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봄을 그리는 맛. (2)
얼어있던 것을 완전히 굽지 않았고, 고기이지만 고기라고 하기엔 너무 얇게 썰려 그 맛이 후에 뿌려진 약재에 가려지는 괴식(怪食)에 전기환은 만족했다.
특히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약해지는 치아에 부담이 가지 않는 고기라는 점에서 아주 마음에 들었다.
“얼린 고기로만 해먹을 수 있는 음식이니 겨울 별미로구나.”
아버지인 전기환과는 반대로 멜랑꼬리가 별로였던 원길은 먹는 듯 마는 듯했는데, 그런 그에게도 희소식이 있었다.
“내촌이 다 되었습니다요.”
한 시진. 거의 두 시간 넘게 약한 불에 구워진 사슴은 육즙과 수분이 빠져서 그런지 몸집의 크기가 조금 작아져 있었다.
같이 창살 꼬치에 끼워 구운 토끼와 닭도 간장양념에 의해 잘 구워졌지만, 그 역시 크기가 줄어 있었다.
사슴을 통째로 올릴만한 그릇이나 접시가 없어 커다란 판 위에 바로 놓았다. 제대로 익혀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칼을 들어 껍질 화 된 살을 찔렀다.
[파삭!]
사슴의 가죽과 지방에 남아있던 육즙이 빠지며 가죽과 지방이 합쳐져 딱딱한 껍질이 되었는데, 칼을 대기 무섭게 바스러졌다.
“음. 괜찮게 되었구나.”
부스러진 조각을 먹어보니, 식감이 바삭거리는게 좋았다.
‘돼지가 아니다 보니 진짜 레촌과는 식감이 좀 다르구나. 음. 이 식감은 마치 유과 같구나.’
명절에 먹는 튀긴 과자와 같은 식감이 느껴졌는데, 짭짜름한 간장 맛과 고기 맛이 나는 유과 같았다. 유과의 맛이라 생각하자 명절에 해 먹어도 좋을 것 같았다.
‘명절에 해먹게 된다면 내촌(內村)이란 이름과도 딱 맞게 나누어 먹을 수 있겠구나.’
그리고 바삭한 껍질 안의 겉살 고기는 육즙이 가득 차 있었는데, 은은하게 스며든 간장의 풍미가 느껴졌다.
사슴의 뱃속까지 잘라내자 제대로 익은 야채들이 준비 되었다는 듯이 쏟아져 나왔다.
“와! 냄새!”
“고기안에서 된장국의 냄새가 나는거 같아.”
겉에 발라가며 구웠던 참기름과 간장의 향은 불향에 묻혀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속살 안쪽에 발라두었던 된장의 향기는 어디로 가지 않고, 풍성하고 맛있는 냄새를 만들어 내었다.
특히나 생강, 마늘과 어우러진 향은 산짐승에게서 나는 잡내를 말끔하게 없애주었다.
얼른 껍질과 고기, 야채를 들어 아버지와 형에게 올렸고, 사각형으로 잘게 썰어 가족들과 노비들에게도 돌렸다.
그리고, 잘 익은 닭과 토끼도 칼로 자르니 야채와 된장의 향기가 제대로 묻어 있었다.
“이거 먹다 보니 국물 없는 고기 된장국을 먹는 맛이야.”
“옳거니, 된장국에 고기를 삶은 후 거기에 채소를 쪄먹는 맛이야.”
“된장과 간장이 스며있어서 소금을 안 찍어 먹어도 맛있어!”
사람들의 맛있다는 말이 들리자 원길도 내촌의 겉껍질을 입에 넣었다.
[아삭!]
“오! 이건 고기를 바싹 말려 기름에 튀긴 맛인데, 질기지 않고 바로 부서지니 특이한 식감이구나.”
멜랑꼬리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내촌 구이는 마음에 드는지 원길의 입이 바빠졌다.
“고기에는 육즙이 좔좔 흐르는데, 겉을 감싸고 있는 껍질은 이렇게 바스락거리게 되어 있으니 참으로 신기하구나.”
“약한 불에 천천히 구웠기에 이런 껍질이 나온 것입니다.”
“닭과 토끼의 껍질도 이렇게 바스락거리는데, 그 맛이 또 고기마다 다른 것이 참 재미있구나. 오랫동안 약한 불에 돌려가며 구우면 이런 식감이 나온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구나.”
원길은 이런 식감이 특이해서 몇 번이나 들여다보고 씹어 먹으며 관찰했다.
“겉의 껍질은 딱딱하게 변해 방어벽이 되어, 안쪽 고기의 풍부한 육즙을 지켜주는 것이니. 내촌이라는 이름과도 어울리는구나.”
전기환도 육즙 가득하게 씹히는 사슴고기에 만족해했고, 집안사람들 모두가 내촌을 즐거이 먹었다.
