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7》2부 25권 - 14화
제6장. 신강남파가 몰살될 때까지 싸운다.
오후 1시 30분쯤 박노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는 말과 함께 서약서를 받았고, 또 강성태의 요구대로 기무라 쿠니오키를 개인적으로 방문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 서약서를 어떻게 할까?
“뒤에 일정이 어떠십니까?”
- 동생에게 서약서를 건네고 나서 교창이와 점심을 먹는 게 전부야.
“그럼 식당을 알려주십시오. 제가 그리 가겠습니다.”
-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박노익과 통화를 마친 강성태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몸을 세웠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식탁에 올려둔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 회장님? 이세종입니다. 인터뷰 마쳤습니다. 일본 연백국은 한국의 연백국 회원들과 함께 독립유공자의 후손을 지원하는 사업을 펼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특종을 잡았다고 여겼는지 이세종은 완벽하게 들뜬 음성이었다.
“발표 내용을 분명하게 확인했지?”
- 우리 방송국 일본 특파원과 현지 코디네이터가 교차로 확인했습니다. 일본에서조차 아직 보도되지 않은 내용이라 이곳에서 편집본을 본사로 먼저 보내고 귀국할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고생해.”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기무라 쿠니오키를 떠올렸다.
인터뷰까지 했으니 쉽지 않을 거다, 기무라 쿠니오키.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판단한 거 같겠지만, 협상하기 전에 왜 오랜 시간을 고민하고 후폭풍까지 계산하는지를 모른다면, 관동 연합을 이끌기에는 확실히 부족하다고 봐야 했다.
물론 그의 멍청함 덕분에 강성태가 좀 더 큰 이득을 얻었지만 말이다.
어쩐지 스마트폰에서 비참하게 일그러진 기무라 쿠니오키의 얼굴과 함께 그의 비명이 들리는 듯해서 강성태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오늘 안으로 JBC의 보도가 나온다면 멕시코로 향하는 데 필요한 준비 하나를 마친 꼴이었다.
“나서희 부장판사 부부만 남은 건가?”
방으로 들어가며 강성태는 남은 숙제를 떠올렸다.
**
인터뷰를 마친 기무라 쿠니오키는 모처럼 홀가분한 상태였다.
새끼손가락을 절반이나 날렸고, 그 끝에서 서약서를 넘겨주었으며, 동시에 연백국의 활동에 관한 인터뷰를 마쳤다.
막말로 온갖 수모를 당한 뒤에 손발 다 들고 항복한 꼴이었는데 그는 나름으로 계산이 있었다.
일본의 돈맛에 빠진 인간들은 기무라의 조용한 연락 한 번이면 언제고 지시에 따르리라는 믿음이었다.
길어도 일 년 안에는 강성태의 등에 칼을 꽂아준다.
다다미가 깔린 서재에 앉은 기무라 쿠니오키가 복수를 다짐할 때였다.
“오야붕. 사사키 선생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보고가 있었다.
사사키 오무라는 총리를 교체할 정도로 힘을 지닌 일본의 실질적인 권력 집단, 일본회의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었다.
급하게 서재를 나선 기무라 쿠니오키는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 마당으로 향했다.
콧수염에 정장을 멋지게 차려입은 사사키 오무라는 마당에서 뒷짐을 진 채 장식으로 세워둔 석탑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급하게 마당으로 나선 기무라 쿠니오키에게 사사키 오무라는 인사 대신 묘한 느낌의 미소를 보였다.
“요즘 고생이 많다지?”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능력이 부족해 송구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오다 스미야기가 느닷없이 당하는 바람에 망가진 관동 연합을 급하게 넘겨받았으니 수습이 쉽지는 않았겠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렇더라도 일본회의에서 지원한 돈을 한국의 독립유공자 후손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발표는 좀 심하지 않았나?”
“강성태를 제거하기 위한 투자로 보아주십시오.”
기무라 쿠니오키의 답을 들은 사사키가 고개를 갸웃했다.
“투자라? 투자에 실패하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점을 알고는 있나?”
“일본의 영광과 일본회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선생님.”
대화의 끝에서 사사키 오무라는 기무라 쿠니오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직후였다.
야쿠자 조직원 이십여 명이 둘러선 마당에 어둠처럼 정적이 내려앉았다.
정적은 끈적하고 불길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기무라 쿠니오키가 둘러선 조직원들을 돌아본 뒤에 다시 시선을 가져간 다음이었다.
“오늘 네가 인터뷰한 영상은 일본에서 보도하지 않는다.”
말투마저 바뀐 사사키 오무라의 차가운 음성이 기무라 쿠니오키의 이마를 때렸다.
“또한, 관동 연합은 신강남파가 일방적으로 자행한 테러 행위에 대해 분명하고 확실하게 복수한다.”
