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8》2부 25권 - 15화
딱딱하게 굳은 나서희를 향해 강성태는 ‘뭘 그리 놀라시나?’ 하는 투로 걸음을 옮겼다.
“당신…?”
“판사라던데 우리말을 제대로 못 하십니까? 말끝이 이상하게 짧네요?”
창가에 놓인 탁자로 다가선 강성태는 침대에 잠든 나채상을 돌아본 뒤에 다시 시선을 나서희에게 가져갔다.
스마트폰을 손에 든 나서희가 이제야 몸을 제대로 세웠다.
“당신 강성태지?”
“당신이 나서희 맞아?”
“말을 조심해. 깡패 주제에 내가 누군 줄 알고 말을 함부로 해?”
정말이지 짧은 틈이었다. 그사이 파란 불꽃을 피워올리는 나서희를 보며 강성태는 재미있다는 느낌으로 픽 웃었다.
“앉아도 돼?”
“말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자꾸 그렇게 나오면 내 손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러니까 지금은 입을 좀 조심해서 놀려. 내 경고를 무시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도 생각하는 게 좋아.”
강성태는 대놓고 나서희의 눈높이로 손바닥을 들었다.
효과는 바로 나왔다.
파란 독기를 파르르 피워낸 눈매는 여전했지만, 나서희는 말투를 가지고 더는 항의하지 않았다.
“지금 네 행동이 협박에 해당한다는 거 정도는 알고 있겠지?”
“재미있겠네? 신고하고 싶으면 하시든가.”
뭘 믿고 저렇게 나오지?
스마트폰을 꽉 움켜쥔 나서희가 강성태의 속내를 알고 싶은 듯 눈을 갸름하게 떴다.
“앉아도 되나?”
“혹시 서약서를 받았…나?”
“뭐? 나서희 부장판사의 부친 나채상 이사장이 일본의 욱일승천을 기원하며 엎드려 서약한 종이? 그거라면야 뭐.”
나서희는 다리에 힘을 풀린 눈치였다. 하지만 강단 있는 태도를 잃지 않으려 이를 깨물며 버티고 있었다.
“이제 앉아도 되나?”
“서약서를 공개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해. 대신 너도 무사하지 못한다는 걸 명심해.”
“부장판사님이야 그렇게 나올 수 있겠지. 하지만 서약서에 이름 적힌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멀리 볼 것 없이 누워 있는 부친부터 생각해야 하지 않나?”
“끄응.”
막강한 힘을 지닌 이사장이자 한국 연백국 회장인 나채상의 딸, 부장판사, 그녀가 지닌 권위가 전혀 먹히지 않는 강성태의 모습에 분통이 터진 것처럼 나서희가 신음을 토해냈다.
강성태는 대놓고 자리에 먼저 앉았다. 그런 뒤에 맞은편 자리를 시선으로 가리켰다.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그러나 지지 않겠다는 듯 입술에 힘을 꾼 준 표정으로 나서희가 맞은편에 앉았다.
“정말 궁금해서 그런데, 재단 이사장에 100억이 넘는 돈을 횡령할 정도로 여유 있고, 부장판사에 올라설 정도로 능력 있는 딸을 뒀는데 왜 굴욕적인 서약서를 써가며 일본에 엎드리지?”
예상대로 나서희는 답이 없었다.
“혹시 사법시험도 높은 사람들끼리는 적당하게 합격시켜 주고 그러나? 그걸 위해서 조아리는 건가?”
“깡패와 오래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온 이유를 말해.”
“물었잖아. 왜 이사장이 굴욕적인 서약을 했는지?”
강성태가 질문한 의도를 알고 싶은 눈치였다.
돈으로 처발라 꾸미고 가꾼 티가 역력한 나서희가 강성태의 속을 뚫을 것처럼 매섭게 눈빛을 빛냈다.
“기무라 쿠니오키가 자살한 건 들었을 테고.”
나서희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상태에서 강성태는 다시 말을 던졌다.
“자살 직전에 기무라 쿠니오키가 JBC 방송국과 인터뷰한 영상을 내가 가지고 있다. 마음 같으면 영상과 서약서를 터트리고 싶은데 또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거든. 알다시피 나는 깡패 두목이라서 말이지.”
확신이 들 때까지는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처럼 나서희는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나는 멕시코에 가서 최소 5년, 길게 잡아 10년은 현장에 있어야 하고. 또 아카시 마오라는 아카시 조직 후계자를 데리고 있어서 굳이 한국에 오지 않아도 돼. 자! 다시 묻는다. 나채상 이사장이 고개 숙인 이유.”
“그 이유를 왜 알고 싶어 하는지를 먼저 말해.”
“내 생각에는 연백국 회원들끼리 서로 도와가며 잘 먹고 잘 살자는 거 아닌가 싶은데. 그렇게 세를 불리면 단맛을 본 인간들은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거든.”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이만 돌아가. 안 그러면 법과 공권력의 무서움을 배우게 될 거야.”
