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 25권 - 17화 (510/513)

《510》2부 25권 - 17화

제7장. 바뀔까 봐?

안아보기는커녕 손을 잡지도 못했다.

그저 같은 공간에서 얼굴을 마주했을 뿐인데 피로에 지친 안다미와 세상의 추악한 단면에 지친 강성태 모두 피어나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수술 중이면 어떻게 하려고 그냥 와요? 연락이라도 하고 오죠.”

“얼굴 봤으니까 됐습니다. 이렇게라도 잠깐 보고 싶었거든요.”

강성태의 목덜미에 남은 흉터를 확인한 안다미가 시선을 들었다.

“답답해서 그런데 잠깐만 앞에 나갈래요?”

“좋죠.”

안다미의 제안을 강성태가 반갑게 받았다.

“잠시만 나갔다 올게요.”

“예, 선생님. 참! 저분이 간식 사 오셨어요.”

간호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안다미가 몸을 돌릴 때, 강성태는 고개를 짧게 숙여 그들에게 인사했다.

응급실을 나선 강성태는 안다미와 함께 주차장 쪽 계단을 올라 벤치에 앉았다.

바로 앞 도로를 온갖 차량이 가득 메웠는데도 안다미는 마치 숲에 앉았다는 듯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셨다.

“무슨 일 있어요?”

“조금 지쳤었나 봅니다. 치곤이랑 일주일 정도 지방에 다녀오려고요.”

“지쳤다면서요?”

“평택에 계신 치곤이 아버지한테 들렀다가 아래로 쭉 돌아보려고요. 가는 길에 밀동에도 들르고, 나중에 다미 씨와 가면 좋을 만한 장소도 좀 골라놓으려고요.”

말을 마친 강성태는 팔을 들어 이마 아래로 내려온 안다미의 머리칼을 위쪽으로 붙여주었다.

“혼자 있게 해서 미안해요.”

“나 때문이라면 정말 괜찮습니다. 대신 너무 보고 싶을 때면 이렇게 찾아올게요.”

강성태가 말을 마친 직후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초록색 수술복 상의 주머니에서 안다미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네? 알았어요. 바로 갈게요.”

스마트폰을 내린 안다미가 미안한 표정으로 보았고, 그 직후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 응급실을 향했다.

“식사는 잘하고 있는 거죠?”

강성태의 질문을 받은 그녀가 안심하라는 투로 웃었다.

“하고 싶었던 일이잖아요. 나는 다미 씨가 어떤 상황이어도 옆에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계단을 내려선 뒤였다.

안다미가 와락, 강성태의 품에 안겼다.

초록색 수술복이 눈에 띄어서 오가는 이들이 돌아보았는데 강성태는 그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품에 들어온 안다미를 힘껏 안아주었다.

숨 한 번 쉴 정도의 순간이 지나고 안다미가 몸을 세웠다.

“고마워요. 이제 또 씩씩하게 견딜 수 있을 거 같아요. 지방에 조심해서 다녀와요.”

“아버님께 부끄럽지 않은 의사가 될 거라고 믿어요.”

강성태의 말에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인 안다미가 무척이나 아쉬운 얼굴을 보이며 응급실 입구로 들어갔다.

강성태는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신 뒤에 천천히 뱉었다.

붉은색 경고까지 떨어졌던 활력 게이지가 노란색을 지나 파란색 근처까지 올라온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한번 걸어볼까?

신월동을 향해 방향을 잡은 강성태는 인도를 타고 쭉 걸었다.

이 방향의 중간에 순두부찌개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마침 저녁 시간도 됐고, 가는 길에 들러서 할머니가 끓여주는 순두부찌개를 먹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솔직히 배가 그리 고프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순두부찌개와 반갑게 맞아줄 할머니를 생각하자 절로 웃음이 나올 만큼 저녁이 먹고 싶었다.

빠르게 걸은 강성태는 여전히 허름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다섯 개의 테이블 중 두 곳이 비어 있었다.

