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5화 (5/327)

4. 독상 한상. (1)

‘으응? 이 식감은 도대체 뭐지.’

춘봉은 닭 다리를 씹다 말고 뱉어 버릴뻔했다.

‘뭔가, 닭 다리는 맞는데... 씹히는 느낌이 마치 고무줄을 씹는 그런 느낌이잖아. 왜 이런 거지?’

혹시나 닭 다리에 고무줄 같은 이물질이 있는지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폈지만, 그냥 평범한 닭 다리였다.

닭이 덜 익은 것도 아니고, 하얗게 속살까지 잘 익어 우려진 닭 다리였는데, 이렇게 고기가 씹히지 않는 게 너무나 이상했다.

‘아직 어린아이라 치아가 약해서 씹지를 못하는 건가?’

춘봉은 아직 덜 자란 치아 문제인가 싶어 양손으로 닭 다리 살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아니 어떻게 요리했길래 고기가 이렇게 질긴 거야? 그러고 보니 닭 다리는 또 왜 이렇게 커? 몇 호 닭을 쓴 거지?’

춘봉은 손바닥을 활짝 펴서 손바닥과 닭 다리의 크기를 비교해 봤다.

닭 다리가 손바닥보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더 컸다.

‘아무리 아이의 손이라지만, 이 사이즈는 거의 칠면조 다리 사이즈 인데. 맛이나 냄새는 분명 닭 다리가 맞는데. 왜 이렇게 크고 질긴 거지?’

다시 한번 잘 씹히지 않는 닭 다리 살을 베어 물곤 억지로 씹어봤다. 분명 맛은 닭고기가 맞았다.

한데, 닭 다리라고 하기에는 뭔가 알고 있던 닭의 식감이 아니었다. 그러다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 이런...”

“네? 도련님 어디가 아프신 겁니까?”

옆에 앉아 백숙 먹는 걸 챙기던 박복 어멈은 무슨 일인지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춘봉은 박복 어멈에게 아무렇지 않다며 다시 닭고기를 씹었지만, 왜 닭 다리가 씹기 힘들 정도로 질긴 것인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닭이야. 닭 품종이 문제였어.’

닭 다리가 씹기 힘들 정도로 질긴 이유는 조리상의 문제가 아니라, 재료인 닭이 가지고 있는 문제였다.

‘아마 다 자라다 못해 노계가 된 수탉을 잡았을 테고, 방목해서 키웠으니 이런 질긴 근육이 생길 수밖에 없겠지.’

평상시 먹던 가둬 키운 육계의 부드러운 살이 아니라 방목된 수탉의 다리가 안겨주는 질긴 질감은 어린아이의 턱을 얼얼하게 만들 정도였다.

‘닭고기가 이렇게 맛이 없다니 충격인데 이거... 가만. 그러면 앞으로도 이런 질기고 맛없는 닭을 계속 먹어야 한다는 거잖아.’

춘봉은 요리사답게 맛있는 닭고기를 먹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현대 우리가 시중에서 사 먹는 백숙이나 삼계탕에 쓰이는 닭은 품종 개량되어 길러진 육계(肉鷄)야. 고기의 식감이 부드럽게 만들어진 품종이라는 거지. 조선 시대에 그런 육계 품종이 있을까?’

한참이나 고민해봤지만, 춘봉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메사 긍정적이던 춘봉이 부정적으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건 우리나라가 품종 육계를 먹게 된 것이 채 100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백숙이 아닌 삼계탕이 알려지기 시작한 건 1960년대였고, 보양식이 유행하기 시작한 1970년대가 되어서야 대중들에게도 삼계탕이란 음식이 알려지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삼계탕이 많이 팔리게 되면서 농촌진흥청에서는 삼계탕에 맞는 육계 개량사업을 시작했었다.

농업진흥청은 전국에서 맛있다는 토종닭들을 끌어모았고, 농축산박사들이 품종개량에 나섰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품종 육계가 ‘우리맛닭’이란 삼계탕용 닭이었다.

닭을 크기별로 몇 호라고 부르는 것도 호수제도 이때 개량사업을 하며 만들어진 것이었다.