“범죄 조직들이 그렇거든. 서로의 약점을 잡지. 배신하면 기존의 연백국 회원들이 먼저 짓밟을 테고, 안 되면 일본의 힘을 빌리고. 그렇지 않나?”
“흥.”
강성태의 말을 더는 들어줄 수 없다는 듯 나서희가 코웃음을 뱉었다.
“깡패라서 그렇게밖에 생각 못 하겠지. 일본에 조아린다고? 조선 시대부터 일제강점기, 심지어 지금까지 우리가 일본을 이겨본 적이 있나?”
진심으로 궁금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그래서 강성태는 나서희 말에 눈매를 좁혔다.
“깡패도 마찬가지 아냐? 과거 야쿠자들을 흉내 내는데 그들처럼 품격이 있어? 아니면 의리가 있어? 징그럽게 회칼이나 휘두르는 게 전부인데 앞으로 백 년, 천 년이 흐른들 야쿠자를 이겨보겠냐고?”
악에 받친 데다 자존심이 상해서인지 나서희는 이성을 놓아버린 듯 거침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 넘지 못하는 단계가 있어. 일본은 우리에게 그런 존재고. 그렇다면 배워야지. 그들의 정치, 경제, 판단, 국민성, 모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냐?
지금껏?
“독도? 그까짓 섬 하나 뭐가 중요해? 과거사? 몸 팔러 간 여자들이 대다수인데 이제 와서 피해자 행세를 하는 거잖아? 심지어 우리 일본은 그들에게 돈도 지불했어.”
우리 일본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하마터면 주먹을 뻗을 뻔했다.
이왕 지껄인 거 더 해봐라.
강성태는 독해진 눈빛을 보이지 않으려 시선을 떨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안 돼. 이건 종자의 문제야. 근본적으로 일본인을 이기지 못한다고.”
“그만하자.”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더 듣다가는 창밖으로 던져버릴 것만 같아서 강성태는 나직한 한마디로 나서희의 입을 막았다.
“둘 중 하나를 택해. 서약서를 공개하지 않는 조건으로 따귀 다섯 대.”
미친 인간인가?
놀란 나서희의 눈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나채상의 처참한 모습을 떠올렸는지 겁이 덜컥 올라온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서약서를 공개하는 대신 따귀 세 대.”
이건 또 무슨 말장난이야?
어떤 결정에도 따귀를 맞아야 한다는 사실을 나서희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 하나 더. 네가 지금 지껄인 말에 대한 대가로 따귀 다섯 대는 따로 있다.”
“내가 부장판사라는 사실을 잊었나 본데….”
“알지. 여수지청에 전화해서 깡패를 보낼 능력이 있다는 정도는.”
화악, 말을 마친 강성태는 팔을 뻗어 나서희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어? 놔! 놓으라고!”
끄드등.
앙탈 수준의 반항을 했으나, 몸을 세우는 강성태에게 멱살을 잡힌 나서희는 정말이지 맥없이 딸려왔다.
마흔 후반의 나이에 이렇게 뺀질거리는 피부를 유지하려면 돈을 얼마나 퍼부어야 할까?
다른 것도 아니고, 종자가 문제라는 대한민국 학생들이 낸 돈과 정부지원금 횡령한 돈으로 말이다.
“우리 일본이라고?”
“내가 언제?”
픽 웃은 강성태는 곧바로 표정을 바꿨다.
그런 말을 했다는 자각조차 못 할 정도로 일본을 우러러보고 살았던 모양이었다.
“네가 차지한 판사 자리, 네가 지금 누리는 커다란 권력부터 사소한 권리를 되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는지 알기나 하냐?”
“내가 시킨 게 아니잖아!”
짜아아아아악! 짜아악! 짜아아악!
확실히 소리가 달랐다. 그리고 고작 세 대를 때렸을 뿐인데 매끈한 얼굴에 손자국이 선명하게 부풀어 오르더니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흐윽! 하지…마!”
짜아아아아악! 짜아아악! 짜아아아악!
세 대를 때린 직후였다.
이번엔 힘을 좀 더 실었다.
터진 입술과 면도칼로 이리저리 그어놓은 것처럼 찢어진 나서희의 볼에서 붉은 피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허흑. 헉.”
조금 전의 강단은 어디 가고 나서희는 혼이 반쯤 나간 얼굴이었다.
공포에 질린 그녀의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게 있다고? 너는 아무리 해도 나한테 힘으로 안 돼. 그러니까 얌전히 복종해야지?”
무슨 소리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서희는 절대 지금처럼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을 거다.
“대답은 반드시 입으로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나서희가 놀란 눈으로 강성태를 보았다.
짜아아아악! 짜아아아악! 짜아아악!
세 대를 더 때렸을 때였다.
“푸후!”
가쁜 숨을 내쉬는 나서희의 입에서 핏물과 함께 이가 튀어나왔다.
