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2부 25권 - 20화
계단을 내려간 지하 업장은 마치 신월동의 프리 스테이션을 옮겨다 놓은 듯한 구조였다.
카운터 안쪽에 노래할 수 있는 홀, 안쪽 복도를 따라 룸이 있었는데 초저녁이라 그런지 음악이 나오는 룸은 없었으며, 노릿하게 밴 술 냄새와 퀴퀴한 곰팡내, 그 위에 뿌려놓은 방향제 냄새가 가득했다.
“어서 오십쇼!”
한눈에 봐도 ‘나 깡패니까 알아서 조심하쇼.’ 하는 면티에 정장 차림의 남자와 하얀 셔츠에 검은색 바지와 조끼를 입은 젊은 남자 둘이 강성태를 맞았다.
“지배인님? 이거요.”
지배인이라고 부른 덩치에게 V자를 그리듯 검지와 중지를 펼쳐 보인 호객꾼이 강성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재미있게 즐기세요, 형님.”
의미심장한 눈짓을 던진 호객꾼이 나가자 직원이 다가왔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안을 한 번 둘러본 강성태는 직원이 가리키는 대로 움직였다.
복도 안쪽에는 좌우로 두 개씩, 룸이 모두 네 개였다.
가장 안쪽의 오른쪽 룸 문을 연 직원이 강성태가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일단 하라는 대로.
룸 안쪽 역시 처음 프리 스테이션을 찾아갔을 때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강성태는 안으로 들어가 문을 바라보는 중앙 소파에 앉았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엎어놓았던 컵을 세워준 직원이 녹차 캔을 따서 따라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진짜 마약을 돌리나?
아니면 이렇게 꼬드긴 뒤에 말로만 듣던 바가지를 씌우는 술집인가?
잠시 안을 둘러보았을 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직원 둘이서 쟁반 가득 술과 안주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주문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12년짜리 국산 양주 작은 병과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가는 맥주 열 병, 수박, 참외, 포도 반 송이를 올려놓은 빈약한 과일 안주, 한치와 땅콩이 담긴 마른안주 접시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주문하지 않은 술과 안주를 가져온 직원이 강성태의 의사 따위 상관없다는 듯 능숙하게 양주와 맥주 세 병의 뚜껑을 따서 늘어놓았다.
완전히 바가지 술집 꼴인데?
지켜보는 강성태를 두고 고개를 숙인 두 놈이 나간 뒤였다.
이번에는 문이 열리더니 지배인이 평범하게 생긴 아가씨 두 명과 함께 들어섰다.
아가씨들은 스물 초반으로 보였는데 강성태를 잠깐 흥미롭게 보았을 뿐, 바로 권태로운 표정을 드러냈다. 형식적으로 인사한 뒤에 강성태의 양쪽에 앉았다.
시장에서 사 입은 듯한 싸구려 원피스에서 향수 냄새가 역할 정도로 진하게 풍겼다.
“밖에서 들으셨지? 우리가 물건은 최상급으로 갖췄거든. 어때요? 이렇게 셋이서 재미나게 놀고 40.”
“아가씨들까지?”
“그래야 진짜지! 원래는 60 받아야 하는 건데 손님도 없고, 요즘 경기도 그렇고, 40에 해드리는 거야.”
“칵테일도 있다고 들었는데?”
“많이 아시는구만.”
강성태의 질문에 지배인이 히죽 웃었다.
“칵테일은 일곱 개로 해드릴게.”
“뭐 뭐 섞어요?”
“애시드하고 필로폰, 엑시터시, 프로포폴, 좋은 건 전부 추려서 전문가가 조합한 건데 이거에 최고야.”
설명을 마친 지배인이 오른손 주먹 위쪽을 왼손 손바닥으로 연달아 내리쳤다.
“여기 아가씨들도 칵테일이라면 환장해.”
강성태는 좌우를 돌아보았다.
