조선 시대라면 대안 단백질로 사람들의 입맛을 바꾸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식사 후 밤이 깊어지자 명주를 짜는 베틀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이 집엔 여자밖에 살지 않아 명주를 짜는 일로 먹고사는 듯했다.
“도련님. 이 늦은 시간까지 잠이 들지 않고, 베를 짜는 건, 우리도 자지 말고 오라는 그런 신호 아닙니까요?”
“흰소리하지 말고 자 거라. 네 얼굴로 아니 된다.”
현실을 알려주었지만, 삼식이는 어디서 주워들은 게 있다 보니 한번 가봐야 되는 거 아니냐며 혼자서 중얼거리다 겨우 잠이 들었다.
‘나이든 시어머니와 젊은 며느리... 그리고 늦은 밤까지 자지 않고 베를 짜는 소리까지... 어떻게 보면 진짜 그린 라이트 인지도 모르지. 그러고 보니, 뽕이란 영화가 유명했구나.’
원종도 흐믓한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
“상중이라 대접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닙니다. 덕분에 귀한 번데기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캔 냉이와 쑥을 놔두고 가니 드십시오. 그리고, 다시 문경으로 내려가는 길에 들리겠습니다. 그때 이야기를 좀 나누었으면 합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당연히 누에와 명주에 관련된 이야기이지요. 그럼 그때 보겠습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젊은 여자는 급히 집안으로 뛰어가 손바닥 크기만 한 대나무 그릇을 들고나와 원종에게 건네주었다.
“말린 오디입니다. 먼 길 갈 때 하나씩 드시면 피곤함이 덜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뽕나무의 열매인 오디를 잊고 있었다. 술도 담을 수 있고, 비타민을 채워주는 약재로도 영양 만점이었다.
‘뽕나무의 뿌리는 달여 먹을 수 있고, 줄기와 잎은 누에에 먹일 수 있으며 사람도 먹을 수 있다. 그리고, 누에는 번데기를 주며 명주실까지 준다. 어쩌면 이 양잠이 완벽한 산업이겠구나.’
원종의 머리에는 당분이 있는 오디로 고기를 재우거나 하는 여러 레시피가 떠올랐다.
“집을 나오기를 참 잘했구나. 어서가자!”
***
“도련님. 오일장이 서지 않게 되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춘궁기라 그런 것인지 곡물값이 많이 올랐습니다요.”
집에서 짊어지고 온 오승포로 잡곡을 바꿔 온 삼식이는 투덜거렸다.
“오일장에서 사람이 밟혀 죽었다고 오일장을 아예 없애 버리다니 음성군수를 이해할 수가 없구나. 최대한 빨리 움직여 빨리 지나가도록 하자.”
원종은 빨리 지나가자고 했지만, 산길 옆에 나 있는 고사리도 채취했고, 흐드러지게 쑥이 피어난 곳에서는 쑥도 챙긴다고 걸음이 느려졌다.
“밥을 할 때 쑥과 냉이, 고사리를 바닥에 깔고 밥을 안쳐 보아라. 쑥냉이밥에 된장국이면 허기는 가시겠지.”
양반가가 없는 마을에서 초가를 빌려 저녁을 하는데, 쑥냉이밥의 냄새가 향긋하게 풍겨나갔다.
그리고, 그 냄새에 이끌려 불청객이 찾아 왔다.
“웬 놈이냐!”
달유와 오추가 창을 들고 나서자 삼식이도 몽둥이를 들고 뒤를 받쳤다.
“아니... 저... 나리들 배가 고파 그런데 밥 좀 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요?”
원종은 밥을 구걸하는 자에게 밥을 주고 싶었다. 허나, 그자의 뒤로 10여 명, 아니 거의 20여 명의 사람이 붙어있자 섣불리 밥을 주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양반 나리. 그냥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요. 저희 재주 좀 보시고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게 좀 주십시오.”
그러고 보니 앞에 선 자의 옷차림도 그렇고, 뒤에 선 자들의 생김새나 옷차림이 심상치 않았다.
“재인백정(才人白丁)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