“복수를 위해 제가 굴욕을 삼키며 견뎠습니다, 선생님.”
사사키 오무라는 고개를 저었다.
“너의 그런 태도가 문제다. 굴욕을 삼킬 게 아니라 멕시코에서 강성태를 무너트릴 준비를 했어야지.”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관동 연합은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네가 건네준 서약서의 의미를 알고는 있나?”
“한국의 연백국 회원들이 충성을 맹세한 증거로 알고 있습니다.”
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사사키 오무라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한국이 우리 문화에 물들고, 일본의 경제에 예속되도록 지난 10년 동안 엄청난 공을 들였다. 그 마지막 단계가 내각제였다. 그 모든 계획의 시작이 연백국이며, 서약서는 연백국을 지탱하는 가장 원초적인 받침돌이었다.”
“내각제까지는….”
“내가 말했잖나. 오다 스미야기가 느닷없이 당하는 바람에 제대로 인계되지 않았다고. 그래도 관동 연합을 빠르게 수습하기에 어느 정도는 기대했더니 잠시 바깥으로 눈을 돌리는 사이에 받침돌을 넘겨줄 줄은 몰랐다.”
“송구합니다, 선생님.”
고개 숙인 기무라 쿠니오키를 보며 사사키 오무라가 번득, 눈짓을 던졌다.
기무라 쿠니오키가 상체를 세우는 순간이었다.
와락, 뒤에서 야쿠자가 달려들어 밧줄로 그의 목을 휘감았다.
“끄윽. 끅.”
버둥버둥 기무라 쿠니오키가 야쿠자 놈의 팔을 잡고 버텼으나 목을 파고든 새끼손가락 두께의 밧줄 탓에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꺼흑. 꺽.”
밧줄에 목이 걸린 상태로 발을 버둥대던 기무라가 천천히 늘어졌다. 그러나 야쿠자 조직원은 그의 목에 휘감은 밧줄을 더욱 세게 졸랐다.
사사키 오무라가 다시금 석탑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사이, 기무라 쿠니오키의 고개와 팔, 몸뚱이가 축 늘어졌고, 그제야 야쿠자 조직원이 힘을 풀었다.
털썩.
기무라 쿠니오키의 몸뚱이가 떨어지는 소리에 사사키 오무라가 고개를 돌렸다.
“관동 지역의 조직 간 암투에서 밀린 기무라 쿠니오키가 홧김에 말도 안 되는 인터뷰를 했으나 뒤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목을 매달았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관동 지역 조직들은 불행한 일을 수습하고 하나로 뭉친다. 그 뒤에 멕시코로 향해서 강성태가 진행하는 사업을 무너트리는 것은 물론이고, 신강남파가 몰살될 때까지 싸운다.”
일본회의의 결정 사항을 알려준 사사키 오무라가 못마땅한 얼굴로 바닥에 널브러진 기무라 쿠니오키를 내려다보았다.
**
강남에 있는 일식집의 안쪽 방이었다.
강성태는 박노익, 이교창과 함께 회와 매운탕으로 식사를 마쳤다.
일본에 도착해서부터 돌아올 때까지의 이야기를 듣느라 식사 내내 지루할 틈은 없었다.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이 차를 마실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잠시 전화 좀 받겠습니다.”
다른 전화는 몰라도 이세종의 전화라면 우선 받고 볼 일이었다.
“여보세요?”
- 회장님? 이세종입니다. 방금 기무라 쿠니오키가 그의 자택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 때문에 그가 했던 인터뷰 보도를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요청한 사람이 누군데?”
- 일본 외무성이 우리나라 대사관을 통해 요청했습니다.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로 빠르고 확실하게 처리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결국, 이렇게 갔구나, 기무라 쿠니오키.
돈으로 밀어붙이는 깡패조직이 위기에서 얼마나 힘을 쓸까. 또한, 정치권에 빌붙어 살아가는 폭력조직의 결말이 어떤 건지를 기무라 쿠니오키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어떻게 하고 싶어?”
- 우선 이 건에 대해 취재를 좀 더 하고, 보도를 결정하겠습니다. 다만, 인터뷰 당사자가 자살한 상황이라 아무래도 보도하기는 어려울 거 같습니다.
“특종인데 아쉬워서 어떻게 하지?”
- 회장님께서 주신 기회를 살리지 못해 그게 더 아쉽습니다.
강성태의 마음에 들고자 하는 이세종의 노력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대꾸였다.
“혹시 몰라서 그런데 인터뷰 영상을 내게 줄 수 있을까? 이왕이면 다른 사람 모르게 USB에 담아주면 좋겠는데? 방해가 있을 때를 대비해 클라우드에 올려서 내가 받을 수 있게 해주면 더 좋고.”