“오빠. 우리 칵테일 하자.”
지배인의 말대로 들어설 때와 달리 아가씨들의 눈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이렇다면 진짜로 마약을 돌린다는 의미인데?
강성태는 어디까지 가는지 확인하기로 했다.
“칵테일로 하죠. 그런데 여기 술값은 얼마예요?”
“안심하고 드셔. 기본만 받을게.”
“지배인 오빠? 우리 피우는 담배 좀 줘요.”
술 가격을 알려주지 않은 상태에서 아가씨가 담배 주문을 얹었다.
고개를 끄덕인 지배인이 나가자 아가씨 둘이 얼음을 꺼내 물잔에 채웠고, 양주를 따랐으며, 이어 맥주잔에 맥주마저 채웠다.
“안 드세요?”
“약 오는 거 보고 마실 테니까 먼저 마셔요.”
“약 진짜 좋아하나 보다.”
나이나 이름 따위 묻지 않았다. 어차피 진짜로 대답할 리도 없었고, 솔직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아가씨 둘이서 양주를 마시고, 다시 잔을 채웠을 때였다.
손수건을 둘둘 말아 손안에 쥔 지배인이 안으로 돌아왔다.
“받아.”
그는 먼저 노란 고무줄을 오른쪽의 아가씨에게 건넸고, 이어서 손수건을 테이블에 펼쳐놓았다.
얇디얇은 주사기 세 개가 손수건 사이에서 몸을 드러냈다.
“다른 곳은 하나로 돌리는데 우리는 보다시피 사끼를 따로 써. 이렇게 양심적으로 장사하다 보니까 남는 게 별로 없어.”
“이거 어디에서 받았어?”
강성태의 질문을 받은 지배인이 손수건을 펼치느라 굽혔던 상체에서 고개만 들었다.
“물건 어디에서 구했냐고?”
뭐야?
지배인의 눈매가 단박에 바뀌었다.
강성태의 눈빛을 확인한 지배인이 상체를 천천히 세웠다.
“어이? 손님이라고 대우해주고, 아가씨들 옆에 두니까 목에 힘 들어가나 본데 얌전히 놀다 가.”
“마지막으로 묻는다. 약 어디에서 났어?”
“그런데 이 새끼가?”
강성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씨발놈이? 일어서서 뭐하려고?”
픽 웃은 강성태는 소파를 밟고 단박에 테이블에 올라섰다.
‘어?’
휙, 콰작!
“꺄악!”
강성태가 놀라서 바라보는 지배인의 턱을 세차게 걷어차는 순간, 아가씨들의 비명이 터졌다.
콰드등! 콰등!
문에 부딪혔던 덩치가 테이블을 붙잡으며 버텼다.
맷집은 인정.
훌쩍 뛰어내린 강성태는 힘겹게 돌아보는 덩치를 향해 오른손 주먹을 힘껏 내질렀다.
쩌어억!
테이블을 잡고 있던 탓에 오른쪽으로 넘어갔던 덩치가 철퍼덕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아가씨 둘은 고개를 모은 채 곁눈질로 강성태를 살피고 있었다.
온갖 꼴을 다 당하며 마약 유통을 막았다고 생각했더니 다른 곳도 아니고 강남 한복판에서 이런 식으로 돌고 있었나 보다.
문이 열리며 직원 두 명이 안을 보았다가 후다닥 입구로 튀었다.
“아저씨 큰일 난 거예요. 앞에 세워둔 차에 오빠들이 잔뜩 있어요.”
겁에 질린 얼굴 반, 걱정된다는 표정 반으로 오른쪽에 있던 아가씨가 건넨 경고였다.
콰응.
“뭐야?”
그 뒤에 홀 건너편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고함이 들렸다.
강성태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덩치들이 잔뜩 있다더니 당장 달려오는 덩치는 달랑 다섯 명이었다.
대신 하나같이 땅땅한 체형에 거친 움직임이었다.
