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난 순살파 아니 순정파! (1)
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요리숙 2기는 가까운 상주는 물론이고 김천에도 어멈을 보내왔는데, 1기보다 2명이 더 늘어난 7명이었다.
거기에 형수의 친정에서 온 어멈까지 해서 8명이었다.
물론 깍두기처럼 낀 형은 내가 직접 모든 것을 알려줘야 했다.
그러면서 형에게 숙장(宿將)이라는 직책을 주고, 명찰과 완장을 달아 주었는데, 형은 의외로 이런 ‘장’이 붙은 것을 좋아해서,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요리숙의 관리에 나섰다.
“어허. 칼질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칼질은 안에서 밖으로 밀면서 해야 안전하느니라.”
“어머 이러시면...”
김천에서 왔다는 어멈은 나이가 22살로 얼굴이 꽤나 반반했는데(물론 조선 시대의 기준에 따라 반반했다는 말이다.) 형은 괜히 어멈들을 관리한다며 은근슬쩍 손을 잡거나 어깨를 건드리며 찝쩍거렸다.
한데, 김천에서 온 어멈도 그게 싫지만은 않은지 은근슬쩍 엉덩이를 밀고 당기기를 하며 그걸 또 즐겼다.
요리숙에 형수의 친정에서 온 어멈이 있었기에 그 이상의 것은 없었지만, 그걸 지켜봤던 박복이의 말로는 정말 아슬아슬했다고 했다.
그 외에는 원길 형이 좁쌀처럼 꼼꼼한 부분도 있었기에 이런 관리 하는 일에 딱 맞는 인사 같기도 했다.
***
[쩝쩝.질겅 질겅... 꿀꺽.]
“음. 상주에서는 백미 1섬이면 되는 것을 원조라 하여 문경에 보낸 것이 잘한 일인 것 같구나. 확실히 상주에서 배워 온 어멈과는 맛의 결이 다르구나.”
“네 어머님. 원조라고 하지만, 두 배나 비싼 곳으로 저를 보내실 때만 해도 낭비가 아닌가 생각했었습니다. 허나 확실히 다른 어멈들에게서 배우는 것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럼, 거기서 배운 것으로 저녁상을 올리도록 하여라. 그리고 그 식료의술이 담겨있다는 책도 가져왔겠지?”
“네. 언문도 배워 왔기에 책을 필사하여 다른 어멈들에게도 볼 수 있게 하겠습니다.”
김천에서 왔다는 22살의 어렸던 행랑어멈은 양반가의 어멈이 아니라, 김천에서 알아주는 기방인 명월방의 찬수(饌饈)였다.
그리고, 제대로 요리를 배워 온 그녀의 솜씨로 인해 명월방의 매상이 오르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김천의 기생집에서 상주 양반들의 입소문으로만 돌던 요리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김천은 물론, 경상남도로 포계와 주토피아, 밥비거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전씨 가문의 요리숙 정규과정과 거기서 배워 온 어멈들이 가르치는 것의 차이점도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자연스레 옥석이 가려졌다.
1기 어멈들을 통한 가르침 가격은 백미 1섬에서 반섬이 되더니 어느새 잡곡 다섯 되까지 가격이 떨어져 버렸다.
요리숙 3기 이후부터는 매달 5일에 10명의 인원 제한으로 강습이 진행되었고, 요리를 배우고자 하는 어멈들은 예약까지 하며 대기할 정도였다.
***
“하하하. 전도령! 장안에 소문이 자자한 포계란 것을 먹어보고자 찾아왔소이다!”
비봉산에서 새 농장을 하는 김일란이 찾아왔다.
“이미 닭을 거래하는 상인을 통해 잘한다는 어멈에게 포계를 먹어봤지만, 그래도 원조집만 할까 싶어 왔소이다. 이건 선물이오.”