“할머니?”

“아이고.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눈가 주름이 길게 이어진 주인 할머니가 강성태를 보고는 주방 테이블에 손을 얹고는 상체를 내밀었다.

“좋은 일 있어? 그렇게 꾸며 입으니까 정말 좋다.”

“그래요?”

잊고 있었던 평범한 일상이 좋아서 강성태는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순두부 해 줘?”

“예.”

자리에 앉은 강성태를 여자 손님 세 명이 힐끔거렸는데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냉장고를 연 할머니가 뚝배기에 재료를 담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테이블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이 조태완의 이름을 올려놓고 몸을 떨었다.

“여보세요?”

- 난데, 잠깐 통화되나?

“말씀하세요.”

- 조철호 변호사 알지?

“예. 알죠. 무슨 일이세요?”

- 밀동에 갔었던 일 있잖아. 남순이란 여자애 사건. 그쪽 애들이 장기 15년, 단기 10년을 받으니까 그쪽 부모들이 이제야 울며불며 매달리는 모양이야.

숟가락을 꺼내서 내려놓던 강성태는 천진해 보이던 이남순을 떠올렸다. 마지막에 헤어질 때 안다미의 품에서 그녀를 올려다보던 눈빛도.

- 자기들끼리 나서서 이리저리 손을 써봤는데 검찰 쪽에는 씨알도 안 먹히고, 전관들도 내막을 알고 나면 사건을 맡지 않으려 하니까 정신이 든 모양이지.

혹시 다른 테이블에 들릴까 봐 강성태는 입구를 향해 상체를 돌렸다.

“한 짓을 생각하면 형이 적게 나온 거 같은데 진짜 그 정도가 최선인가요?”

- 소년범이잖아. 거기 미성년자 넘어간 놈은 21년까지 나왔어. 변호사를 내세웠는데도 그 정도면 사람 깬 거보다 세게 나온 거야.

강성태를 다독이는 듯한 조태완의 음성이 먼저 건너왔다.

- 우리 쪽에서 애들 두들겼다고 고소장 쓴 걸 검찰 쪽에서 외면하는 바람에 부모들이 완전히 기가 죽었다고 하더라고. 말로는 보스를 만나서 진심으로 용서를 빌 기회를 달라는데 어떻게 할까?

“보고 싶지 않습니다.”

- 그렇다면 하나만 더 생각해 줘. 조 변호사 말로는 부모들이 남순이가 살 아파트를 하나 사주고, 앞으로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생활비를 지급하겠는데 그건 어때?

솔직히 이남순을 위해 그게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이남순이 강성태와 안다미에게 바랐던 건 그들의 처벌이었다.

- 이제 밀동에서는 남순이 괴롭히는 일은 없을 거 아냐. 힘들게 사는 거보다 2심 판결 나기 전에 적당한 선에서 앞으로 살길을 만들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게 조 변호사의 의견이더라고.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거라면 제가 남순이에게 아파트를 사주겠습니다. 부모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죄를 지으면 그만한 벌을 받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 보스의 결정이 확실하니까 조 변호사에게 그렇게 전하지. 그건 이렇게 정리하고, 노익이하고 식사했다면서 나는 한 번도 안 찾아와?

“안 그래도 의논드릴 게 있어서 내일쯤 찾아뵐까 했습니다. 내일 시간 어떠십니까?”

- 내일 점심 할까? 어때?

강성태의 질문에 조태완이 세상 반가운 음성으로 대꾸를 건넸다.

“점심때 찾아뵙겠습니다.”

적당하게 통화를 마친 강성태가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다음이었다.

찌그러지고 휜 쟁반을 든 할머니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이거 먹어.”

불에 그슬린 자국이 선명한 하얀 플라스틱 접시에 달걀부침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다른 손님들에게는 제공하지 않는 메뉴였다.

“감사합니다.”

“밥 필요하면 말해.”

“예, 할머니.”

