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사람은 나면 한양으로 보내고 말(馬)은 나면 탐라로 보내라.
“그대들은 혜민서(惠民署)나 활인서(活人署)를 가보지 않은 것이요? 거기에 있는 의녀를 본 적이 없소?”
“...”
원종의 물음에 어멈들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막내 도령. 참으로 답답하오. 평생을 문경이나 상주를 벗어나 보지 않은 어멈들인데, 어찌 한양에 있는 혜민서나 활인서를 가볼 수가 있단 말이오?”
어멈들이 하지 않던 답은 아버지의 둘째 첩인 원홍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방귀깨나 뀌는 양반이나 되어야 혜민서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지 천것은 그 근처도 가지를 못하오.”
“아니, 그게 무슨... 그럼, 활인서는? 활인서도 그러오?”
“뭐, 활인서는 그래도 천것들을 치료는 해주지만, 그것도 성저십리(城底十里) 내의 사람에 한정되오. 그게 무슨 말이냐면, 한양 사람들만이 활인서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오.”
원홍에게 이야길 듣자 머리가 멍해졌다.
내가 알고 있던 혜민서나 활인서와는 너무나 달랐다.
원홍의 말이 거짓이 아닐까 싶었지만, 작년까지 한양 교방(敎坊)에 있었던 사람의 말이었기에 그녀의 말이 맞을 터였다.
‘아니 그럼, 이제까지 드라마에서 보았던 혜민서나 활인서에서 병자를 치료하는 모습은 다 뭐야. 그리고, 둘 다 한양 근처에 사는 사람들만 치료한다면, 지방 사람은? 지방의 의료서비스는 없는 거야?’
한양이 아닌 지방의 의료에 대해 떠올려 보았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사극 드라마든 역사 기록이든 지방의 의료에 대한 것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저 역병이 나면 마을을 봉쇄하고 이후 죽은 시체들을 정리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면 허준에 나왔던 <줄을 서시오!>하는 건 다 구라인거야? 아니네. 과거 보러 가는데, 의원이 있다는 소문만으로 수백 명의 환자가 왔다는 건 사실 기반이겠구만.’
지방에 활인서 같은 곳이 없으니 용하다는 의원이 있다는 소문만 나도 근방의 백성들은 다 몰려들었을 것 같았다.
미디어의 영향으로 철석같이 혜민서나 활인서가 백성이면 누구든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 같은 곳이라고 믿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지방의 의료 현실을 알았기에 세종 시절 향약집성방 같은 책을 만들게 한 것인지도 모르지.’
그런 의서를 보고 지방의 유생들이 유의(儒醫)가 되어 구세제민(救世濟民) 할 것이라 여겼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한자를 읽을 줄 아는 자들은 돈이 있는 자들이니 진짜 의원을 불러 치료를 받았을 것이고, 가장 의학서가 필요했던 서민들은 책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구한다고 하더라도 한자를 몰라 그런 책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을 것 같았다.
“그럼 그쪽은 한양에 있을 때 의녀들을 본 적이 있소?”
“저야 본 적이 있지요. 하지만, 의녀들이 정해진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만 보았지 진짜 의술을 베푸는 것은 나도 본적이 없소이다.”
원홍은 막내 도령이 다른 양반가의 어멈들을 모아 요리를 가르쳐 준다는 말에 뭔가 얻어 배울 것이 있을까 싶어 온 것이었다.
하지만, 원종의 입장에서는 그녀가 이곳에 있음으로써 큰 깨우침을 얻은 것이었다.
원종이 처음 식료의를 내세운 것은 지금 시대에 요리사란 직업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궁중 숙수는 남자가 한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국왕과 왕족을 위해 만들어진 벼슬이었기 때문이었고,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기만 해도 고추가 떨어진다며 부엌일이 터부시되는 시대였다.
그렇기에 식료의를 내세워 남자도 부엌 출입을 할 수 있다는 관념을 퍼트리고 싶었다.
그런 식료의에 대한 관념 확산을 위해 양반가의 어멈들을 ‘요리숙’이란 과정으로 묶어 레시피를 퍼트리려고 한 것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요리들이 널리 알려지다 보면 궁극적으로는 요리사란 직업과 미식이 확산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조선의 사정을 보니 단순한 음식 레시피가 아니라 음식과 식생활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다 가르치고 퍼트려야 할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조선 시대가 만든 벽이로구나. 닭 사료 같은 인프라가 없듯이. 지방에는 인프라가 없는 것이야.’
사람은 나면 한양으로 보내고 말(馬)은 나면 탐라로 보내라는 말이 있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한국이 서울 민국이었듯이 조선도 인프라가 몰려있는 한양 조선이구나.’