- 알겠습니다, 회장님. 먼저 클라우드에 올려놓고, USB에도 따로 준비하겠습니다. 클라우드 접속 아이디와 비번은 문자로 보내겠습니다, 회장님.
강성태의 의도를 확실하게 알아챈 이세종의 답이었다.
“귀국하면 연락해. 고생한 보람은 있어야지.”
- 고생이랄 게 있겠습니까? 그저 회장님을 위해 움직인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 그럼 USB를 가지고 찾아뵙겠습니다, 회장님.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무슨 일인가 하며 바라보는 박노익과 이교창에게 시선을 주었다.
“기무라 쿠니오키가 자살했답니다.”
그 뒤에 강성태는 통화 내용을 있는 그대로 두 사람에게 들려주었다.
“내가 볼 때 기무라는 절대로 자살할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럴 겁니다.”
“그럼 혹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박노익을 향해 강성태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기무라 쿠니오키를 살해했다면 인터뷰 내용을 부정할 테고, 다음으로 야쿠자 전체가 멕시코로 달려오는 한이 있더라도 어떡해서든 저와 협상해서 서약서를 돌려받으려고 할 겁니다.”
“도대체 어떤 놈이 관동 연합 보스를 죽이고 그런 짓을 할 수 있지?”
“연백국을 처음 지원한 건 일본회의입니다.”
강성태는 바르지오 만시니에게서 들은 일본회의에 관해 짧게 설명했다.
“그럴 걸 왜 그놈들은 넘겨줄 때까지 가만있었어? 차라리 넘겨주기 전에 해결했어야지. 그렇지 않나?”
“기무라 쿠니오키가 보고하지 않았을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는 서약서를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고요.”
기무라 쿠니오키의 모습을 떠올리는지 박노익은 대꾸가 없었다.
“기무라에게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요코하마의 빌라 앞에서 절대 절을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흐음.”
“두 번째, 세 번째, 모두 비슷합니다. 그는 잃을 게 많아서 몸을 사렸고, 우리는 잃을 게 없다는 투로 달려들었기 때문에 늘 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서약서인데.”
강성태는 앞에 둔 가죽 지갑을 내려다본 뒤에 다시 시선을 들었다.
“이 안에 적힌 이름이 모두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에게 어느 정도 여유를 줬다고 봅니다. 돈만 주면 일본에 충성할 사람들은 얼마든지 다시 모을 거라고 믿었겠죠. 실제로 명문 대학 재단이 일본에 100억 원의 투자를 요구했을 정도니 더 말해서 뭐하겠습니까.”
“더러운 새끼들.”
강성태의 설명을 들은 박노익이 욕을 뱉고는 입맛을 다셨다.
짧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교창이는 부산으로 가면 되고, 동생은 어디로 가나?”
“서약서를 받았으니 남은 숙제를 마치러 갈까 합니다.”
“남은 숙제?”
“나서희 부장판사가 지난 시간을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설마 부장판사의 따귀를….”
강성태의 표정과 눈빛을 본 박노익이 기가 찬 얼굴로 뒷말을 삼켰다.
**
일주일의 휴가를 낸 나서희는 병실에서 연달아 전화를 돌렸다.
그녀와 통화한 연백국 회원들은 대개 몸을 사렸다.
가장 큰 원인은 앞에서 설치던 강장문 지검장과 곽정윤 의원, 오상현 회장이 일본의 입장을 확인한 뒤에 움직이자며 발을 뺀 데 있었다.
서약서가 강성태 손에 들어간다면?
생각만으로도 치가 떨린다는 듯 나서희는 고개를 저었다.
야쿠자 두목이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그걸 강성태에게 넘겨줄 리 있을까?
혹여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지.
이럴 때일수록 독하게 마음먹고 더 강하게 나가야지.
마음을 다져 먹은 그녀는 다시 스마트폰을 들어 번호를 눌렀다.
“안녕하세요? 저 나서희예요.”
- 부장판사께서도 소식을 들으신 모양이군요.
“네?”
- 모르셨소? 일본 측 연백국 기무라 회장이 자살했소. 지금 일본 뉴스에 나왔어요. 인터넷 한국판에도 기사가 줄줄이 올라와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눈을 끔벅인 나서희는 급하게 통화를 마치고 스마트폰을 이용해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일본은 이렇게 정리했구나.
그렇다면 서약서를 넘기지 않았다는 뜻이겠고.
반전의 희망을 본 나서희는 잠에 빠진 나채상을 돌아보았다.
이제 부친을 저렇게 만든 강성태를 옭아매 교도소에 넣는 건 일도 아니었다.
‘너는 죽었어.’
나서희가 이를 질끈 깨물 때였다.
병실 문이 열리며 연예인인가 싶은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누구…?”
의자에서 일어서던 나서희는 심장이 쿵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