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2부 25권 - 13화
상장사 주식으로 백억 대를 주무르는 박노익이었다.
그는 이교창과 함께 일등석 티켓을, 뒤따른 부산 덩치 셋에게는 비즈니스 클래스를 구입하라 지시했다.
티켓을 받은 그는 곧바로 항공사가 운영하는 VIP 라운지로 향했다.
야쿠자 놈들이 따라붙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겁날 것도 없었고, 실제로 놈들은 라운지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이런 곳에서는 직접 들고 오는 게 좋아.”
이교창과 함께 움직인 박노익은 접시에 음식을 담아 자리로 돌아왔다.
아무리 격식을 차리지 말라고 해도 부산 덩치들은 테이블에 주스와 물, 커피를 올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맛있게 드십시오, 형님.”
“얼른 가서 음식들 가져와.”
“감사합니다, 형님.”
자리에 앉은 박노익과 이교창에게 고개 숙인 부산 덩치들이 음식을 가지러 움직였다.
“맛있게 드십시오, 형님.”
“너도 어서 들어.”
맞은편에 앉은 이교창에게 식사를 권한 박노익이 포크를 들었다.
두 사람이 샌드위치와 파스타, 모닝빵 등을 입에 넣는 동안, 부산 덩치 세 명이 음식을 담은 접시를 들고 바로 뒤 테이블에 자리했다.
솔직히 박노익은 입맛이 없었다.
막말로 기껏 일본까지 왔던 목적이 모두 망가졌는데 뭐 좋다고 초친맛 음식이 입에 들어가겠나.
다만, 누가 보든, 아니든 간에 지고 싶지 않았다.
신강남파는 이 정도에 실망해서 밥을 거르지 않는다는 사실과 같잖은 야쿠자들 초대가 아니어도 일등석 라운지에서 얼마든지 아침 해결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세종인가 하는 국장에게 연락해야 하지 않습니까, 형님?”
“그쪽은 알아서 움직이게 놔둬 봐. 서약서를 주지 않더라도 연백국과 관련한 발표를 할 수 있잖아.”
“양아치 새끼들이 그거라고 하겠습니까?”
종류별로 입에 넣었던 이교창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얼큰한 국물을 좋아하는 그에게 샌드위치와 파스타로 구성된 아침이 버겁기는 하겠다.
“점심에 서울에서 회에다가 매운탕이나 한 그릇 하자.”
“예, 형님.”
이교창을 다독인 박노익이 커피잔을 들었을 때였다.
입구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어른대더니 야쿠자 여섯 놈이 들어와 줄줄이 늘어섰다.
이것들 봐라?
날카롭게 던진 박노익의 시선에 거만하게 들어서는 기무라 쿠니오키가 들어왔다.
급해서 왔을 텐데 폼 잡기는?
“일어서지 마라.”
박노익이 짧게 지시한 직후에 기무라 쿠니오키가 묵직한 걸음으로 테이블 앞까지 다가왔다.
테이블에 의자는 달랑 두 개였다.
박노익은 항공사 직원을 대하는 듯한 덤덤한 표정으로, 이교창은 상체를 등받이에 기댄 약간은 불량한 태도로 기무라 쿠니오키를 올려다보았다.
“오야붕이십니다.”
자리를 비워달라는 의도를 통역하는 야쿠자가 우리말로 분명하게 전했다.
이교창은 별 개 같은 소리를 다 듣는다는 태도로 기무라와 야쿠자를 번갈아 보았다.
“오야붕이십니다.”
“알아. 그래서 어쩌라고? 나는 부산의 이교창이다. 이렇게 나도 소개했으니까 됐지?”
무슨 뜻이냐는 듯 시선을 던진 기무라에게 야쿠자 놈이 빠르게 이교창의 말을 전했다.
꿈틀, 기무라의 눈매가 독하게 변한 순간이었다.
이교창은 두꺼운 손을 움직여 포크를 거꾸로 집었다. 그리고는 기무라 쿠니오키의 눈을 다부지게 노려보았다.
자리 뺏고 싶으면 해 봐. 눈알 하나는 반드시 파줄 테니까.
이교창의 시선을 의식한 기무라 쿠니오키가 눈매를 찌푸리는 순간이었다.
“어이!”
기무라 쿠니오키의 뒤편에서 묵직하게 깐 음성이 들렸고, 이어서 알아듣지 못하는 일본말이 달려왔다.
이교창은 일본말에 능통한 부산 덩치에게 시선을 주었다.
“뭐라는 거냐?”
“한국은 예의를 안 가르치냐고 묻습니다, 형님.”
“그래?”
이교창은 주저하지 않고 몸을 세웠다.
말리지 않으면 그가 들고 있는 포크가 기무라 쿠니오키의 눈을 찍는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어이!”
“어딜 나서?”
곧바로 분위기를 알아챈 야쿠자들이 나섰고, 그와 동시에 부산 덩치들이 앞을 막았다.
콰등! 콰드등!
