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저장고기를 만드는 법.
“병아리가 또 죽었습니다.”
박복 아범의 손에 들린 죽은 병아리를 보니 원종도 마음이 울적했다.
어쩌면 이 녀석은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녀석인지도 몰랐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조류 중에서 겨울에 알을 까는 새는 없었다.
인간의 손에 길러져 계절에 상관없이 알을 낳도록 진화를 시킨 결과로 겨울에 태어난 병아리였다.
“죽은 병아리는 통구이나 해 먹게.”
손바닥보다도 작은 녀석이지만, 통구이로 구워 골수까지 씹어 먹는 별미 중의 별미였다.
죽은 것은 안타깝지만, 종들에게는 아주 좋은 단백질원이었다.
다행히 김일란의 충고대로 미리 약한 개체들을 정리했기에 다 큰 닭은 죽지 않았지만, 용케 부화시킨 병아리들은 겨울의 매서움을 이겨내지 못하게 계속 죽어 나갔다.
토끼들은 토굴의 역할을 하는 나무 상자 안에 숨어서 나오지 않았는데, 가끔가다 밀려 나온 놈들을 보면 안에서 토끼끼리 싸움을 하는지 씹힌 상처가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밀려 나온 녀석은 며칠 안에 죽었다.
동물의 사육이 쉬운 것 같으면서도 참으로 어려웠다.
“크킁. 이 냄새는...”
뭔가 구수하고 기분 좋은 풀 내음이 풍겨왔다.
냄새를 따라가니 축사에서 소죽을 끓이고 있었다. 닭이나 토끼와는 달리 소와 말에겐 풀을 끓여 먹이고 있었다.
집엔 황소가 두 마리, 암소가 세 마리 있었고, 암컷 조랑말도 세 마리가 있었다.
소먹이 풀과 볏짚이 주였고, 콩깍지와 쌀겨 같은 것들도 넣어 푹 삶아내는 소죽에선 구수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삭힌 볏짚을 제대로 쓰는 것 같았다.
소죽은 김이 펄펄 나며 뜨거워 보였는데도 말이나 소는 뜨겁지도 않은지 헐떡거리며 잘 먹었다.
열심히 여물을 먹는 소를 보니 소고기가 먹고 싶었다.
‘육질이 줄줄 흐르는 고기가 먹고 싶은데, 이곳에 오고 나선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구나.’
인류가 먹을 수 있는 최상의 고기이자 고기의 왕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바로 소고기였다.
특히나 조선에서는 소의 뿔과 발굽을 빼면 모든 것을 다 먹었다.
일본이 소의 부위를 150여 곳으로 구분하고, 영국은 200여 곳으로 구분해서 도축할 때, 우리 조상들은 300여 곳으로 분류해서 도축했을 정도로 소를 잡아먹는데 진심이었다.
물론, 소의 부산물인 내장이나 가죽까지도 다 포함을 해서 그런 숫자가 나오는 것이다.
소의 담낭에 생긴 혹까지도 우황(牛黃)이라 부르며 채취해서 약으로 먹을 정도였으니 가히 소의 모든 것을 다 먹었다.
먹지 못하는 소뿔은 활을 만드는 데 썼고, 소의 발굽은 가죽 장화의 밑창으로 사용했으며, 심지어 소장과 대장에서 소화되지 않은 배설물까지도 모아 비료로 썼다.
모든 것을 다 먹고 쓸 수 있는 소를 자주 잡아먹었을 것 같지만, 사실 조선 시대에 소를 잡아먹는 것은 불법이었다.
농경 문화이기에 소를 중히 여긴 것도 있지만, 고려 시대 불교국가를 지향하며 광종이 우금령(牛禁令)과 가축의 도축금지령을 내린 이후로는 소를 도축해서 먹는 것이 불법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원나라의 일본 원정의 출발지가 조선반도로 결정되어, 몽골인들이 들어왔고, 그들의 소 도축법과 소고기를 먹는 방법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반도 사람들은 소고기의 맛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번 입맛을 본 소고기는 조선 시대 들어 다시 우금령이 내리더라도 몰래 도축하여 먹을 정도였다.