“저 새끼야?”
직원들을 돌아보았던 덩치들이 다시 고개를 돌려 강성태를 살폈다.
“너 뭐야, 이 새끼야?”
“여기 대가리가 누구냐?”
“아니 그런데 이 새끼가 진짜?”
굳이 이런 놈들에게서 욕먹어 가며 싸우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고룡동이 희생될 정도의 싸움을 통해 막았던 마약이 이런 식으로 돌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좋게 대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강성태는 곧바로 앞으로 나갔다.
쩌어어어억!
가장 앞에서 욕을 뱉었던 놈의 눈이 풀어지며 고개가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쩌어어억! 쩌어어어억!
연달아 날린 강성태의 주먹에 뒤편에 있던 두 놈이 뻣뻣하게 굳으며 뒤로 넘어갔다.
세 놈이 연달아 바닥에 처박히자 남은 두 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신강남파 강성태다. 여기 대가리가 누구야?”
“뭐?”
픽 웃은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김진용의 번호를 찾아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 김진용입니다, 형님.
“진용아. 여기 강남에서 논현동으로 가는 뒤편 골목이거든. 마약 장사하는 놈들 가게인데 위치 알려줄 테니까 강남 숙소에서 열 명만 데리고 와.”
- 예? 형님? 알겠습니다, 형님.
강성태는 남은 두 놈 중 왼편에 있는 놈을 향해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좋은 말로 할 때 위치 알려줘.”
이걸 어떻게 하지?
왼편 놈이 오른쪽 놈을 돌아보았다.
이 새끼들이 진짜 장난하는 줄 아나?
강성태는 대뜸 왼쪽 놈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쩌어어어억! 철퍼덕!
놈이 넘어지는 것과 동시에 강성태는 남은 한 놈에게 다시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위치 정확하게 말해. 아니면 다시는 못 걸어 다니는 수가 있다.”
“예, 형님.”
잘생긴 인물, 한 방에 한 명씩 날리는 주먹, 거침없는 말투, 이제야 남은 한 놈은 강성태의 정체를 믿는 눈치였다.
“여기가 어디냐 하면 말입니다.”
- 야, 이 개새끼야! 너 지금 앞에 계신 분이 누군지 알아? 신강남파 큰형님인 거 알고도 지금 대들었어? 이 씨발 새끼들! 모가지가 백 개라도 돼? 백 개든 천 개든 오늘 밤에 다 울대 갈라줄라니까 얌전히 위치 말하고 형님 모시고 있어, 이 씨발 새끼들!
정말이지 숨도 안 쉰 것처럼 튀어나온 김진용의 거친 고함이 스마트폰을 향해 선 덩치의 이마를 사정없이 때렸다.
얼이 빠진 덩치 놈이 공손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세심하게 위치를 알려주었다.
“진용아. 위치 알겠어?”
- 10분 안에 가겠습니다, 형님.
통화를 마친 강성태가 종료버튼을 눌렀을 때였다.
또다시 입구 문이 거칠게 열리며 세 놈이 더 들어왔다.
그중 한 놈은 그나마 서른 후반으로 보였다.
바닥에 널브러진 놈들, 공손하고 조심한 태도로 서 있는 덩치 한 놈, 쭈뼛대는 직원 둘, 서른 후반으로 보이는 덩치가 주변을 둘러본 뒤에 강성태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어디서 오셨소?”
“신월동.”
무슨 대답이 이래?
정체를 아냐는 듯 서른 후반의 덩치가 김진용과 통화한 덩치를 돌아보았다.
“신강남파 강성태 형님이시랍니다, 형님.”
답을 들은 서른 후반의 덩치가 슬로비디오를 틀어놓은 것처럼 천천히 강성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설마? 아닐 거야.
그의 눈에 담긴 건 의심이 아니라 소망이었다.
“제가 진용이 형님이란 분과 통화했습니다, 형님.”
