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4》2부 25권 - 11화
이병렬의 눈짓을 받은 김진용이 스피커폰 버튼을 누르고서 통화하기 편하게 들어주었다.
“여보세요?”
- 병렬아. 나 상식이다.
“예, 형님.”
거친 평가를 뱉어내고, 쇳소리 가득한 음성으로 대꾸하지만, 이병렬은 아직 스마트폰조차 들고 있기 힘든 상태였다. 그런 그가 여수 대가리 진상식을 상대로 한 치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며 강성태는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언제가 이병렬이 “신강남파 뺑뺑 돌아가네!”라며 떠들었던 감탄사가 떠올라서였다.
- 내가 여수 진상식이다. 솔직하게 할 말이 있는데 비밀로 해줄 자신 있냐?
“저는 우리 보스 모십니다, 형님. 보스께는 무조건 말해야 합니다.”
- 뻑뻑하게 굴지 말고, 일단 듣고서 아니다 싶으면 비밀로 해달라는 거 아니냐?
“보스에게는 무조건 말합니다, 형님. 그게 싫으시면 제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 야, 인마!
“아 거, 씨발! 왜 자꾸 욕을 하고 지랄이야?”
- 뭐? 야, 이 새끼야?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나름 평화롭게 진행되던 대화가 단박에 주먹질 직전으로 달렸다. 하여간 이런 식의 완급 조절 면에서 이병렬은 배울 점이 엄청나게 많은 인물이었다.
“형님이라고 불러주는 것도 니미! 기분 좋을 때, 행사장에서 볼 때나 그런 거지. 서울 잡아먹겠다고 동생들 끌고 올라오는데 언제까지 형님 대접받고 싶어?”
거침없이 내지른 이병렬의 쇳소리에 당장 진상식은 대꾸를 내놓지 못했다.
“이보세요, 여수 진상식 형님. 우리 보스가 광주부터 인천, 호남, 부산, 싹 비상 걸어서 여수로 밀고 간다는 거 병실에 있는 내가 매달려서 막았어. 그건 아시나?”
- 야! 이병렬?
“씨발!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시네? 어디 신강남파 얼굴에 침 뱉고 이 바닥에서 얼마나 형님 대접받는지 봅시다. 나도 더는 우리 보스 말릴 자신 없으니까 서울에서 붙든, 여수에서 붙든, 한번 해보자고!”
- 내가 씨발. 무슨 침을 뱉었다고 그래?
“대놓고 비상 걸어서 서울로 밀고 올라오는 게 침 뱉는 거 아니면 뭐야? 그래놓고 어떡해서든 중재하려는 나한테 욕이나 찍찍하고. 그렇게 신강남파랑 우리 보스가 우스워?”
- 와! 진짜 너무하네! 인마가 욕이냐? 그게 욕이야?
어쩐지 대화가 치사한 말싸움으로 흘러가는 눈치였다.
아니나 다를까.
강성태를 향해 이병렬이 왼쪽 눈을 찡긋했다.
진상식을 코너로 몰아넣는 이 완벽한 드리블과 완급 조절이라니, 통화하는 이병렬을 보며 강성태는 그를 반드시 멕시코에 데려가야 한다고 확신했다.
저 말솜씨에 걸리면 아무리 기가 센 카르텔이라도 결국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칠 게 분명했다.
“형님. 나 이병렬입니다.”
- 그걸 모르냐?
“그러니까 할 말이 있으면 얼른 하고 조용하게 차 돌려서 내려가십시오. 이 통화 끝나는 대로 보스에게 보고해야 하는 데 이렇게 수다 떠느라 시간 끌다가는 광주랑 부산, 전주 식구들이 여수로 갑니다.”
- 그러니까 비밀을 지켜달라고.
“아, 진짜! 유충일 아시지요? 충일이가 지금 동생들 데리고 대기 중이라니까요. 그 새끼는 보스 말이라면 진짜 칼 거꾸로 삼키고 남을 놈입니다.”
- 크흠.
유충일의 이름을 들은 진상식이 갑갑한 속을 헛기침으로 토해냈다.
유충일이 이 정도로 인정받는 인물이었어?
고개를 돌린 강성태의 시선 앞에서 유충일이 고개를 숙였다.
- 그래, 알았다. 보스에게 말하든 말든, 네가 알아서 하고. 나 이거 협박받아서 어쩔 수 없이 올라가는 거다.
“협박이라뇨, 형님? 어떤 새끼가 여수 상식이 형님을 협박한답니까?”
- 그게 이 씨발! 여수지청하고 경찰서에서 압력을 줬다는 거 아니냐? 무조건 서울 가서 신강남파 강성태 형님 손 보라는 건데 내가 힘 있냐? 그래서 우선 올라가는 시늉이라도 하는 거다.
강성태는 오른손 엄지로 얼굴을 가리킨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서 한다고 그래.’
강성태가 신호를 보낸 뒤였다.