강성태는 멱살을 당겨 나서희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일제강점기에 순사에게 고문당하던 사람들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돼? 아니어도 되새겨.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려던 나서희가 급하게 “네에.” 하는 답을 내놓았다.
“허흑. 허흐흑.”
놀라 가쁜 숨을 내쉬면서 나서희는 울고 있었다.
맞은 뺨과 부러진 이가 아파서, 아직 강성태에게 멱살을 잡힌 상태라는 사실이 무서워서, 그리고 이렇게 맞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터진 울음처럼 보였다.
짜아아아악! 짜아악! 짜아아아악!
강성태는 세 대를 더 때린 뒤에 팔을 밀쳤다.
콰드등.
밀려 나간 나서희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뒤에 뼈대가 없는 인형처럼 앞으로 무너졌다.
강성태는 탁자에 고개를 처박은 나서희의 맞은편에 앉았다.
“고개 안 들면 다시 열두 대를 때릴 테니까 알아서 해.”
신념이고 지랄이고 따귀의 힘은 대단해서 나서희는 피범벅인 얼굴을 들었다.
곱게 단장했던 머리는 헝클어졌고, 돈을 처발라서 가꿨던 볼은 찢어진 데다 퉁퉁 부었으며, 입술은 세 배쯤 부풀어 올라 있었다.
“허흐흑. 허흑.”
“겨우 따귀 열두 대다. 그것도 못 견디면서 죽음을 맞을 정도로 고문받던 분들의 희생을 함부로 평가해? 그게 교육자 집안의 딸이자, 이 나라의 판사가 할 소리냐?”
“잘못…했습니다. 허흑. 허흐흑.”
숫제 흐느끼는 수준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한다. 서약서는 내가 가지고 있을 테니까 독립유공자 후손을 지원하는 일을 제대로 해. 명심해라.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네가 허튼짓을 하면 칼잡이를 보내서라도 저기 누워 있는 부친과 너를 진짜 죽여버릴 거니까.”
“예에.”
답을 하며 고개를 떨구는 나서희를 보며 강성태는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연백국 회원의 딸은 마약을 가져와도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는 교훈 하나로 풀어주고, 학생들과 정부지원금을 횡령해도 집행유예를 남발해 내보내며, 부동산 사기를 쳐도 오히려 피해자를 처벌하는 판사라니.
왜 이런 사람이 판사로 있을까?
정말 화 나는 일은 이런 나서희의 모습을 부러워하며 그 아래에서 머리 조아리며 충성하는 인간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연백국의 진짜 목적은 더러운 권력에 고개 숙이는 일반인들이 아닐까.
“허흑. 허흐흑.”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주먹에 힘이 들어가서 강성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소란에서도 나채상은 약 기운 탓인지 1인실 침대에 누워 깨어나지 않았다.
병실을 나선 강성태는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갔고, 이어 병원을 빠져나갔다.
오늘따라 햇살은 왜 이렇게 화창한지.
속없어 보일 만큼 화창한 햇살 아래에서 강성태는 병원 앞쪽에 있는 작은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잠시 후, 커피를 든 강성태는 근처 공터의 담벼락에 기대앉았다.
높은 건물,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우습게도 곤잘레스 이두안이 그토록 바라는 멕시코의 모습이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하기는.
적어도 대한민국에는 마약 카르텔이 날뛰지 않을 정도의 치안이 있고, 또 지금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처럼 제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이 있으니까.
아쉽지만, 어둠에서 살아가는 그림자가 할 수 있는 선은 여기까지였다. 같은 어둠에서 살아가는 그림자였다면 결과가 달랐겠지만 말이다.
멕시코로 향하기 전에 남았던 마지막 숙제를 해치웠는데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음 같으면 최치곤과 함께 지금부터 실컷 마시고 싶었다.
입맛을 다신 강성태가 일회용 컵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났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타이밍 참.
픽 웃은 강성태는 통화버튼을 누른 뒤에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갔다.
“여보세요?”
- 통화되냐?
“상관없이. 무슨 일인데?”
- 김삼문 사장 말이다. 이 인간이 사고 쳤었나 봐.
“뭔데? 또 돈을 거뒀어?”
- 그게 아니라 이모한테 말이지.
최치곤은 이모 장숙경이 의아하게 생각했던 이유를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너는 그거 어디에서 들었어?”
- 이모가 커피알리고로 오셨더라. 마침 은주랑 둘이 김밥 먹다가 딱 걸렸잖아. 그런데 이모 좀 이상하시다?
“왜?”
-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슬픈 얼굴이더라고. 그냥 갑자기 팍 늙어서 힘 빠진 분처럼. 무슨 말인지 알지?
슬픈 얼굴이었다는 최치곤의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남아서 강성태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지금 어디냐?”
- 커피알리고. 너는 어딘데?
“여기 강남인데 지금 그리 갈게.”
- 그럴래? 그럼 여기 있을게.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일회용 컵을 들고 몸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