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독상 한상. (2)
우선 오첩반상이라고 하면 밥과 국, 찌개, 찜, 김치, 장류를 ‘제외한’ 반찬의 가짓수가 다섯 개라는 뜻이었다.
즉 오첩반상은 반찬 5개 + 국, 찌개, 찜, 김치를 합친 밥상이라고 생각하면 되었다.
그래서 오첩반상이 현대인의 기준으로는 8개의 반찬이 있을 수 있었고, 10개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현대의 비싼 한정식집에 갔을 때, 오첩반상, 칠첩반상으로 주문했는데 반찬의 개수가 5개, 7개가 아니라 8개 혹은 10개가 나오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자.
물론, 내가 잘생겨서 서비스 반찬이 더 나온 건가? 하는 쓸데없는 망상도 고이 접어 두도록 하자.
밥상에는 쌀눈이 붙어있긴 해도 눈처럼 하얀 백미 밥과 무와 파가 썰려 들어있는 된장국. 그리고 고춧가루 없이 절인 배추김치와 전을 찍어 먹기 위한 간장이 기본으로 놓여있었다.
반찬으로는 닭고기를 잘게 쪼개 우엉채와 볶은 닭고기 볶음요리와 죽순을 간장에 조린 죽순조림, 버섯에 달걀 물을 입혀 구운 버섯 전, 생채(익히지 않고 날로 무친 채소)와 숙채(볶거나 삶은 채소)가 올라와 있었다.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삼시 세끼 모두 죽을 먹었고, 기력을 돋아 주기 위해 올린다는 백숙도 환자식이라 밍숭맹숭 했었는데, 국과 찬에서 올라오는 간장의 짠 냄새만으로도 입에서 침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놋쇠 그릇과 사기그릇에 정갈하게 담겨 있는 한상차림을 보니, 버릇처럼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어두고 싶었다.
고춧가루가 들어가 붉은 색감이 많은 현대의 한식과 다른 점이 많았기에 더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게 아쉬웠다.
현대인은 절대 먹어볼 수 없는 진짜 오리지날 조선 시대 오첩반상이라는 것에 얼른 숟가락을 들었다.
‘음... 이 맛은...’
맑은장국부터 한 숟가락 떠먹었는데, 내가 기대하던 맛과는 다른 맛이 혀와 입안을 채웠다.
‘애미야 국이 짜진 않고, 떫다! 아주 떫어.’
춘봉이 기억하는 된장의 깊은 짠맛 대신 오랜 기간 숙성발효되어 타닌성분이 너무 많아진 묵은 된장의 떫은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물론, 이 타닌의 떫은 된장 맛은 현대의 된장에도 있는 맛이었다.
하지만, 현대 한국에서 끓이는 된장국에는 여러 재료와 조미료가 들어가 떫은 타닌 맛을 감추어주고, 시원하면서 묵직한 된장의 맛만 느끼게 하는 게 기본이었다.
하지만, 지금 먹는 된장국에는 그런 타닌의 떫은맛을 감추어 줄 부가 재료가 없었고 그러다 보니 떫은맛이 너무 도드라졌다.
‘두부와 양파를 넣으면 이 떫은맛이 좀 없어지고 맛이 깊어질 것 같은데...’
된장국의 아쉬움을 보완해줄 방법이 머리에 떠올랐지만, 두부는 몰라도 양파는 지금 시대에 조선에 있는지 확실치 않았다.
이름 그대로 양파는 서양에서 들어온 양파이기에 언제 어떻게 들어오게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춘봉은 된장국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닭고기 볶음을 입안에 넣었다.
‘맛있다!’
백숙으로 먹었던 닭처럼 질길 거라 걱정했는데, 다행히 닭고기 볶음에 쓰인 닭고기는 부드러웠다.
잘게 채 썬 우엉의 크기와 맞게 잘게 뜯겨 있었는데, 닭고기의 결을 따라 일일이 손으로 뜯은 것 같았다.
‘사람의 노고가 들어가서 그런지 부드러운 식감이구나.’
식감을 위해 닭고기를 일일이 손으로 찢었을 부엌 어멈들의 노고가 느껴졌다.
현대에서 먹던 닭고기 장조림을 먹는 듯한 식감에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간이 살짝 짰지만, 이 정도의 짠맛은 괜찮았다.