숟가락을 든 강성태는 순두부찌개의 국물을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7천 원이면 이렇게 행복한 저녁 한 끼를 먹는 세상에서 뭐 얼마나 더 잘살겠다며 추악한 모습을 보이는 건지, 더러운 인간들을 상대하는 동안 온몸에 튀었던 추악함을 매콤한 순두부찌개가 깨끗하게 닦아주는 느낌이었다.

**

다음 날 점심에 찾아간 사무실에서 조태완은 더할 수 없이 반가운 표정으로 강성태를 맞았다.

“식당 예약해 뒀으니까 먼저 밥부터 먹고 오자.”

“점심시간 비껴가는 게 좋지 않습니까?”

“방으로 돼 있어서 괜찮아.”

김석문까지 남겨둔 조태완은 강성태를 사무실 바로 뒤편의 곰탕집으로 안내했다.

돌솥밥에 도가니 찜, 설렁탕을 주문해 놓아서 도착하기 무섭게 바로 음식이 앞에 놓였다.

“노익이하고 교창이한테 일본에 다녀온 이야기는 다 들었지. 기무라 쿠니오키가 죽었다는 소식도 알았고.”

음식을 먹으며 조태완은 지나가는 일을 이야기하듯 들었던 내용들을 알려주었다.

“보스가 힘든 거 같아서 그동안 전화도 못 했다.”

“찾아뵙지 못하면 전화라도 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니까. 보스가 정말 힘겹게 뛰어다니고 있으니까 뒤에서 내 역할을 묵묵하게 하는 게 진짜 돕는 거라고 생각했다는 말인데 왜 그렇게 받아? 서운해.”

말끝에 얼른 더 먹으라며 도가니 찜을 권하는 조태완은 당장 깡패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안사람이 배가 많이 올라왔어. 이따금 손을 가만히 대보면 안에 있는 녀석이 움직이는 것도 느껴지고. 사는 게 정말 별거 없는데 참 더럽게 살았구나 싶기도 하고, 이런 게 진짜 행복이구나 하고 느낄 때가 많아.”

속내를 털어놓는 조태완의 눈가와 볼에 행복이라는 감정이 은은하게 올라와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현금 하고 살고 있는 집 말고 가진 부동산을 처분해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아이들을 도우면 어떨까 싶은데 보스 생각은 어때?”

설렁탕 국물을 삼킨 강성태는 평범한 아저씨로 바뀌어 있는 조태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까 나도 그렇고, 정훈이, 심지어 등에 칼 꽂았던 동팔이 놈도 같았더라고. 공부는 못 하겠고, 환경 더럽고, 배운 건 없고, 지기는 싫고. 누가 잡아주는 사람 없으니까 막 나간 구석이 있었지.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이 길에 들어선 거고. 개같이 살아놓고 또 남들보다 많이 가지고 싶었으니까.”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맨정신으로 내놓는 말이었다.

“멕시코에 갈 식구들 교육하면서 보니까 이 새끼들, 안 되는 새끼들은 정말 안 되더구먼. 조직이 무서워서 반항은 못 하지만, 근성이 틀려먹은 놈들이 있어. 처음에는 그런 놈들은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잠시 입맛을 다시며 뜸을 들였던 조태완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나와 정훈이가 그렇게 사회에서 버려졌거든. 교육을 못 따라오는 놈들 중에도 업장 관리 잘하던 놈도 있고, 하다못해 운전 잘하는 놈도 있었는데 나부터도 그걸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더라고.”

진지하게 고심했던 내용을 털어놓는 조태완이 강성태는 무척이나 고마웠다.

“그래서 내가 가진 돈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아이들이나 자기가 진짜 잘하는 게 뭔지 모르는 놈들을 도울 수 있으면 어떨까 싶었다.”

죽을힘을 다해 빛을 향해 달렸어도 늘 제자리를 맴돌았다고 여겼더니 어느새 조태완은 빛의 세상에 발을 반쯤 내밀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또 자신이 반쯤 걸친 빛의 세상에 소위 동생들을 데려다주고 싶었고, 반대로 빛의 세상에서 어둠으로 밀려날지 모를 아이들을 지키고 싶다는 소망도 품은 모양이었다.