사람들이 즐겁게 사슴을 먹는 모습을 보다 보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엇? 그러고 보니 현대에서 구정이라 부르는 설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크리스마스는 지나갔고... 아니지, 아예 구정 10여 일 전에 한국식 구정 크리스마스를 만들어 버릴까.’
서양에서 들어온 풍습으로 날을 잡아 행사해버릴까도 생각을 했다.
‘아니야. 그냥 사슴으로 내촌을 해 먹는 날로 하자. 코 큰 사슴 루돌프를 잡아서 내촌을 만들어 영양 보충하는 그런 날로 하지 뭐.’
“아버님. 형님. 이 내촌 요리는 한 두시진 동안 약한 불에 천천히 굽는 공(功)이 들어가야 이런 바스락거리는 껍질이 만들어집니다. 더운 여름에 내촌을 만들게 되면 조리하는 사람이 너무 힘이 듭니다. 더구나 짐승들의 몸에 쌓인 지방도 여름에는 거의 없기도 하고요.”
“그렇지. 겨울을 넘기기 위해 짐승들이 몸을 불리니 지금이 가장 맛있겠지.”
“네. 맞습니다. 그래서 이 사슴 내촌은 설날 10여 일 전에 만들어 먹는 것으로 했으면 합니다.”
“허허. 이 맛있는 걸 1년에 한 번만 먹자는 말이냐? 짐승의 지방이 많은 겨우내 먹으면 안 되는 것이냐?”
원길 형은 이미 요리를 조금 배웠기에 내가 안 된다고 해도 왠지 몰래 해 먹을 것 같았다.
“형님. 사슴으로 만드는 내촌만 10여 일 전에 먹자는 것입니다. 제가 다른 시기에도 먹을 수 있는 지방이 많은 짐승을 찾아보겠습니다.”
“아, 그런 말이었느냐? 그렇다면 사슴 내촌은 설날 10여 일 전에만 먹는 것으로 하자구나. 그럼 그날을 뭐라고 부르면 되겠느냐?”
“내촌대이(內村代以)입니다.”
“대를 이어 가는 내촌이라. 공동체의 단합을 위한 날로 하겠다는 것이로군. 알았다. 기억하마.”
“언년아. 받아 적었느냐?”
“네. 적었습니다요.”
언년이는 닭으로 만든 내촌을 먹으면서 내촌대이의 날짜를 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달력을 만들어 복날과 이런 음식을 먹는 날을 표시해서 보급하면 더 좋을 것도 같은데...’
***
시간이 흘러 내일이면 현대의 우리가 구정이라 부르는 설날이었다. 원종은 10살이 될 것이며, 내년에는 집을 떠나 움직여야 했다.
설날의 설은 ‘새로운 날’, ‘선날’의 뜻으로 새로운 1년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당연히 한 살 더 나이를 먹고, 떡국을 먹는 날이었다.
그래서 원종도 가족들과 먹기 위해 떡국을 할까 고민했다.
응? 설날에는 당연히 떡국을 끓여 먹는 게 기본인데, 왜 고민하느냐고?
현대인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설날 = 떡국 먹고 세배하며 용돈 받는 날의 공식은 조선 중기에나 만들어졌기 때문이었거든.
설날에 떡국을 먹었다는 기록은 조선의 19대 왕인 숙종때 나온 이식(李植)의 택당집(澤堂集)에 처음으로 나오는데, 새해 첫날의 제사상에는 병탕(餠湯), 만두탕을 올리고, 과일과 포를 올렸다고 쓰여져 있었다.
병탕의 한자 병(餠)은 떡 병자다. 즉, 떡탕이라는 것을 제사상에 올렸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떡국이 새해 첫날과 연계되는 최초의 기록이었다.
곡물을 가루로 만들어 쪄서 만드는 떡은 선사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며 고려는 물론 신라 시대의 경전에도 떡의 존재는 자주 나왔다.
대표적인 게, 신라의 왕을 정하는 방법으로 떡을 깨물어 이가 많은 사람이 왕이 되기로 했다는 기록이었다.
삼국시대 초기에도 있었던 떡인데, 그 떡으로 만드는 떡국은 의외로 조선 중기 택당집과 그 이후 나온 ‘동국세시기’, ‘영양세시기’ 등에서부터 본격적으로 기록되시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설날에는 당연히 떡국을 먹는다는 규칙(?)이 전국적으로 퍼져있었다.
그러면, 또 궁금한 것이 생길 것이다.
‘너는 글을 쓰거라, 나는 떡을 썰 테니.’의 떡국 설화 주인공인 한석봉 한호의 에피소드가 진짜인가 하는 궁금증이다.
그건 설화이니 후대에 만들어진 ‘썰’일수도 있지만, 그걸 제쳐두고라도 한석봉의 생몰연대 또한 조선 중기의 사람이다.
결국, 떡국에 쓰이는 말린 가래떡도 조선 중기에나 나왔다는 말이었다.
“그래 원조가 없으면 내가 원조가 되면 되는 거지. 이제 역사에는 떡국이 조선 초에 나온 거다. 언년아! 어서 와서 받아적어라!”