- 솔직히 너도 알지만 여수 잘 일군 내가 미쳤다고 서울에 달려들겠냐? 막말로 이거 목총 차고 황야의 무법자한테 달려드는 꼴 아니냐고? 그런데 속사정을 털어놓자니 동생들 보기 망신스럽고, 그렇다고 버티자니 지청하고 경찰서에서 골인시킨다고 겁주고.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냐?
막혔던 갑갑한 속내가 봇물 터지듯 쏟아진 모양이었다. 이병렬이 말할 틈도 없이 진상식은 하소연을 줄줄이 쏟아냈다.
- 우리 뒤에서 형사과 곰들이 차 두 대로 따라와서 차도 못 돌린다.
하소연을 털어놓은 진상식이 말끝에 “후우-!”하는 숨을 토해냈다.
강성태는 얼른 이병렬에게 눈짓을 던졌다.
‘일단 끊어. 내가 전화 한번 해볼게.’
‘오케이.’
사인을 받은 이병렬이 얼른 입을 열었다.
“형님. 이거 아무래도 좀 알아봐야겠습니다. 제가 5분 뒤에 전화 드리겠습니다.”
- 이거 동생들 모르게 해라. 특히, 충일이 그 새끼, 광주 식구라 내가 예뻐라 하는데 이런 속사정 알면 불러서 밥도 못 먹는다. 알지?
유충일을 슬며시 본 이병렬이 픽 웃었다.
“일단 끊으십시오, 형님.”
이병렬의 지시에 김진용이 스마트폰을 가져가서 종료버튼을 눌렀다.
내내 상체를 기울인 데다 팔을 뻗고 있어서 허리와 어깨가 제법 아팠을 텐데 김진용은 내색하지 않았다.
“잠깐만.”
강성태는 고민할 것도 없이 스마트폰을 꺼내 고강준의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난데 일단 들어.”
강성태는 짧게 여수 진상식이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
- 푸후! 나서희 부장판사가 손을 쓴 모양인데 검사라는 새끼가 판사 지시에 깡패들이나 동원하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뜨거운 김을 푹 쏟아낸 고강준이 먼저 통화를 끊었다.
“그럼 그렇지. 미치지 않고서 어떻게 여수가 신강남파를 노려? 그러게 솔직하게 터놓지 뭔 체면을 차린다고, 원. 참. 부탁이 하나 있어.”
이제야 내막을 알았다는 듯 후련해 하던 이병렬이 말끝에서 강성태를 빤히 보았다.
“커피 한 잔만 마셔주라.”
“커피?”
“너무 생각나는데 상태가 이래서 마시는 거라도 봤으면 싶어서 그래. 저 새끼들은 마시라고 해도 고개만 숙여대니까 내가 속이 터져.”
병실을 찾아다니다 보니 별 희한한 요구를 다 받는다.
“야! 얼른 커피 타서 가져와!”
이병렬의 지시를 받은 조봉진이 구석으로 움직였다.
서열이 뭔지, 유충일이 고개 두 번 조아린 게 전부인 병실이라 조봉진은 여태 구석에서 장승처럼 서 있다가 이제 겨우 임무를 맡은 꼴이었다.
잠시 후에 달달한 믹스 커피 냄새가 병실에 퍼졌고,
“맛있게 드십시오, 형님.”
조봉진이 종이컵을 올려놓은 쟁반을 강성태에게 가져왔다.
강성태가 손을 뻗어 종이컵을 든 직후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고강준이 전화한다고 해서 기다리던 참이었는데 하필 왼손에 종이컵을 든 상태였다.
궁금해할 이병렬을 생각해서 스피커폰 통화를 하기로 마음먹은 강성태는 침대 위에 놓아둔 스마트폰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여보세요?”
- 서방님? 소녀 오늘 임무를 모두 완수했사옵니다.
이게 뭐야?
종이컵을 든 강성태조차 당황해서 액정을 내려다보았는데 이곳 사정을 알 길 없는 최치곤은 막힘이 없었다.
- 서방님의 칭찬이 그리운데 어찌할까요? 어디 계신지 말씀해 주시면 소녀가 모시러 가겠사와요.
“염병한다, 씨발!”
더는 못 듣겠는지 이병렬이 거친 대꾸를 내놓았다.
세상을 뚝 자른 듯한 정적이 느닷없이 병실 안을 뒤덮었는데 김진용과 유충일, 심지어 조봉진까지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입술에 힘을 꾹 준 채 울음처럼 보이는 흐느낌을 억누르고 있었다.
- 안녕하십니까, 형님? 최치곤입니다, 형님.
“소녀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었더니 속이 뒤집혀서 안녕 못 해, 이 새끼야.”
- 죄송합니다, 형님.
“지금 바쁘니까 이따 보스가 전화하실 거다. 고생했고, 가서 야식이라도 해. 다른 문제는 없지?”
- 예, 형님.
민망해할 최치곤을 생각해서 강성태는 다른 말 하지 않은 채 종료버튼을 눌렀다.
“둘이서 이러고 놀아?”