우금령을 어긴 자에게 곤장 50대를 때리고 도성 밖으로 내쫓았음에도 소의 도축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지금 당장 나만 봐도 소죽을 먹고 있는 눈앞의 누렁이를 보며 소고기를 생각하고 있으니 소고기를 끊기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닭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저... 막내 도련님. 토끼 먹이로 쓴다고 축사의 볏짚을 너무 많이 가져가십니다요. 계속 가져가시게 되면 소를 먹일 것이 없게 됩니다요.”
“응? 그게 무슨 말인가?”
소와 말을 키우며 밭을 가는 일을 하는 소찬이 아재가 심각하게 말을 했다.
“그게, 박복이가 도련님의 토끼들을 먹인다고 볏짚을 들고 갑니다. 애초에 미리 알려주셨다면 어떻게든 더 모았을 터인데, 지금은 볏짚을 구하기가 어려워 봄이 오기 전에 볏짚이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닭과 달리 토끼는 풀을 먹인다고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눈이 와 풀을 가져올 수 없자 박복이가 소, 말 먹이를 들고 와 먹인 것 같았다.
박복 아범은 토끼 먹이 문제가 갑자기 나오자 내가 경을 칠까 싶어 눈치를 봤다.
“풀만 먹이면 된다고 토끼 먹이를 생각하지 않은 내 잘못이네. 토끼를 절반 이상 줄이겠네. 박복 아범은 며칠 동안은 수고스럽겠지만, 들에서 눈을 걷어내고 풀을 들고 오게나.”
“네에, 알겠습니다요.”
토끼는 산에서 잡아 올 수도 있고, 번식도 쉽지만, 소는 그렇지 않으니 토끼의 숫자를 대폭 줄여야 할 것 같았다.
문제는 토끼를 잡아서 어떻게 보관할지가 문제였다.
“흠. 박복이에게 목장을 불러오라고 하게.”
“네. 뭘 만들 준비를 하고 오라고 하면 되겠습니까요?”
“뒤집힌 배를 만들 거라고 이야기하게.”
“네? 뒤집힌 배요? 강물에 뜨는 그 배가 맞지요? 일단, 다녀오겠습니다요.”
박복 아범은 뜬금없이 배를 만들겠다는 소리에도 되묻지 않고 뛰어갔다.
***
갑자기 배를 만든다고 불려온 목장은 마당에 배를 만들겠다는 내 말에 놀랐는데, 그 배가 뒤집힌 배라고 이야길 하자 놀람을 넘어 황당해했다.
“도련님, 소인은 소목장이라 배를 만들 재주가 없습니다요.”
“만들 것이 배가 아니니 걱정 말게. 설명은 배라고 하지만, 그 형상이 뒤집힌 배와 같다고 해서 그렇게 지칭했을 뿐이야. 이 그림을 보게.”
“음. 도련님 그러니깐 배가 뒤집힌 것처럼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그런 나무로 된 통로 같은 집을 만들라는 말씀인거지요?”
“맞네. 그 높이와 폭은 4척에 길이는 그 배인 8척이어야 해. 그리고 그 입구에는 문을 달 수 있어야 하고.”
“어떤 것인지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양의 나무집이 왜 필요하신 겁니까요?”
“훈연(燻煙)하기 위해서야. 이 입구에 화로를 설치해서 연기로 고기를 훈제할 거네.”
“훈제요? 그건 어떤 겁니까요?”
“고기에 열과 그을음을 묻혀 장기간 보관하는 방법이지.”
목장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입구에서 불을 피우면 연기가 천장을 타고 흘러 고기가 훈연되는 것을 설명했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선 이 뒤집힌 배란 것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좋군.”
“그런데 저기... 대신에, 다 만들고 나면 그 훈연인가 훈제인가하는 고기를 저도 먹어 볼 수는 없겠습니까요? 워낙에 이 집안의 음식이 맛있다고 소문이 나서 저도 한 번만 먹어보고 싶습니다요.”
“하하하. 좋네. 토끼 한 마리는 자네에게 주도록 하지. 물론 품삯에서 깔 거네.”
보통은 훈제나 훈연으로 고기를 장기간 보관하는 방법이 원시적인 방법이기에 한반도에도 그런 전통적인 훈연법이 전해 내려오고 있을 거로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조선에서는 훈제라는 식량 보관법을 아는 자가 드물었다.