몇 번의 드잡이가 바로 벌어졌다.
밀고, 밀치기는 했지만, 양쪽 모두 주먹을 날리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사고 터지면 수습이 정말 어렵기 때문이었다.
당장 일등석과 비즈니스석을 구매한 승객들이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나 멀찍이 움직였고, 라운지 안내 카운터에 있던 직원들이 당황한 얼굴로 다가왔다.
“교창아.”
“예, 형님.”
“공항이다. 적당히 하고 앉아.”
“실례했습니다, 형님.”
박노익의 지시에 고개를 짧게 숙인 이교창이 아쉬운 얼굴로 기무라를 노려본 뒤에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거기 피라미. 내가 지금 기분이 안 좋으니까 그만 가시란다고 해. 우리 보스께 보고했으니까 나머지 일은 보스와 의논해서 처리하면 된다고 전하고.”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야쿠자에게 짧게 지시한 박노익은 관심 없다는 왼팔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여차하면 비행기를 타러 가겠다는 태도였다.
“왜 아침 식사 초대를 거절하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공항에 왔냐고 물으십니다.”
“개새끼한테 예절을 알려준다고 앞발로 숟가락 들겠냐?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다는데 내가 떠들어서 알 것도 아니고, 얼른 가라. 귀찮다.”
차마 박노익의 말을 그대로 전할 수 없었는지, 통역을 맡은 야쿠자가 멈칫거렸다.
그때였다.
통역을 위해 함께 움직였던 부산 덩치가 일본어를 내놓았고, 그 직후에 기무라 쿠니오키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박노익의 말을 부산 덩치가 전한 상황이었다.
승객들은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라운지 직원은 금방이라도 경찰을 부를 듯한 태도여서 돌아가는 모양새가 기무라 쿠니오키에게 불리했다.
“바가야로!”
나직한 음성으로 욕을 뱉어낸 기무라 쿠니오키가 통역을 맡은 야쿠자를 향해 연달아 말을 쏟아냈다.
“어떻게 했기에 형님께서 이렇게 화가 나셨냐며 통역을 꾸짖고 있습니다. 빨리 사과드리고 용서를 받으랍니다, 형님.”
부산 덩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통역을 맡은 야쿠자 놈이 라운지 바닥에 철퍼덕 무릎을 꿇었다.
“제가 오야붕의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해서 오해가 있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박노익은 테이블 앞에 꿇어앉은 야쿠자를 보며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만약, 강성태가 관동 연합의 보스였다면 어땠을까.
실제로 통역을 맡은 조직원이 실수했다 하더라도 강성태는 절대 아랫사람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지시할 사람이 아니었다.
심지어 서약서를 받지 못했다고 전화했을 때도,
“일찍 나오셨고, 누구도 다치지 않았으니 됐습니다.”
강성태는 박노익 일행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마음 푸시고 조심해서 오십시오.”
박노익을 배려해주는 강성태, 내내 심부름했던 조직원을 사람들 많은 곳에서 무릎 꿇리는 기무라 쿠니오키, 그릇의 차이가 이토록 극명하게 보이는 장면이 또 있을까.
왜 그런지 박노익은 문득 강성태가 무척 보고 싶었다.
“너를 봐서 내가 참는다. 교창이를 일어나게 할 수는 없으니까 의자 하나 가져와.”
박노익의 지시를 들은 야쿠자 놈이 고개를 짧게 숙인 뒤에 몸을 세웠다. 그런 뒤에 기무라 쿠니오키에게 지금 말을 전했다.
어쩌겠나.
박노익이 이토록 뒤 없는 사람처럼 밀어붙이는데.
기무라가 시선을 돌리자 목덜미에 울긋불긋 벚꽃을 그려 넣은 야쿠자 놈이 의자를 가져와 박노익과 이교창 사이에 놓았다.
“오해가 있었습니다.”
“비행기 시간이 다 돼서 길게 이야기할 틈은 없고, 하고 싶은 말만 하십시오.”
“서약서를 드릴까 합니다.”
“보스에게 이미 보고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전화해서 받아도 되는지 확인하겠습니다. 그 전에 내가 믿을 수 있도록 서약서를 테이블에 올려놓으십시오.”
박노익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을 정도로 단호한 태도였다.
멋대로 해라. 나는 마음 비웠다.
뭔가 말을 하려던 기무라 쿠니오키가 굴욕을 삼킨다는 태도로 손을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는 두 뼘 길이의 가죽 지갑을 꺼내놓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지갑을 내려다보았던 박노익은 기무라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서약서를 확인하겠습니다.”
“한국은 신뢰라는 게 없습니까?”
“워낙 간교한 이웃이 있어서 매번 확인해도 당할 때가 많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말과 행동, 표정을 바꾸는 이웃 때문에 우리도 몹시 피곤합니다.”
기무라 쿠니오키는 말문이 콱 막힌 얼굴로 대꾸를 내놓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죽 지갑에 손을 뻗은 박노익은 곱게 접어놓은 한지를 꺼내 펼쳤다. 꺼낼 때와는 달리 모두 펼친 한지는 박노익의 양팔 길이만큼이나 길었다.