농진청이 만들어낸 우리맛닭은 전국의 토종닭을 끌어모아 개량했지만, 토종닭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는데, 진짜 토종닭이라고 부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외국에서 들여온 산란계와 육계가 조선에 보급되었었고 6.25 전쟁 이후에는 미국에서도 개량된 품종 닭들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몇천 년을 한반도에서 이어져 내려오던 진짜 토종닭은 외부에서 들어온 품종 닭에게 밀리거나 교잡되어 그 원형이 어떤 것인지조차 모르게 된 것이었다.

다행히, 농진청이 내놓은 우리맛닭은 전해 내려오던 그림 속 전통 닭과 생김새가 비슷했고, 생육도 빠르며 고기의 맛도 부드럽고 좋았다.

그렇게 정부에서 만들어 보급한 우리맛닭은 자연스레 전국에 보급이 되었고, 몇십 년이 지나는 동안 다시 개량되어 부드럽고 맛있는 닭으로 한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농업과학이 만들어낸 우리맛닭의 부드러운 맛에 한국인들의 입맛이 길들여져 버린 것이지. 내가 기억하는 맛있는 닭을 내가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처음 탕반이 앞에 놓였을 땐 탕반 그릇을 싹 비워 버릴 정도로 식욕이 돌았었지만, 질긴 고기를 질겅거리며 씹어 삼키다 보니 채 반도 먹기 전에 배가 불러왔다.

어쩌면 죽만 먹다 위가 작아져서 못 먹은 것인지도 몰랐다.

절반 정도를 남기곤 소반을 밀어내자 박복 어멈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곤, 빠른 속도로 소반을 들고 나갔다.

질긴 닭고기나마 배불리 먹고 눕자 머리에 잡념이 쌓이기 시작했다.

‘아차, 지금 연도가 어떻게 되는 거지?’

궁금증이 생기자 자연스레 연도를 추정할만한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자신의 나이를 알게 되었고, 지금이 어느 시기인지도 알게 되었다.

다만, 그 정보를 추론하게 된 사건이 떠오르자 기분이 찝찔했다.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

자신이 사는 문경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현대에는 경상북도 영주시로 불리는 곳이었는데, 이때는 순흥도호부란 행정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순흥도호부란 지명은 없어져 버린 지명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1년 전에 세조의 동생이자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이 단종복위운동을 순흥도호부에서 벌였고, 박살이 났었구나.’

당연히 복위운동은 실패했고, 복위운동에 가담한 순흥도호부의 부사 이보흠(李甫欽)의 일족과 순흥도호부 인근 30리 사람들에겐 역적의 혐의를 씌워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그리곤 역적이 나온 땅이라고 순흥도호부를 조각내어 행정 구역 자체를 없애버렸다.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 불리는 사건이었는데, 내가 태어나기 1년 전인 정축년에 일어난 사건이었기에 자연스레 나이를 알게 되었다.

정축지변이 일어난 다음 해인 무인년생으로 9살이었다.

이걸 역순으로 계산하자 1458년생이며 지금은 서력으로 1467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면 지금의 왕은 세조로 구나. 다행이다.’

춘봉은 지금의 왕이 세조라는 걸 알게 되자 마음이 안심되었다.

‘왜란이나 호란 같은 전쟁 시기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평화로웠던 시기에 태어났어.’

물론, 성종 이후 폭군 연산군의 시대가 예약되어 있지만, 아무리 연산군 시대가 살기 어렵다고 해도 왜란이나 호란이 벌어졌던 전쟁통만 할까 싶었다.

***

“도련님 저기 보세요. 이제 역병을 태우는 연기도 나지 않고, 역신이 물러가신 것 같아요.”

박복 어멈의 말처럼 열린 창밖으로는 뭔가를 태우는 연기가 나지 않았고, 푸르게 맑은 하늘만이 보였다.

그리고, 하늘을 보자 한숨도 같이 나왔다.

‘내가 왜 환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

기와집이 여러 채 있는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니 먹고 살 걱정은 없을 것 같았지만 뭘 하고 살아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양반이라면 당연한 과거 준비를 해서 관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지만, 앞으로의 연산군 시대가 걱정되었다.