단순히 요리를 가르치려 했는데, 의료에서부터 여러 가지를 가르쳐야 할 것 같기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리고, 지금 일주일간의 요리숙 과정에서 배운 것을 어멈들이 다 기억할까도 고민되었다.
‘그래 세종대왕님의 유산을 적극 활용하자.’
결정을 내리자 우선 교육부터 시작했다.
“우선, 다들 손등이 보이게 양손을 앞으로 내밀어 보게나.”
다섯 명의 기본적인 요리실력을 알아야 수준에 맞게 요리를 가르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 실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청결이었다.
“휴우...”
어멈들의 손을 보니 부엌일을 오랫동안 한 어멈들답게 손이 남자들 손처럼 험했다. 그리고, 목욕을 자주 하지 못하는 시대 특성상 손톱에 낀 검은 때도 보기에 험했다.
“자 다들 가위로 손톱을 짧게 자르는 것부터 하시오. 음식은 바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시작 전에 꼭 손톱을 정리하고, 손을 씻어 청결하게 해야 하오.”
손톱 정리가 끝이 나자 무명으로 만든 앞치마를 나누어 주었는데, 전통적인 허리에 묶는 것이 아닌 목 뒤로 걸어 입는 긴 앞치마였다.
“옷에 음식이 튀는 것을 막아주는 용도로 음식을 할 때는 반드시 입어야 하는 옷이오. 그리고, 최소 사흘에 한 번은 빨아 입어야 하오.”
물론, 앞치마의 왼쪽 가슴에는 ‘춘봉(春峰)’이란 한자를 새겨 춘봉요리숙 출신이란 것을 표시 나게 했다.
“그럼, 그대들도 우리 요리숙에 온 손님들이니 찻물 밥부터 대접 하겠소이다. 이 찻물 밥을 알기 전에 먼저 찻잎을 알아야...”
***
“언년아, 박복아 너희 글을 좀 배워야 하겠다.”
“네?”
“글이라굽쇼? 저희가 배워도 되는 것입니까요? 종놈은 글을 배우면 큰일 난다고 하던데...”
글을 배우란 말에 박복이는 근심부터 했다.
“너희가 배울 글은 천자문이 아니기에 배워도 된다.”
“도련님. 천자문이 아니라면 무슨 글인가요?”
“언문이다. 너희가 언문을 깨우친다면 장날에 엿을 사 주도록 하마. 어떠냐?”
“그렇다면 당연히 배워야 하지요. 뭐부터 배우면 됩니까요?”
달달한 엿을 사 주겠다는 말에 박복이와 언년이의 태도가 적극적으로 변했다.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께서 말씀하시길, 똑똑한 이는 한나절이면 한글을 깨우칠 수 있을 거라 하셨는데, 아이들은 엿에 대한 욕심이 커서 그런지 반나절 만에 한글을 쓰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도련님. 진짜 제가 하는 말을 언문으로 쓸 수 있는 게 신기합니다요. 이렇게 쉬운 것을 왜 몰랐을까요?”
“너희들에게 가르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난 너희 둘이 필요하니 가르치는 것이다.”
훈민정음이 나왔음에도 널리 확대되지 못한 것은 언문으로 된 책이 풀려 천민이나 상민들의 머리가 커지는 것을 양반들이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언문 즉, 한글을 쓰는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지렁이를 키우는 흙 통에 나뭇가지로 글씨 연습을 시키고 있으니 불편한 게 바로 보였다.
‘세로쓰기와 띄어쓰기가 문제구나.’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도 처음에는 중국 한문의 표기 방식을 그대로 가져와 사용했기에 띄어쓰기나 쉼표 없이 세로로 붙여서 한글을 썼었다.
한자가 널리 쓰이기 시작하던 당시 책은 죽간(竹簡)이었기에 자연스레 세로쓰기와 띄어쓰기가 있을 수 없었는데, 이로 인해 한자로 쓰인 글은 오역이나 이해가 잘못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란 말이었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 와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로 쓰일 수 있었는데, 띄어쓰기로 인해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었다.
이러한 오역을 방지하고자 띄어쓰기를 도입한 것이 미국인 호머 헐버트 박사(Homer hulbert)였다.
그는 한글에 영어식의 띄어쓰기를 도입했는데, 자신이 영어를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단어 이후 띄어 쓰는 영어처럼 한글도 그렇게 띄어쓰기를 계도했다.
그리고 띄어쓰기는 계도의 효과가 바로 나왔다.
학생들도 띄어쓰기와 쉼표로 인해 글을 읽고 쓰기가 수월해지자 자연스레 띄어쓰기가 전국으로 보급이 될 수 있었다.