할 말이 없어서 강성태는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징그럽게 말 안 듣더니 오늘을 계기로 잘하면 이 버릇을 고치겠구나 싶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혹시 몰라 액정을 확인한 강성태는 고강준의 이름을 확인하고서 다시 스피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나서희 부장판사가 손 쓴 게 맞아. 절대 후환 없게 처리했으니까 안심해. 그리고 강 회장. 기분 나쁘더라도 내 말 하나만 들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러지?
액정을 내려다본 강성태는 잠자코 고강준의 말을 기다렸다.
- 깡패라고 하기에는 번듯한 일을 하는 건 인정한다. 내가 차기 총장이 되는 데 도움 줄 능력이 있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하지만, 여기에서 적이 더 많아지면 나까지 묶어서 죽일 수 있다는 점을 고민해. 특히, 정치권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지 마. 내가 기소를 막는다면, 그들은 새로운 법으로 강 회장을 수사할 능력이 있어.
화가 나서 건넨 충고라기보다는 앞으로의 미래를 염려하는 심정에서 내놓은 걱정으로 들렸다.
“조심하지.”
- 나서희 부장판사 부부는 연백국 선에서 끝내자. 여기에서 그 부부까지 손대면 정치권으로 번질 가능성이 커. 판사들 그거, 고귀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족속들이라 자존심이 상하면 똘똘 뭉쳐. 그것만 알아.
할 말을 마친 고강준이 바쁜 일이라도 있다는 양, 전화를 툭 끊었다.
“씨발 놈이 겁 더럽게 주네.”
“말이야 맞지. 우리는 어둠에서 사는 존재들이고, 그 인간들은 빛의 세상이니까.”
“더러운 짓은 다 하면서 뭔 빛? 에이, 이 꼴 저 꼴 보기 싫어서라도 얼른 멕시코로 가든가 해야지.”
이병렬이 툴툴댈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이번에는 김진용이 들고 있던 이병렬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상식이 형님입니다, 형님.”
말하지 않았는데도 김진용이 스마트폰을 내린 뒤에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병렬아. 신강남파 보스가 진짜 대단하시다!
“일 풀렸습니까, 형님?”
- 지금 막 전화 받았다.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여수로 돌아가란다. 후환 없을 테니까 걱정할 거 없고, 혹시 경찰이 찝쩍대면 직접 연락하라는 말도 들었다. 고맙다. 내 이번에 신세 진 거 언제고 갚으마.
“신세랄 게 있습니까, 형님? 조심해서 가십시오.”
- 그래. 나중에 연락하자.
통화는 짧았다.
조금 전까지 욕 뱉어가며 싸우던 통화를 생각하면 참으로 극적인 결말이었다.
“보스의 능력 덕분에 손 안 대고 여수랑 한식구 된 느낌인데?”
강성태에게 말을 건넨 이병렬이 시선을 들었다.
“충일아. 시간 봐서 여수 한번 다녀와. 내가 보냈다고 하고, 언제 기회 봐서 부를 테니까 보스랑 저녁이나 먹자고 해.”
“예, 형님.”
연백국의 정리와 여수 진상식의 서울행이 그나마 한풀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이제 두 가지 남았다.
하나는 일본에서 있을 발표였고, 나머지는 나서희 부장판사 부부의 정리였다.
경험상 나서희 부장판사 부부가 오히려 멈추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아무리 고강준이 당부했다고 해도 준비를 해놓는 게 현명한 일이었다.
**
집으로 돌아간 강성태가 상처를 피해 몸을 씻고 났을 때였다.
디지털 도어록의 숫자 누르는 소리가 들린 뒤에 최치곤이 들어왔다.
“뭐냐?”
“모처럼 포장마차 들러서 족발 싸 왔다. 죽이지?”
“은주 씨 안 만나?”
“오늘은 일이 있다고 미리 전화해 놨어.”
식탁에 앉은 최치곤이 검은색 비닐봉지에서 족발과 반찬들을 주섬주섬 꺼냈다.
“술도 사 왔어?”
“아까 전화로 염병한다, 씨발! 하는 병렬이 형님 욕을 듣고 났더니 맨정신으로 못 잘 거 같다.”
씁쓸한 얼굴로 입맛을 다시는 최치곤을 보며 강성태는 픽 웃었다. 그런 뒤에 맥주잔 두 개를 꺼내 식탁으로 옮겼다.
“마셔도 되겠냐?”
“딱 두 잔만.”
“그래?”
둘이서 술을 놓고 마주 앉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를 정도여서 그런지 최치곤은 들뜬 얼굴이었다.
“술은 네가 말아.”
강성태에게 맥주와 소주를 밀어준 최치곤이 비닐장갑을 끼고 막국수를 비볐다. 그 사이, 강성태는 또 능숙하게 맥주잔에 소주와 맥주를 일대일로 부었다.
“와! 진짜 오랜만 아니냐?”
“그러게.”
사과하러 다녔을 김삼문, 지검장과 의원, 기업가의 처리, 여수 진상식과의 통화, 들려주고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밤이었다.
“고생했다.”
“나야 돌아다니기만 했는데 뭐.”
강성태가 내민 잔에 최치곤이 틱, 소리가 나도록 잔을 부딪쳤다.