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 25권 - 16화 (509/513)

《509》2부 25권 - 16화

택시를 이용해 신월동에 도착한 강성태는 주차장에서 커피알리고 안을 살폈다.

두 테이블에 앉은 손님이 전부여서 마음 같으면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정장도 그렇지만, 아직 남은 흉터를 드러낸 채 들어서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최치곤을 부를 생각으로 강성태가 스마트폰을 꺼냈을 때였다.

주방 쪽에서 나온 최치곤이 주차장에 선 강성태를 보고는 목을 쭉 빼냈다.

‘2층으로 와! 2층!’

검지로 위를 가리키는 강성태를 향해 최치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단을 올라간 강성태는 자물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 내부는 여전히 깔끔했다.

최치곤과 함께 심부름센터를 해보자며 준비했던 장소인데 그 뒤로 참 어마어마한 사건이 줄줄이 있었다.

“왔냐?”

사무실을 둘러보는 강성태의 뒤에서 일회용 컵을 든 최치곤이 들어섰다. 머리에 힘을 빡 준 최치곤 역시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뭐냐? 기껏 준비해서 왔더니? 커피알리고 사장님이 다른 커피숍 컵을 들고 오는 건 반칙이지.”

강성태의 손에 들린 일회용 컵을 본 최치곤이 농담을 던지며 문 쪽 소파에 앉았다.

“정장은 뭐야? 무슨 일 있어?”

“네가 언제 부를지 몰라서 준비하고 있었다는 거 아니냐. 그렇지 않아도 이거 덕분에 이모한테 의심은 덜 받았다.”

강성태 앞으로 커피알리고의 일회용 컵을 밀어준 최치곤이 갑갑하다는 투로 숨을 뱉어냈다.

“김삼문 사장 말이야. 강성태라는 분을 절대 모른다며 오바질 하는 바람에 이모가 눈치채신 모양인데 어쩌냐?”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

“내가 볼 때는 아냐.”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의 절반을 꼬박 붙어 다닌 최치곤의 판단이 그렇다면 더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건 그거고. 왜 이렇게 지쳐 보이냐?”

최치곤이 의아한 표정으로 건넨 질문이었다.

“나서희한테 다녀오는 길이다.”

숨길 이유는 없었다. 말이 나온 김에 강성태는 나채상의 병실에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들려주었다.

“일이 다 끝났다고 생각해서인지 맥이 좀 풀린다. 거기에 나서희의 말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아.”

“마무리가 후련하지 않아서 그런 거지. 거기에 기껏 손에 쥐었던 기무라가 죽어버렸으니 지칠 만도 하다.”

입술을 내민 최치곤이 나름의 생각을 내놓았다.

“전에 용병할 때는 이런 적 없었냐? 느닷없이 지친다거나 갑자기 서울이 생각났다던가. 그럴 때 있었을 거 아냐? 향수병도 있고?”

최치곤의 질문을 받은 직후였다.

뿌옇게 피어오른 먼지 사이로 강렬하게 달려들던 화약 냄새와 손에 든 소총의 무게, 쿠크리의 감촉이 강성태를 스쳐 지나갔다.

“용병 때는 그냥 막사에서 지는 노을을 보거나 우리나라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아저씨랑 이런저런 이야기한 게 전부였어.”

“졸라리 불쌍하게 살았네. 술 같은 것도 없었어?”

강성태는 어깨를 들썩여 보인 뒤에 가볍게 웃었다.

죽음이 어른거리는 장소에서 술을 마신다는 건 자살과 같은 짓이어서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지 말고 나랑 술이나 마시러 갈래? 몸은 괜찮냐?”

“커피부터 마시고.”

강성태는 커피알리고의 일회용 컵을 들어 뜨거운 느낌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희한한 일이었다.

익숙한 커피를 마시자 지친 몸과 마음에 조금은 활력이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뭐지?

강성태는 일회용 컵을 돌려가며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정말 힘든 날 말이야. 혹은 비가 주륵주륵 내리는 날은 커피를 진하게 타서 마셨어. 그게 이상하게 위로가 되더라고.”

