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수확의 계절. (2)
“이보게 원길이. 백숙을 대접한다고 했는데, 그럼 계서(鷄黍)라는 말처럼 기장밥이 나오는 겐가? 난 기장밥은 꺼칫거려서 별로인데...”
곁채에 손님으로 주저앉자마자 기장밥은 별로라며 은근히 쌀밥을 달라며 눈치를 주는 양반을 보고 있으니 원길의 속에서 열불이 솟아났다.
동생 원종의 말마따나 더 남길 수 있다는 말에 웃으며 참고는 있었지만, 이거 달라 저거 달라 투정질 하는 자들을 보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참자. 참아야해. 두배. 오로지 두배! 참아야 한다.’
얼굴이 굳을뻔한 원길은 애써 웃으며 기장밥도 먹을 만하다며 다독였다.
“이 보 게들 원길이가 내어주는 기장밥이 최고의 예우인데 왜 그러는 겐가? 예기(禮記)에 따르면 천자(天子)께서도 절기가 되면 기장밥에 닭고기를 먹는다고 했고, 논어(論語) 미자편(微子篇)에서도 귀한 손님이 오면 닭을 잡고 기장밥을 먹였다고 했네. 원길이 우리에게 예우를 해주는 것이니 입에 거칠다고 하여 다른 것을 먹을 이유는 없네.”
입에 거친 기장밥이야말로 선현들의 가르침에 따르는 최고의 예우라는 진사 김재원의 말에 구시렁거리던 둘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오! 김진사가 상을 치르기 위해 내려와 있지만,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진사는 다르긴 다르구만.’
원길은 백미밥 대신 기장밥을 내놓으면서 생색낼 수 있는 고사(故事)를 알게 되자 집안이 빈곤해 별로 친하지 않았던 김재원의 인상이 아주 좋게 보였다.
“오! 항아리 백숙이로구만.”
검붉은 항아리를 들고 종들이 들어와 상에 올렸는데, 문풍지로 쓰이는 황지가 항아리의 입구를 단단히 막고 있었다.
양반들이 조심스레 황지를 떼어내자 항아리에서는 하얀 김이 뭉실뭉실 피어올랐는데, 백숙의 육향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으응? 킁킁. 이건 마늘 냄새 아닌가? 산초향에 가려졌다지만, 분명 마늘 냄새인데. 어찌 백숙에 마늘을 넣은겐가?”
“그러게. 백숙에는 산초와 황기, 회향을 넣는 것이 마땅하거늘, 어찌 마늘과 파가 들어있단 말인가? 뭔가 이상하구만. 이거 먹고 배앓이 하는거 아닌가?”
음식을 대접하는데도 투정 부리는 둘에게 원길이 욱하려는데 마침 원종이 방으로 들어왔다.
“형님들 마늘과 파를 백숙에 넣지 않는 것은 옛날 방식입니다. 두 분은 옛날 사람들이 마늘을 백숙에 넣지 않은 이유를 아십니까?”
“안 넣은 이유? 그건... 흠흠.”
마늘을 백숙에 넣었다고 타박하는 둘에게 오히려 왜 마늘을 안 넣었는지 물어보자 둘은 입을 다물었다.
그들도 그저 예부터 백숙에는 마늘을 넣지 않는다고 전해 들었을 뿐이지 그 연원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형님들 전조의 국교가 무엇이었습니까?”
“전조라면 당연히 불교... 아, 그렇구나. 오신채(五葷菜)로구나. 불교의 오신채에 마늘이 들어가기에 넣지 않은 것이구나.”
“네 맞습니다. 마늘과 자총이(파)는 승려들이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는 나물이라 생각하여 백숙에 마늘과 파를 넣지 않았습니다. 자극이 강하기에 생으로 먹으면 화를 잘 내게 하고, 그렇다고 익혀 먹으면 음란한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여 먹지 말아야 한다고 했지요.”
“하지만, 이건 백숙이잖느냐. 승려라면 육식을 원래 하지 않을 터인데.”
“네. 그건 몸에 좋은 백숙을 먹어 몸보신을 해야 하는데, 마늘이 음란한 마음을 일으키게 되면 백숙의 효용이 다른 곳으로 뻗친다고 하여 민가에서도 오신채를 백숙에 넣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오 그렇구만.”
