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내 안전을 위해. (1)
[왈왈왈!] [웡웡웡!] [멍멍멍!]
“삼식아, 철구야 일어나보거라 어여!”
“아 왜요? 잠자는디.”
농사일이 없는 겨울 농한기라고는 하지만, 일이 아예 없는 게 아니었다.
갈피(칡껍질)로 그물을 만들라는 막내 도령의 명도 있었고, 지붕에 쌓인 눈도 쓸어내린다고 온종일 바빴다.
“저 개소리 안 들리냐? 젊은 놈들이 이리 잠이 많아서 어데쓰꼬. 늙은 내가 나가까?”
다 늙어 거동도 힘든 조구 할배가 지팡이를 짚고 방을 나서려 하자, 삼식이와 철구는 짜증을 내며 따뜻한 방을 나섰다.
“엇! 진짜 개들이 짖는 게 장난 아닌데.”
집에서 키우는 네 마리는 물론이고 옆집에서도 개들이 미친 듯이 짖어대고 있었다.
삼식이와 철구가 마루 밑에서 몽둥이를 꺼내 들 때 다른 방에서도 젊은 종들이 뛰쳐나와 화롯불을 밝히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밖에서 횃불을 든 종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하자 원종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문밖으로 나왔다.
“산 짐승이 내려온 거 같습니다요.”
곁채에 딸린 방에서 자던 박복이가 나와서는 급하게 불을 밝혔다.
“우리도 가보자!”
집사 역할을 하는 덕쇠의 명으로 종들이 줄을 지어 집안을 훑듯이 움직였다.
“저, 저! 저기! 승냥이다!”
버둥거리며 담을 타 넘어가는 놈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는데, 초록색의 두 눈에서 불빛이 쏟아졌다.
“세, 세 마리다!”
놈들은 횃불을 들고 사람들이 몰려들자 담을 뛰어넘어 도망쳤는데, 놈들의 입에는 내가 그리 소중히 여기던 서라벌 닭이 물려 있었다.
“절반은 밖으로 나가 승냥이들이 어디로 가는지 확인해서 산초 입까지 뒤쫓다가 와라. 반은 다른 놈들이 있는지 다시 확인해라 마루 밑을 살펴!”
덕쇠는 승냥이들이 이 근처에 자리 잡지 못하게 횃불과 사람으로 뒤쫓는척하여 밀어내려는 듯했다.
그리고 원종은 승냥이가 어디로 갔는지보다 닭이 더 걱정이었다.
“박복 아범 닭 우리와 토끼 사육장을 살피게!”
원종의 고함에 몇몇이 급히 뛰어갔다.
그리고 승냥이들의 습격에 박살이 난 닭 우리는 처참했다.
“닭이 많이 상했습니다.”
“얼마나?”
“서라벌 닭은 살아 있는 게 10여 마리밖에 없습니다. 집닭들은 늑대를 피해서 담벼락이나 지붕으로 도망쳐서 그리 피해가 없습니다.”
서라벌 닭은 가두어 키우다 보니 도망도 치지도 못하고 놈들에게 죽은 거 같았다.
“아니, 이 쌍놈의 새끼들이 먹지도 않을 거 왜 죽이고 지랄이야!”
겨울을 대비해 금이야 옥이야 선별해 키운 닭들이 절반 넘게 죽어 버리니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토끼는?”
“토끼는 네 마리가 죽었습니다.”
토끼의 피해는 작았지만, 토끼와 서라벌 닭은 비교할 수가 없었다.
“우리 집 개들은 뭐 했는데? 아니, 되었다.”
늑대에게 집을 지켜야 할 개를 생각했지만, 집에서 키우는 개는 다리가 짧은 땅개 같은 작은 개들이었다.
그런 개라도 10여 마리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땅개 4마리로는 늑대를 어떻게 할 수 없었을 것 같았다.
“덕쇠 아재 우리 집엔 제대로 무기 들고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없는가?”
조금 전만 해도 다들 나무 몽둥이만 들고 있지 날이 선 무기를 들고 있었던 이가 없었다.
그런 몽둥이라도 들고 적극적으로 앞으로 나서 뭘 해보려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횃불과 몽둥이를 들고 쫓아내려고만 한 것이 대응의 전부였다.
원종이 보기에는 나중에 도적이 쳐들어와도 그냥 몽둥이만 들고 있다 기세에 눌려 항복해 버릴 것 같았다.
호랑이 같은 짐승을 막아내는 것은 물론이고, 도적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전문적으로 무예를 닦은 사병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방원이 사병으로 일으킨 왕자의 난 이후 모든 사병은 금지라는 거지.’
이방원 본인도 사병으로 난을 일으켜 왕이 되고 보니 이 사병이라는 게 얼마나 정권에 위험이 되는지를 느꼈을 터였다.
결국, 반란의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법으로 사병을 거느리는 것을 금지해 버렸다.