강성태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커피알리고는 강성태의 꿈이었다.

멕시코에서의 일을 마치고 나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손님들을 상대하며 평화롭게 살고 싶은 소망 역시 아직 간직하고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모양이네.”

“뭐를? 뭔데 그게?”

머리를 빡 세운 최치곤이 궁금한 얼굴로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너랑 이렇게 지내는 거.”

이게 철학적인 답이야, 아니면 농담인데 못 알아들은 거야?

고민에 휩싸인 최치곤의 눈을 보며 강성태는 픽 웃었다.

그 직후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바지 주머니 안에서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민정이다. 같이 듣자.”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탁자에 내려놓은 뒤에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오빠, 나야. 민정이. 통화돼?

“괜찮아. 그런데 민정아. 치곤이가 함께 듣고 있어.”

- 아, 그래. 차라리 잘됐네. 치곤이 오빠, 잘 지냈어?

“어! 민정아, 오랜만이다.”

짧은 인사가 오간 다음이었다.

- 치곤이 오빠? 오늘 엄마 만났지?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성태랑 이야기 중이었어. 너한테 뭐라고 하시던?”

- 나한테 오셨다가 가셨어. 내가 잘 말씀드려서 풀어지셨거든. 엄마가 아직 성태 오빠한테는 전화 안 하셨다니까 알고 있으라고 전화한 거야.

뭐가 이렇게 쉽게 끝나?

스마트폰을 바라보던 최치곤이 당황스럽다는 느낌으로 시선을 들었다.

“민정아. 치곤이 말로는 이모가 슬퍼하시는 거 같다던데 네가 보기에는 어때?”

- 오빠. 엄마 확실히 갱년기야. 요즘 들쭉날쭉 장난 아니니까 조심해.

“진짜 다른 일 없지?”

- 오빠가 깡패 두목이면 곤잘레스 회장이나 은선곤 대표가 함께 일하겠냐고 하니까 그런가 하셨어. 엄마가 자꾸 그러는 거 다미 언니가 싫어할 거라고 하니까 그때는 화를 내더라. 갱년기가 사춘기보다 무섭다더니 진짜 그런가 봐.

강성태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전 사건으로 김민정이 미리 알고 있었기에 다행이지, 이런 때 이모 장숙경과 함께 파고들었다면 빠져나가기 불가능했을 상황이었다.

- 이번 거, 오빠가 도와준 거 맞지? 민재 오빠가 또 전화한 거지?

“그냥 넘어가자.”

- 아효, 진짜. 김민재, 언제 사람 되냐?

투덜대는 김민정의 말이 웃겨서 강성태는 바람 빠지는 사람처럼 웃었다.

- 오빠. 나 근무 중이라 이만 끊을게. 언제 한번 들러라. 아니면 근무 끝나고 포장마차에서 보든가.

“알았어. 몸조심해.”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눈초리를 뾰족하게 세운 김민정과 그 앞에서 곤란해할 김민재를 떠올리며 실없는 웃음을 그려냈다.

“어? 민정이랑 통화하더니 기운이 생겼나 보네? 하여간, 너도 병이다, 병. 얼굴이 밝아졌잖아?”

그런가?

최치곤의 말을 듣고 난 강성태는 잊고 있던 중요한 사안을 새롭게 깨달은 느낌이었다.

“그림자로 살면서 늘 밝은 세상을 부러워했거든. 그런데 그곳에 우리보다 더 추악한 인간들이 있다는 사실에 실망했었나 봐.”

“와, 진짜. 나랑 이야기할 때는 알아듣게 좀 해주라.”

“나채상과 나서희 같은 인간들이 독버섯처럼 똬리를 틀고 있어도 결국 민재나 민정이, 다미 씨, 은주 씨 같은 평범한 이들이 세상을 끌어가는 건데 내가 너무 나쁜 면만 보며 지친 건 아닌가 싶다고.”

“흐음.”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눈치인데 최치곤은 더 묻지 않았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그리고 그 틈을 타고 테이블 위에 올려둔 스마트폰이 다시 몸을 떨었다.