‘그때는 진짜 줄 한번 잘못 서면 가족이 씨몰살 당해 버린다고.’

물론, 과거 공부를 하며 유학을 배우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어느 정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배우기도 했고, 공맹의 도는 결국 유학자들의 말장난과 지배이론일 뿐 백성들을 위한 진정한 학문이 아니었다.

‘늘 위정자들이 뭘 하든 백성은 고통 받았다로 결론이 났었지.’

붕당이니 세도정치니 유학의 파벌싸움으로 인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가득했다.

‘그리고 제일 빡치는 건, 유교탈레반 시대에는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생긴다는 거지.’

내가 좋아하는 요리를 하며 풍족하게 한평생을 보내고 싶은데, 조선 시대에는 남자가 부엌에서 일한다고 하면 부랄 떨어진다고 난리를 칠 터였다.

‘유교탈레반과는 멀리할수록 좋을 것 같아. 그러다 정 심심하면 미식 관련으로 프랑스나 이탈리아 요리를 우리나라 전통음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고.’

그냥 단순히 생각한 것인데 솔깃했다.

프랑스의 푸와그라나 이탈리아의 피자가 한국에서 기원 되었다고 요리서에 그림을 넣어 기록해 버리면 유럽 놈들이 피눈물을 흘릴 터였다.

‘아예 그런 조리서를 만들어 유럽으로 보내 그 나라 역사에도 기록되게 하는 게 좋겠다. 그러면 유럽 애들이 알아서 기겠지.’

요리와 미식의 선진국이라고 거들먹거리며 비싸게 굴었던 프랑스와 이태리의 쉐프들이 내가 남긴 요리를 배우기 위해 한국으로 유학 온다는 생각을 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아예 훠궈, 딤섬, 마라탕도 우리 것으로 다 해버리지 뭐. 짱개놈들이 설치지 못하게 기록으로 조져보자고.’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 할지 고민했는데, 아주 재미있는 요리 관련 일을 할수 있을 것 같아 즐거웠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유교 시대에 양반이 요리를 한다고 했을 때 생길수 있는 리스크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

“쾌차하신 이후에 키도 더 크신 것 같습니다. 옷을 새로 지어야겠어요.”

박복 어멈은 옷을 입고 방문을 나서는 춘봉의 모습에 아주 뿌듯했다.

하지만 춘봉은 땀을 뻘뻘 흘리며 더위에 헐떡거렸다.

병이 다 나았기에 문안 인사도 겸해 저녁 식사를 아버지와 큰형과 먹기로 했는데, 이제껏 입지 않았던 의관을 갖춰 입는 게 문제였다.

바지를 입고 데님을 묶는 일부터 저고리, 마고자, 쾌자까지 박복 어멈이 입혀주었는데, 그 위에 도령 모자라는 복건까지 쓰게 되니 땀이 뿜어져 나오듯이 흘러내렸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땀이 뿜어져 나오는 늦여름이었기에 갑갑했다.

‘에어컨! 찬바람이 그리워! 성인(聖人) 캐리어님이 만드신 그 에어컨이 필요해.’

더운 여름 에어컨 찬바람을 느낄 때마다 에어컨 발명가인 캐리어에게 고마움을 표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에어컨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캐리어 님 그립읍니다!!’

“도련님 그래도 여름이라 속저고리와 합당고는 빼 드린 거예요.”

합당고란 팬티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옷이었는데, 박복 어멈의 이야기에 힘이 빠졌다.

“어멈. 모시 적삼 같은 얇은 옷은 없는 거요? 이걸 입고 있으면 쪄 죽을 것 같은데.”

“모시 적삼은 방에 있을 때나 입는 거지 의관을 갖추어야 하는 때는 입을 수 없답니다. 얼른, 사랑채로 가십시오.”

‘내가 진짜 에어컨은 못 만들지만, 단추, 지퍼 만들어내고, 복식 간소화 꼭 이루어낸다. 개량 한복 님도 보고 싶읍니다!’

한식 조리사들이 입었던 개량 한복이 엄청 구리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개량 한복이 선녀였다.

땀을 흘리면서 문밖 주위를 둘러보자 춘봉이 머무는 곁채와 아버지의 사랑(舍廊)채가 눈에 들어왔다.