덕분에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군사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왜란이나 호란이 일어났을 때도 밥만 먹고 무예만 닦는 사병이 없다 보니 늘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말을 타고 활을 쏘며 유랑했다는 ‘화척(禾尺)’을 어떻게든 들여서 발골사로 쓰면서 사병 역할까지 시키는 게 맞는 것 같단 말이지.’
한데, 그렇게 또 화척을 들이게 되면 유목민 특성상 그 주인까지 배신할 확률도 있었다.
사실, 유목민이나 농경민이나 어느 쪽이 더 배신을 많이 한다는 건 없다.
충효를 숭상하는 유교적 가치관을 가진 자들은 배신하는 것도 명분이 있어야 했기에 유교적 가치관이 없는 자들에 비해 덜 할 뿐이었다.
결국, 내린 결론은 유지할 여유가 된다면 내 신변안전을 위해서 사병을 둬야 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
“늑대였는감?”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이리저리 다니자 옆집 박가네의 종들도 횃불을 들고 나왔다.
“그래 승냥이. 세 마리인데, 닭을 물고 산으로 올라갔어. 우리가 사람이 많은 걸 보여줘서 쫓아내려는데 자네들도 같이 산 초입까지 움직여주세나.”
“그러지. 작년 겨울에는 범이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올해는 늑대라니. 그런데, 자네들이 입고 있는 그 옷은 뭔가?”
“아, 이거? 우리 막내 도련님이 겨울에 입는 옷이라고 만들어서 내려 주신 거네. 한번 만져보게.”
옆집 종은 만져보란 말에 삼식이가 입고 있는 경량 패딩을 만져봤다.
“응? 옷이 엄청 푹신한데. 설마, 솜이 이만큼이나 들어가 있는 건가?”
“에이, 아무리 우리 막내 도련님이 아랫것들을 잘 챙겨 주신다고 해도 이렇게 빵빵하게 솜을 넣은 옷은 무리지. 이 폭신한 느낌은 새털이라네. 닭이나 오리의 털을 옷에 넣어 만든 거라네.”
옆집 종은 손으로 만진 옷이 의외로 두껍고 푹신한 느낌이 들자 부럽기도 했고 이 옷이 얼마나 따뜻한지 궁금하기도 했다.
“푹신하긴 한데 따뜻하기도 한가?”
“그럼, 다른 옷 네다섯 벌을 겹쳐 입은 거보다 더 따뜻해. 내 말이 거짓말 같으면 다른 이들에게도 물어보게.”
옆집 종들은 옷의 모양이 특이하고 진짜인지도 궁금하여 다른 종들에게도 물어보고 패딩 옷을 만져봤다.
푹신한 촉감과 따뜻하다는 말에 부러웠다.
‘종놈 팔자 주인 팔자 따라간다고 하더니 틀린 말이 아니구만.’
그러고 보니 전가네 종들은 고깃국에 밥도 넉넉하게 먹는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소문처럼 종놈들 얼굴에 기름기가 잘잘 흐르는 거 같았다.
***
“형님. 옆집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왜? 무슨 일이 있느냐?”
“사냥꾼을 고용해서 인근의 짐승들을 좀 잡아야 할 것 같은데, 우리가 사냥꾼의 품삯을 다 낼 필요는 없잖습니까? 옆집 박가네와 돈을 같이 부담한다면 사냥꾼을 반값에 고용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구나. 그럼, 내 다녀오마.”
원길이 출타준비를 하는데, 원종이 들러붙어 롱패딩과 털로 만든 귀마개를 챙겨줬다.
그리고 형님과 같이 출타할 종들에게도 나눠줬던 숏패딩을 입었는지 확인했다.
“그렇게 하지. 공동으로 사냥꾼을 고용하도록 하지. 작년에는 범이 그리 설치더니 올해는 승냥이라니. 사냥꾼을 구해서 처리하게 되면 밤에 자다 깨는 일은 없어지겠지.”
작년에 고생했기에 박가네의 장자 박경일도 사냥꾼을 고용하자는 말에 흔쾌히 동의했다.
“그런데, 자네 입고 온 옷이 특이한데 그건 무슨 옷인가?”
“아, 이 나이기온(拿移氣溫) 말하는 건가?”
“나이기온? 따뜻한 기운을 붙잡아 옮긴다라... 이불처럼 푹신푹신해 보이는데, 솜을 잔뜩 넣었나 보구만.”
“솜이 아닐세. 우리 집 막내가 겨울에 입으면 따뜻하다고 만든 옷인데, 이 옷 안에는 솜 대신 닭과 오리의 털이 들어가 있다네. 여기 손을 한번 넣어 보게나.”
박경일은 전원길의 말에 손을 뻗어 나이기온이라는 옷 안으로 손을 넣었는데, 따뜻한 온기가 이름처럼 남아 있었다.
솜이 아니라 새의 털이 옷에 들어 있다는 말에 찝찝한 생각도 들었지만, 박경일은 따뜻한 온기가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이거 나도 한 벌 구해 입을 수 없겠나? 요즘 등이 시려서 말이야.”