김일란은 서라벌 닭 4마리를 가져오며 경기 양주에서 새를 키운다는 두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나이든 노인과 이제 열댓 살쯤 된 손자로 보였다.
셋은 닭을 키우는 사람들답게 닭 우리부터 살펴보았는데, 나무통에서 곡식이 나오는 자동급여기를 신기해했다.
“갈근피(葛根皮)로 짠 그물로 천장을 막아 두고 곡식을 먹여 키웠구만. 이러면 닭이 움직이지 않아 빨리 크긴 하겠어. 곡식도 사람이 직접 주지 않고 저 통을 통해 먹게 되니 일손이 줄어들겠어.”
노인은 나무로 된 자동급여기를 이리저리 살피며 원리를 알아내려 했다.
“급여기는 몇 개 만들어 둔 게 있으니 챙겨 드리리다. 목장에게 가져가면 그대로 만들어 줄거요. 대신에 살이 맛있는 닭 종자가 있으면 좀 가져다 주시오.”
“아이구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서라벌 닭과 비슷한 맛이 나는 강화도 닭이 있습니다. 겨울이 지나 비봉산에 올 일이 있다면 꼭 전해드리겠습니다요.”
두 조손은 김일란과는 달리 천민이었기에 양반들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는데, 그런 모습이 안타까웠다.
일반 양반들이 보기엔 그저 닭을 키우는 천것들이었지만, 춘봉의 눈에는 이들이 보배로 보였다.
지금 시기의 조선에는 한강 여의도에 소와 말을 키우는 목장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거기의 목동들이 조선 유일의 축산업자였다.
그런 목동들과 이 조손 같은 사람들이 조선의 축산업을 키울 동량이자 근본이 될 사람들이었다.
닭의 개량은 물론이고 돼지의 개량에도 나 혼자가 아닌 집단으로 같이 뭉쳐서 움직일 사람들이 바로 이런 자들이었다.
‘그리고 개량된 재료를 요리숙 출신의 어멈들에게 보급해주고, 소비하는 시스템을 구축한다면 거기서 또다시 재화가 만들어질 것이다.’
천민인 조손을 극진히 대접해 보내었고, 내년에 한양으로 갈 때 양주에 들러 그들의 농장을 보기로 했다.
“그런데, 저 둘의 신분은 천하다고 했는데, 누구의 밑에서 일하는 것이오?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는 것이요?”
“길창군(吉昌君) 권람(權擥)의 외거노비이긴 하지만, 재작년 권람이 죽고 나서 아들들 간의 재산 싸움이 일어나 운신에 여유가 있는 거요.”
“권람이라 하면...”
권람이라고 하면 칠삭둥이 한명회의 관포(管鮑)로 불리었던 자로 계유정난 이후 좌의정까지 지낸 대신이었다.
“아들이 여섯이라던데, 서로 재산을 더 가지려고 싸운다고 난리도 아니라고 하오. 권람은 애완 비둘기를 아주 좋아했었는데, 그 아들들은 비둘기에 그리 관심이 없어 아쉬울 따름이라오.”
김일란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역사 속에 이름을 남겼던 위인들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칠삭둥이로 태어나 계유정난을 설계한 한명회가 어떤 인물인지 정말 궁금했다.
“그런데, 서라벌 닭도 그렇고 일반 닭도 많던데, 언제 다 잡을 예정이오?”
“그게 무슨 말이오? 닭을 잡다니? 지금도 닭의 숫자가 부족해 최대한 늘리려고 하는 중인데.”
“음? 그럼 겨울 동안 저 닭들을 다 껴안고 가겠다는 거요? 닭 먹이값이 만만치 않을 터인데. 설마, 겨울에도 닭의 숫자가 늘어날 것으로 생각하는 거요?”
김일란의 말을 듣고 보니 의구심이 들었다.
“그럼 숫자가 늘어나지 않는단 말이오?”