“허나, 세월이 흘러 그 연원은 잊어버리고 그저 오신채에 속하는 마늘과 파(자총)를 백숙에 넣으면 안 된다는 것만 민가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보니 백숙에 마늘이 들어가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네. 스님이 아닌 이상 백숙과 마늘을 같이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양의 기운이 일어나기 수월해지는 것입니다.”
“오호라! 그렇다면 보양식 중의 보양식이 백숙에 마늘, 파로구나.”
두 양반은 양기가 일어난다는 말에 항아리에서 백숙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여기에 피를 잘 돌게 하는 대추와 소화를 돕는 무, 폐와 기관지에 좋은 도라지를 넣었기에 이 백숙은 약선백숙(藥膳白熟)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오! 약선이라. 이거 오늘 원길이 덕에 호강을 하는 구만. 고마우이.”
입에 거친 기장밥이 나오는 것에 툴툴거렸던 양반이었지만, 정력에 좋고 몸에 좋다는 약선요리를 먹게 되자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백숙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런 둘과는 다르게, 진사 김재원은 백숙을 먹는 걸 망설였다. 그가 닭이나 안에 들어간 다른 재료를 못 먹어서가 아니었다.
집에 처자식을 두고 혼자 몸에 좋다는 음식을 먹게 되자 마음이 무거웠던 것이었다.
그런 무거운 마음이었음에도 이율배반적으로 백숙의 냄새가 너무 좋아 수저를 들 수밖에 없었다.
“아...”
김진사는 기름기 가득한 국물을 입에 머금자 그 풍요로우면서도 번들거리는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꿀꺽...]
따뜻하다 못해 뜨끈한 국물이 목구멍을 넘어가자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했을 때처럼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운이 솟구쳤다.
닭다리를 뜯어 고기를 입에 물자 그 쫄깃하면서 고소한 맛에 대학혹문 같은 책이 없어 겪었던 마음고생이 사라졌다.
기름기 가득하고, 풍요로운 육향이 그득한 닭고기는 그런 고민과 걱정, 서글픔을 잊게 해주는 맛이 었다.
뜨거운 국물 한 모금에 마음이 편해졌고, 뜯어 먹는 고기 한 점에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
하지만, 김 진사는 수저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수저를 움직여 계속 먹고 싶었지만, 뜨끈한 국물도 쫄깃한 고기도 집에 있는 처자식을 잊게 만들지는 못하였다.
김진사는 자신이 부끄러움만 참는다면 집의 처자식들이 닭고기와 기름기 가득한 국물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몇 번이나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어기... 내 속이 좋지 못하여 다 먹지 못할 것 같은데, 이거 싸줄 수도 있겠는가?”
김 진사는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부끄러워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잘사는 집안이라도 음식이 남으면 버리지 않고 내림 상을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 예의를 벗어나 먹던 음식을 싸달라고 했으니 말을 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아... 여윽시! 맛있는 것을 먹을 때는 부모님이나 토끼 같은 자식들이 생각나는 것은 당연하지요. 효도할 수 있고, 자애로운 아버지가 될 수 있게 따로 챙겨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으래, 원종이 네 말이 맞다. 맛있고 몸에 좋은 음식을 먹는데, 어찌 부모님이 생각나지 않을까. 본인의 정력만 생각해서 허겁지겁 먹는 자네들은 반성하게나.”
“이런, 불효자를 일깨워 주는구랴.”
원길 형의 말에 다른 양반도 김 진사의 집안 사정을 알기에 부모님과 가족을 챙기는 사람으로 포장을 했다.
“걱정하지 마시고 백숙을 드십시오. 가실 때 챙겨 갈 수 있게 한 마리씩 더 해드리겠습니다.”
집에 들고 갈 음식을 챙겨주겠다는 원종의 말에 김 진사는 그제야 다시 수저를 들었다.
조금 전에도 먹었던 백숙이었는데, 그새 산초 향이 독해진 것인지 김 진사는 눈물이 나려는 걸 겨우 참아내며 백숙을 먹었다.
***
“서방님은 왜 안드십니까요?”
“나는 이미 배불리 먹고 왔네. 어서 드시게나.”
김 진사는 자신의 집까지 종에게 항아리 백숙을 들여 배달시켜준 전원길을 생각하고 있었다.
‘평소에 밴댕이 같고 좁쌀영감 같았던 사람이었는데,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이었어. 이런 대인배가 또 어디에 있나.’
항아리 백숙을 가져다준 종이 따로 들고 왔던 종이 꾸러미도 주고 갔는데, 항아리 백숙을 먹고 남은 국물에 넣어 먹을 수 있는 밀 반죽이었다.