호머 헐버트 박사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가 급했기에 띄어쓰기를 둘에게 가르쳤고, 세로쓰기가 아닌 가로쓰기를 가르쳤다.
둘은 이게 훈민정음과 얼마나 달라진 것인지도 모르고 글을 배워갔다.
“그런데 도련님. 저희 둘이 언문을 배운다고 해도 쓸 곳이 있겠습니까요?”
“박복아. 쓸 곳은 아주 많다. 아마 너희들은 나중에 한글 알려줘서 고맙다고, 내게 절을 해야 할 것이다.”
“헤헤. 그렇게 된다면야 저도 좋지요. 그런데 글이 이렇게 쉬웠을 줄은 몰랐습니다요.”
“그렇지? 처음엔 어렵게 느껴지지만, 막상 배워보니 쉽지? 남을 가르칠 수도 있을 것만 같고. 안 그래?”
“네. 자음과 모음을 끼워 쓰는 것 자체가 너무 재미있습니다.”
“좋다. 그럼 내일부터는 이번에 온 어멈들에게 언문을 가르쳐 보거라.”
“네? 제가요? 그게 될 수가 있습니까?”
“그럼, 될 수가 있지. 너는 오늘 내게 한나절 만에 언문을 배웠지 않았느냐? 충분히 가르칠 수 있다. 그러니 내일부터 어멈들에게 언문을 가르쳐라.”
“그럼 언년이는요?”
혼자만 일한다는 생각에 억울한지 동생 언년이를 언급했다.
“언년이는 사서로 글을 써야 할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을 받아쓰는 일이지.”
요리숙에 온 어멈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이유는 요리숙 수료증의 역할을 하는 요리숙 책자를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요리숙 책자에는 레시피의 가장 기본이 되는 청결을 강조하고, 표준 분량(分量)을 수치화해서 넣을 예정이었다.
요리의 레시피가 가지는 힘은 레시피만 보고 따라 했을 때 같은 음식이 나오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되려면 분량에 대한 기준이 명확해야 했다.
조선 시대의 양념을 치는 분량은 언제나 ‘조금’이라는 단어였다. 요리에는 이 조금이라는 단어를 지양해야 했다.
“언년아 받아 적어라. 소금과 같은 알갱이가 있는 것의 경우에는 한 꼬집으로 최소 분량을 정하고, 어른 숟갈 그리고 소주잔 한잔, 밥그릇 한 그릇으로 분량을 정한다고 써라. 열 꼬집은 한 숟갈이며, 소주잔 열 잔이면...”
요리에 쓰는 분량을 통일해야 나중에 소금 3꼬집을 넣으라고 했는데, 사람마다 개량법이 달라 음식이 짜지거나 싱거워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정량화가 쓰인 요리숙의 책자가 있다면 사람이 말로 알려주는 것보다 더 정확하고 기억을 까먹더라도 다시 기억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다음에는, 같이 먹으면 안 되는 음식궁합에 대한 것들이다.”
“구, 궁합요?”
궁합이란 말에 바로 속궁합을 떠올려 얼굴이 발그레해지는 언년이를 보니 마구니가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년아! 음식궁합! 음식궁합! 사람궁합이 아니라고!”
“네, 네.”
병이 난 것을 고치는 것보다는 병이 오지 않는 몸을 만드는 것이 식료의의 일이었기에 음식 궁합도 넣으려고 했는데, 왠지 사서 고생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장어와 복숭아는 같이 먹으면 설사를 일으키기에 한 상에 올리면 아니 되며, 게와 감 또한 같이 먹으면 토사곽란(吐瀉癨亂)을 일으켜 죽을 수도 있기에 피해야 한다...”
아주 기본적인 음식 궁합만을 요리숙 책자에 넣는 것이었지만, 이게 지금 시대의 개념으로 보면 실용의학서적이나 마찬가지의 책이 될 것 같았다.
‘이거 요리사를 위해 식료의를 내세웠는데, 진짜 의원이 될 각이잖아.’
*
[작가의 말]
사실 조선 시대에도 지방의 의료를 맡은 기관이 있었습니다.
태조에서 태종 시기에 지방에 의원 혹은 의학원을 두고 의원을 파견했다고 나오는데, 다만 그곳이 어디에 있고 몇 명이나 파견되고 한 기록은 없습니다.
거의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의료는 개인 의원들에게 일임 되었던것 같습니다.
귀양을 간 정약용이 아들에게 절대 사대문 밖으로 이사 나오지 말라는 편지를 보내고 했었는데, 그런 것을 보면 조선 후기에도 여러 인프라가 있는 서울에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깔려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이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