“허허허. 닭을 위해 아궁이 불을 때워 따뜻하게 해줄 거요? 겨울에는 닭도 추워서 알을 잘 낳지 않고, 병아리가 깨어난다고 해도 제대로 성장하기 힘드오. 그래서 보통은 첫눈이 오기 전에 절반 이상의 닭을 다 잡아서 정리하는 게 기본이오.”
닭이 1년 내내 알을 낳고, 번식이 가능하다곤 하지만, 결국 따뜻한 난방이 되는 사육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했다.
김일란의 말처럼 불을 때는 아궁이를 만들어 난방을 하고 닭을 키우는 게 가능하겠지만, 그렇게 했을 때 가성비가 나오는지가 알 수가 없었다.
“땔감을 때워 닭을 키우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시오. 추위에 약한 닭들이 죽어야 건강한 닭들만 남아 더 좋은 품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거요. 그리고, 저 닭 우리에는 지붕을 만들고 닭이 들어가 버틸 수 있는 집을 따로 만들어야 할거요. 그래야 겨울을 넘길 수 있을 거요.”
김일란의 충고를 듣자 그제야 겨울이 가까이 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약한 닭을 절반 가까이 잡아 어떤 요리를 할지도 고민했다.
“도련님! 영덕에서 작은 도련님 내외가 오셨습니다요!”
새로운 치킨 요리를 먹기 위해 왔다는 듯이 작은 형이 본가로 온 것 같았다.
***
“아버님이 쌀을 50섬이나 보내주셔서 다행이었습니다. 영덕에는 역병이 돌지는 않았지만, 비가 자주 내려 흉년이 들었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다. 사돈어른의 건강은 괜찮으냐?”
“죽만 겨우 드시다 가을이 되며 몸을 일으키셨습니다.”
“다행이구나. 그런데 그 소식은 없고?”
“그게... 힘을 쓰고는 있으나 아직은...”
“음. 영덕에서 주로 뭘 먹느냐? 해산물을 많이 먹는 것이냐?”
“네? 바닷가이다 보니 해산물을 많이 먹습니다.”
“그래서 힘이 없는 것이야. 내 막내에게 보양식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보양식요? 그러고 보니 형님 말로는 동생이 식료의가 되기로 했다고 하던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역병으로 아프고 나서 의술을 배우기로 했단다. 그게 음식으로 사람을 고치는 식료의라고 하더구나. 곁채로 가자꾸나.”
전기환과 둘째 아들인 전원상이 곁채로 가자 마루에 상들이 펴져 있었고, 마당에 만들어진 화덕에는 첫째인 원길과 셋째인 원종이 흰옷을 입고 요리를 하고 있었다.
“허! 아버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행랑어멈들은 옆에 서 있고 형님과 동생이 요리를 하다니요.”
“다 너에게 먹일 보양식을 하는 것이니 올라가자꾸나.”
전기환이 차려진 상 앞에 앉자 첫째, 둘째 며느리도 따로 상을 차고앉았다.
“아버님. 저에게 먹일 보양식을 한다고는 하지만, 반가의 후손이 어떻게 칼을 만지고 식재를 만진다는 것입니까?”
“저게 식료의술이라고 하더구나. 음식으로 사람을 고치고, 병에 걸리지 않게 만드는 의술이라고 했다.”
“허나, 어찌...”
“양반이 부엌에서 일을 하는 거냐 이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의술이라 함은 중인들이 하는 술인데, 그걸 위해 양반이 스스로 체통을 떨어트리려 하다니요. 제가 영덕으로 가고 난 이후 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원상이 너는 양반이 칼과 도마를 만지는 게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네. 아버님. 전혀 양반답지 못하옵니다.”
“그렇다면, 너는 세종대왕 시절 명의 사신이 왔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느냐?”
“명의 사신이 왔을 때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사옵니까?”