떡국을 알려진 역사보다 먼저 만들어 퍼트리게 되면 그로 인해 생기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성달의 사건 같은 일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내가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해놓은 이후에 생기는 일은 내 손에서 벗어난 일이었기에 하늘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내 요리로 인해, 내가 만든 물건으로 인해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다 하늘의 뜻으로 여기기로 했다.
그게 내 속이 편했다.
***
설날인 내일 떡국을 먹기 위해 수확한 쌀 중에서 가장 좋은 쌀을 골라, 가루로 빻게 했다.
곱게 갈린 가루만 쓰기 위해 체를 두 번이나 쳐서 반죽했고, 다른 떡을 찔 때 같이 쪄내었다.
“제가 떡쟁이 입니다요!”
노비 중에서 힘이 좋은 삼식이가 떡메를 들고 나섰고, 그 뒤로 힘이 좋은 노비들이 줄을 섰다.
기름을 묻혀가며 두시진 가까이 떡을 치자 집안사람들이 모두 먹을 만큼의 떡이 만들어졌고, 그 사이로 내가 끼어 기름 묻힌 손으로 가래떡을 만들기 시작했다.
기계가 있었다면 편했겠지만, 떡메에 쳐진 떡을 손바닥으로 돌돌 밀어 길쭉하게 가래떡을 만들었다.
“도련님. 절편(截片 도장 떡)을 만드시는 겁니까요? 그렇다면 그렇게 만드는 게 아닙니다. 떡살로 눌러 만드는 것이지 손으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요.”
집안에서 가장 솜씨가 있는 덕구 어멈은 이런 떡은 없다며 이야길 했다.
“이건, 절편과 비슷하긴 하나 다르네.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흰 절편처럼 만들되, 그 모양이 이렇게 둥근 원형이 되게 떡을 만들어 주게나.”
“어디에 쓰려고 하시는 겁니까요? 그리고, 썰지 않고, 이렇게 길게 만드시는 연유가 있으십니까요?”
“연유가 있네. 손가락 두 개 굵기보다 굵은 가래 크기로 만들어 주면 되네. 그래서 이름도 가래떡이지.”
“네. 도련님이 시키시니 만들어 두겠습니다요. 절편처럼 들러붙지 않게 기름을 바르면 되겠습니까?”
“아니. 가래 굵기로 한 척(약 30cm) 길이로 만들면 차가운 물에 넣어 바로 굳히면 되네. 굳어지면 다른 떡들과 같이 두어도 들러붙지 않을 거야.”
“네? 차갑게 굳히라굽쇼?”
덕구 어멈은 기껏 뜨겁게 뽑은 떡을 차가운 물에 식혀 굳히라는 말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막내 도령이 뭔가를 또 하려는 건가 싶어 시킨 개수보다 더 가래떡을 만들었다.
***
조상들께 올리는 제사가 끝이 나고 제삿밥을 나눠 먹으니, 도소주(屠蘇酒)라 불리는 술이 올라왔다.
도소주란 술은 잡을 도(屠), 악한 기운 소(蘇), 술 주(酒)자로 악한 기운을 잡아주는 술로 풀이할 수 있었다.
“도소주는 어린 사람부터이니 원종이부터 한잔 하거라.”
현대한국에서도 제사 후 음복(飮福)이라는 이름으로 미성년자에게도 술을 주긴 했지만, 입이나 살짝 축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도소주라고 주는 술은 간장 종지만 한 크기의 큰 잔에 술을 가득 담아 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 세상에 와서 처음으로 마셔보는 술이구나.’
냄새를 맡아보니 솔잎 향이 향긋하게 올라왔는데, 그대로 들어 원샷을 때렸다.
“크흑 캬아!”
도수가 높아 입에서 불이 나는 듯했고, 자동 반사처럼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하하하. 시원하게 한잔 마시는 것을 보니 올해는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보낼 수 있겠구나. 다음은 나다.”
형과 아버지에게 도소주가 올라갔고, 다들 술을 남기지 않고 잔을 비웠다.
이 도소주(屠蘇酒)라 불리는 설날에 먹는 술은 중국 화타가 원단(元旦)에 마시게 했다는 말도 있고, 당나라 때의 명의 손사막(孫思邈)이 마시게 했다는 말도 있었다.
나쁜 기를 쫓고 건강을 기원한다는 술이다 보니, 주당(酒黨)들이 술을 마시기 위해 명의(名醫)들의 이름을 가져다 붙였다는 게 정설이었는데, 고려 시대부터 설날에 마셨다고 하니 떡국이 설날 음식으로 자리를 잡기 전에는 이 도소주가 설날 하면 떠오르는 1순위 음식이었다.
도소주가 형수와 아버지가 아끼는 첩인 원홍에게까지 가게 되자, 밖에서 덕구 어멈이 떡국을 들고 들어왔다.
“아버님. 형님. 도소주와 더불어 설날에 꼭 먹어야 하는 떡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