살짝 과한 것 같았던 닭고기 볶음의 짠맛은 밥이 입으로 들어서자 바로 감쇄되었다.
아니, 그 짠맛이 백미 밥과 만나 서로 스며들어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래 이거지 이게 밥반찬의 맛이지!’
탄수화물인 쌀밥의 투명한 맛에 짭조름한 간장의 맛을 앞세운 닭고기와 우엉이 슬며시 끼어들어 맛을 더했다.
‘볶을 때 들어간 간장이 예사 간장이 아닌 거 같구나. 깊고도 부드러운 맛이 있어. 4~5년 숙성된 중장인가.’
춘봉은 닭볶음에 쓰인 간장만을 따로 찍어 먹어봤다. 깊고 묵직한 짠맛이 느껴지는 것이 예사 간장이 아니었다.
그깟 흔한 간장이 뭐라고 호들갑 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아는 그 흔한 간장과 조선 시대의 간장은 애초에 맛이 달랐다.
흔히 짠맛이 강한 국간장을 조선간장 혹은 재래 간장이라고 이야길 하며 진간장에 비해 맛없는 간장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었다.
우선 조선에선 장독에서 2년 이상 숙성되어야 간장을 꺼내 먹었는데, 이런 2년 묵은 간장을 ‘햇간장’ 혹은 ‘청장’이라고 불렀고, 4~5년 숙성된 간장을 ‘중장’이라 불렀다.
이처럼 숙성도에 따라 간장의 이름을 달리 붙인 이유는 그만큼 숙성도에 따라 간장 맛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조선간장은 이런 숙성 시간을 가질 수가 없었고, 1년도 안 되는 숙성도로 판매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조선간장은 짠맛이 강해 국의 간이나 맞추는 맛없는 간장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이에 반해 일본식 간장인 왜간장, 진간장은 1년 미만의 미숙한 맛을 속이기 위해 아미노산액과 첨가제를 넣어 간장을 달게 만들었는데, 그 달짝지근한 맛으로 인해 사람들은 진간장이 맛있고 좋은 간장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4~5년 제대로 숙성된 조선 중장을 맛보게 된다면, 그 깊은 맛에 반해 진간장을 다시 찾는 경우는 없었다.
‘숙성된 중장이 맛있다는 건 맛만 보면 다 알지. 하지만, 문제는 가격이었지.’
장독 안에서 세월이란 첨가제가 만들어내는 단맛은 너무나도 맛있었지만, 그 들어간 세월로 인해 가격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고 쉽게 만날 수 있는 간장이 아니었다.
중장 이상 숙성된 씨 간장 같은 제품을 생산해보려고 했던 이들도 있었지만, 결국 그 세월을 버티지 못하고 대부분이 무너졌었다.
종갓집이나 소규모로 생산이 가능한 가정집에서만이 먹을 수 있는 전통 간장이었으니 그 맛을 대중들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쉬웠다.
그리고, 아버지나 형이 식사 전에 숟가락, 젓가락을 간장에 한 번 담갔다가 먹었다는 것도 기억났다.
‘수저의 살균과 입맛을 돋우는 짠맛을 위해서 간장에 수저를 담그는 거였어.’
숙성된 간장의 염도로 혹시나 있을지 모를 숟가락과 젓가락을 소독하는 조상의 지혜에 감탄했다.
중장의 달짝지근하면서도 짭짜름한 맛과 쫄깃하게 씹히는 닭볶음 덕에 밥이 절로 입으로 들어갔다.
죽순조림도 처음 먹었을 때는 특유의 서걱거리는 식감이 거슬렸지만, 조림에 베여있는 간장 양념이 퍼지자 죽순 특유의 풍취가 같이 살아나 입안을 즐겁게 했다.
숙채 나물로 나온 채 썰어 삶은 무는 부드러웠고, 생채로 나온 부추 무침도 고추장 베이스가 아니라 간장 베이스라 짭짜름하면서도 상큼한 맛이 있었다.
그에 반해, 장에 찍어 먹게 나온 달걀 물 입힌 표고버섯 전은 싱거웠는데, 중장에 푹 찍어 먹으니 싱숭생숭한 버섯 맛이 올라왔다.