“중국 명나라에서 사신이 왔을 때 주상전하와 사신 앞에서 요리를 하여 바로 상에 올릴 숙수가 필요했었다. 헌데 그럴 수 있는 숙수가 없었다고 한다. 물론, 궁에는 수십 명의 숙수가 있었지만, 담력 있게 그 앞에서 요리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었지.”
“그럼 어떻게 되었사옵니까? 여자 숙수가 나섰었습니까?”
“남자 숙수도 오금이 저려 주상전하 앞에서 바로 요리를 못하는데, 여자가 설 수 있었겠느냐? 그때 주상전하가 요리를 위해 급하게 부른 이가 충청도 병마 절제사였던 이교(李皎)공이었다.”
“이교 공이라면 의안대군(義安大君)의 아드님으로 종친이지 않습니까?”
“그렇다. 그러한 이교 공이 주상전하와 명의 사신 앞에서 즉석요리를 하여 음식을 올렸었다. 그건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이교 공의 행위 또한 체통을 떨어트리는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그건... 종묘사직을 위해 요리를 한 것이니 종친의 품위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옵니다.”
“그렇다면, 지금 너의 형과 동생은 어떠하냐? 멀리 장가를 간 형제가 돌아왔기에 성의를 보여 앞섶가리개를 입고 요리를 하는데, 그것은 양반으로서 체통이 떨어지는 일이더냐?”
“그... 그게...”
원상은 아버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종친이었지만, 나라를 위해 즉석요리를 하는 것이나 형제를 위해 양반이 요리하는 것이나 같은 행위였다.
형제간의 우애가 양반의 체통보다 더 소중한 것이라고 충고하시는 것 같았다.
“아버님 잘못했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내게 사과할 필요 없다. 네 형과 동생에게 사과하거라. 형제를 위해 기꺼이 요리를 해주는 둘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네.”
원상은 고정 관념을 버리고, 과연 형과 동생이 어떤 요리를 해서 자신에게 줄지 기대하며 쳐다보았다.
***
“도려낸 닭고기 순살을 앞뒤로 한지로 감싸 홍두깨로 두들겨 살을 펴주게. 그리고 손을 꾹꾹 눌러 물기를 제거해야 하네.”
[탁탁탁탁~.]
어멈들과 형에게 요리를 가르치며 하다 보니 일의 진행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럿이 함께하다 보니 대량의 음식을 만들기는 쉬웠다.
“홍두깨로 얇게 편 닭고기 살에 청주와 간장, 소금, 달걀을 넣어 손으로 조물조물 섞어주어야 하네.”
손으로 닭고기를 조물거리자 금세 청주와 간장은 고기에 흡수가 되었고, 거기에 다시 메밀가루와 밀가루를 섞어 넣어 또 조물거렸다.
손으로 한참을 주무르자 밀가루를 넣었음에도 소금의 영향으로 육즙이 흘러나와 반죽이 되었다.
“고기가 숙성될 동안 양념을 만들어 봅시다. 이번에 만드는 양념은 요리할 때 넣는 양념이 아니라 찍어 먹는 양념입니다. 박복아 미리 만들어 두었던 겨자가루를 가져오거라.”
*
[작가의 말]
의안대군은 둘이 있습니다.
한 명은 이성계의 배다른 형제인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와
이성계의 8번째 아들인 의안대군(宜安大君) 이방석(李芳碩)이 있습니다.
실제 중국 사신 앞에서 요리를 했던 ‘이교’는 이성계의 동생인 의안대군 이화의 아들로 천성이 술과 여자를 좋아했고, 사람을 모아 시끌벅적하게 노는 것을 좋아 했다고 합니다.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는 금강사의 루(樓)에 사람 수십 명을 모아 술 먹고 놀았는데, 무슨 짓을 했는지 그 루가 무너져 8명이 깔려 죽는 사고를 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화를 보아 이교는 산과 들로 놀러 다니며 즉석요리를 즐기는 사람이었다고 추정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