“진용이 형님? 혹시 블라이스 엔터 김진용 형님이라고 하셨냐?”
“그건 못 들었고, 형님. 10분 안에 이리 오신다고 했습니다, 형님. 목소리 들어보면 생활하시는 분 맞습니다, 형님.”
대화를 들어보면 서른 후반은 김진용을 아는데 정작 통화한 놈은 얼굴을 본 적이 없는 눈치였다.
이것들은 진짜 정체가 뭐지?
깡패라는 것들이 강남에서 장사하면서 신강남파 김진용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끄응.”
룸 안쪽에서 쓰러졌던 지배인 놈이 복도로 나서며 강성태의 의문을 잘랐다.
“너 이 새끼?”
이것들이 그런데?
다른 때, 다른 일이었으면 모르겠는데 마약을 대놓고 파는 놈들이어서 그런지 욕을 뱉는 순간 적당히 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
쩌어어어억! 털썩!
강성태는 겨우 나온 지배인 놈을 깔끔하게 쓰러트렸다.
“신강남파 강성태 형님이십니까?”
“나는 당신 같은 동생 둔 적 없으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마약 어디에서 구했는지나 말해.”
“그게 형님.”
서른 후반의 남자가 어렵게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콰으응!
문이 부서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칠게 열리더니 눈이 반쯤 뒤집힌 유충일이 뛰어들었다.
이렇게 빨리?
“이런 씨발 새끼들이!”
유충일만이 아니었다.
“야! 다 조져!”
조성호와 광주 덩치들이 우르르 뛰어들어서 들고 온 배트와 쇠파이프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퍼윽! 퍽! 퍼으윽! 퍽! 퍼윽!
서른 후반의 덩치, 그와 함께 들어온 두 놈, 전화 받았던 놈, 겨우 정신을 차리고 상체를 반쯤 일으켰던 놈들에게 쇠파이프와 배트가 떨어졌고, 발길질이 날아갔다.
“괜찮으십니까, 형님?”
개 패듯 두들기는 장면을 배경으로 유충일이 강성태에게 건넨 질문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
“논현동에서 동생들 옷 찾아서 클럽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형님. 도로 중간에서 전화 받고 바로 차 돌렸습니다.”
옷을 찾는다고?
“업장에서 입는 양복만 전문적으로 만들어 주는 양복점이 역삼동 뒤편에 있습니다, 형님. 뒷길로 달리면 이곳하고 5분도 안 걸립니다.”
유충일이 설명을 마쳤을 때, 축 늘어진 덩치들의 뒷덜미를 당겨 홀 중앙으로 끌고 간 광주 덩치들이 놈들을 줄줄이 바닥에 꿇렸다.
“이 씨발 새끼!”
퍼윽! 퍽! 퍽! 퍽!
반 박자 늦게 끌려가던 지배인 놈이 버둥대다가 조성호의 거친 발길질을 머리를 감싸며 받아냈다.
“조성호! 그만하고 안에 들어가서 테이블 위에 주사기 가져와!”
“예, 형님.”
숨을 내쉰 조성호가 재킷을 매만진 뒤에 곧장 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손수건에 주사기 세 개를 싸서 들고나왔다.
“이것들이 약을 팔았습니까, 형님?”
놀라서 묻는 유충일의 질문에, 강성태는 고개만 끄덕였다.
“이거 어디에서 받았는지 확인하고, 손님 명단 있는지도 알아봐. 안에 아가씨들한테 물어봐서 미성년자 여자애들 고용한 거 없나도 보고.”
“예, 형님.”
유충일이 사명감 가득한 눈으로 답을 내놓았다.
어떤 새끼를 먼저 조져줄까?
그런 뒤에 그가 정말 독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움찔한 서른 후반의 놈이 고개를 움츠릴 때였다.
콰응!