“고강준이다. 함께 들을 거니까 조심해.”

고개를 끄덕이는 최치곤 앞에서 강성태는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이봐, 강 회장. 내가 그렇게 당부했는데 나서희 부장판사를 망가트리면 어떻게 해?

전화를 받기 무섭게 불만 가득한 고강준의 음성이 조용한 사무실을 가득 메웠다.

- 남편인 김병일 부장판사가 이리저리 쑤시다가 안 되니까 재벌과 검찰이 감싸주는 조직폭력 두목이 있다는 보도를 내겠다며 움직이고 있다고.

“마음대로 하라고 둬.”

- 아 참. 그렇게 뻗대기만 해서는 돕는 사람들이 오히려 곤경에 빠진다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단계를 밟아서 하나씩 해결해야지. 연백국 회원 숫자를 알잖아? 게다가 일본 측 연백국 회장이 자살한 건에 강 회장이 걸려 있어서 저쪽에서 문제 삼으면 외교적인 문제도 돼.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는데?

하긴, 일본에 가서 그 난리를 쳤는데 고강준 정도 되는 인물이 그 사건을 모르는 게 어쩌면 더 이상한 일이었다.

- 일본 공항에서 신강남파 고문이라는 박노익이 일본 측 연백국 회장을 만난 것도 문제가 커. 항공사 라운지에서 소란이 있었고 목격자도 많아서 동향 보고서에 다 올라왔다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 내가 JBC 소신영 회장과 이우섭 부의장 동원해서 덮고 있으니까 이제 좀 그만하자. 혹시 더 찾아갈 사람이 있더라도 최소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는 자제하고.

“나서희를 끝으로 일단 정리했으니까 당장 더 찾아갈 사람은 없어. 그리고 기무라 쿠니오키의 인터뷰 영상이 JBC 방송국에 있고, 연백국 나채상이 일본에 충성을 맹세한 서약서가 나한테 있다.”

강성태의 말이 건너간 뒤에 고강준은 바로 대꾸를 내놓지 않았다.

이거 봐? 이 인간, 인터뷰와 서약서까지 알고 있네?

강성태는 퍼뜩 보도국장 이세종을 떠올렸다.

그가 소신영에게 보고했을 테고, 그쪽을 통해 고강준에게 자연스럽게 넘어갔을 확률이 가장 높았다.

“필요하면 영상은 소 회장에게서 얻고, 서약서 사본을 원하면 내가 보내 주지.”

- 그게 있다면 김병일 부장판사를 누르는 데 확실히 도움 되기는 하지. 어떻게? 내가 사람을 보낼까?

“그렇게 해.”

- 연순동을 시킬 테니까 연락하면 복사본을 넘겨줘. 그리고 말이야. 나서희 부장판사 말인데,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이 부러지고. 고막 나가고, 광대뼈 망가져서 수술 들어갔다는데 정도가 좀 심하지 않나? 나채상 이사장보다 더 큰 수술이라던데?

“죽일 뻔한 걸 참았으니까 그 이야기는 그만하지?”

- 크흠. 아무튼, 복사본 보내 주고, 약속한 대로 당분간은 좀 조용하게 지내자. 멕시코로 바로 가면 더 좋고.

강성태가 어떤 대꾸를 할지 두렵다는 것처럼 할 말을 마친 고강준이 전화를 끊었다.

“진짜 끝났나 보다.”

통화를 듣고 있던 최치곤이 먼저 내놓은 반응이었다.

“왜? 다 끝난 거 맞잖아? 핑곗김에 일주일만이라도 쉬자. 수술에 지친 안 선생도 좀 찾아가고, 이모한테 가서 김치찌개에 밥 먹고, 나랑 우리 아버지한테 가서 산삼 내놓으라며 하루쯤 보내면 얼마나 좋아?”

“그럴까?”

“일할 때 보면 너 좀 결벽증 있는 사람 같아. 가끔은 풀어주기도 해야지. 지금은 꼭 그런 순간 아닌가 싶다.”