이는 주식에 따른 차이였다.
유목민 계통이나 채집 사냥 문화권의 경우에는 고기를 장기간 보관해야 할 일이 있기에 이런 훈연법이 발달할 수 있었지만, 정착해서 주식인 곡식을 먹는 문화권에서는 훈연법이 발달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한국과 일본은 불교의 영향으로 인해 육식을 터부시했기에 아예 훈제법이란 것을 몰랐다.
그래서 내가 도입한 배를 뒤집은 것과 같은 훈연소를 만드는 방법은 북유럽의 바이킹들의 방법이었다.
세로로 긴 바이킹 배를 뒤집고 바닥에 불을 피우면 연기가 뒤집힌 배에 가득 차게 되어 매달린 고기가 훈연되는 것이었다.
일본은 그래도 메이지 시대 이후 가다랑어포(가쓰오부시)를 만들며 나름의 훈연법이 발달할 수 있었지만, 조선은 훈제고기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훈제법 자체를 아는 이가 드물었다.
목장이 훈제를 위한 배 집을 만들 동안 토끼 40마리를 도축했다.
덕구 어멈이 아무리 가파치 마을 출신이라고 해도 토끼 40마리를 혼자 도축해 피를 빼고 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상주에서 칼을 잘 쓰는 철렬 이란 자를 불러왔는데, 가파치 출신이라는 덕구 어멈이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칼을 잘 썼다.
이런 발골사가 있으면 나중에 돼지나 소를 잡을 때 아주 좋을 것 같았다.
“그대는 화척(禾尺 유목민)인가?”
“아닙니다. 양인입니다요.”
“아, 화척이라 오해해서 미안하네.”
철렬이란 자가 도축을 하기에 당연히 백정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실 철렬의 예처럼 실제 조선 중종 시기까지만 해도 일반 양인이 도축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대인들은 가축을 도축하는 자들을 뭉텅 거려 백정(白丁)으로 지칭했지만, 현대인이 기억하는 천민 도축업자 백정의 이미지는 조선 시대 후기의 이미지였다.
투르크 계열 혹은 발해가 망하고 한반도로 들어온 거란족들을 화척이라 불렀는데, 세종대왕 시절부터 유랑하는 이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그래서 직역(職役 신분에 따라 하는 일이 정해졌다는 의미)을 가진 정호(丁戶)가 아니라는 의미로 직역이 없는 백정호(白丁戶)라고 부른 것이 백정의 어원이었다.
이 화척들은 세종, 문종, 세조 시대까지 전국에서 분란을 일으켰는데, 오죽했으면 과거 시험 문제로 이 백정호의 자들을 다스리는 방법을 논하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명종 시절 백정 출신 임꺽정이 나오며 백정호 마을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자들을 솎아냈고, 그 이후부터는 우리가 아는 천민 도축업자 백정으로 남게 되었었다.
“화척이었다면 그 솜씨가 탐이나 거두고 싶었는데, 아니라 하니 어쩔 수가 없구만. 상주에서 벌이가 꽤 좋은가?”
양인이라고 했지만, 괜히 스카웃에 대한 미련이 남아 벌이가 어떤지도 물었다.
“그저 배 굶지 않고 살정도는 됩니다요. 그런데, 가축을 잡아주는 칼 쓰는 자를 구하시는 겁니까?”
“그렇네. 자네가 탐이 나는데, 어떤가? 문경으로 올 수 있겠는가?”
철렬은 자신이 가진 칼질하는 재주가 탐이 난다고 말하는 양반은 처음 보았다.
진실로 자신의 재주를 아끼는 것 같은 어린 도령의 말에 기분이 좋았다.
이미 문경 전씨 가문의 음식 솜씨가 대단하다는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미 상주에서 일가를 이루었고, 벌이도 좋았기에 문경으로 옮기고 싶지는 않았다.
“저는 안되지만, 제 밑에 있는 자는 어떠십니까?”
“그치도 솜씨가 자네만큼 좋나?”
“아직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면 저와 같은 실력은 갖추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애는 도련님이 원하는 화척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한번 데리고 오게.”