‘간장 베이스의 음식이 대부분이지만, 승리의 공식과 같은 단짠단짠이 아니라, 짜면서도 싱거운 짠싱짠싱의 새로운 공식이 지배하는 밥상이었어. 한 상 잘 먹었다.’
“병을 앓고 나니 식욕이 돋는 모양이구나. 내일부터는 많이 담으라고 이야기하마.”
반찬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먹다 보니 떫은맛의 장국까지 모두 다 비워버렸다.
이런 춘봉과는 반대로 아버지와 형은 밥이나 찬을 어느 정도씩 남겼다.
‘응? 흔히 알던 조선사람은 대식가라는 관념이 잘못된 건가? 그게 조선 후기 한정이었나?’
“내림 상으로 받아먹을 게 없다 보니 언년이가 울상이 되었구나. 하하하.”
큰형 원길의 내림상이라는 말에 춘봉은 아차 싶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형이 밥과 찬을 조금씩 남긴 게 이해가 되었다.
‘양반들의 밥상 예절를 내가 어긴 것이구나.’
말은 양반들의 밥상 예절이라고 했지만, 내림상 문화는 양반뿐만 아니라, 조선의 국왕까지도 따르던 한국 특유의 식사문화이자 예절이었다.
보통 양반가의 남자들이 먹고 남은 찬은 여인네들이 내림하여 먹었고, 그들이 먹고 남은 것은 다시 종들에게 내림 되어 먹는 게 보통이었다.
물론, 내려오는 내림 상에 밥과 국을 따로 더하여 먹었다.
그렇기에 양반이라면 당연히 가족과 아랫것들을 위해 밥을 남기는 것이 식사 예절이었다.
내릴 것 없이 잔반까지 다 먹어 버리는 것은 아래에 남겨줄 사람이 없다라는 뜻이었고, 싹쓸이하듯이 모든 걸 다 먹는 것은 자신의 신분이 낮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했다.
괜히 내림상으로 받아먹을 반찬이 없어진 언년이에게 미안했다.
“식사 다했으면 일어나자꾸나.”
원길은 춘봉을 일으켜 세워 사랑방 밖으로 이끌었다.
원길과 춘봉이 사랑방을 나오자 금세 상들이 치워졌고, 저녁 인사를 드리고 사랑채를 물러나는데 웬 젊은 여자가 사랑채로 들어갔다.
“응? 저 여자는?”
“이번에 아버지가 들인 두 번째 첩이다.”
원길은 사랑방으로 들어가는 젊은 첩을 흘겨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춘봉을 데리고 곁채로 움직였다.
환생 전의 소년 원종이라면 남녀 간의 이치를 몰랐기에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이젠 어른의 기억도 가지고 있기에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바로 왔다.
‘아무리 색(色)에 빠져있다 하더라도 식사를 끝내자마자 첩을 방으로 들이는 건 좀 이상한데.’
식사하자마자 첩과 그 짓을 하려는 아버지의 행동이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
“더운데 너도 벗거라. 이 더운데, 아버지는 무슨 계집질이 그리 좋으신지 원. 부채질 좀 잘하거라.”
원길은 자신의 곁채로 오자마자 쓰고 있던 갓과 도포, 두루마기를 벗어 던졌다.
괜한 트집을 몸종에게 토해내자 이제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부채질을 했다.
“정축지변 때 아버지와 동문수학했던 친인들이 모두 죽어 버렸기에 적적해서 색에 빠지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첩을 들이는데 90섬이나 썼다는 건 너무 하다고 생각되지 않느냐?”
“네? 그게 무슨...”
“아, 네게 이야길 하지 않았던가? 아버지가 둘째 첩을 들이는데 90섬이나 썼다. 한양 교방(敎坊)에서 빼 왔다고 하는데, 아무리 외모가 아름다운 미기(美妓)라고 해도 90섬이 말이나 되는 것이냐?”
‘90석이면 한섬이 대충 두 가마니 이니 180가마? 그럼, 대충 쌀 한 가마가 40만 원 정도 했으니, 7200만 원 정도쯤 되려나. 뭐, 조선 시대에는 쌀값이 더 비쌌으니 그 이상의 가치인가.’