경호원의 삶, 특히 멕시코라는 특정 지역을 이해하지 못하는 최치곤의 조언이었다. 그러나 강성태를 지켜보는 최치곤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조언이기도 했다.

“쉬는 게 안 되면 나랑 지방 한 바퀴 돌래?”

강성태의 침묵을 살핀 최치곤이 이번에는 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말한 대로 안 선생하고 이모 찾아뵌 다음에 인천부터 쭉 내려가자. 중간에 평택 아버지한테 들르고 아래쪽 한번 도는 거지. 숙소 불쑥 찾아가서 사는 꼴도 확인하고. 어때?”

병실에서 이병렬이 당부했던 내용이기도 해서 강성태는 솔깃한 표정으로 답을 대신했다.

“거 뭐냐? 밀동? 거기도 한번 들러주면 좋지 않겠냐?”

“나야 다미 씨가 수술이 걸려서 그렇다고 치고, 너는 은주 씨한테 미안하지 않냐?”

“잠깐 떨어져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아.”

어쩐지 꽉 잡힌 유부남이 잠시라도 떨어질 핑계를 찾는 듯한 느낌이었다.

의심스럽다는 강성태를 향해 최치곤이 히죽 웃었다.

**

강성태는 샌드위치와 생과일주스를 잔뜩 들고 서라대학병원 응급실에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안다미 선생 잠시 만나러 왔습니다.”

“예. 신분증 잠깐만 주세요.”

입구에서 출입자를 관리하던 직원이 강성태를 알아보고는 눈인사로 답을 한 뒤에 출입증을 내주었다.

“이거 드세요.”

“감사합니다.”

강성태는 출입 관리 직원에게 샌드위치와 생과일주스를 건네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안녕하세요?”

강성태를 본 병원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마치 연예인을 보는 듯한 반응을 터트렸다.

“경호원이셨어요? 어쩜? 정말 멋지세요.”

얼굴이 붉어진 간호사 한 명이 눈에 분홍색 하트를 떠올리며 말을 걸었고,

“방송에서 봤어요. 복도 안쪽에서 손 이렇게 잡고 서 있는 거요. 너무 멋있었어요.”

옆에 앉은 간호사가 함께 호들갑을 떨었다.

“안 선생님에게 잠깐 연락해주실 수 있나요? 수술 중이면 이거만 전해주시고요.”

목덜미의 상처를 본 간호사가 뭔가 엉뚱한 장면을 연상하는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데스크 아래로 시선을 떨궜다.

“안 선생님 수술이…. 됐네요. 지금 막 중환자실 올라가셨거든요. 바로 연락해 드릴게요.”

간호사가 구내전화기를 드는 동안, 강성태는 들고 왔던 샌드위치와 생과일주스를 데스크 안쪽으로 넘겨주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응급환자를 살피는 간호사들이 강성태를 힐끔거렸고, 처음 보는 의사들이 대놓고 시선을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커튼을 열어놓은 침대 옆에 앉아 있던 보호자들이 연예인인가 하는 얼굴로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제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썩어버린 인간 몇 명 때문에 지쳤다니.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 사람들이 마약과 고리대금이라는 갈고리에 걸리지 않게 한 것만으로 감사해야 할 일이고, 그 과정에서 연백국이 나왔을 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응급실을 둘러본 강성태가 안쪽 입구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녹색 수술복 차림에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안다미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주변이 온통 멀리 사라지며 응급실 안에 강성태와 안다미만 남은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지친 얼굴이었다.

피곤함이라는 망토가 그녀를 온통 뒤덮어서 다가오는 걸음마저 힘겹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한 토막 겨우 얻은 휴식을 방해했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강성태를 향해 다가오는 안다미의 눈에 반가움과 기쁨, 미소가 분명하게 담겨 있었다.

그녀 역시 지금의 강성태처럼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모양이었다.

‘어머? 어쩜 좋아?’

간호사들이 강성태와 안다미를 번갈아 보고 있었는데 주변은 여전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다며 세상이 주는 포상 같았다.

다가오는 안다미를 지켜보는 이 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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