“하하 물론이지. 동생이 몇 벌 더 만들어 두었을 걸세. 이 새털로 만든 것이 얼마나 따뜻한지 우리 아버지는 이걸로 이불을 만들어 덮고 주무신다네. 요즘엔 방에 불을 덜 때라고 하실 정도야.”
“오, 그 정도로 따뜻하단 건가? 그 새털 이불도 구할 수 있겠나?”
“물론이지. 돈만 있으면 된다네.”
박경일이 흔쾌히 돈을 내겠다며 옷과 이불을 사자 원길은 재화를 만들어 냈다는 즐거움에 기뻤다.
‘좋은 물건을 적정한 이문을 붙여 파는 게 이리 재미있을 줄이야. 면포와 베가 들어가긴 하지만, 닭털, 오리털은 거저 생기는 것이니 이거야말로 화수분이로구나.’
원길은 물건을 파는 재미에 인근의 양반가들을 돌며 롱패딩을 입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몇 벌이나 주문을 받아 왔다.
***
“옷과 이불을 주문받아 온건 잘했지? 설마 옷이나 이불이 없는 건 아니겠지?”
“네 형님 충분히 여유 있게 만들어 두었습니다.”
양반으로서 물건을 팔고 왔다는 것에 대해 기뻐하면 기뻐했지 슬픈 표정이 없는 것을 보니 내가 원하던 영업이사가 된 것 같아 기뻤다.
“아버지의 첫째 첩이었던 다희가 나이기온과 이불을 만드는 책임자입니다. 바느질 솜씨가 좋습니다.”
“오, 네가 팔지 말고 달라고 했던 그것이 이렇게 돌아왔구나. 어쩐지 뭔가 싼값에 팔아 치우기 싫더라니.”
“형님. 그래서 그런데, 배가 다르다고는 하나 아버지의 정(精)을 받아 태어난 아이들이니 다희의 아이들을 속신(贖身 노비의 신분을 풀어 주어서 양민이 되게 하는 것)시켜 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흠. 종의 몸을 빌어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정이니... 둘이었지?”
“네.”
“그럼, 다희가 계속 나이기온 옷을 만드는 일을 한다는 조건으로 두 아이를 봄에 속신시켜 준다고 해라. 되었느냐?”
“네 그거면 충분합니다.”
아직 패딩이나 이불의 재고 수량은 많았지만, 주문을 받았기에 바느질을 할 수 있는 어멈들을 총동원했다.
그리고 양반들이 입고 돌아다니는 나이기온 옷과 우리 집 종들이 입고 돌아다니는 경량 숏 패딩을 본 양인들도 옷을 구할 수 있는지 물어왔다.
“당연히 팔 수 있지. 양인들에게 파는 건... 덕쇠 아재가 좀 맡아서 팔아 줘야 할 것 같소.”
양반의 신분으로 양인들과 흥정을 하고 옷을 파는 것은 부담감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양인들에게 파는 것은 덕쇠 아재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집안에 한자를 알고 셈을 할 수 있는 이가 집사인 덕쇠 아재밖에 없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한글을 깨우친 박복이를 책임자로 쓰고 싶었지만, 아직은 어렸다.
‘뭔가 상업을 책임져줄 그런 사람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
“막내 도련님 현의 이방 어른이 사냥꾼 넷을 데리고 왔습다요.”
사냥꾼을 구해야 한다고 한 지 나흘 만에 사냥꾼이 구해진 것이었다.
“아전이?”
이방, 아전, 향리 모두 다 같은 말로 지방 군현의 하층 잡무를 맡은 행정 공무원이라고 보면 되는데, 조선 조에서 늘 하층민들의 고혈을 빠는 것이 바로 이들이었다.
그들이 민초의 고혈을 빨 수밖에 없는 조선 시대의 구조적인 문제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이방의 이미지는 조선 시대 부패의 아이콘이었다.
“그럼, 사냥꾼을 데리고 온 값을 치러줘야 하는가?”
“네 관례에 맞게 그렇게 주려고 했는데, 막내 도련님을 좀 뵈었으면 한다고 해서 말입니다.”
“나를? 형님이 아니라?”
“네. 나이기온을 막내 도련님이 만들었다는 걸 알고는 도련님을 꼭 뵈어야 한다고 합니다요.”
“나이기온 때문인가 보군. 그럼 데리고 오게나.”
***
“수리(首吏)를 맡은 김율시라 합니다.”
이방이라고 온 자는 분명 도포를 입고 갓을 썼지만, 갓의 넓이가 짧은 것이 양반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래 보자고 한 연유가 어찌 되는가?”
“그게... 관노나 관기를 겨우내 부리시고, 그들이 만드는 나이기온 옷을 받을 수는 없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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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참고로 한국의 마지막 야생 늑대가 생포되었던 곳이 경북 문경이었습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호랑이 표범이 많아서 늑대나 곰이 잘 없었는데, 조선 후기 화기가 보급되자 호랑이와 표범은 줄어들고 늑대와 곰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그러다 일제 치하와 전쟁을 겪으면서 한국의 육식 동물은 야생에서 멸종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