“더구나, 올해는 역병이 돌아 김매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에 흉년이 들 게 뻔한데, 저런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쓰시니... 어휴, 그냥 계집종이나 가지고 노시면 될 것이지. 괜히 헛돈을 쓰시고 말이야.”
“형님. 흉년이 든다면 올해 거두어들이는 수확이 어느 정도 될 것 같습니까?”
“올해는 한 200섬이나 거두어들이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
‘200섬이라.’
뭔가 천석꾼 만석꾼에 비하자면 부족한 듯싶었지만, 200섬 정도면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입을 좀 줄이려고 하는데, 이젠 아버지가 관심 없는 첫째 첩이랑 애들을 외거노비들에게 보낼까 생각중이다.”
“네에?”
흉년이 왔다고 아버지의 첩과 이복동생들을 내쫓으려 한다는 원길 형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첩이나 이복동생들을 형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건가?’
궁금증이 생기자 원래의 기억이 다시 내게 알려주었다.
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천자 수모 법이나 노비종모법 등 여러 가지 노비에 관한 법들이 떠올랐다.
양반의 씨라고 해도 어미가 노비이면 그 자식들도 그대로 노비일 뿐이었다.
보통은 노비에게서 난 자식이 불쌍하다고 그 아비들이 면천 시켜주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새로 들인 첩에게 빠져있는 아버지는 전혀 그런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거기에 흉년으로 거두어들일 재산에 민감한 큰형을 보니 형도 그런 면천에 대한 것은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현대인인 내가 가진 보편적 사고방식으로는 아버지나 형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긴 힘들구나.’
아무리 노비에게서 낳은 자식이라도 자식이었고, 배가 다른 이복형제라고 해도 형제긴 형제였다.
헌데도 마치 물건처럼 처리한다고 하자 현대인의 가치관을 가진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종이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다섯 살 즈음의 어린 동생들 얼굴이 떠오르자 매몰차게 그 애들을 내몰기에는 마음이 무거웠다.
“딸린 애 둘까지 해서 외거노비들에게 내려주는 조건으로 소작을 더 받으면 어느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흉년인 만큼 군식구를 줄여야 하는 게 맞겠지?”
군식구를 줄이고 외거노비들에게 소작을 더 받을 수 있는 일거양득의 방법이라고 이야길 하는 형을 어떻게든 말리고 싶었다.
“형님. 그럼, 아버지의 첩과 아이들을 저에게 맡겨보시겠습니까?”
*
[작가의 말]
주위 상황설명을 했으니 이제 일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요!
그리고 곡식의 섬은 갈대나 풀, 짚등으로 짠 가마니로 싼 것들을 말하는데, 석(石)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신라 때부터 섬이란 말이 쓰였으며, 성인 한 사람의 1년간 소비량 또는 장정 한 사람이 짊어질 수 있는 양인 15말의 양이라고 합니다.
리터로 따지면 지금의 한섬은 10말을 뜻하여 대략 180리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벼 한 섬은 200kg
쌀 한 섬은 144kg
보리쌀 한 섬은 138kg 였다고 하는데, 지역마다 또 편차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섬이란 말은 일본이 들어오며 직물로 짠 가마니가 들어온 이후로는 쓰이지 않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쌀 한 가마가 80kg 이 글에서는 대충 한 섬을 두 가마니로 계산을 할 예정입니다.
ps:사실 미디어에서 조선에 내림상 문화가 있었다고만 하고, 정확한 디테일은 알려주지 않았기에 저는 먹고 남은 밥상으로 먹으면 밥이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했습니다.
왕이 흉년이라 찬을 줄이면 궁녀가 굶는다는 그런 말들이 있었으니깐요.
그러다 글을 쓰며 공부해 보니 내림상은 첩 반상과 엮여있는 문화였습니다.
첩 반상에 국, 찌게, 찜, 김치, 장을 포함하지 않는 것은 그것들이 찬이 아니기에 내림상에 언제든 추가할 수 있다는 그런 의미도 있더군요.
그래서 윗사람이 남겨 내림하게 되면 반찬은 그대로 두고 아랫사람들이 밥과 국, 찌개를 추가해서 먹었던 겁니다.
그래서 아랫사람들도 충분히 먹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양반가나 먹고살 만한 집 한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