반죽을 떼 넣어 다시 끓여 먹으면 맛난다고 언문으로 쓰여있는 종이를 보고 있으니 자신이 부끄러웠다.
궁핍하여 먹거리가 없는 자신을 배려해 주는 원길을 이제까지 배포 없는 소인배로 양반답지 않은 자로 여겼는데, 그렇게 생각했던 자신이 더 소인배 같다고 생각되었다.
다른 이를 겉만 보며 판단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고기를 다 먹은 백숙 국물에 밀 반죽을 끓여 먹으며 즐거워하는 처자식을 보니 사람을 보고 학문을 보는 것에 편협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껏 해왔던 똑같은 공부가 달리 느껴졌고, 공맹의 도리를 다르게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뱃속의 뜨끈한 백숙 국물이 그런 김 진사, 김재원에게 용기를 주고 있었다.
***
“저치의 사정이 딱해서 내가 편을 들어 주기는 했는데, 나중이라 해도 덕을 볼 것 같지는 않은데.”
“형님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많이 베푸십시오. 베푼 것이 돈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형님이 베풀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게만 하시면 됩니다.”
“허허 나는 도저히 알 수가 없구나. 어떻게 그렇게 베풀면 그게 두 배로 돌아온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시간이 가면 자연스레 알것입니다.”
원길은 동생이 확신하듯 이야길 했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향교에 이름을 올린 동기간 양반들을 두세 번씩 챙겨 먹이자, 이제는 몸이 좋지 않아 거동이 힘든 아버지뻘 되는 양반들에게 찾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한번 끓인 항아리 백숙과 밀 반죽을 들고 찾아가 같이 백숙을 먹으며 마늘이 어디에 좋고, 대추가 어디에 좋다며 약선요리를 먹여 대었다.
아직 겨울은 아니지만, 쌀쌀한 날씨에 뜨뜻한 백숙을 먹게 되자 이마와 등판에 땀이 솟구치며 거동이 힘들었던 자들도 몸이 개운한 느낌이 들어 과연 약선요리로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큰 도련님 올해 소출은 208섬입니다요. 작년과 비교하면 31석 작게 수확이 되었습니다요.”
덕쇠의 수입 보고를 듣는 원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흉년이구만 흉년이야. 아무리 역병으로 김매기를 제대로 못 했다곤 해도, 너무 줄었어.”
“그럼 잡곡하고 미리 좀 구해 둘깝쇼?”
“닭 사료로 쓰려면 그래야 하겠지. 내년 봄, 보리 수확 때까지 닭 먹일 잡곡을 미리 챙겨두게나. 그런데, 덕쇠 자네에겐 막내가 무슨 말 없던가?”
“네? 말이라고 하면 무슨 말이신지.”
“아, 글쎄 지금 내가 여기저기 어르신들이고 양반들 찾아가면서까지 재물을 쓰고 있지 않나. 내 기억으로만 해도 집닭 100여 마리는 쓴 거 같은데. 안 그런가?”
“정확히는 140마리를 사왔습니다요. 토끼도 120마리를 사왔었습니다요.”
“허허. 서라벌 닭이 아니라곤 하지만, 많긴 많군. 이렇게 계속 쓰다간 집안이 거덜 날 수도 있는데, 막내는 아무 말 없던가?”
“네. 그저 밀 반죽이나 그런 것도 아끼지 말고 챙겨주라는 것만 들었습니다요.”
“흠. 동생이라 믿고는 있지만, 영 불안하단 말이지.”
원길은 이제까지 이렇게 남에게 밥을 사고 맛난 음식을 공짜로 주고 했던 적이 없다 보니 재산이 금방 줄어들 것 같아 불안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들판에서 곡식 수확이 끝나자 원길이 그토록 기다리던 말을 동생이 해주었다.
“형님. 이제 베푼 것을 거두어들일 때가 온 거 같습니다.”
*
[작가의 말]
실제 조선 시대 백숙에는 마늘, 찹쌀을 넣지 않았다고 합니다.
닭의 육향을 위주로 산초의 화한 맛으로 먹었다고 하더군요.
당연히 마늘, 후추가 없으니 비린내를 잡기 위해 산초, 차조기, 회향, 형개 같은 초목 향신료를 넣었다고 합니다.
(인삼, 도라지, 대추, 찹쌀, 마늘, 무, 파가 들어가는 삼계탕은 70년대에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