저러다가 오늘 문짝 떨어지지 싶을 정도로 거칠게 문이 열리며 이번에는 김진용과 정소국이 강남 덩치들과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김진용과 정소국이 먼저 인사했고, 두 사람을 향해 유충일과 조성호가 상체를 숙였다.
“어떤 새끼가 여기 대가리야?”
“안녕하십니까, 형님? 서천 인범이 형님 행사장에서 인사드렸던….”
김진용의 질문에 서른 후반의 남자가 답을 하는 순간이었다.
휙! 콰작!
김진용이 그의 얼굴을 세차게 걷어찼다.
콰작! 콱! 콰윽! 퐉!
서른 후반으로 보였던 놈 역시 제법 땅땅한 체격이었음에도, 덩치가 워낙 커다란 김진용이 짓밟자 마치 아이가 어른에게 얻어맞는 것처럼 보였다.
“이 개새끼야! 형님이라고 부르지를 말든가, 우리 큰형님께 대들어놓고 뭘 잘했다고 이름을 팔아!”
하는 모양으로 봐서는 서른 후반으로 보였을 뿐, 실제로는 나이가 어렸던 모양이었다. 하기는 워낙 인상들이 더러워서 보통 나이보다 서너 살, 많게는 열 살 정도 위로 보이기도 하니까.
대략 5분쯤 뒤에 상황이 정리되었다.
“진용아. 충일이한테 말해뒀으니까 마약 관련한 거 싹 알아봐.”
“예, 형님. 봉진이가 차 가지고 있습니다, 형님.”
“놔둬.”
“알겠습니다, 형님. 들어가십시오, 형님.”
궁금한 게 많았지만, 이 정도는 김진용에게 맡겨주는 게 좋았다.
계단을 따라 밖으로 나오자 입구에 있던 강남 덩치들이 강성태를 향해 고개를 숙였고, 그 옆에서 호객꾼 놈이 매에 잡힌 병아리처럼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저놈 역시 김진용에게 맡기는 게 현명한 일이었다. 물론 강성태가 직접 확인하는 것보다 처참한 과정을 거치겠지만, 마약을 대놓고 호객한 짓거리에 대한 벌은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강성태는 호객꾼을 외면하고 도로로 나섰다.
**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친 강성태는 조태완, 이병렬, 박노익의 순서로 전화를 받았고, 이어서 김진용의 보고도 들었다.
- 보따리 장사꾼하고 유학생에게서 받은 약에 물을 타서 사용했습니다, 형님. 조직은 따로 없고, 전에 생활했던 놈이 양아치 새끼들 몇 놈 데리고 불법 영업한 게 전부인 거 같습니다.
“확실해?”
- 거짓말 못 했을 겁니다, 형님.
김진용의 대답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챈 강성태는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통화를 마쳤다.
어떻게 보면 해프닝이라고 할 정도의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이미 마약이 보따리 장사꾼이나 유학생들을 통해 쉽게 들어올 정도로 널리 퍼졌다는 증명 같았다.
이럴 때 독하게 틀어쥐지 않으면 언젠가는 골목에서 오만 원짜리 지폐 한 장에 마약을 거래할 날이 있을 테고, 그 후유증으로 인한 잔인한 범죄, 음주운전은 비교도 하기 힘든 처참한 사고, 길에 널브러진 채 잠든 노숙자들을 숱하게 보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할 수 있는 한, 거대한 조직들을 틀어막고는 있지만, 강성태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치와 법이 좀 더 마약에 강력하게 대응하려면, 뭐라고 해도 있는 놈들, 높은 자리에 있는 놈들에게 잔인한 처벌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밤 10시가 다 되었을 때였다.
이번에는 최치곤이 전화를 걸었다.
잠시 저녁에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다음이었다.
- 내일 아버지한테 갈 거지?
“내일이나 모레, 아무 때고 가자. 급할 거 없잖아.”
- 내일 가자. 아버지가 너하고 갈지 모른다고 하니까 엄청 기다리신다.