“네. 다음에 불러 주시면 꼭 같이 오겠습니다.”
그냥은 못 데리고 오고, 일이 있으면 그때 같이 오겠다고 하는 철렬이란 자를 보니 믿음이 갔다.
철렬의 칼질로 토끼고기의 손질은 되었지만, 목장이 훈연소를 아직 만드는 중이었기에 바로 훈제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게 더 좋았다.
“고기를 잡은 후 바로 열과 연기에 훈제해도 되지만, 그렇게 하면 보존 기간이 짧습니다. 먼저 소금에 절여 며칠 동안 자연 건조하며 수분을 빼내고 다시 훈연을 해야 오랫동안 보존할수 있는 고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원길 형과 덕구 어멈은 물론이고 교재를 만드는 박복이와 언년이도 나를 따라 토끼고기에 소금을 발랐다.
“헌데, 소금을 너무 많이 쓰는 거 아니냐? 이 소금 한 뒤웅박이면 토끼 한 마리를 살 수 있겠다.”
“헉, 소금이 그 정도나 비쌉니까?”
현대에서는 10kg짜리 천일염 한 포대를 만원이면 살수도 있었는데, 천일염이 없는 상황이다 보니 소금값이 진짜 금값에 버금가는 듯했다.
왜 조선 시대에 등짐을 지고 돌아다니는 소금 장수가 많았는지 알 것 같았다.
“처음이니깐 소금을 이렇게 쓰는 거로 하고, 다음에는 바로 훈연하는 거로 하겠습니다.”
사흘 후 훈연소가 만들어지자 토끼고기를 천장에 줄을 세워 매달았다.
그러곤, 화로에 소나무 가지를 넣어 불을 지폈다.
“콜록, 콜록. 오늘 아침에 베어온 소나무라 그런지 연기가 장난 아닙니다. 콜록, 콜록.”
박복이에게 송진이 많을 것 같은 소나무 가지를 베어오라 시켰는데, 송진 때문인지 연기가 엄청나게 올라왔다.
“이 매운 연기가 토끼고기를 오랫동안 먹을 수 있게 해줄거다.”
이 연기가 고기에 묻어 표면을 코팅하게 되면 가장 춥고 배고플 때 도움이 되는 단백질이 될터였다.
올해는 토끼고기뿐이었지만 내년에는 염소나 돼지도 준비한다면 식량 사정이 좋아질 것 같았다.
훈연소에는 하루를 넘겨 다음 날까지 불을 피워 훈연을 시켰는데, 연기 그을음이 고기를 다 덮어씌우자 겉면이 딱딱해졌다.
작은 손 칼을 써서 토끼고기를 살짝 떼보니 검은 그을음 안으로 수분이 쫙 빠진 붉은 살이 보였다.
“제대로 되었구만.”
이 그을음 위로 다시 흰 곰팡이가 슬게 되면 몇 년이고 보관할 수 있는 훈제 고기가 되는 거였다.
그을음으로 인해 건강에 해로울 수도 있겠지만, 배고파서 죽는 게 더 무서운 시기였기에 넘어갔다.
훈연소를 만든 목장에게 약속대로 토끼 훈제 한 마리를 줬다.
“처음 입에 넣으면 탄 것 같은 텁텁함이 있지만, 불에 탄 듯한 이 맛이 사람의 혀를 농락하는 것 같습니다요.”
내가 불향이라고 알려주지 않아도 목장이든 박복이든 나무가 타며 건네주는 진한 불향에 감탄을 했다.
“이 뒤집힌 배. 훈연소를 제가 다른곳에 만들어 줘도 되겠습니까요?”
훈제의 불향이 목장의 입을 사로잡은 것 같았다.
“물론이네. 다만 만들어 줄 때 내게 이야기만 하게. 훈연이란 것이 훈연소를 꽉 채워서 한 번에 하는 게 가장 좋기에 서로 훈연 공간이 남을 때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을 거네.”
“감사합니다요.”
아버지와 형 내외에게도 훈연 된 토끼고기를 잘게 찢어 주전부리로 올려주었고, 행랑채 종들에게도 불향을 한번씩 맛보게 해주었다.
그리고 훈제 불향을 맛보고 싶은 불청객이 그날 밤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