“형님.”

강성태는 진심으로 조태완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앞으로 한 달 뒤에도 그 생각이 변하지 않으신다면 은선곤과 만나서 함께 의논하시죠.”

“한 달? 한 달은 왜? 내 마음이 바뀔까 봐?”

“뒤에 후회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을지 고민하시라는 뜻입니다.”

강성태의 권유에 조태완이 알 것 같다는 느낌의 웃음을 그려냈다.

“남순이 말이지. 전에 나한테 보스가 물었었지? 만약 내 딸이 그렇게 당하면 어떨 거 같냐고? 나 같으면 아마 그 새끼들 다 갈아서 죽이고 남았지. 그런데, 그런 놈들이 나쁜 짓을 하지 않게끔 미리 끌어주면 내 딸도 다치는 일이 없어지지 않을까?”

곰탕집 안쪽 방에서 오간 대화였다. 그런데 강성태는 조태완의 말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피할 수 없어서 발을 들인 조직에서 할 수 있는 한 조직원들을 빛의 세상으로 이끌고 싶었는데 그에 대한 근본적인 답을 조태완이 내밀어 준 느낌이었다.

“보스. 멕시코에 꼭 가자. 훈련에서 밀려나는 놈들보다는 그곳에서 새 삶을 찾고 싶어 하는 놈들이 월등히 많아. 그리고 그놈들 눈빛을 보스가 꼭 봐야 해.”

“멕시코에는 반드시 갈 겁니다.”

강성태의 답을 들은 조태완이 듬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키란인가 하는 동생 있지? 그 동생에게 교육을 부탁하면 어떨까 싶은데? 마카오에 다녀온 놈들 말을 들어보니까 동선이라든가 움직임은 그 동생이 정말 잘 가르친다고 하더라고.”

“알겠습니다.”

마침 무료해 하는 키란에게 어쩌면 가장 적당한 역할이 아닐까 싶었다.

좀 더 점심을 즐긴 강성태는 조태완과 헤어져 병원으로 향했다.

둘러볼 겨를이 없어서 몰랐지, 조금씩이나마 빛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녁에는 모처럼 은선곤도 한번 볼까?

그 역시 조태완처럼 바쁜 강성태를 배려해 연락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을 꺼낸 강성태는 은선곤의 번호를 눌렀다.

- 은선곤입니다, 회장님.

“뭘 그렇게 딱딱하게 그래? 혹시 오늘 저녁 약속 있어?”

- 예?

저녁을 먹자는데 당황한 은선곤의 반응이 있었다.

“바쁜 모양인데 다음에 해도 돼.”

- 죄송합니다.

뭔가 약점이 잡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은선곤의 대꾸에 강성태는 고개를 갸웃했다.

- 저기, 회장님. 사실은 민정 씨와 저녁 약속이 있습니다.

“민정 씨? 내 동생 김민정?”

- 예, 회장님.

왜 그런지 주눅 든 은선곤의 답을 들은 직후에 강성태는 흐느끼는 것처럼 웃었다.

늘 분명하게 답을 내놓던 은선곤이 뭔가 눌린 듯 답을 하더니 그 이유가 김민정과의 저녁 약속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 아직 특별한 관계는 아닙니다.

“누가 뭐라고 했어? 알았어. 괜찮으면 민정이한테는 나와 통화한 이야기는 하지 마. 알게 되면 너무 부담스러워할 거 같아서 그래.”

- 알겠습니다, 회장님.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웃음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방지병원에 들어섰다.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올라간 강성태가 이병렬의 병실 문을 연 직후였다.

이게 뭐지?

강성태는 단박에 웃음을 지우며 병실 안을 돌아보았다.

이병렬의 침대 앞을 김진용과 조봉진이 지켰고, 맞은 편에 처음 보는 덩치 다섯이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한 태도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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