“뭐라고 적혔는지 봐라.”
“일본과 천황의 욱일승천을 위해 노력할 것을 서명을 통해 맹세합니다…?”
박노익이 내민 일본어를 우리말로 풀어내던 부산 덩치가 기가 막힌 모양인지 뒤를 제대로 맺지 못했다.
“나채상의 이름이 있는지 확인해.”
“연백국 회장이 엎드려 올립니다, 나채상.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형님.”
‘개만도 못한 새끼.’
욕을 삼킨 박노익이 서약서를 다시 접어 가죽 지갑 안에 넣었다. 그런 뒤에 재킷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
강성태는 스마트폰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나다, 동생. 기무라가 공항 VIP 라운지에 직접 왔기에 서약서를 받았다.
박노익의 보고를 들은 강성태는 정말이지 차갑게 웃었다.
무서운 인간, 기무라 쿠니오키.
엎드려 절하고, 손가락 자르고, 이번에는 공항까지 달려와 서약서를 내놓았다.
조직원들이 모두 그 모습을 봤으니 체면 때문에라도 한 번쯤 달려들 만한데, 강성태의 등 뒤에 칼 꽂을 날을 기다리면서 불리한 상황마다 비굴할 정도로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 동생?
“당분간 서약서를 넘겼다는 말은 비밀로 하자고 해보십시오. 아마 기무라 쿠니오키가 더 좋아할 겁니다. 연백국이 발표를 제대로 한다면 오늘 오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은 잊겠다고 하십시오.”
- 알았다.
“형님. 서약서를 넘겼다면 기무라가 반드시 우리 중 누군가를 노리기 위해 다가설 겁니다. 돈이나 여자를 밝히는 것처럼 기무라에게 접근해 주시겠습니까? 듣고 있을 테니 답은 안 하셔도 됩니다.”
- 공항까지 와서 서약서를 내놓았으니 이 정도면 관동 연합에서도 충분히 성의를 보인 거지. 서울에서 보자.
강성태의 의도를 분명하게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지켜보고 있는 사람을 경계하듯 박노익은 적당한 대꾸를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
통화를 마친 박노익은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서약서를 넘겼다는 사실을 양쪽 모두 비밀로 하자는데 어떻습니까?”
의심스러운 듯 눈가를 좁힌 기무라 쿠니오키를 향해 박노익이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 말합시다. 내가 일본이 처음도 아니고, 관동 연합의 오야붕과 함께 온 길인데, 긴자는 아니더라도 관동 연합이 관리하는 곳에서 기분 좋게 술도 한잔 마시게 배려하는 게 도리 아닙니까? 그 뒤는 말하지 않아도 아실 테고.”
무슨 말인지 알지 않느냐는 투로 박노익은 뒷말을 적당하게 넘겼다.
“그렇지 않아도 서운한데 아침에 달랑 피라미 하나 보내니까 당연히 감정이 나쁘게 뻗칠 수밖에 없지요.”
아직 기무라 쿠니오키는 의심을 풀지 않은 눈치였다.
“연백국이 발표하고 나면 내가 조용히 일본에 들르겠습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아십니까?”
“모르겠습니다.”
경계심이 역력한 기무라 쿠니오키의 얼굴에 대고 박노익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는 처음부터 기무라 오야붕을 위해 우리 보스를 막아섰던 사람입니다.”
아! 그랬지!
기무라의 눈이 솔깃한 감정을 담고 반짝였다.
“이곳에 내가 왜 부산 대장이라는 동생을 데려왔겠습니까? 부산은 서울보다 일본의 유행이 먼저 유입되는 도시입니다. 우리가 힘을 합할 일이 많이 있을 거 같은데 관심이 없다면 나도 뭐 더는 나서지 않겠습니다.”
아직 의심을 떨치지 못한 기무라는 쉽게 답을 내놓지 못했다.
뭔가 있구나.
맞은편에 앉은 이교창은 애써 지은 덤덤한 표정으로 속내를 감춘 앞이었다.
“자, 그럼 오늘은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내 입지를 생각해서라도 연백국 발표를 애써주시고, 당분간 우리 보스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자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박노익을 따라 이교창, 기무라가 비슷하게 몸을 세웠다.
“두견새가 울지 않는다고 죽일 것이냐, 울게 할 것이냐, 울 때까지 기다릴 것이냐. 기무라 오야붕은 어느 쪽입니까?”
“오오!”
일본의 세 인물,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상징하는 세 가지 질문을 받은 기무라 쿠니오키가 감동한 표정으로 탄성을 쏟아냈다.
“일본에 오신다면 좋은 자리를 만들어보겠습니다.”
“손을 잡으시겠습니까?”
“우리 박 상의 넓은 배포에 감동했습니다.”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박노익이 내민 손을 기무라 쿠니오키가 반가운 얼굴로 굳게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