보통 조선 시대의 양반가라도 미성년자인 남자아이는 여인네들이 거주하는 안채에 같이 사는 것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춘봉은 역병에 걸리다 보니 사랑채에 딸린 곁채에 격리가 되었던 것 같았다.

현대 한국인이라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란 문학 작품 때문에 사랑채는 손님들이 거하는 방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실제 사랑채는 집안의 주인이 머무는 곳이었다.

그 사랑방에 달린 작은 곁채가 바로 손님들이 머무는 방이었다.

그래서 양반가의 고택에는 행랑채와 사랑채가 있는 공간 사이에 손님들이나 성인이 된 아들들이 머무는 곁채가 여러 채 지어져 있는 것이 기본이었다.

***

“으음... 그래 병이 나았다고 하니 다행이구나. 다들 먹자.”

원종이의 기억으로만 봤던 40대 중반의 아버지는 죽다 살아난 아들이 문안 절을 하는데도 그냥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반면 눈에 쌍꺼풀이 진하게 있는 큰형 전원길은 건강하게 병을 이겨낸 막내의 어깨를 친근하게 잡고 자리에 앉혔다.

그리곤 춘봉의 등을 두드려 주며 몸이 괜찮은지 물었다.

‘어쩌면 아버지의 저런 무뚝뚝함 때문에 형이 다정한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전생에서는 외동으로 컸기에 형제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여기에선 형이 둘이나 있고, 배다른 동생도 둘이나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허허 어찌 이리 땀을 흘리느냐? 몸이 아직도 힘든 것이냐? 아차차, 격리한다고 부채질할 계집종도 붙여주지 않았었구나. 언년아! 부채 들고 들어오거라!”

전원길의 말에 밖에서 원종이보다도 더 어린 계집종이 한달음에 들어 왔다.

언년이의 얼굴을 보니, 박복 어멈의 딸이라는 게 떠올랐다.

“어허 대원선(大圓扇)에 박쥐나 학이 그려진 것으로 들고 와야지. 원앙이 그려진 부채로 뭘 하는 것이냐?”

전원길의 호통에 언년이는 다시 뛰어나가 장수와 상서로움의 의미를 지닌 박쥐가 그려진 둥근 부채를 들고 들어왔다.

언년이는 자신도 땀을 흘리면서도 자기의 몸만 한 큰 부채를 들고 춘봉에게 부채질을 했다.

“허허 그래. 이래야 더운 여름에도 의관을 정제하고 살 수 있는 것이지. 이 형은 이런 부분까지도 생각하고 있단다. 이제 들자꾸나.”

원길은 이런 작은 것까지도 신경 써주는 그런 자애한 형이라고 보이고 싶었겠지만, 받아들이는 춘봉으로서는 그 반대였다.

‘원길 형님, 제가 있던 때의 박쥐는 그게... 그. 짱개. 우한... 휴우... 여튼 그런 긍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구요.’

그리고, 자신을 위해 땀 흘리며 부채질하는 언년이도 눈에 보이자 괜스레 마음에 걸려다.

세 남자가 식사하는 사랑채 안방에는 아버지와 큰형에게 부채질하는 계집종이 따로 붙어있었고, 사랑채 마루에는 상을 내어오는 계집종들을 감시하듯 지켜보며 음식을 넣고 있는 큰형수가 있었다.

‘...’

춘봉은 남존여비(男尊女卑), 반상(班常)의 법도가 살아있는 조선을 이 식사 한 번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독상에 앉아 상을 받아보니, 오첩반상이 차려져 있었는데, 환생 후 처음 받아보는 독상의 풍성함에 놀랐다.

양반가에 오첩반상이 올라왔다는 말에 에게? 반찬이 다섯 개뿐이야? 그게 무슨 풍성? 양반도 별로 못 먹었네.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현대인이라면 오첩반상이기에 다섯 개의 반찬이니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학교나 군대에서 주는 밥도 기본 1식 4찬으로 나오는 수준이니 다섯 개 반찬이 그리 크게 안 와 닿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 첩반상을 세는 방법은 현대의 개수와는 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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