“말씀드렸어?”
- 그래야 미리 좋은 고기 구해놓거든.
예상하지 못했던 최치곤의 답에 강성태는 기가 막힌 웃음을 토해냈다.
- 집에 혼자 있지? 그러지 말고 나와. 모처럼 포장마차에서 한잔하자.
“그럴까?”
최근 들었던 그 어떤 제안보다 솔깃한 꼬드김에 강성태는 몸을 세웠다. 그리고는 청바지에 면티, 점퍼 차림으로 포장마차를 향해 걸었다.
아르윈과 키란을 부를까도 싶었는데 포장마차에서만큼은 형님, 동생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최치곤과 홀가분하게 마시고 싶었다.
포장마차에서 최치곤과 있다가 자정쯤 연락해서 함께 우동이나 국수를 먹어도 나쁘지 않겠다.
“어머, 삼촌? 어서 와! 진짜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
얽은 자국이 선명한 이모가 반갑게 맞아주는 뒤편에서 최치곤이 팔을 들었다.
늘 앉던 벽에 붙은 자리였다.
“일찍 왔냐?”
“주문도 다 해놨다. 얼른 앉아.”
최치곤의 말대로 자리에 앉기 무섭게 달걀찜과 골뱅이무침이 나왔고, 곧바로 소주와 맥주가 테이블에 놓였다.
“시원하게 한 잔 마시고 시작하자.”
흐뭇한 표정의 최치곤이 소주 반, 맥주 반으로 두 잔을 채우고 나서 하나를 강성태에게 건넸다.
“왜 그래? 뭐 묻었냐? 바꿔줘?”
물끄러미 잔을 내려다보는 강성태를 최치곤이 의아한 표정으로 보았다.
“전에 우리 둘이 이렇게 마시고 있을 때 민정이가 전화하면서 여기까지 단숨에 왔었잖아. 참 엄청난 일들이 있었구나 싶어서.”
“생각이 많아지시네, 우리 서방님.”
“그거 좀 하지 마라니까.”
지친다는 표정으로 강성태가 잔을 들자 최치곤이 건배의 의미로 마주쳤고, 함께 시원하게 들이켰다.
“후-!”
긴 숨소리만큼이나 힘겨웠던 기억들이 단숨에 씻겨나가는 느낌이었다.
“멕시코에도 소주랑 맥주는 가져갈 수 있지? 가끔 이거라도 있어야 숨 쉬지 않겠냐?”
잔을 가져간 최치곤이 또다시 소주 반, 맥주 반을 잔에 부을 때였다. 볼링을 치고 나온 듯한 한 무리의 손님들이 포장마차에 들어섰다.
삼합회, 야쿠자와 싸우고, 멕시코로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저 사람들은 이렇듯 평범하고 평화롭게 지냈던 모양이었다.
“이번엔 뭐가 좋아서 그렇게 흐뭇한 얼굴이야?”
“어둠 속에서 열심히 달린 보람이 조금은 있는 거 같아서.”
“그게 뭔데?”
강성태를 따라서 새로 들어선 손님들을 돌아보았던 최치곤이 다시 시선을 가져왔다.
“그림자는 밝은 세상을 더욱 빛내는 거로 만족해야지, 드러나지 않을수록 좋아. 우리 참 열심히, 잘 달려온 거 같아서, 그냥 그래서 좋았어.”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강성태와 이렇게 단둘이 있는 시간이 만족스럽다는 듯 최치곤이 잔을 내밀었다.
틱.
잔을 부딪치자 맥주잔 특유의 소리가 울렸고, 그 직후에 강성태와 최치곤은 두 번째 잔을 거의 동시에 비웠다.
“크흐.”
감탄사를 뱉어낸 최치곤이 히죽 웃었다.
“내가 너 찾아다닐 때 말이야.”
그런 뒤에 케케묵은 화제를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